13
홍빈과 그런 식으로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 정적이 물처럼 차오르고 있어.
은성이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고요에 고개를 돌려 어느새 노을이 지는 도시를 바라봐.
비가 올 심산인지 꽤나 흐린 구름들이 하늘을 메워가고 있어.
택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핸들을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주차장에서는 희한한 향기가 풍겨 나오고,
고무바닥에 미끄러진 바큇자국이 무색하게도 여전한 침묵은 떠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마찬가지야. 고요함만 맴돌 뿐이라고.
습하고 진해기는 공기 사이로 먼지 같은 빗방울들만 소란을 피울 뿐이야.
은성과 택운은 그렇게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
은성이는 장 본 물건들을 정리하고 택운은 이내 방으로 들어가 버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은성이 고개를 돌려 그의 방문을 바라봐.
냉장고 정리를 마치고 문을 닫는 은성이의 어깨를 돌리는 손에 은성이는 눈을 동그랗게 떠.
쿵- 하고 등을 냉장고 문에 부딪힌 은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 앞에 서 있는 택운을 올려다봐.
그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입술을 움직여. 그의 눈길이 언뜻 그 입술에 머물렀던 것 같기도 해.
"왜 그래요, 아프잖아-"
"......"
"택운씨"
꽉 붙잡힌 어깨에 은성이는 문득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봐.
택운은 꽤나 차가운 표정으로 은성을 바라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수그려져. 은성이는 다가오는 택운의 실루엣에 고개를 돌려.
저번의 그 나쁜 입맞춤이 생각나자 은성이는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다가오던 그의 숨결이 문득 은성이의 움직임에 멈춰 서.
택운은 고개를 돌린 은성을 차가운 얼굴로 바라보다 이내 그녀가 눈을 꾹- 감아버리자 제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목 언저리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어.
그의 숨결이 제 목에 닿자 은성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밀어내.
그런 그녀의 움직임에도 아랑곳 않고 그가 입술을 움직여.
"왜, 부분데 이런 것도 못해?"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티셔츠 아래로 들어와.
갑자기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은성이는 그를 더욱 세게 밀어.
그러든지 말든지 택운은 거칠게 그녀에게 몸을 밀착시키곤 입술을 부딪혀.
"으...읏!"
투닥거리는 그녀의 손을 무시하며 그가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어.
그의 왼손이 그녀의 등허리를 쓸어내리고 오른손은 그녀의 뒷목을 움켜쥐고 있어.
택운은 그녀의 입술을 아프게 깨물기도 하고 그 안을 뜨겁게 헤집어놓기도 해.
은성이는 숨이 막히는 아픔에 눈가에 눈물이 고여서는 끙 끙 대며 그를 밀어내려 안달해.
그런 그녀의 가녀린 거부가 무색하게 택운은 한참 동안 은성을 괴롭게 해.
얼마 동안이나 그런 실랑이가 이어진 걸까...
마침내 떨어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실이 이어졌다 끊어져.
택운은 낮은 숨을 몰아쉬며 은성을 내려다보고, 은성이는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을 가리며 숨을 몰아쉬어.
물기가 가득 고인 그녀의 눈가에서 방울방울 애처로운 눈물이 떨어져.
거친 숨들이 오가는 공간에서 은성이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차가운 택운의 눈을 마주 봐.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은성이 숨을 내리누르며 택운을 보며 말해.
택운은 대답 없이 그런 그녀를 바라봐.
"한 번으론 부족했어요?"
"....."
"이런 식으로 간 보지 말고 차라리 그냥 안지 그래요?"
"그래, 그럼 지금 하자"
"뭐-?"
"날 잡고 한 번 자자고"
"미쳤어요?"
"뭐가 잘못됐어? 법적으로 혼인신고까지 다 되어있는데 뭐가 문제야"
"정택운씨!"
"이혼 생각하는 거면 먼저 진짜 부부가 되던가 해야 할 것 아니야"
"......."
