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 새로고침
A. 사전 인터뷰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인류는 지능의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스스로 생각하고, 사회와 집단을 이루어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또 받아들일 건 기꺼이 받아드리고. 하지만 10년 넘게 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됐어요. 내 기대만큼 인간들이 꼭 그렇지만은 않구나. 뭐, 쉽게 말해 상종 못 할 아메바가 많다는 거예요.
김여주 / 18, 태평고 전교 꼴등
머리만 잘난 애들 싫어해요. 옆에 있으면 귀신같이 팔에 소름부터 돋는다니까요? 이거 보세요! 맞죠? 자아도취, 자만, 기만, 허세로 똘. 똘. 뭉쳐서 자기보다 못난 사람들 후려 까는 재주가 디폴드값으로 탑재된 놈들인데 뭐 좋다고 어울리겠어요? 대학 입시에서 왜 인적성을 보는 줄 아세요? 과연 오직 점수 때문일까요? 아니죠! 아메바라면서 남 무시하고 인성 개빻은 저런 애들 걸러내려고 만든 거예요. 피디님도 고대 나오셨으니까 무슨 말인지 아실 거잖아요? 뭐야? 눈을 왜 피해요? 피디님도 약간 이지훈 과인가? mbti 뭔데요?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멍청한 건 딱 질색이죠. 현실감 없고, 상황 파악 못 하고, 계산 느리고, 동떨어지고, 주관 없이 여기저기 끌려다니다가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게 뻔하잖아요. 왜 그런 삶을 자처해서 사는 건지. 아, 그래서 멍청한 건가. 물론 지능이 처참한 건 운명이지 죄가 아니죠. 하지만 저한테 말 걸면 그때부턴 죄예요.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아이큐부터 물어보려고요. 130 이상만 대화 가능. 진심으로.
김여주 / 18, 태평고 전교 꼴등
누구처럼 주관이 너— 무— 뚜렷해도 톡! 부러지거든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팬더 대나무 재질은 좀 아니지 않나요? 기업에서 인력 뽑을 때 저런 애들을 괜히 기피하겠어요? 자고로 섞이는 맛이 있어야죠. 물 흐르듯 해파리처럼 유유히 떠다니면서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즐겁게 살아가면 어때서요? 무조건 강력한 소신이 있어야 하고 똑 부러지는 주관이 있어야 하나요? 남들과 다른 나만의 뭔가를 꼭 가져야 하나요?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성공한 인생인가요? ‘이 험난한 세상을 내 숨이 다할 때까지 버티면서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성공한 인생 아닐까요?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우연히 태어난 김에 어쩔 수 없이 산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나요? 이 거칠고 험난한 세상을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성공한 인생 아니냐는데, 솔직히 그렇게 살면 누가 돈 줘요? 전 길바닥에서 자아실현 하고 싶진 않거든요. 뭐, 백번 생각해서 쟨 거지로 나앉아도 명예롭긴 하겠네요. 현대인 역사상 최악의 인생 ‘1위’ 정도로. 어쨌든 1위니까 기분은 좋겠어요.
김여주저 / 18, 태평고 전교 꼴등
기요?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현실적으로 땅 파먹고 살 거 아니면 적어도 시대와 맞지 않는 몽상가 기질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 세 인생이라지만 실질적 데이터 분석에 의하면 평생 수면 시간을 계산했을 때 1인당 약 25년이거든요. 결과적으로 청년 시절에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발전에 총력을 다해도 모자란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결국 인생은 실전이에요. 그 실전을 모르는 지구상의 아메바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움도 듭니다만, 어쨌든 제 인생은 아니잖아요. 뭐 어쩌겠어요. 저만 성공하면 됐죠. 방송 나가면 인간미가 없네, 싸가지가 없네 많이들 떠드시겠지만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해파리처럼 멍청하게 떠다닐 바에야 차라리 가두리양식장에서 짧고, 굵게 살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고 싶네요.
김여주. / 18, 태평고 전교 꼴등
EBS 교육 방송에서 왜 또 쓸데없이 ‘전교 1등과 전교 꼴등’ 앵콜 다큐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방송 끝날 때까지 제 목표는 단 하나예요. 공부를 못 해도 제가 절대 바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거죠. 몽상가 기질의 꼴등도 당당한 삶! 학교 성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확고한 신념! 이래 봬도 어제 책 한 권을 읽었거든요. 〈어떻게 지구를 정복할 것인가> 저는 꽤 진보적인 사람이에요.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간 유형이 뭔지 아시나요. 바로 책 한 권 ‘만’ 읽은 사람이죠. 정립되지 않은 불안한 자아와 일방적인 사이비 신념이 결합되는 그 순간을 직접 제가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네요. 본인밖에 모르고 본인만 꽃밭인 세상. 약간 멍청한 소시오패스라고 보시면 돼요.
김여주멍 / 18, 태평고 전교 꼴등
청한 소시오…… 야, 너 내 얘기하고 있는 거야?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학교에서 비교과로 챙겨주신 게 많아서 기브엔테이크로 고민 끝에 결정하긴 했는데요. 지금이라도 정정 가능한가요? 아, 죄송한데 저 아메바 못 다가오게 제 옆에 유리판 좀 세워주세요. 네, 그거요.
김여주누 / 18, 태평고 전교 꼴등
군 대문짝만하게 얼굴 팔리고 싶어서 출연한 줄 알아요? 끝나면 출연료 준다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거지! 학교 째다가 걸려서 엄마 카드 끊겼다구요. 아이, 당연히 알바도 해봤죠. 근데 나이 어리다고 망할 사장 놈들이 쥐꼬리만 한 월급을 떼어먹는다니까요? 아이스크림 박스 통 뽑아다가 면상 교체해주고 싶다고 협박했다가 점주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게 생겼는데!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피디님, 이제부터 삐— 처리 해주셔야 돼요.
김여주진/ 18, 태평고 전교 꼴등
짜 생각할수록 열 받네? 카메라 돌아가는 거 맞죠? 후…… 야, *평점 **리 마트 점주 시* **야 보고 있나? 개**같은 병*아! 야이 호*자식 시*놈아 이게 맞냐? 아주 대**를 종***에 담가서 확 지*맞게 쿠팡 세일가로 전시해버릴라니까!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음, 그냥 통으로 날리시는 게 낫겠네요.
김여주야 / 18, 태평고 전교 꼴등
무튼 저 사이코랑 말만 섞으면 돈 주는 거 맞죠? 공영 방송인데 양심 없는 대기업 업체처럼 떼먹는 거 아니죠? 피디님 명함 진짜예요? 나 전화해 본다?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저런 애가 영어 특기자로 학교 입학했다는데 솔직기 믿기 어려운 건 사실이죠. 합격 전산처리가 잘못됐나 싶기도 하고요. 애들이 그러던데요. 쟤 영어 9등급이라고. 저 9등급이랑 처음 말해봐요.
