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갈 곳 잃은 엄지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방황했다. 몇 번 그러고 나니 전화는 끊겼다. 물론 그러기가 무섭게 다시 울렸지만. 김태형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몰랐던 건 아니다. 다만 이 상황에서도 놀랍도록 침착하지 못 한 김태형이 웃길 뿐이었다. 과 건물 앞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았다. 매캐한 냄새가 풍겨왔다. 하필 자리 잡은 곳이 흡연 구역이었다. 담배는 싫지만, 피고는 싶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뿌연 담배 연기가 하늘을 다 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시선의 끝
w.kookoogo
"우니까 더 못생겼다"
"닥쳐"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나는 창피한 줄 도 모르고 울었다. 그 것도 김태형 앞에서.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는 녀석의 팔을 꼬집었다. 아랑 곳 하지 않고 낄낄 웃으며 동영상 까지 촬영했다. 그리고 한 동안 김태형의 프로필 사진은 나였다. 한 손에는 꽃 다발이 뭉개지도록 쥐여져 있었고, 한손으로는 얼굴을 가리고 우는 내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마스카라를 칠하지 않았던 것 이었다.
그리고 나서, 김태형은 어떻게 했더라.
"여주야"
처음으로 성을 떼고 내 이름을 부르면서,
"울지마. 오빠 가슴 찢어진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장난끼 가득한 말투였지만 표정 만큼은 진지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눈물을 멈추지 못 했다. 쪽팔리게.
김태형은 재주가 많았다. 공부 빼고 다 잘했다. 노래, 체육, 먹기, 여자 꼬시기, 음 또 뭐가 있었더라. 아무튼 그래서 녀석은 예체능으로 대학교를 들어갔다. 난 미끄러졌다. 별로 얘기하고 싶은 부분은 아니지만 한마디로 재수를 했다. 한번도 책상에 앉아서 4시간 넘게 공부를 해 본적이 없었는데 적응하느라 죽을 뻔 했다. 그렇다고 남 한테 의지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1년동안 죽은 듯이 공부만 했다. 목표는 없었다. 그냥 어디든 들어가야만 허 한 마음이 없어 질 것 같았다. 가끔가다 김태형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면 야속하게도 녀석은 행복해 보였다. 날 많이 생각해서 부러 연락을 잘 안하는 김태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치만 그 땐 그게 좀 서운했다. 서운하고, 그냥 기분이 우울하고, 얼굴이 생각나고, 그래서,
'보고싶어 태형아'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의 난 찌질했다.
'야 이여주 진짜 뭔 일 있냐 너?'
이번엔 문자로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새벽 2시부터 4시 까지 이어진 문자 행렬은 사람을 정말 짜증나게 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해 본 말인지 모르겠다. 나한테 진짜 무슨 일이 생긴줄 알고 저러는건지 뭔지. 그래도 전화 보단 괜찮은 것 같다. 잠이 다 깨지 않는 비몽사몽한 상황이라 용기가 났다. 휴대폰을 들고 답장 버튼을 눌렀다.
'없어 나 아파서 그랬어 잠 좀 자자'
알람을 맞춰 놨기 때문에 차마 휴대폰을 끄진 못하고 침대 끄트머리로 던져 버렸다. 지잉, 지잉 - 역시나 진동은 계속 울렸다. 나름 자장가 역할을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밥 먹고 가!"
"늦었어 오늘 일교시란 말이야"
"학교 가는 길에 꼭 챙겨 먹어!"
