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 5명 × 또래상담 000 "교복 입어." "싫어." "그럼 학교 때려쳐." "그건 더 싫어." "교복 입고 학교 오는 건." "싫지." 씨발. 이걸 갈아 버릴 수도 없고. 껄렁하게 상담실 의자에 앉아 있는 놈이 잘 손질되어 있는 손톱 끝을 쳐다봤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서 말이다. 나는 곧 끊어질 것 같은 이성의 끈을 고이 붙잡고 문밖을 쳐다봤다. 여전히 문밖에는 문지기 두 명이 멀뚱히 서 있었다. 쟤들, 축구부라고 했던가. 도망치면 잡히겠지. 어쩌면 저 터질 것 같은 허벅지 근육으로 맞을지도 몰라. 창문을 깨고 탈출할까 했지만 여기는 삼 층이었다. 심지어 선생님들은 나를 마음 단단히 드시고 가둬놓으려 작정하셨는지 문지기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교문에도 두 명, 운동장에는 네 명. 매점쪽에도 두 명. 쟤들 다 운동부다. 저렇게 많은 사내놈들이 달려들면 나는 물론이고 놈도 꼼짝없이 잡힐 게 분명하다. 도대체 내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아. 있지. 그것도 아주 큰 죄. 이 새끼랑 친구인 거. 제기랄. 김태형, 열 일곱, 주황 대가리. 김태형은 대가리 색이 당근을 쏙 빼닮은 주황색인 걸로 설명은 충분했다. 양아치다. 그것도 아주 전형적인. 학교는 오되 가방과 교복은 버리고 온 지 오래였고, 매번 다른 피어싱과 바뀌는 머리색은 선생님들의 눈뿐만 아니라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에 거슬리기 마련이었다. 어디서나 눈에 튄다 그래야 하나. 우월한 기럭지와 잘생긴 얼굴 탓에 무얼 입든 어떤 색을 머리에 묻히든 꺅꺅거리는 여학생들은 언제나 있었지만, 그들은 김태형 앞에선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닫았다. 김태형이 다른 학생들에게 공포감을 심을 만한 짓은 하지 않았어도 사람의 아우라나 뉘앙스라는 게 있어서, 학생들은 김태형의 주황색 머리털만 보이면 주춤거리고 말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김태형은 그럴 때마다 뭐지, 나를 싫어하나? 하는 생각에 우울해 하는 건 함정. 그런 걸 없애려면 교복도 입고 머리색도 바꿔야 한다는 내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웃긴 건,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게 얘 하나가 아니라는 거다. "나가 봐. 다음." "응. 전정국 부르면 되는 거야?" "어." 말은 조곤조곤해서 참 괜찮은데. ……욕을 안 쓰는 건 아니더라도. 문이 덜커덕 열렸다. 뒷머리를 거칠게 헤집은 전정국이 의자를 요란하게 끌어 앉았다. 아마 이 새끼는 나 문제아예요~ 라고 티 내는 걸 좋아하거나 사춘기가 뒤늦게 왔거나 가오를 잡는 것 중 하나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셋 다지만. 사춘기를 넘어선 오춘긴가. 나는 매우 짜증이 난다는 듯 인상을 팍 쓰고 있는 녀석을 반성문 묶음으로 머리를 냅다 쳐 버렸다. "악! 이게 무슨 짓이야, 갑자기! 죽을래?" "인상 쓰는 거 좋아하길래. 이유 없이 인상 쓰는 것보단 인상 쓸 이유를 만드는 게 더 낫지 않나 해서. 어때. 인상 쓰는 게 훨씬 더 수월해졌지?" "……미쳤어? 아니다, 미친 게 맞아." 멀쩡한 사람을 몰아가네. 아무튼 아까 전 김태형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와 전정국을 보고 생긴 피로, 앞으로 몇 놈들이 더 남았다는 우울함을 전정국의 머리를 내려침으로써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풀린 건 아니었다. 