"이혼하고 위자료 잘 챙겨서 새살림 차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당신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예요?"
"화풀이? 이게 화풀이로 보여?"
"그럼 뭔데, 홍빈이한테 한 소리 듣고 괜히 찔려서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잖아!"
은성이의 눈가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와.
택운은 여전히도 차가운 얼굴로 은성을 내려다보고 있어.
"왜 매번 그렇게 나쁘게 얘기해요?"
"......"
"진짜 나쁜 짓 하고 있는 건 당신이면서! 왜 내가 나쁜 년인 것처럼 말하냐고 왜!"
은성이 고개를 떨구며 그렇게 소리치자 택운은 떨리는 숨을 뱉어내며 마른 세수를 해.
그녀의 발치에 눈물이 빗방울처럼 뚝- 뚝- 떨어져.
'그래, 어쩐지 아침부터 운이 좋다 했어' 하면서 은성이는 후회를 해.
'장 보러 같이 가 줄 때, 일말의 기대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말이야.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애써 소매를 끌어당겨 눈물을 닦아내며 그녀가 문득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려.
택운은 입을 꾹- 다물고는 그녀를 바라봐.
"진심인 게 잘못이야...? 그게 약점이라도 돼?"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깊고 낮은 숨이 택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와.
택운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얼굴로 천천히 은성을 향해 손을 뻗어.
꽤나 많이 고민한 흔적이 느껴지는 그 나른한 손길이 은성이에게 닿을 듯 말 듯 이어져.
그리고 차마 그의 그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은성이는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어.
꾹- 마음속으로 무언갈 내리누르듯 그녀는 아픈 숨을 내뱉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로 택운을 바라봐.
택운은 어느새 제 손을 모른 척 내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은성을 마주 봐.
은성이는 그의 그 표정이 싫어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음에도 불구하고 신경 쓰지 않는 척 입술을 움직여.
"나 요 앞에 편의점 좀 다녀올게요, 깜빡하고 고무장갑을 안 사 왔어요"
"......" 그녀의 그 한 마디에 문득 택운의 눈썹이 움직여.
"쉬어요, 오늘 피곤했을 텐데"
그 한 마디에 택운의 입술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벌어져.
은성이는 그걸 봤음에도 못 본 척 자신을 가두던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택운의 두 눈동자는 은성을 쫓고, 그녀는 뭐가 그리 급한지 외투도 안 걸치고 현관을 나서.
거실에 택운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어.
닫힌 현관 문틈으로 습한 공기가 밀려들어왔어.
택운은 그제야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얼굴을 구겨.
된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씨발-"
......어렴풋이 천둥소리가 들리네.
비가 오려는 걸까?
*
집에 혼자 남은 택운은 한참 부엌을 서성대다가 이내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아- 짜증이 나다 못해 속이 뒤집어져서 죽을 것만 같아.
솔직히 인정해, 찔렸던 것도 맞고 쪽팔리게 괜히 차은성이한테 화낸 것도 맞아.
하지만 뭐 의처증도 아니고 이홍빈과의 사이를 진심으로 의심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 씨- 내가 잘못 했다고.
택운은 죄책감인지 뭔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서는 침대에 누워 긴 팔로 제 눈을 가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이내 속이 답답한 듯 일어나서 다시 알 수 없는 신음을 뱉어내기도 하고,
괜히 멀쩡한 머리를 망가뜨리기를 반복해. 흘끔흘끔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괜히
은성이 흘린 시집은 넘겨보며 읽어지지도 않는 글자를 찾으려 노력해.
째깍째깍- 애먼 시간은 맘도 모르고 빠르게 지나가.
어느새 창밖은 어두컴컴해졌고 택운은 침대에 드러누워 되지도 않는 생각을 휘젓고 있었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쿠구궁- 하는 마른 천둥소리만 연속으로 들려와.
택운은 그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비가 오나 안 오나 창밖을 확인해.
아니나 다를까 후두득- 하는 소리와 함께 봄비 치고는 꽤나 짓궂고 굵은 빗방울들이 창문을 때리고 있어.