알았어. 걱정하는 엄마의 말에 대충 대답하고 신발을 구겨 신었다. 분명 아껴 신어야지, 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때가 탔다. 잘 들어가지 않은 뒤꿈치를 구두 주걱으로 쑤셨다. 쏙, 들어간 발에 묘한 쾌감을 느끼면서 문을 열었다. 다녀 올게요! 소리쳤다. 아침 마다 전쟁이다. 대학교 오면 안 이럴 줄 알았는데. 아마 이번 학기는 내내 이럴 것 이다. 시간표를 잘못 짜서 망했기 때문이다. 수강 신청을 하고 진지하게 휴학을 고민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고민만 했다. 앨리베이터를 잡았다. 택시타고 가면 30분 정도 걸리니까, 안전하게 도착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 돈은 남아나질 않겠지. 오늘 점심은 쿨 하게 포기 하기로 한다. 점수를 깎이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택시 뒷자석에 급하게 올라 탔다. XX 대학교 정문으로 가주세요. 말 하기가 무섭게 출발 하는 기사 아저씨에게 따봉을 들었다. 후, 창에 머리를 박았다. 집에서 부터 뛰어 오니 죽을 맛 이었다. 숨을 고르고 나니 그제서야 어제 못 본 연락들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치마를 입어 휴대폰을 크로스 백에 넣었다. 꺼내는데 귀찮지만, 오늘은 그냥 치마가 입고 싶은 날이라 그랬다. 지금 이렇게 의식의 흐름이 쩌는건 아마도 아침이라서 그럴 것이다. 홀드를 푸는데 역시나 어마어마한 연락이 와 있었다. 하나는 팀플, 하나는 친구들, 스팸, 그리고 김태형.
'아파? 괜찮아?'
'야ㅡㅡ 진짜 왜 이렇게 씹어 근데?'
'개 빡쳐 학교 앞으로 찾아간다'
'이여주'
'사람 무시 하는 거 정도껏이다 내가 개냐?'
'왈왈. 사실 난 개야'
'오늘 넌 김태형이 아닌 개태형을 보게 될 거여'
이어폰을 꽂았다. 창 밖을 보니 치마 입을 계절이다. 역시나 나는 계절 감이 있다. 문득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동시에 표정을 관리 하려 애썼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스스로 민망해서. 문자 몇 통에 기분이 좌지우지 된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것도 두서라곤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바보 같은 김태형의 문자에. 팔을 괴고 여전한 날씨를 쳐다봤다. 창 문을 조금 열었다. 따땃하지 않은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아침에 자지 못 한 잠을 강의실 와서 다 잔 것 같다. 쉬는 시간 없이 3시간 동안 이어지는 수업이 야속했다. 교수님 탓 이다. 그래도 나름 꿀 잠을 잤다. 꿈도 꿨는데 동기가 등을 치는 바람에 깨 버렸다. 종소리 대신 날 깨운 알람이었다. 고마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두꺼운 전공책을 탁, 하고 덮었다. 들고 다니는게 힘들어 몇 번이고 버릴까 생각 했던 책이다. 그러고 보니 사물함을 신청 못해서 벌어진 참사였다.
"오늘 점심 뭐 먹어?"
"나 안 먹어"
"아 왜! 나 친구 없는 거 잘 알면서"
"혼자 먹어. 나 오늘 택시비로 다 썼어"
"......사줘?"
"아니"
"에이씨"
"혼자 드세요~ 나 간다"
뾰루퉁한 동기의 표정을 무시하고 강의실 밖으로 토해지 듯 나왔다. 나오는데 5분이 걸렸다. 그만큼 넓고, 학생 수 가 많았다. 대체 왜 1교시에다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딴 강의를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들 나 같이 수강 신청에 실패 한 게 분명하다. 강의실 앞에서 대충 치마를 정리하는데 어느새 따라 나온 동기에 내 등을 쳤다. 매번 생각했는데 손이 정말 맵다.
"야! 그냥 같이 있어주기만 하면 안돼?"
"안돼. 나 바빠. 도서관 가야 해"
"아 시험 기간도 아닌데 개 야박하게 구, 헐"
"왜 그래"
"쟤 뭐야. 우리 수업 듣는 앤가? 개 잘생, 헐 진짜 대박"
동기가 손 끝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호들갑을 떠는게 묘하게 익숙해서 뜬금없이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손 끝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누구길래 그래.
"김태형......?"