저 운동부 새끼들은 다리도 안 후들거리는지 변함 없이 서 있었고, 몇몇 선생님들은 각자 끌고 온 차로 학교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학교 상담실에 가둬진 것보다는 그냥 감옥에 가두어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는 밥도 끝내 주게 잘 나오고 침대도 푹신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방도 따로 있는데. 이건 완전 그냥 죽으라는 거지 뭐야. 차라리 교장 선생님과의 일 대 일 상담이 더 낫겠다. 한 시간 전 선생님들께 더욱 반항하지 못한 내가 한심해졌다. 전정국은 원래 우리보다 한 살이 어리지만 우리나라에만 있는 빠른 년생으로 같은 나이나 다름없게 됐다. 거지 같게도 동생인 게 확실하다만. 누나라고 불릴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먹다니 그것부터 전정국은 마음에 안 들었다. 전정국, 열 일곱을 빙자한 열 여섯, 만렙 토끼. 킁. 나는 괜히 코를 훌쩍였다. 만렙 토끼라는 별명은 안 어울리게 귀엽잖아. 만렙은 맞는데 토끼라니. 나는 아까 전보다 조금 풀어져 있는 전정국의 얼굴은 쳐다보다 관뒀다. 토끼인가 보지 뭐. "주먹을 그만 날릴 생각은 없고?" "잘 아네." "여자애들 그만 울릴 생각도 없고. 그치."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자기들이 날 좋아하는 걸 어쩌겠어. 난 걔네가 싫어. 고백받아 주면 마음도 없이 사귄다고 쓰레기라 할 거잖아. 철벽남이고 지랄이고 하는데, 난 철벽남인 게 아니라 그냥 걔들한테 관심이 없는 거야." "……그래. 어떤 여자 만날지 참 기대되네." 재수 없다. 진짜 재수 없다. 쟤 딴에는 진심 백퍼센트 말을 나에게 한 것이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으로써 짜증을 솟구치게 만든다. 저러다 독신으로 살까 봐 걱정도 된다. 보는 눈이 높은 건지,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건지. 아. 잠깐만. 내가 쟤 연애를 왜 걱정해 주는 거지.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는 자괴감에 한숨을 쉬었다. "네가 여자를 울리든 말든 상관이 없어. 그런데 말이야, 그 여자애들이 나한테 상담하러 온다는 게 큰 상관이 있다는 거야. 남자들은 뭘 좋아해요? 이런 엿 같은 질문을 하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알아? 잘 좀 타일러. 난 너 싫어. 귀찮아. 꺼져. 이딴 말만 하지 말고." "결국 네가 상담해 주기 귀찮아서 그런 거네 뭘." 전정국의 말에 정곡을 찔려 말을 멈췄다. 귀찮은 게 맞다. 상담 도중에 울음보가 터져 숨 넘어갈 듯 우는 여학생들을 달래 주는 건 내 몫이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실연을 당하고 흘리는 눈물은 그리 쉽게 그쳐지지도 않아 더 고역이었다. 더군다나 눈물 자국이 생긴 얼굴로 상담실을 나갈 때 이 상담을 했다는 걸 말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들어 줄 때면 더 피곤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여학생들은 매 시간마다 와 나를 들들 볶아댔다. 말했어? 말 안 했지? 말하면 안 돼! 후배, 혹시 말한 건 아니지? 후배, 말 안 한 거 맞아? 후배, 절대 말하지 마! ……염병들하고 있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전정국 때문에 그런 짓을 벌인 거라고 생각하지, 스멀스멀 열이 올라왔다. 