김여주저 / 18, 태평고 전교 꼴등
기요, 인격 모독 그만하지?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물 없나요?
김여주그 / 18, 태평고 전교 꼴등
게 뭐 어때서요? 영어 특기생으로 입학했고 2학년 357명 중에서 357등인 것도 맞아요. 공부를 하든 말든 제 자유 아닌가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래도 돼요? 자유경제 체제라면서요? 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라는 거죠! 〈어떻게 지구를 정복할 것인가>에 따르면…… 근데 다들 듣고 계시죠? 저만 혼자 말하는 거 아니죠? 피디님! 쟤 물 주지 말라니까요?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저 먼저 일어날게요. 체육관에서 조회 있거든요. 그리고 다음부턴 인터뷰 따로 해도 되나요? 어후, 귀 아려 죽겠네.
김여주야 / 18, 태평고 전교 꼴등
!!!! 내 말 아직 안 끝났거든???
이지훈 / 18, 태평고 전교 1등
네, 다음 자웅동체.
김여주야 /18, 태평고 전교 꼴등
이 저 개**!!!
OFF ON OFF
; 전교 1등 이지훈 x 전교 꼴등 나 (上)
학교도 하나의 경쟁 사회다. 소수점으로 금은동이 가려지는 운동 경기처럼 미세한 차이로 등수와 등급이 판가름 나는 데스크 스포츠라고도 할 수 있다.
소리 없이 피 터지는 입시 경쟁 속에서 나는 후보군에도 없는 무명 선수다. 대학은 백일몽이요, 그저 3년의 세월이 쌀벌레 솎아내듯 빠르게 흘러가기만을 바라고 있었으나 무심한 하늘은 하루라도 날 편하게 내버려 두질 않았다.
/ 태평고 에타 /
익명 12:23
이지훈 존나 내 꺼 ㅠ ㅠ ㅠ ㅠ 쉬는 시간에 덤블링하는 거 존나 ㄱㅇㅇ 으리낭ㄹ머닐아니삼각김밥 반죽에 넣어서 와랄라랄앙랑라먹고 싶음 ㅠㅠㅠㅠㅠㅠㅠ
익인1
ㅋㅋㅋㅋ 짝사랑 개오짐 안쓰럽 ㅠㅠ;
익인2
이지훈 에타 함? 보여주고 싶넼ㅋㅋㅋㅋㅎㅎㅋㅎ
익인3
나 같으면 고백했다ㅋ
ㄴ익명 (글쓴이)
넌 왜 안 하세요?
ㄴ익인3
남자임.
ㄴ익명 (글쓴이)
그게 몬 상관?
ㄴ익인3
아?
ㄴ익명 (글쓴이)
뭔 아?여 ㅠㅠㅠㅠ 번호표는 내가 앞이니까 꺼져
익명 14:55
2학년 1반 이지훈은 알까? 내가 오래전부터 좋아했던걸? 같은 중학교였고 걘 방송부, 난 원예부였는데 금요일마다 동아리 하면서 이지훈 점심 방송 들었음 ㅋㅋ큐ㅠㅠㅠ 폰으로 목소리 몰래 녹음하고 그랬는데 아마 절대 모르겠지ㅠ 공부 잘하면 싸갈쓰가 바갈쓰라는 나의 편견을 깨준 유일한 존재임 ㅠㅠ 존나 마음에 불법으로 들어앉아 놓고 왜 나 안 만나조 ㅓㅠㅠㅠㅠㅠㅠㅠㅡㅡ
익인1
이 정도면 이지훈도 눈치껏 결혼해줘야 한다
ㄴ익인(글쓴이)
님 신라웨딩홀 1등으로 초대함 ㅠ
익인2
너 몇반임?
ㄴ익인(글쓴이)
미쳤다고 알려줌?ㅠ
익인3
요즘 김여주랑 일등 꼴등 방송 찍던데 개부럽 ㅋㅋ큐ㅠㅜㅜㅜㅠ
ㄴ익인(글쓴이)
ㄱㅊㄱㅊ 차피 걔 이지훈 스타일 아님 ㅋㅋㅋㅋ
ㄴ익인4
ㅋㄲㄲㅋㅋㅋㅋ 어케 알엌ㅋㅋㅋㅋ
ㄴ익인(글쓴이)
이지훈 존나 반듯해서 양아치 개싫어함 ㅋㅋㅋ ^_^
ㄴ익인5
김여주도 너랑 이지훈이랑 같은 중학교였다 아님?
ㄴ익인(글쓴이)
어 ㅎㅎ 꼴에 양심 있다고 돈은 안 뜯었는데 여자애들 머리카락은 줜나 뜯음 ㅋㅋㅋㅋㅋㅋㅋ 존나 뒤에서 자기만 하면서 가끔 반에서 겉도는 애들 울고 있으면 누구냐고 지가 찾아서 심판함 ㅋㅋㅋㅋ 그럴 시간에 지 망한 인생이나 신경쓰지ㅠ
ㄴ익인3
? 그건 잘한 일 아녀? ㅋㅋㅋㅋㅋㅋ
ㄴ익인6
2222 양아치 말고 노빠꾸 같은데ㅋㅋㅋㄱ
익인7
이지훈 멍청한 인간 개극혐함. 방송 아니었음 꼴뜽이랑 말도 안 섞었을듯.
ㄴ익인8
꼴뜽 (X) 꼴등 (O)
ㄴ익인7
ㅁㅊㅂㅊㄲㅈㄹ
ㄴ익인 (글쓴이)
ㅋㅋㅋㅋㅋㅋㅇㅈ
ㄴ익인2
@익인(글쓴이) 너 3반?
ㄴ익인(글쓴이)
꺼지라고ㅠ
올해의 태평고 에타 키워트 약 15프로는 [2학년_1반_이지훈]이다. 방송 출연을 결심하고 난 후엔 파이가 1/4로 늘어났다. 그리고 내 욕도 같이 늘었다. 모든 건 만인의 동경이자 유니콘인 전교 1등 이지훈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도 줄곧 1등을 도맡았던 이지훈은 내게도 먼 종족이었다. 내 식으로 풀어보자면 걘 교복 셔츠 깃 하나도 빳빳하게 다려입는 섬세한 변태였고, 쉽게 곁을 내주진 않지만 본인의 마음이 트인 소수에게만 상을 내리듯 미소를 건네는 선이 분명한 영역 변태였다.
혹시 변태라는 말이 불편한가? 그렇다면 뵨태라고 하겠다. 아, 이것도 이상한가? 그럼 그냥 이지훈이라고 부르겠다. 아무튼 그 이지훈과 나는 3년 동안 반도 달랐고, 주로 내가 단상 위로 올라간 이지훈을 올려다보며 박수 치는 쪽이었으며, 그건 고등학교 입학식에서도, 2학년 개학식에서도 이어졌다.