아니, 김태형? 이 아니고 저건 김태형! 이다. 멀리서 봐도 저건 김태형이었다. 저 또라이 진짜. 특유의 껄렁하게 앉아 있는 폼, 남자 주제에 작은 얼굴, 그 안에 꽉 찬 이목구비. 저기서 뭐하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이건 오랜시간 지켜 봐야 알 수 있는 김태형의 무의식적 행동인데, 혀를 빼꼼 내 밀고 가증스럽게 웃는다. 저렇게 웃으면 여자들은 백이면 백 다 넘어왔다. 그래서 김태형은 나를 신기해 했었다. 그리곤 놀렸다. 너는 분명 여자가 아닐꺼라고. 참 웃기다. 난 치마도 입는 여자다. 팔짱을 끼고 녀석이 이제 어떻게 행동하나 지켜봤다.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해 분명 5분 안에 이 곳을 뜰 것 이다. 그리고 다른 장소에 가 있겠지. 거기서 나를 기다릴 것 이다.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여긴 우리 학교고, 난 김태형의 연락을 씹었고, 김태형은 날 베스트 프렌드 쯤으로 여기고, 그러니까 분명 김태형은 나를 보러 온 것 이다.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놈 답게 아무런 예고 없이. 그러나 나는 그 장난에 장단을 맞춰 줄 여유가 없었다.
쿨 하게 뒤를 돌았다. 동기에게 점심 밥을 같이 먹어줄 테니 가자, 라고 하려던 참 이었다.
"거기 하얀색 치마!"
"야 씹냐!"
"크림 빵!"
"......이여주! 여주야!"
발 등에 불 떨어진 듯 걸어가던 다리가 멈췄다. 이름을 저렇게 불러버리면 난 멈출 수 밖에 없다. 크로스 백 끈을 꽉 쥐었다. 이상하게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 걸 다 아는 듯한 손이 어느새 내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나를 돌려 세웠다. 동기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나중에 물어볼게 뻔했다. 무슨 사이냐고. 그럼 무슨 사이라고 답할까 잠깐 고민했다. 김태형이랑 나는 친구 사인데, 친구 사이가 아니야.
"밥 먹었냐?"
"......아니"
"어제 늦게 자서 오늘 택시 탔지. 그래서 돈 없지"
"......"
"가자. 너 좋아하는 크림 빵 사줄게"
"나 그거 고등학교 이후로 안 먹는데"
"튕기긴"
내 손목을 잡은 채로 날 질질 끌고 간다. 여긴 우리 학교고, 김태형은 그냥 꽤 자주 온 타 학교 학생인데 어째 나보다 지리를 더 잘 아는 것 같다. 과 건물 일 층에 있는 옷 가게 쇼윈도에 김태형과 내가 비춰졌다. 내 손목을 붙잡은 채 앞서 가는 키 큰 김태형과, 그냥 나. 왠지 민망했다. 언제 부터 였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모든 것이 창피하고, 낯설어 졌는지.
"오늘 널 위해서 오빠가 준비한 만찬이다"
"편의점을 그냥 털어 왔어?"
앞에 놓인 각종 인스턴트 음식을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는지 모르는지 빙구 같이 웃기 바쁘다. 김태형은 지금 매우 기쁠 것 이다. 날 만났으니까.
쭉 지켜봐온 김태형은 아주아주 약하다. 특히 정에 약하고, 사람에 약하고, 사랑에 약하고.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를 싫어하는 티를 조금이라도 내면 끙끙 거리기 바빴다. 남자 답지 못하게. 그렇지만 그게 사람 답긴 했다. 인간적이지 않은 외모에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음, 고등학교 친구 말로는 그래서 더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결론은 내가 나쁘 다는 것이다. 뜬금 없을 수 도 있는데 진짜 그렇다. 연락 씹는 거 싫어하는 거 다 알면서, 김태형에게 삐진 티를 엄청 내곤 잠수 타 버렸으니까. 그것도 무려 3일씩이나.
"먹어"
"알았어"
"......"
"왜 그렇게 쳐다봐?"
"항상 얘기하는 건데"
"......"
"난 말 안하면 몰라. 멍청이라"
"......"
"그니까 화난 거 있으면 욕해도 좋으니까 말로 해"
"......"
"주우,"
"김태형"
"라"
"......"
"그리고 이거"
벙 찐 나에게 김태형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입을 벌리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빨리 받으라는 듯이 손짓을 한다. 차가운 액체 방울 들이 손에 닿았다.
