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경성의 봄, 벚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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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땅거미가 질 때 쯤 깼다. 새벽부터 고생했던 터라 긴장이 풀리자마자 잠에 빠져든 것 같다. 조심스럽게 마당문을 나와 골목길을 바라봤다.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여기에서는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집에 쌀이 없냐....”
주린 배를 붙들고 쌀독을 열어봤지만 텅 비어있었다. 그저 장독대에 있는 김치 몇 포기가 전부인 듯 했다. 어쩔 수 없이 사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들었다. 앞으로 서울에서 얼마나 머무를지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돈을 써도 되나 싶었다. 일단 남은 돈을 지갑에 꼭꼭 숨기고 허리춤에 찼다. 어디부터 가야할지 감히 잡히지 않았다.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자기들끼리 엉켜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 마루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생각했다.
“우선 가야해...”
‘어딜 가야해....?’
갈 곳을 잃어 출발점에서 길을 잃어버리고야 만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고장난 나침반이 돌아가고 있다. 나는 어디서부터 헤메고 있었단 말인가. 아, 어쩌면 갈곳이 없어서 못가고 있는건지도.
“끼이익”
할 일없이 이리저리 수첩을 뒤지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대문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웬 남자 한명이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낯빛이 어두운 것을 보아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는다.
“,,,,누구세요?”
“....나?”
“네...”
“너 데리러 왔잖아.”
“네?”
“학생회관에 오라고 했는데. 안와서.”
“...아....”
“수첩 다시 줘.”
“....”
태형이 이름이 적혀있는 것 만으로도 수첩을 주기는 싫었지만 줄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딴청을 피우다 말한다.
“가자.”
“네?”
“너 이제 우리 동아리 회원이야.”
“.....”
“한글회 가자. 너도 1기 회원이야.”
내 손목을 잡아끄는 그 때문에 엉거주춤 일어나게 되었다. 엉성한 자세로 그를 뒤따라간다. 태형이는 볼 수 있는건가?
“아....아픕네다....!”
“누가 평양사람 아니랄까봐.”
“그런거 아닙네다..! 진짜 아픕네다...”
스르륵 손목을 놓고 조금 걷는 속도를 낮춰준다. 봄이지만 아직 부는 추운기운이 분위기를 더 얼려준다.
“내이름은. 김 석진이야. 동아리 회장이고.”
“아... 김여주 입니다.”
“알아.”
“네?”
“.....가자”
“어디가십네까?”
“한글회 회원들 만나러.”
“태형이...”
“...태형이?”
“아....수첩에서 봐서요. 이름이 낯익던데...”
“....걔도 찾지마. 그이름 지워.”
“.....네?”
“넌 왜 없는사람만 주구장창 불러대냐?”
“.......”
덜컥.
무언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기있는 이유가 그것 하나뿐인데. 한껏 부푼 마음이 소리없이 터저버렸다. 나의 눈물샘과 함께.
“.....”
“왜. 울어?”
“.....아..아닙...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말해줘서일까? 오늘의 일이 헛수고였다는 것을.
내 꿈은 그저 신기루일 뿐이었다고.
“하....”
“.....죄송합니다.”
“이름이 여주 였나.”
“네....”
“....일단 애들 만나야되니까 따라와.”
갑자기 나온 눈물을 닦으며 뒤를 따라 걸었다. 태형이는 없지만 있다고 믿으면서 걸어나갔다.
태형이는 조선 어딘가에 있으니 조선 한중간에 있는 경성에서부터 찾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은 내 발걸음을 더 씩씩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일까, 이곳 경성에서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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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골목 안 작은 포차에서 대학생들이 시끌시끌하게 모여있다. 다양한 연령층이 있었지만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장 많아 보인다.
나를 데려온 회장님께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자리로 날 인도한다. 얼핏보니 네명 정도가 앉아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민윤기라고 합니다.”
낯이 익는 사람이 앉아있다. 열흘 전 조명가게에서 봤던 그가 앉아있다. 무기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는 알아보는것도 귀찮았는지 모른척하기에 바빴다.
“네...안녕하세요. 김여주 라고 합니다. 오늘 처음뵙네요....”
어색한 인사치레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내 술잔에 막걸리를 한사발 기울여준다. 평온하게 주전자를 쳐다보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리고 이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김석진이 인상을 구기며 말을 건다.
“뭐야? 왜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우리동네 불알장수아저씨라우....! 내래 참말이라우!!!”
“허헙!
술을 따른후 주전자를 내려놓다 삐끗하고야 만다. 그러게 내가 기억력이 안좋은것도 아니고 모르는척은 왜 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라고? 뭐라고?”
"ㅋㅋㅋㅋㅋㅋㅋ민윤기 왜 그딴걸 팔고다니냐 ㅋㅋㅋㅋㅋㅋㅋㅋ"
“허험...”
초록색 빵모자를 쓰고있던 그는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다.
“...아직 아저씨는 아닙니다만....”
“올해로 스물입니다.”
“...아 그래요? 저는 스물셋입니다.. 다들 스무살인가요?”
“아니. 나 스물세살.”
“친구네?”
“선배겠지.”