우리 학교에서의 미스테리 중 하나는 왜 우리 학교에 전정국 열풍이 불었냐 이거다. 물론 나만의 미스테리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만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니까. 열이 오르는 머리를 식히려 손으로 지압하듯 꾹꾹 눌렀다. "싸움질은 어떡할 거야." "벌점은 안 쌓였잖아." "너는 시발 사회 생활할 때 상사가 너 짜증 나게 하면 냅다 후려칠 거냐?"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거야. 비유를 해도 어쩜." "너네 혹시 뭐 짰어? 나 짜증 나게 하려고? 아니면 하나같이 다 성격이 개 같은 거야?" "둘 다 아닐걸." 얘네랑 대화하면 명이 짧아지는 기분이다. 이건 너무하다, 정말. 몇 명을 나 혼자 상대하라는 건 정말 너무하다. 아마 선생님들도 이놈들의 화법을 감당하지 못해 나에게 떠넘긴 게 확실하다. 이런 선생님들이 어디 있어. 힘들다고 학생한테 막 떠넘기는 게 어디 있냔 말이야. 개 같다. 니미랄. 넥타이를 풀었다. 전정국이 박력~ 오~ 이러면서 또 지랄했다. 나는 다시 넥타이를 고쳐 맸다. "알았으니까 그럼 정호석이랑 박지민 같이 불러." "벌써 끝나?" "드디어 끝나는 거야. 빨리 불러." "아쉽네. 오케이." 뭐가 아쉬워. 죽여 버릴까.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샤프를 집어들었다. 이걸 날리면 오십 대 오십이다. 맞은 전정국이 빡쳐서 날 때리든가 빗나갔음에도 자신을 향해 샤프를 던진 나에게 빡친 전정국한테 맞든가. 어차피 쳐맞는 건 똑같네. 나는 집었던 샤프를 놨다. 전정국이 문을 반쯤 연 상태로 야, 니네 둘! 하고 외쳤다. 조금 웅성거리더니 둘은 티격태격하며 상담실 안으로 들어왔다. 피로가 온몸을 덮치는 듯했다. 체력적으로 제일 딸리는 둘은 붙여놓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둘의 에너지가 서로에게 가면 나에게는 덜 오지 않을까 하는. 나름 머리를 쓴 건데. 사실 나도 내 머리를 믿을 수 없다. 두 배로 힘들면 어떡하지. 어쩌면 네 배일 수도. "봤어? 이 새끼가 나 때렸어." "지랄. 말은 똑바로 하자. 네가 내 발 밟았거든?" "네 발이 너무 못생긴 걸 왜 나한테 탓해?" "어휘력도 겁나 딸리네. 내가 언제 네 탓을 했어. 네가 발을 밟았다 한 거지." "어쩌라고." "얼굴도 개떡같이 생긴 게." "뭐? 여자애들은 나 망개떡 닮아서 귀엽다고 했어." "그거 다 개소리야. 사실 걔네 집 다 망개떡 파는 집안이래. 너 상술에 넘어간 거임. 일부러 망개떡 쳐먹게 하려고." 존나게 시끄럽다. 책상을 엎어버리고 싶을 만큼. 어디까지 하나 보자 했지만 정호석이 이겼다. 정확히 말하면 박지민을 쳐발랐다. 박지민이 가뜩이나 많은 볼살을 부각시키려 볼에 바람을 넣고 씩씩댔다. 정호석은 그런 박지민이 더럽다고 헛구역질을 하는 척했다. 나는 아픈 눈을 깜박거리고 반성문 묶음을 만지작댔다. 아까 전정국처럼 머리를 때려 버리는 게 좋으려나. 그런 생각을 알아챈 정호석은 박지민의 허벅지를 툭툭 친 뒤 조용히 시켰다. 어쭈. 정호석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정호석과 박지민. 이 둘은 가장 유하고 주위에 있을 법한 남학생들이었다. 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주위에 있을 '법'한 거에서 끝나지 왜 진짜로 내 주위에 있고 지랄이냐는 거다. 비글도 아니다. 악마견이라 불리는 세 마리가 합쳐져 사람이 된다면 이 두 명일까 싶을 정도다. 