"딸기 프라푸치노"
"......"
"그리고 진짜로 아프지 말자"
김태형이 웃었다. 아주 환하게. 난 웃을 수 없었다. 그 대신 고개를 숙였다. 분명 날 걱정하고, 날 위하고, 진심이 가득 담긴 김태형의 말에도 웃을 수 없었다. 대신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다시 한번 죽을 것 같은 감정이 휘 몰아 쳤다. 햇빛은 쨍쨍한데 나만 그늘이다. 그늘 속 나는 태풍에 휘말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다. 사실 태풍이 아니고, 김태형에게. 난 김태형에게 치이고 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김태형이 치고 있는 틀은 나에게 너무 가혹하다. 기대를 하게 만들지만 결국엔 각이 잘 잡힌 틀일 뿐이다. 그걸 아니까 괴롭다. 틀도, 틀의 주인도 나는 너무 잘 안다.
"응? 고개 들어. 야 우냐? 내가 너무 감동적이었나?"
"뭐라는거야"
"친구 좋은게 이런거지. 감동 먹었지 진짜? 내가 오늘 여자 친구도 내팽겨 치고 니네 학교를 찾아와서,"
"먹을테니까 가. 학교 안 가?"
"나 오늘 하루 종일 너랑 있을 건데?"
"누구 맘대로?"
"내 맘. 오늘 술 마시자"
"둘,이?"
바보 같이 끝 음이 떨렸다. 김태형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았지만 내가 창피했다. 큼큼, 괜히 헛기침을 했다.
"몰라. 일단 오늘 수업 다 끝났지? 너 오늘 일교시 하나 잖아"
"나보다 더 잘 아네"
"내가 누군데"
"아무튼, 그래서 뭐"
"근처 일찍 여는 술집 가자 너 통금도 있고"
"왜 내 통금을 네가 만드는데?"
"여자는 자고로 통금이 있어야 섹시해"
"미친,"
"욕은 별로"
"아 진짜!"
가자. 김태형이 다시 내 손목을 붙잡았다. 굳이 뿌리치지 않고 일어 났다. 사온 음식들을 언제 정리 했는지 까만 봉다리를 달랑 거리며 손에 쥐고 있다. 줘, 내가 들게.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버스, 지하철을 수차례 갈아탄 결정장애 둘은 결국 헤매이는데만 2시간을 소비 했다. 안 그렇게 생겨서 사실 김태형보다 내가 더 심했다. 여기 갈래? 하면 음, 아니, 별로, 로 일관하니 나중에는 그 짜증 없는 김태형이 나에게 짜증을 냈다. 진짜 짜증나! 하고 말이다. 그래도 덕분에 완전 쌩 대 낮 부터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됐다. 그래도 술은 밤 이지, 따위의 소리를 짓껄이니 옆에서 째려보는게 느껴졌다. 슬쩍 눈을 돌리니 김태형 특유의 나른한 눈빛이 날 향해 있었다. 뭘 봐, 손으로 얼굴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내리게? 아깐 싫다며"
"내가 언제?"
"존나 변덕......"
"안 내려?"
"내려! 가시나 진짜"
내리는 순간 까지도 툴툴 거린다. 신경 안 쓰는 척 계단을 올랐다. 그러니 녀석이 조용해 졌다. 그대신 내 뒤에 찰싹 붙어 오르기 시작했다. 꽤나 긴 계단이라 힘들어 죽겠는데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뒤를 돌아 김태형을 째려봤다.
"왜, 또, 뭐"
"일단 빨리 올라가"
"왜그러는데?"
"......잖아"
"뭐라고?"
"너 치마 입었잖아. 빨리 안올라가냐?"
멋있는 척은, 치마 뒷 쪽을 붙잡고 나머지 계단을 올랐다. 얼굴이 후끈하고 빨개지는 거 보니 아무래도 운동 부족인 것 같다. 괜히 손 부채질을 했다. 김태형은 내내 내 뒤에 있었다. 술 집에 도착할 때 까지 난 김태형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못했다.
dㅗ타+ 맞춤법은 수시로 확인하고 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