단정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위로 살짝 떠올랐다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머리카락, 은은하게 풍기는 섬유 유연제 냄새, *발 *같네 따위의 욕은 해본 적 없는 것 같은 흰 얼굴로 상을 받은 이지훈은 남은 2년도 모범적인 행보로 나아갈 듯 보였다. 개학식 당일 오후, 학교와 떨어진 사거리 골목길에서 교복을 입은 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이지훈을 보기 전까지는.
삐뚤어진 넥타이, 그 사이로 풀린 단추 두 개, 부스스한 머리, 그리고 교복에 소스가 묻건 말건 롯데리아에서 쓸어 담은 햄버거 여섯 개를 품에 안고 가던 나와 마주친 두 눈.
“…….”
“…….”
좁다란 골목길에서 담배를 태우는 전교 1등을 본 내 심정은 순수한 마음으로 안데르센 잔혹 동화를 읽다가 충격받은 일곱 살의 영희였다. 백설 공주가 사실은 마녀의 딸이었다는 루머를 듣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벽에 기댄 채 뚝딱거리며 지나가는 나를 응시하는 그 눈길은 3D 프린터보다 뜨거웠다.
“야.”
“…….”
“거기.”
거기. 거기라 함은 단단한 벽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이제 막 봉우리를 맺은 벚꽃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발에 채이는 돌이라던가, 예의범절을 모르는 놈들이 버린 빵 봉지일 수도 있겠…….
“못 본 걸로 하자.”
“…….”
“눈치껏.”
대박, 나 1등이랑 처음 말해봐.
“어어, 걱정 마. 절대 말 안 할게.”
“근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냐.”
뭐야? 플러팅인가?
“어…… 우리 같은 중학교 나왔을걸?”
“방송부였어?”
“아니?”
“선도부?”
“……아니?”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선도부냐고 물었을 때 뜨끔했다. 완장을 차는 쪽은 아니었지만 아침마다 밥 먹듯이 드나든 곳이었으니까. 내가 울 학교에서 이지훈한테 걸린 것만 해도 123점이라 벌점 1등이었을걸?
“아무튼 오늘 일은 못 본 걸로 할게. 입 꾹, 자크자크.”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왜 못 믿어?”
“사람을 어떻게 믿어.”
“그럼 넌 뭘 믿는데?”
“내 성적.”
전교 1등의 대화방식이란 이런 건가?
“……이게 뭐야?”
“사인해.”
노트 한 장을 갈라 이지훈이 내민 건 ‘묵인서’였다. 사람을 믿지 못하겠으니 증거로 남기겠다는 생각 같았다. 하지만 법률 드라마를 보면 함부로 사인하면 안 된다는데. 나중에 법정 소송에 휘말릴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고 내가 남긴 모든 흔적은 판결에 불리한 작용으로 번질 수 있다고 했는데. 이거 잘못하다가 깜빵가면 어떡하지?
“사인은 못 하겠다.”
“왜?”
“그렇잖아, 이런 거 함부로 사인하면 나중에 누가 날 지켜줘?”
“야, 그건…….”
“너도 날 못 믿는 것처럼 나도 널 못 믿겠거든.”
할 말을 잃은 이지훈은 고개를 돌려 헛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에 장착하고 보여주는 만인의 웃음이었는데,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은 그 웃음을 빠르게 지우고 대뜸 정색한다는 것?
“내가 장난 같나.”
“너도 내가 장난 같아?”
“너 몇 반인데.”
“13반.”
“2학년은 8반이 끝이야.”
“나 4학년이야.”
“맛이 간 거야?”
“그럴지도?”
정신 연령은 이지훈보다 내가 한 살 더 많은 것 같으니 이쯤 해야겠다.
“마음 같아선 끝까지 따지고 싶지만 오늘은 내 햄버거가 더 중요하니까 여기서 끝낼게.”
“…….”
“사람 못 믿는 거, 어디 가서 그러면 너만 손해야아아아야야!!!! 내 햄버거!!!!!! 야!!!!!!!”
눈 깜짝할 새에 햄버거를 뭉텅이로 빼앗아 달리기 시작한 이지훈은 전날 내린 비 때문에 움푹 들어간 커다란 웅덩이 앞에서 주저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햄버거가 중요하면 내가 먹어야지.”
“네가 그걸 왜 처먹어!”
“오늘 너한테 제일 중요하다며, 이 햄버거가.”
“뭐?”
“중요한 걸 뺏어야 내가 덜 빡치지.”
“이런 미친!”
이지훈은 일용할 양식과 함께 훠이훠이 사라졌다. 바닥엔 타다 남은 담배꽁초를 남긴 채. 그날이 우리의 마지막인 줄 알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EBS 방송국 놈들은 ‘전교 1등과 전교 꼴등’ 타이틀 아래 이지훈과 나를 묶었고 교장실에서 다시 만나게 된 이지훈은 오래오래 간직해 왔다며 롯데리아 쿠폰을 내밀었다.
“그날은 잘 먹었어.”
……
“보답이야.”
미친 또라이는 세트 쿠폰을 손에 쥐여주곤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때까지 방송 출연을 고심했던 나는 안 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더랬다.
“피디님, 전 절대…….”
“꼭 하고 싶습니다.”
이지훈은 내 말을 가로채며 동의서에 사인했다.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친구예요.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교환학생이에요, 교환학생.”
……
“어려울수록 제가 도와야죠. 진 빚도 있고요.”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인사해야지, 친구야.”
동아줄 같은 엄마 카드가 끊기지만 않았더라면 상종도 안 했을 얼굴이었다. 엄마는 최근에 담임의 상담 전화를 받은 모양이던데, 내가 장래 희망을 ‘돌’로 적어서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내 나이 열여덟에 EBS 교육 방송 출연은 뿡뿡이 여름 내복을 입고 전국 노래자랑에 나가는 것과 맞먹는 정도 아닌가. 전 국민 앞에 나 좀 보라며 벌거벗겨진 느낌 정도. 하지만 지금 더욱 내 인생을 고달프게 하는 건…….
“방금 체육관으로 들어온 2학년 1반 김여주나 학생은 당장 단상 앞으로 올라오길 바랍니다.”
이가 들어도 시력만큼은 몽골인 뺨치는 태평고 교장의 아침 인사가 산뜻하다. 교장의 주름진 손가락을 따라 태평고 놈들이 뒤를 돌았다. 연예인 간접 체험이었다.
어차피 나 하나 없다고 조회가 망하거나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아닌데 웬 호들갑인지. 사전 인터뷰 직후 열을 식히려 학교 정원 한 바퀴를 돌다 왔을 뿐인데, 태평고 교장은 나 때문에 흥이 깨져버렸으니 책임지라는 얼굴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단물 덜 빠진 풍선껌을 뱉고 목에 명찰을 걸었다. 홍해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비켜선 아이들의 노고를 언젠가 갚아주리라. 큽, 웃음을 참으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이지훈에게도 반드시 복수하리라.