김태형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김태형은 어렸을 때부터 봐서 면역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얘네들은 그냥 답이 없다. 객관식이면 찍기라도 할 텐데 심지어 주관식이어서 사람 미쳐 버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암 쏘 씨리어스. 난 정말 진지하다. 김태형과는 조금 다른 깝이 사람을 한계점으로 몰아간다. 결론은 시발스럽다. "우리한테 할 질문 없어?" "우리라고 묶지 마. 더러워." "와, 잘됐다. 나도 너랑 상담하기 싫었어. 00아, 우리 이 새끼 내보내자!" 박지민이 신이 나서 말했다. 정호석은 뭐 이딴 게 다 있냐 하는 눈빛으로 박지민을 쳐다보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뭔가 질문해 주세요, 하는 것 같아. 머리가 아팠다. 정호석, 열 일곱, 에너자이저. 박지민, 열 일곱, 망개떡. 사실 둘의 문제점은 거의 없었다. 바지통을 줄인다거나 교복을 단정하게 입지 않는 건 종종 있는 일이고, 얘네들이 다른 애들처럼 막 성격파탄자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렸다. 그러나 정호석은 담배가 문제, 박지민은 여자 문제가 심각했다. 미성년자들이 할 짓이냐고 이게. 다른 애들보다 더 심각한 건가. 박지민은 바를 드나들었다. 정호석은 엄청난 골초고. 신기하게 담배 냄새는 안 나지만. 박지민에게서 무슨 향은 나는데, 나는 바에서 나는 향기가 뭔지 모른다. 향수 냄새가 막 섞이려나. 그런데 박지민의 몸에서는 은은한 향이 났다. 나 참. 이거 보기만 해서는 완벽범죄잖아. "정호석, 담배 지금 어디 있어?" "담배? 왜?" "있잖아, 내가 기관지가 좀 안 좋거든. 그러니까 펴. 여기서. 창문 열지 말고." "……어?" "피라고. 지금. 너 피고 싶지. 그치. 그럴 거야. 라이터 있지? 펴." "아니, 야, 너 기관지 안 좋다며……." "괜찮아. 펴." 정호석이 손에 들린 담배갑을 가만히 쳐다보며 울상을 짓는다. 박지민도 눈이 휘둥그레해져서 머리만 긁적였다. 담배를 자꾸 빼앗는다고 끊어지는 게 아닌 걸 잘 안다. 또 살 텐데 그게 얼마나 돈 낭비야. 가뜩이나 돈 없는 학생인데. 나는 시무룩해진 정호석을 그대로 두고 박지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박지민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뒤지려고 이게 날 꼬시려 그러네. 이 새끼도 마찬가지로 여학생들이 상담실로 뛰어오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다. 진짜 제일 황당했던 것도 박지민 얘였다. "요즘 만나는 애는 몇 명이야?" "어, 글쎄. 한 다섯 명?" "예전에는 일곱 명이었잖아. 두 명 줄었네."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일곱 명은 인간적으로 너무 힘들더라구. 체력적으로 딸려." 어련하시겠어. 나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하는 박지민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민은 특히나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1학년 끝자락인 지금보다 몇 달 전이지. 자그마치 8개월 전이네. 8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이 일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학년 전체가, 아니 학교 전체가 떠들썩했었다. 그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든 박지민은 막상 아무렇지 않았었지. 음. 참 대단해. 아무튼. 