'분명 은성이 외투도 안 걸치고 밖으로 나간 것 같은데...'
외투도 안 걸치고 뛰쳐나간 여자가 우산을 들고 갔을리 없다는 생각에 택운은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
사실 그냥 신경 안 쓰고 모른척 하면 되지만 그것도 쉽지가 않아.
은성을 신경 쓰지 않고 처음처럼 무시했으면 됐을 것을, 그러지 못하고 나쁜 짓을 해 버린 것은 결국 택운이었으니까.
쏟아지던 빗방울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택운은 이내 일어나선 외투를 찾아 걸쳐.
그때 귀에 익은 전화 벨 소리가 들려와.
택운은 혹시 은성이 전화했나 싶어 벨이 여러 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아.
"너 어디야?"
다짜고짜 묻는 그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
"어디냐니까?"
".......자기 지금 누구랑 통화해?"
문득 간드러지는 현아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전해져.
"아.. 문현아"
"뭐야 짜증 나게, 전화하자마자"
"....."
"왜 와이프가 이 날씨에 가출이라도 했어?"
"그런 거 아니야, 왜 전화했어"
"뭐, 내가 전화하는 데 별 이유 있겠어, 외로우니까 전화했지"
"......."
"천둥 소리도 무섭고 비도 쏟아지고- 자기도 보고 싶고"
"......."
"나 일주일이나 참았는데 설마 오늘도 피곤하다 그럴 거 아니지?"
쿠쿵- 한 번 더 천둥소리가 집 안을 메워.
택운은 가만히 서서 현아의 목소리를 듣고 있어.
그러다가 이내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한지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려.
그래 고민할 게 뭐가 있다고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도대체 생각하고 고를 게 뭐가 있다고, 뭐가 그리 걱정돼서 당장 찾으러 나가려 했는지 모르겠어.
어차피 정답은 정해져 있는데 말이야.
아- 진짜 뭣 같네.
"각오해 문현아. 오늘 끝까지 할 거니까"
절대 화나서 이러는 거 아니야.
절대 네 생각이 자꾸 나서 이러는 거 아니라고.
*
'고무장갑은 무슨-'
지갑도 들고 나오지 않은 주제에 무슨 고무장갑을 사 오겠다 그러고 뛰쳐나온 건지,
은성이는 자신이 생각해도 제 핑계가 거지 같았다는 생각에 편의점을 나서며 콧등을 찡그려.
봄이라고 해도 저녁은 생각보다 쌀쌀해서 외투 하나 걸치지 않은 가벼운 차림에 그녀는 조금 추워 팔짱을 껴.
눈물의 짠 기운에 눈가도 간지럽고, 입술도 괜히 부은 것 같아 신경 쓰여.
그런 생각을 하며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웬걸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퍼부어대기 시작하잖아.
천둥소리에 깜짝 놀란 은성이는 비명은 불사하고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해.
어디서 뛰어왔는지 반쯤 비에 젖은 남자가 비를 피하러 편의점 캐노피 아래로 들어와.
은성이는 후드를 뒤집어쓴 그 남자와 나란히 서서는 한 손으론 가슴을 두드리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아니나 다를까 텅 빈 것이 핸드폰도 들고 나오지 않았어.
'아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괜히 다시 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아닌 척하려 애를 썼지만 서러운 마음은 배가 돼서 이제 견디기가 힘들어.
'그래 이 망할 정략결혼 처음부터 하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은성이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을 알아.
자꾸만 아른대는 그의 그 미소도, 문득 설레던 작은 움직임들도 다 너무 진득하게 마음에 붙어버렸는걸.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언제까지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말이야.
문득 딸랑- 하는 방울 소리가 들려.
여전히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언제 우산을 사들고 왔는지 다시 은성 옆에 서서는 부스럭거리며 우산을 펴고 있어.
한참 실랑이를 벌이더니 이내 팡- 소리를 내며 우산을 펴곤 빗속으로 들어가.