“안녕하십니까, 교장 선생님.”
교장의 맨들맨들한 대머리가 여름철 자연광을 받아 혜성처럼 번쩍였다. 돈도 많으면서 왜 머리를 심지 않는 거지? 꼭 대머리여야만 명문고 교장의 입지가 살아나는 걸까? 다행히 내 생각을 읽지 못한 교장은 유선 마이크를 들었다.
“에… 여기 있는 김여주격 학생은 오늘부터 그, 이비에스으 다큐, 응, 다큐에 참여하게 됐는데, 요 아침부터 정신 못 차리고 지각까지 해버렸으니 그 뭐냐, 응, 지난해 다섯 명을 안정적으로 그, 서울대에 보낸 자랑스런 에, 태평고의 교장으로써 따끔히 훈계할 때라고 생각흡니다. 그으, 프로그램 이름이…… 응, ‘전교 1등과 전교 꼴등’… 맞지요? 여러분이 아는지 모르겠지만은, 여기 김여주 학생은 무려 2년째! 2년째 전교 꼴등을 도맡고 있읍니다. 그 어려운 것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돌하르방보다 더욱더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요 아름다운 모습! 이번 방송을 통해 김여주 학생이 개천에서 용 나듯 자립하고 갱생할 수 있도록, 훗날 국가의 중요한 인력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교직원을 포함한 학생분들이 큰! 박수를 쳐주시길 바랍니다!”
려와 조롱이 섞인 박수가 터졌다. 차라리 모두가 교장 대머리라고 놀리는 내 생각을 읽는 게 더 나을 뻔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나약하게 쫄면 안 된다. 쫄아버리면 농심 쫄면밖에 되지 않으므로 대통령 대선 출마처럼 만백성에게 근엄한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은 메타버스 버전 안의 모습 같기도 했고, 달걀말이 꾼 윤의 모습 같기도 했으며, 끝은 포타계의 귀여니 이의 모습이기도 했다.
치과 의사인 엄마가 이런 날 본다면 쪽팔려 죽겠지만 (굳이 말하면 남 시선 때문에 쪽팔리겠지만) 정작 나에겐 흔하디흔한 반응이다. 잘하다가 못하면 죽고 싶으나, 못하는데 계속 못 하면 그것도 나름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인간은 한결같기가 쉽지 않으니까.
다만 단상 밑에서 웃음을 꾹 참고 있는 정 피디가 거슬렸다. 고대 나왔다고 중졸을 무시하는 걸까? 저 돌아가는 카메라 장비를 발로 차면 한 구백은 물어줘야 하겠지? 무신용 329개월 할부는 무리일까? 정 피디도?
“다음으로 2학년 표창장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2학년 1반 이지훈 앞으로.”
교장과 한통속인 교감은 단상에 나를 세워둔 채 표창장 시상을 거행했다. 2학년 1반 가운뎃줄에 있던 재수탱이가 호명을 받고 앞으로 걸어왔다. 당찬 워킹은 여느 싹바가지 없는 전교 1등다웠다.
“표. 창. 장. 2학년 1반. 이지훈. 위 학생은 2022년도 1학기 우수한 학업 성적과 바람직한 교우 관계를 형성하는 모범적인 학생으로 선정돼 위 상장을 수여 함. 2022년 6월 27일. 태평고 교장 엄석대.”
이지훈은 상을 받들며 허리를 숙였다. 이내 약 15도 정도 각을 틀더니 날 향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웃어? 날 비웃었어? 피디님 찍고 있죠? 쟤 인성 찍고 있죠? 억울한 눈으로 피디를 채근했으나 카메라 각도상 이지훈의 인성 고발은 불가능했다. 자랑스런 태평고의 후예로 거듭난 이지훈은 파란 벨벳 커버로 덮인 상장을 옆구리에 끼고 내 옆을 지나쳤다.
“어으, 쪽팔려.”
“?????????”
이지훈의 동선을 따라 황당한 내 얼굴이 돌아갔다. 쪽팔려? 뭐가 쪽팔려? 내가 쪽팔려? 내 인생인데 네가 뭔데 쪽팔려? 미친 거 아니야? 인성 박살 났네? 세상 꼬라지 잘 돌아가 아주?
“에, 이 자리를 빌려 전하겠읍니다. 앞으로 우리 학생들이 내디뎌야할 그 으마으마한 세상, 그 세상까지 제대로 도달하기 위하여는, 현재 여러분이 서 있는 이 자리! 이 태평고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에, 알았으면 좋겠고, 또한 우리 김여주일 학생은 부단히 노력, 노력, 거듭 노력하여 태평고의 자랑! 이지훈 군의 바람직한 학업 태도를 본받아 성장할 수 있도록! 이상!”
사불란하게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머리통들을 보며 생각했다. 내 인생에 고등학교 동문회나 동창회 따위 없을 거라고. 그래 여주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방송이고 뭐고 쪽팔려서 못 하겠다고 해. 방송국 놈들 말만 잘 바꾸는데 너라고 못 하겠어? 정신 차려! 칼국수 반죽처럼 밀어붙이란 말야!
“피디님 있잖아요.”
“여주 학생, 아까 출연료 물어봤었죠? 그게 정확하게 얼마냐면요…….”
.
.
.
“피디님.”
“네.”
“제 목숨을 바쳐 끝까지 구하겠습니다.”
“목숨이요? 방송을 목숨까지 걸고 구하진 않아도 되는…….”
“피디님.”
“네?”
“여러모로 성실하게 감사합니다.”
돈맛을 알아버린 빵댕이가 신나게 체육관을 나섰다. 편의점에서 뭐 빠지게 일하지 않아도 카메라에 이목구비만 비추면 편하게 입금되는 세상이라니. 교복 치마 안으로 숨겨 입은 체육복 바지를 내리며 매점으로 뛰었다. 파트너 이지훈은 벌써 아이스크림을 물고 나오는 중이었다. 입금을 위한 1단계는 ‘사이코와 친해지기’가 좋겠지?
“안녕?”
“하겠냐.”
“앞으로 잘 부탁할게?”
“카메라 없으면 말 걸지 말라고 했잖아.”
“어제 아이큐 테스트했는데 정확히 132 나왔어. 이제 말 걸어도 되지?”
“삼각형의 합은.”
“참 나, 당연히 사각형보단 작겠지. 내가 바보야?”
“혹시나 했던 내가 등신이다.”
“맨날 일등 짬 좀 먹더니 어깨에 지식 뽕이 오르셨나 봐요? 아주 에베레스트세요?”
“에베레스트 몇 미터.”
“야, 그걸 모르면 자퇴해야지.”
“그니까 몇 미터.”
“몇 미터냐면, 어?”
“…….”
“어?”
“…….”
“……어?!”