매번 4월달은 교생 선생님들의 실습이 있다. 우리도 다른 학교와 똑같이 교생 선생님을 각 학급마다 배정받았었다. 우리 학교는 전체 반이 여덟 개인데, 남자 교생 선생님 세 명, 여자 선생님 다섯 명 이렇게 오셨었다. 앞반에 쫙 다 남자 선생님을 배정받고 뒷반은 여자 선생님들로만 배정받았었다. 불만이야 많았지만 솔직히 뭐 남자 선생님이 그렇게 잘생기셨던 건 아니라. 그런데 여자 선생님들은 진짜 예쁘셨었다. 어찌나 잘 꾸미시고 다녔었는지, 매일 바뀌는 머리 스타일과 옷. 삐까뻔쩍한 구두와 네일까지. 가족을 제외한 여자는 다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박지민은 글쎄 그 교생 선생님들을 다 꼬셔버린 거다! 그 한 달 동안! 그게 말이 되냐고! 박지민을 두고 여자 선생님들은 싸우시기까지 했었다. 결국 다 남자 선생님들의 부축을 받으시며 나갔었고 박지민은 그 날 교무실로 불려갔다. 교내봉사를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박지민은 대단했다. 그것도 엄청. "다른 건 더 안 물어봐? 응?" "……더 할 말은 없는데. 쓸데없는 여자애들 꼬시고 다니지 좀 마. 복도가 너 때문에 시끄러워." "에이, 그건 곤란해! 솔직히 내가 꼬시는 게 아니라 걔네들이 먼저 끼 부리는 거란 말이야. 너무해." "믿어지지는 않지만 믿도록 노력할게. 정호석 너는 어떡하지. 담배는 어떻게 못해, 나도. 너도 끊고 싶은 마음은 없을 테고." "……." 박지민이 자기 말이 무시당했다는 거에 시무룩, 정호석도 담배를 만지면서 시무룩. 둘 다 축 쳐져 있다. 감정 기복이 되게 심한가 보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알았어. 남은 애 좀 불러 줘." "남은 애? 윤기?" "민윤기네. 왜 이름 안 불러?" 나는 그냥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쉬었다. 보스몹. 끝판왕의 등장이었다. 민윤기는 아무런 것도 얼굴에 담지 않은 채 묵묵히 걸어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금발로 탈색한 머리, 풀어헤쳐진 넥타이. 나는 뜨거워지는 머리를 식히려 애썼다. 답답한 마음에 셔츠의 윗 단추를 풀었다. 넥타이가 헐렁해진 건 오래였다. 민윤기는 김태형과 내 친구였다. 진짜 안 어울리는 조합인 거 안다. 그것도 아주 잘. 초등학교 때 생긴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 간다는 것도 웃긴 얘기였다. 그럼에도 김태형과 민윤기는 나와 안 친했던 적이 없었다. 다른 무리에 있어도 서로를 잘 알았다. 내가 김태형과 만나면 장난치기 바빴던 사이라면, 민윤기와 나는 서로에 대해 파악하기 바빴다. 여태 뭐 하고 지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여나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민윤기는 안 그래 보여도 기분파였다. 그래서 말이 많을 때와 말이 적을 때는 확연히 달랐다. 오늘의 민윤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시발. 파악하기 어렵게. 나는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너는 시발 그래도 김태형 뜯어말렸어야지." "……." "머리 내일까지 검은색으로 염색해." "……그거면 돼?" "응. 그것만 좀 하자." "……." "학교에서만 눈에 띄지 말자." "어. 안 어려워. 어려운 부탁 아니야." 그래. 바람 빠지듯 후우, 한숨을 쉬었다. 민윤기, 열 일곱, 천재. 음악 천재라도 머리는 좋다. 사회 생활 머리는. 공부쪽은 하위권. 