은성이는 이제 쭈그려 앉아서는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쳐다보고 있어.
찰박찰박- 제 앞에 다가온 발소리에 은성이 이내 고개를 들어.
생전 처음 본 남자가 그녀의 앞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어.
은성이는 그가 아까 그 후드를 쓰고 있던 남자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의 눈을 마주 봐.
눈이 마주치가 그가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어 보여.
은성이는 뭔가 싶은 마음에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우산 없어요?"
"네?"
"우산 없나 보네-"
"아, 네..."
"씌워드릴까요?"
"그.. 괜찮아요. 누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은성이는 문득 친근한 그의 말투가 부담스러워 대충 그렇게 둘러대.
택운만큼이나 키가 큰 남자는 그녀의 그 대답에 씩- 웃으며 후드를 벗어.
문득 드러난 높고 곧은 콧대에 은성이는 가만히 그를 응시해.
"거짓말"
그가 그녀에게 말해.
"네?"
"거짓말 하지 마요, 아까 핸드폰 뒤적거리다 못 찾는 거 봤는데-"
"아....."
"집 가까우면 데려다줄게요. 같이 쓰고 가요"
"저 진짜 괜찮은데..."
"뭐, 비 다 그치려면 한... 내일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네"
문득 그가 꽤나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뱉어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은성이는 도통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렇게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씌워준다 할 때 쓰고 가요-"
"......."
"아! 나 원래 이렇게 아무한테나 친절한 사람 아니에요!"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물론 미인한텐 친절하지만-"
은성이는 정말로 벙쩌서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은성을 마주 보다 슬쩍 고개를 기울여.
천둥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와.
은성이는 그 소리에 조금 놀라면서도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내젓더니 그에게 말을 해.
"전 진짜 괜찮아요. 아까보다 좀 잦아든 것 같으니까 그냥 뛰어가면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캐노피 밖으로 발을 내디뎌.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얇은 옷차림에 은성을 바라보고,
은성이는 괜히 낯선 사람과 더 엮이기 싫어서 차박차박- 빗 길을 빠르게 걸어가.
분명히 오는 길은 엄청 가까웠는데, 가는 길이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진 건지....
은성이는 축축하게 젖어오는 제 옷과 머리카락에 애를 쓰며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해.
가로등 불빛도 빗방울에 흐려져 뿌옇게 번져 보여.
얼마나 더 걸었을까 드디어 아파트가 보여.
은성이는 발끝까지 축축하게 젖어서는 바쁘게 발걸음을 옮겨.
몸이 푹 젖어 으슬으슬 한 게 반드시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아.
그런데 있잖아- 분명 시야가 뿌옇게 흐렸었단 말이야.
분명 너무 흐려서 잘 안 보였었는데, 왜 이상하게 내 옆을 지나가는 당신은 아주 잘 보이는 걸까?
눈에 익은 검은 차도, 문득 고개를 돌려 본 그 번호판도 왜 그렇게 다 나를 지나친 게 당신임을 알려주는 걸까?
'진짜 되는 일 하나도 없다'
한 번 더 은성이는 그렇게 생각해.
빗속에서 가만히 멈춰 서서는 점점 더 멀어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은성이는 입술을 꾹- 깨물어.
눈물 말이야,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는 그게 그녀의 눈가에 차올라.
그렇게 비를 맞고 있었어,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가 않아서.
그렇게 한참을.
"거봐 내가 뭐랬어"
문득 낯선 목소리가 그녀의 곁에서 들려.
머리맡에 그림자처럼 우산이 드리워져.
은성이는 눈을 끔뻑이며 제 눈가에 찬 습기를 흘려보내다가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남자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이번에는 웃어 보이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해.
"그러니까 내가 우산 쓰고 가라 했잖아"
*
음- 음-
재미없으면 안 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재밌을 것 같은데?
눈이가네-
이 여자.
예뻐서 그런가?
*
혹시 울어요?
물속같이?
[김경인 / 종이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