“357등 기강이 대단하네.”
검색 결과가 안 나오는 걸 다행으로 봐야 할까.
B. 이지훈 관찰 일지
“새 기술을 습득했어, 어때?”
그렇다. 우리 학교 전교 1등은 저러고 논다. 잼민이 6년 시절을 입시 현장까지 끌고 온 무형문화재계의 미친놈이다. 놀랍게도 전국 석차 10등 밖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배터리 프리 고성능 로봇으로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더불어 소수의 친한 놈들에겐 개그맨 뺨치는 참외 배꼽 도둑 드립력을 선사하는 또라이다.
이지훈이 개척하고 이지훈이 즐기는 콩 벌레 게임 때문에 쉬는 시간만 되면 친구들을 끼고 복도에 자리를 깔고 저 지랄…… 아니, 저런 마땅치 않은 행동으로 학업 분위기를 망친다. 예와 인을 배운 지식인으로서 그들을 따끔하게 혼내고 싶은 욕구가 들기도 하지만, 그걸 또 집어낸다고 한들 빠릿빠릿하게 고쳐먹을 놈들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머리에 든 게 많은 내가 참아야지. 그렇죠 피디님?
“네, 그럼 쪽 인터뷰는 여기서 마칠게요.”
“저 아직 안 끝났는데요?”
“지훈 학생 인터뷰도 따야죠.”
콩 벌레 게임으로 좋아 죽는 이지훈이 정 피디 부름에 다가왔다. 예? 김여주에 대해 아는 걸 말해보라고요? 여기서요? 이지훈은 교복 넥타이를 손가락에 감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엄연히 교육 방송인데 눈치가 있으면 좋게 말해주겠지. 괜히 전교 1등이겠어? 357등인 나도 배터리 프리 고성능 로봇이라고 칭찬해줬잖아?
이지훈 / 18, 콩 벌레 기술 습득 〈 new!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 친구가 밥을 광적으로 먹어요. 보통 점심에 공깃밥 한 개를 먹잖아요? 물론, 저도 배고프면 많게는 세 공기 정도를 먹는데, 저번에 제가 직접 목격…… 근데 진짜 말해도 돼요? 그… 영양사님 솥을 거덜 내더라고요. 아니요, 가정용 쿠쿠 밥솥 사이즈가 아니라 그 대용량 전투 밥솥 있잖아요. 한번 할 때 50인분씩 나오는…… 네, 그런 거죠.”
……저런 걸 인터뷰라고 한다고?
“아직까지 그렇게 잘 알진 못해요. 살면서 9등급과 친해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저 친구를 대해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도 있고요.”
……
“꼴등한테 한 마디요? 음, 그래, 괜찮아. 잘 될 거야.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네 인생 네가 사는 거지 내가 사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은 해볼게. 프로그램 취지에 맞게 같이 공부도 하고 대화도 하면 나도 9등급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래, 잘 지내자. 건강하고. 안녕. 영원히…….”
‘김여주를 밥만 많이 먹고 존나 멍청함’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카메라 앞에서 이지훈은 내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2학년 1반 앞문에서 펼쳐진 막간 속마음 인터뷰에 살 떨리는 자들은 다름 아닌 지나가는 학생들이었다. 내 인터뷰 중엔 이지훈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카메라와 나를 흘겨봤고, 그 반대로는 내가 뒤에서 대놓고 쏘아보고 있었으니까.
수업 시작 직전, 1분단 끝에서 카메라 세팅을 마친 피디가 ‘자연스럽게’를 요구했다. 대본도 없고 연출도 없는 다큐의 생명은 내츄럴이었으니까. 욕만 하지 않는다면 편집 없이 그대로 내보내고 싶다는 피디의 간곡한 부탁에 마음을 다잡았다. 돈만 아니면, 방송만 아니면 가지도 않았을 이지훈의 짝꿍 자리로 향하면서.
물티슈로 책상을 닦았다. 군데군데 붙은 투명테이프 조각을 커터칼로 긁어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5x12 시간표를 붙였고 유튜브에서 5시간 만에 찾아낸 명언도 새겨넣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오러지 책장을 넘기는 적을 생각해라. 마음이 울렁거린다. 이러다가 의대 가면 어떡하지?
“그런 거 할 시간에 공부하겠다.”
“마음의 준비 몰라?”
“오러지가 뭐야.”
“오러지 적을 생각하라고.”
“오로지 아냐?”
“오로지야?”
“오로지 놀았구나.”
그럴 수 있다든지, 괜찮다든지 하는 상대방을 위한 배려를 유아기에 배우지 못했나 보다. 이지훈은 말하고 싶은 건 죄다 뱉어내는 극악무도한 스타일 같았다. 하지만 쫄면 문방구 쫄쫄이밖에 되지 않으니 입금을 위한 2단계 ‘참기’를 실행해보고자 한다.
“좀 떨린다, 그치?”
“어깨 힘이나 빼.”
“어렸을 때 레슬링 해서 그래.”
“레슬링을 했다고?”
“응, 5년.”
“진짜로?”
“응, 뻥이야.”
“그 있잖아, ‘장래 희망’이라는 게 있어?”
“행복한 사람 되기?”
“아냐, 그거 말고 너 정치해.”
“왜? 카리스마 있어 보여?”
“뻥쟁이는 정치해야지.”
“우리 당 할래?”
“당 이름이 뭔데.”
“우리당에이지훈있다 당.”
“욕 처먹을 것 같아서 싫어.”
“난 괜찮고?”
“넌 뻔뻔하니까.”
차분한 미소를 싱긋 날리는 이지훈은 천하의 나쁜 놈이다. 어떻게 저런 말을 웃으면서 하지? 뻔뻔하게 맞고 싶냐고 되받아치고 싶은데 주변 시선이 너무 많다. 그들에겐 꼴등의 기질답게 난 매일 화장실 청소나 하는 인간이고, 이지훈은 새하얀 셔츠를 걷고 공부다 운동이다 만능인 모범생이니 여기서 욱하면 확실히 내 쪽이 불리했다.
그래, 칼을 뽑았으면 화를 참고 단무지라도 썰어야지. 입금을 위한 3단계 ‘순응’을 시작한다. 1교시는 한국사 시간이었다. 서랍 던전 깊숙이 넣어둔 새 책과 다름없는 교과서를 꺼냈다. 어제 산 필통도 열었다. 한 번도 쓰지 않은 0.9mm 샤프에 심을 넣었다.
똑 딱.
똑 딱.
똑 딱 똑 딱.
똑딱 똑딱똑 딱.
똑 딱똑딱똑 딱 똑딱똑 딱.
.
.
.
“시계냐?”
“심이 왜 안 나오지?”
“그냥 연필 써.”
“괜찮아, 어제 샤프 열두 개 샀어.”
“장사해?”
“모처럼 공부하는데 열과 성의를 다해야지.”