“선배가 뭔데?”
“..그래 내가 뭘 바라겠냐.”
석진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스무살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었는데 한바탕 웃더니 편안해진 분위기였다. 누나누나 하는 애들이 귀엽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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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비밀결사조직이다~ 이소리야!!!!!임마!!!!!!”
“아이고 잘나셨어~~~”
“정신 똑바로 차려!!!!! 너 말이야 너어~~”
과하게 마셨던 탓일까 석진이가 주정 아닌 주정을 부리고 만다. 다들 헤어지는 분위기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윤기였다.
“윤기야...”
“그렇게 농도짙게 부르지 마시오.”
“푸하하하....뭐라고했어 방금?”
인상을 잠깐 찌푸리더니 내 팔을 잡아끈다.
“집 어디야.”
“박지민...관악산 아래...”
“이시간에 외간남자집에서 자겠단 소리요?”
“거기 우리집이라고!!!!!! 왜 말을 못알아들어 이 멍충아...”
“...미안하오.”
“오오거리지말라고오!”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내 팔을 잡아끈다.
“어디가...”
“가게.”
“거길 내가 왜 가!!!!! 거길 내가 다시가면...다시가면....”
“필요하잖아.”
“이제 필요없거든....우씨...”
“불알 필요하잖아.”
....내래 다시 평안도말씨 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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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에 이끌려 조명가게로 돌아왔다. 적적한 이곳에서 아름다운 조명들 속으로 사라진 그를 멍하니 쳐다본다. 머지않아 다시 온 그는 작은 물잔 하나를 들고온다.
“마셔. 목이라도 좀 축여.”
쭉 뻗은 그의 팔이, 손이 참 희다. 한참동안 신기한 구경거리인양 바라보고 있으니 소매를 내린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니 나를 아무감정없다는 듯이 쳐다본다.
“안취했어. 그래서 필요없어.”
“안마시면 여기서 안보내줄거니까. 맘대로 해.”
그가 떠온 물을 쪽 들이켰다. 따뜻한 보리물이었다. 꿀떡꿀떡 잘 넘어가는 보리물을 마시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
“작전이 뭐야.”
“뭐? 작전?”
“응. 나 이제 뭐할까?”
“뭘하긴 뭐해 다쓰러져가는 박지민집가서 발닦고 잠이나 자.”
“어린놈이 말버릇 하고는...”
“너도 많이 산 건 아니거든요?”
“....아주 고약해.”
“넌 영악해.”
술이 확 깬다. 지금 세 살이나 어린애한테 여우취급 받은건가?
“뭐라고? 다시한번 말해봐.”
“꼬리 100개달린 구미호라고 했다 왜.”
“저게...”
“한글회 남자밖에 없는데 구미호 좋~겠다?”
“너 간부터 빼먹기 전에 조용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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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조금 높은 의자에 앉더니 싱긋 웃는다. 허탈해서 웃는 웃음인가? 어쨌든 집에나 가고싶다.
“야.”
“누나라고 불러.”
“나한테 뭐...뭐...그러니까...여..역..여기....”
“뭐라는거야 똑바로 말해봐.”
“여기 다시 오고싶지 않았냐고.”
“.....무슨소릴 하는거야.”
“안오고 싶었어?”
“전혀. 생각나지도 않았어.”
아까부터 자꾸 곤란해하면서 말을 미루기에 무슨 일인가 했는데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란 말인가?
“정말 없었어.”
“....”
“.....”
한참동안 서로를 말없이 쳐다본다. 사실 그가 먼저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 또한 그 눈길을 피하고 싶지 않아서 한참동안 쳐다봤다.
그러다 그가 먼저 눈길을 거둔다.
“그래. 그럼.”
“가.”
가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계산대 뒤에있는 문으로 쏙 들어간다. 조명이 환하게 켜져있는 이곳을 빠져나와 집으로 걸어간다. 장장 15분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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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꽃글입니다!! 쓰고싶어서 미치는줄 알았네요 ㅋㅋㅋㅋ자꾸 오류가떠서....8ㅅ8....
저번화 댓글 잘 읽었어요~ 답글을 달아주기 싫어서 안 단건아닌데....다들 한마음으로 같은생각을하시기에...달기가 난처하더군요...ㅋㅋ
스토리를 바꿀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지만 일단 여러분 믿고 기다려주세요..!
아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부분이 있어요. 바로 제목인데요
제목은[1932년 경성의 봄] 이 맞구요 글 시작전에 [1982년 경성의 봄, 벚] 이렇게 되어있는데 , 뒤에는 부제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벚" 에피소드는 5부작 생각하고 있어요. (벗뜨 이렇게 진도가 나간다면 5화를 넘을수도 있다능...)
음 그리고 한 부제목이 끝나면 한시즌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인트 걸거에요!!!!빼액!!!!
그래도 걱정마라요 암호닉달아주신분들 제가 언제든지 택파 보내드리겠습니다! 이건 제가 나중에 벚 에피소드가 끝나면 다시 차근차근 말씀드릴게요
암호닉은 계속 댓글로 받을 예정입니다!
그럼 연휴 잘쉬세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