“그건 머리로 하는 거야,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야? 날 가르치려 들지 말아 줄래?”
“삼 삼.”
“십…… 구.”
“아까 장래 희망이 뭐라고?”
이지훈은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온 것 같다. 별것도 아닌 일에 굉장히 예민하고, 또 별것도 아닌 걸로 상대방 기죽이기에 능숙하다. 내 나이 십팔씩이나 먹고 고작 구구단을 못 뗐겠는가? 갑자기 물어보면 에디슨도 대답 못 할걸? 당신들도 그렇잖아? 칠 삼?
“뭐야? 오늘 수행평가 있었어?”
“미처 준비 못한 척하지 마. 원래 안 하잖아.”
“왜 너까지 입 싹 닫고 있었어?”
“눈이 있으면 좀 봐. 칠판에 적혀 있잖아. 한국사 5단원 174페이지부터 199페이지까지.”
학교에 별 관심 없다고는 하나, 남들 다 아는 걸 나만 모르면 좀 서운하다. 평생 남을 영상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마당에 이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최대한 표정을 숨기며,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모범생의 분위기로 시험지를 받았다. 나만 혼자 붕 뜬 수치플은 1번부터 압도적인 주관식으로부터 시작됐다.
“문무왕의 업적? 왜구 토벌?”
……
“신라 시대의 황금기 유물…… 아, 황동청동나팔바지귀걸이?”
……
“발해의 특징은…… 설마 고요한 바다?”
.
.
.
“……와아, 지랄.”
고요한 바다 같은 2학년 1반에 이지훈의 지랄 소리가 낮게 들렸다. 나의 개소리든 이지훈의 쌉소리든 짝꿍인 서로만 들을 수 있는 인간 돌고래 초음파였다.
“왜, 그냥 루나도 찾지 그러냐.”
“나 진지해.”
“그게 문제 같아 너는.”
“진지한 게 왜?”
“헛소리를 진짜처럼 하니까 화가 나는 거야.”
“나의 재치 어때?”
“음쓰 같아.”
이미 답을 작성한 뒤 시험지를 엎어 놓은 이지훈은 당당했다. 옆에서 비 쫄딱 맞은 강아지처럼 답 때문에 부들부들 떨고 있으면 불쌍해서라도 도와주겠다, 안 그래?
“내 처지 알면 좀 도와주지?”
“이게 다 점수고 등급인데 뭘 도와줘.”
“마지막 문제만 알려줘, 마지막만.”
“마지막?”
“쌤이 점수 가져가라고 준 0.5점짜리 보너스 문제 있잖아. ‘대한민국 K팝의 역사를 뒤흔들며 여전히 고공 성장 중인 그룹 세븐틴의 멤버는 총 몇 명일까요?’ 이거.”
“진심이야?”
“아, 십칠?”
“선생님, 김여주저 아직도 캐럿 아니라는데요.”
게?
이지훈 / 18, 빡친 셉 일곱째
솔직히 하나 알려주면 두 개 알려달라고 하고, 두 개 알려주면 네개 더 알려달라고 하는 게 인간의 이기적인 본심이거든요. 처음부터 싹을 말려버려야 뒤탈이 없어요. 경쟁은 냉정하거든요.
김여주야 / 18, 억울한 예비 캐럿
니, 누가 전부 알려달래요? 마지막 문제, 그것도 겨우 쩜오 보너스였는데 그걸 그~ 렇게 알려주기 싫었나 봐요? 아니다, 쟤는 그냥 제가 싫은 거예요. 저 고약한 인성으로 교사라도 해봐요. 애들 자퇴서가 끝이 없을걸요?
이지훈 / 18, 이성주의자
학교에서부터 사회성이 판가름 나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각성하느냐, 아니면 실패의 원인을 남한테 찾고 질타하고 미워하느냐. 수준은 딱 그 차이인 것 같아요.
김여주됐 / 18, 전교 꼴등 예비 캐럿
고! 내가 치사해서 세븐틴 팬하고 만다. 눈알이 빠지는 한이 있어도 세븐틴이 왜 세븐틴인지 알아버릴라니까 피디님도 절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이지훈 / 18, 루비
저 같으면 벌써 휴대폰으로 검색해봤죠. 미루는 것도 병이에요, 병.
멀리서 봐야만 아름다운 것은 우리네 인생만이 아니다. 전교 1등 이지훈도 그렇다. 우연히 머리가 좋아서 설렁설렁 1등이나 먹는 게 아니었다. 이지훈은 독해도 너무 독했다. 장장 3일 동안 본인이 내준 숙제 해왔냐며 들들 볶는데, 정말이지 기름집에 온 것 같았다. 카메라가 켜져 있건 말건 본인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 보였다. 9등급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노력해보겠다더니 왜 내가 이지훈의 세계로 질질 끌려가는 것만 같지?
“국어 325쪽 시조 다 외웠지.”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누가 지었어.”
“그 사람.”
“누군데.”
“있잖아, 그 사람.”
“그니까 누구냐고.”
“또 사람 못 믿네? 의심하는 거지?”
“…….”
“어?”
“……”
“……이몽룡?”
“꺼져.”
네이버 전생 테스트에서 난 뉴요커였다. 그러므로 영어가 아니면 언어와 맞지 않는다. 믿기 어렵겠지만 논리적인 수학이 내 성향과 잘 맞다. mbti 검사에서도 T가 49프로였고 어쨌든 그때부터 수학을 좋아하기 시작했으니까.
“이게 절댓값이라는 거야. ‘수직선 위의 점이 수직선 위의 원점에서 얼마나 떨어졌나를 나타내는 말’인데…….”
“근데 우리 점심 언제 먹어?”
……꼭 그렇다고 적성에 잘 맞는 건 아니다. 하지만 체육이라면 다르다. 이건 정말 내 시간이다. 뜀박질은 온종일 할 수 있고 주 종목은 발야구다. 올림픽에 발야구가 있었다면 금메달은 5년 연속 내 것이었을 것.
“저기 한 분 나가신다. 보내드려.”
배구공에 고탄력 스핀을 넣어 내 등딱지를 맞춰버린 이지훈을 저주하고 싶었다. 3루에 있는 나보다 4루에 있는 애를 맞추기 쉬웠을 텐데 이지훈은 방향까지 들어 나를 보내버렸다. 저 미소가 샹그리아 와인 같다는 뭇 여자애들은 단체로 머리가 헤까닥 한 걸까. 나한테는 광기에 서려 있는 발야구 악당 두목 같은데. 뒤돌면서까지 확인하는 것 봐. 지독해.
“약한 애들이 먼저 나가리 되는 건 자연의 섭리니까.”
“죽을래?”
“장수하고 싶어.”
언젠가 이지훈이 학업의 낙담 골짜기로 끌려갔으면 좋겠다. 기회가 된다면 357등 자리도 물려주고 싶다. ‘멍청한 이지훈’이란 타이틀, 나름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전혀 관심 없는 이지훈은 수돗가에서 땀에 젖은 얼굴과 목을 닦으며 포카리를 마셨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돌려버리는 싹퉁바가지의 면모란. 따뜻한 감정 1도 없는 놈.
이지훈 / 18, 경력직 신입
게임도 하나의 약육강식이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잖아요. 꼴등과 1등의 차이점이 있다면 ‘강한 의지’의 차이 아닐까요? 뭐든 의지만 있다면 못할 게 없을 텐데. 참 안타까워요.
싹바가지는 넓은 포용으로 꼴등을 감싸주겠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내 손에 들린 음료 캔이 찌그러진다. 그래? 의지만 있다면 뭘 못하겠냐고?
“오늘의 학급 회의 안건으로 ‘청소년 흡연의 위험성과 해결방안’을 정중히 건의합니다.”
처음 앉아본 앞자리에서 처음 손을 들어 처음 발표했다. 반장으로서 안건 주제를 적고 있던 이지훈은 천천히 뒤를 돌아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미 우리 학교는 금연 학교야.”
“전 목격했습니다.”
“……뭘.”
이지훈의 톡 튀어나온 목젖이 위로 쑥, 올라갔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누군가의 흡연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
“아마 4학년 13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지훈만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4학년 13반은 없어도 저놈은 안다. 그 흡연자가 본인이라는 걸.
“의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저도 그 아이가 ‘의지’로 금연을 이뤄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안건을 당당하게 제출합니다.”
인간의 의지로만 되지 않는 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부고 나머지는 금연이다. 마음먹은 대로 이뤄진다면 모두가 서울대를 가고 대한민국은 담배 사업이 진즉 망했을 텐데, 현실은 소수만이 진리는 나의 빛을 향해 쫓아가고 담배갑에 첨부된 병든 사진을 안타까워하며 흡연자들은 대부분 라이터를 켠다. 그러니 전교 1등 재수탱이도 알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본인과 같지 않다는 걸.
“좋습니다. 과반수 찬성으로 김여주부 학생의 안건을 채택합니다.”
반장의 빠른 손놀림으로 led 학급 화면엔 흡연 시 목구멍과 내장, 십이지장, 대장, 요도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극악한 유튜브 영상이 재생되었다. 이지훈은 이마를 매만지며 나를 응시했다.
‘복수한다.’
‘그래라?’
분명히 묵음인데 이지훈 싹바가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꼽고 언짢은 말투로 내려까는 그 목소리 말이다. 다른 아이들은 한 번도 듣지 못했을, 양파의 마지막 알맹이 같은 이지훈의 예민한 보이스를.
“자, 오늘이 12일이니까…… 아, 내 차례네.”
학급 회의 종료 직전, 이지훈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반은 일주일에 한 번 학급 회의가 끝나기 전에 한 사람씩 주말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 공유하는 이상한 문화가 있다. 화합과 소통을 급훈으로 내걸 만큼 서로 간의 대화를 중요시 여기는 괴짜 담임이 직접 만든 룰이다.
“주말엔 보통 독서실에 있는데 이번엔 운동을 했어. 여름이잖아. 밤엔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자주 달리는 편이야. 아, 너무 재미없나?”
……
“글쎄, 좋아하는 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음, 싫어하는 건…… 떡볶이? 떡을 별로 좋아하진 않아.”
국민 간식 떡볶이 헤이러 이지훈을 향한 촉수가 발동했다. 근원지는 나였다. 나도 물어볼 거 있어. 새로운 안건을 제안하는 것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이지훈의 눈썹이 꿈틀댔다.
“우리 오늘 떡볶이 먹으러 갈래?”
“…….”
“내가 떡볶이 진—짜— 좋아하거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이지훈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찰나이긴 했지만 내 입꼬리는 이미 올라갔다. 카메라는 돌아가고, 피디는 땀을 흘리고, 옆 반 아이들까지 몰려온 상태에서 모범적인 이미지의 이지훈이 할 수 있는 모범 대답은 오직 하나다.
“……그래, 뭐, 네가 좋아하면.”
〈이지훈 관찰 일지 보고서>
- 콩 벌레
- 공부 또라이
- 발야구 집착남
- 포카리 좋아함 (사줄 의향은 없음)
- 표정 관리 실패하는 경우 : 1) 나랑 눈 마주쳤을 때 2) 나랑 대화할 때 3) 나랑 인터뷰 같이할 때 4) 내가 입 모양으로 욕할 때 5) 내가 〈어떻게 지구를 정복할 것인가> 책 추천할 때 6) 내가 숨 쉴 때
“근데 점심을 그렇게 먹고 또 들어가나. 돼지는 진짜 위대하다.”
+ 7) 개새끼
C. 떡볶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하나다. 그 인간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해버리기. 주인공 둘에 피디 하나, 카메라맨 두 명이 푸짐한 왕토끼 분식집에 앉았다. 방송 출연에 신난 분식집 주인은 이것저것 담아주기 시작했고, 그 어수선한 틈으로 이지훈은 낮게 물었다.
“맛있냐.”
“나중에 떡볶이집 아들이랑 결혼할까 봐.”
“그 사람은 무슨 죄야.”
“네 인생 아니니까 신경 끄지?”
“국물을 턱으로 먹고 있잖아.”
먹으면서 받아치다 보니 끈적끈적하고 시뻘건 떡볶이 국물이 잔뜩 묻었다. 이지훈은 혀를 차며 냅킨을 뽑아 건넸다.
“너 점심도 턱으로 먹더라.”
“나의 인간적인 면모 어때?”
“꼴 보기 싫어.”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하네?”
“9등급은 어떤 느낌이야.”
“밥상머리 앞에서 예의도 없고?”
“꿈이 있어?”
“응, 자웅동체.”
“그럴 줄 알았어.”
이지훈은 많은 음식을 앞에 두고서도 입을 대지 않았다. 피디는 카메라를 잠시 멈추며 물었다. 혹시 다른 거 사다 줄까? 그러자 이지훈은 물을 마시며 온화하게 말했다.
“아뇨, 전 김여주졸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서요.”
“하하, 둘이 벌써 그렇게 친해졌어?”
“복스럽게 먹네요. 우리 집 복순인줄.”
지에 이지훈 반려견이 되었다. 복순아, 많이 먹어. 쪼쪼 혀를 튕기며 남기지 말고 먹으란다.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저거 공부하는 척하면서 남 빡치게 하는 기술 연마하는 거 아니야?
“밥 먹다 말고 뭐하냐.”
“낙서한다, 왜.”
“거기에 내 이름 왜 쓰는데.”
“누구누구 왔다 감, 이런 거 안 해봤어?”
“덜떨어진 애들만 하는 거 아냐?”
무슨 말만 뱉으면 가시다. 어렸을 때 잔가시 많은 동해안 갈치만 먹고 자랐을지도 모른다. 정작 이지훈은 상대방이 상처를 받았는지 관심도 없다. 떡볶이 국물이 턱에 묻은 것만 놀릴 줄 알지, 평소엔 저런 식으로 어쩌라고 식이다.
이지훈의 대부분은 ‘무관심’ 또는 ‘까칠’로 이뤄져 있다. 두 단어 없인 존재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낙서로 이미 새까맣게 어지러운 벽에 오늘의 흔적을 새긴다. 전국 분식집 어디서나 볼 법한 상투적인 문장이었다.
‘태평고 2학년 1반 이지훈과 여름방학식날다시 떡복이먹 으러오겠슴. *_*’
“띄어쓰기 왜 저래.”
“강조의 느낌?”
“지구를 어떻게 정복할 건지도 저런 식으로 써 있나 보네.”
“인생 서적 폄하 금지.”
“떡볶이 받침은 쌍기역이야.”
“내 습관 괜찮지?”
“파괴가?”
“조용히 지껄여줄래?”
저놈의 맞춤법. 국어연구원 수석 직원인가 보다. 마커 뚜껑을 닫고 어묵 국물을 마셨다. 헤어짐을 강요당할수록 끈끈해지는 세기의 커플처럼, 나도 지적당할수록 고치지 않는 뻔뻔함을 가지고 있다. 이지훈은 체념의 고개를 흔들었다.
“근데 너, 어릴 때 떡 먹다가 걸렸어?”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아니, 다들 떡볶이는 좋아하지 않나? 순대 간이나 허파 싫어하는 사람은 봤어도 떡볶이 싫어하는 건 처음 봐서.”
“그거 편견이야.”
“너도 나한테 편견 많잖아.”
이지훈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어떤 편견?”
“9등급이라고 나 멍청할 것 같다는 거.”
“몇 번을 우려먹는 거야 그 얘기를.”
“사골 내서 육수까지 쭉쭉 뽑아낼 거야.”
“좋겠다, 배고파서 굶은 일은 없겠네.”
“아메바 멍청이라는 말이 여기에 콕 박혀서 안 떨어지거든?”
흔히 마음이라 통칭하는 심장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지훈은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심했다고 내가? 잘만 먹던 떡볶이 그릇을 밀어내고 제 눈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으니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터. 사전 인터뷰부터 지난 일을 되짚어가는 이지훈의 눈동자가 오른쪽 위로 향했다.
“딱히 거짓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것 봐, 끝까지 잘났다고.”
“너도 나 같은 애 있으면 팔에 소름부터 돋는다며.”
“그래도 난 배터리 없는 고성능 로봇이라고 칭찬해줬거든?”
“그거 욕 아니었어?”
“이씨, 나한테는 특급 칭찬이야.”
“싫어하는데 칭찬을 왜 해.”
“싫어해도 멋있는 건 멋있는 거니까!”
“……내가 멋있다고?”
“아유, 진짜! 사장님! 저 다 먹었어요!”
속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재수가 옴팡지게 없어도 학생의 본분을 기깔나게 잘하는데 부럽고 멋있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만약 내가 전교 2등이었다면 머리를 질끈 묶고 이지훈의 공부량을 염탐하거나 시기하고 질투했을 텐데, 사는 세계가 다르다 보니 그런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그 마음을 뱉어버렸다는 건데…… 전학 갈까?
“그러니까 멋있다는 얘기는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하겠다 이거지!”
“…….”
“인간으로서! 같은 동문으로써! 어? 막, 널 좋아한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고!”
“…….”
“……웃어?”
체육관에서 당했던 비웃음과는 결이 다른 웃음이었지만 쪽팔린 건 매한가지다. 변명할수록 내 굴만 파는 것 같아 이만 입을 닦고 떠나려는데, 이지훈이 먼저 일어나 계산을 하고 나가버렸다. 한 입도 안 먹었으면서 계산을 한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여기서 헤어지면 되는 거죠?”
영상 욕심 많은 피디는 분식집 앞에서 헤어지는 장면을 원했고, 이지훈은 피디의 말처럼 가게 문 앞에 서 있었다. 십팔 세들의 우정을 쌓는 순간을 보고 싶다나 어쩐다나. 정 피디는 인간 극장을 찍고 싶은 건가?
“그래 지훈아, 잘 가. 내일 또 만나자.”
“…….”
“……너도 얼른 해야지?”
이지훈의 운동화를 건드리며 복화술로 속삭였다. 내일 또 만나, 인사하면 이지훈은 그래, 잘 가, 즐거웠어, 하고 반대편 길로 가야 하는데 물 먹은 기계처럼 말이 없었다. 내가 쳐다보기만 해도 눈살을 찌푸리던 놈은 표정 변화 없이 요지부동이다. 아까 먹지도 않은 음식값 계산할 때부터 이상하다 했는데 진짜 이상해진 거 아니야?
“야.”
“어?”
교복 바지에 손을 꿰어 넣은 채 가만히 있던 이지훈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불법 투기를 한 것도 아닌데 괜히 경찰에게 들킨 것만 같다. 이대로 동사무소에 과태료 부과하러 가면 그림은 웃길 것 같긴 한데. 어쩌면 예능 피디로 장래 희망을 바꿔야 할지도?
“멍청하다는 거 취소.”
“…….”
“취소했으니까 거기에 콕 박힌 거 떼라고.”
보이지 않는 마음이 잠들어 있을 내 왼쪽을 가리키며 이지훈은 살살 목을 긁었다. 땅을 한 번 쳐다봤다가, 내 눈을 쳐다봤다가, 또 옆을 응시했다가, 다시 내 눈을 바라봤다가…… 무슨 꿍꿍이야?
“빚진 건 갚아라.”
“빚?”
“떡볶이값.”
“시키지도 않았는데 네가 낸 거잖아?”
“그니까.”
“그니까?”
“갚아, 너 나한테 빚진 거야.”
커다란 손바닥을 흔들며 휘적휘적 걸어가는 이지훈의 뒷모습. 그 장면을 줌 아웃으로 밀어내는 피디와 카메라맨의 프로 정신. 1부 끝날 때마다 내보낼 엔딩 곡이 뭐라고 했더라?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뭐야, 진짜 웃기네?”
붉은 입가를 닦으며 이지훈과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씩씩하고 당찬 내 뒷모습이 담길 영상은 편집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꼴등이어도 괜찮지 않나? 걸음은 어쨌든 벤처 사업에 대성공한 1세대 회장님 같잖아?
‘아메바 멍청이라는 말이 여기에 콕 박혀서 안 떨어지거든?’
‘멍청하다는 거 취소.’
……
‘취소했으니까 거기에 콕 박힌 거 떼라고.’
“……신경 쓰인다고 하니까 생각해 준 건가?”
그땐 알지 못했다.
관찰 일지엔 없는 이지훈의 진짜 세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