천재는 자기가 관심 있는 부분에서만 특출나단 말이 딱 맞는 듯, 민윤기는 음악쪽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다른 쪽에서는 아쉽게도 특별히 두각을 보이진 않았다. 사람을 구워삶는 데에는 도가 튼 녀석은 머리만 염색해 오라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쯤이면 머리가 검은색으로 변해 있겠지. 또 선생님들께 꾸지람 아닌 꾸지람을 듣을 테고. 민윤기는 그냥 조용한 학생에 불과했다. 화려한 머리색과 천재라는 타이틀을 제외하면. 기분이 좋을 때는 마음껏 떠들었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딱히 어디 밉보일 곳 없는 민윤기는 의외로 적이 많았다. 민윤기의 담임을 맡으신 분들이나 잘 아시는 선생님들은 민윤기를 그렇게 좋아하다못해 거의 앓다시피 해도, 민윤기의 겉모습을 보는 선생님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혀를 차곤 하셨다. 그것만이 아니다. 민윤기 성격을 자꾸 건드는 애들은 민윤기의 화려한 언변에 잽도 아닌 어퍼컷을 맞고 난 다음에는 민윤기를 정말, 정말정말 싫어했다. 우리반 여자애 한 명도 나에게 묻더라. 너는 도대체 왜 그런 애랑 친구야? ……누가 친구야, 시발. 입 닫아. 그 여자애는 내 답을 받고 난 뒤 나도 싫어했다. 그리고 김태형도 싫어했다. 병신. 고백 거절당해서 그런 거면서. 요점만 짚어 주겠다. 기분파에, 강단 있는 성격, 껄렁한 겉모습, 음악 천재. 한 마디로 '지랄맞은' 민윤기는, 개나 소나 다 좋아하는 다른 애들과 달리 웃기게도 마니아층이 있었다. 좋아하는 애들만 좋아한다는. 그 여자애들도 참 신기한 게 매일매일 차이면서도 그래? 알겠어~ 하고 반응했다. 면역력이라도 생긴 건가. 먼저 달라붙지도 않았다. 보이면 인사하는 거고, 아님 마는 거고. 아무리 생각해도 존나 신기하다. 그런 애들이 우리 학교에 있다는 게. 그게 존재하는 생물체라는 게 더 신기하다! 나중에는 내가 그 여자애들 찬양이라도 할까 봐 무섭네. "야." "왜." "너 시발 강다연한테 나 친구 아니라고 했더라? 뒤지고 싶냐?" "내가 세상에서 딱 잘못한 거 세 가지가 있어." "뭔데." "첫째, 김태형이랑 친구한 거. 둘째, 너랑 친구한 거. 셋째, 이 학교에 입학한 거." "염병하고 있네." 짜증 난다. 왜 친구를 먹은 거야, 대체. 이 멍청한 나년아. 나는 조금 기분이 풀린 것 같은 민윤기에게 애들을 다 끌고 오라며 손을 휘저었다. 민윤기는 자기가 개새끼냐고 기분 나빠 했다. 자기혐오인가. 개새끼를 개새끼처럼 대했더니 기분 나쁘다는 경우는 처음이네. 어쩌라는 거지. 나는 창밖을 다시 봤다. 운동부 때문에 체육이 싫어진다는 얘기는 들어 보았으려나. 지금 내가 그럴 지경이다. 아까 봤던 얼굴들이 스멀스멀 걸어와 내 앞에 앉았다. 나는 반장문 묶음에서 종이 몇 장을 빼 각자 앞에 놔 주었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딜." "꺼져." "아이, 친구끼리 너무하네. 의리 지켜라, 어?" "친구 아니야." "야. 나는." "너도 친구 아니야. 니들 둘이 친구해. 한 명당 다섯 장씩. 잘못 써도 다시, 찢어도 다시. 운동부 애들이 문앞 지키고 있는, 저 개 같은 새끼! 내가 여기 갇혀 있는데 왜 지가 먼저 튀어!" 씨발! 나는 다급히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야, 거기 너! 씨발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면 의자 날려 버릴 거야, 썅! 남자애는 몸을 흠칫 떨다 그곳 그대로 멈췄다. 어딜 감히 지금 나보다 먼저 가? 나보다 학교를 먼저 빠져나갈 수 없는 새끼는 없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건. 김태형이 벌어진 입을 다물고 연필을 쥐었다. 예쁘게 써라, 예쁘게. 하나같이 글씨가 안 예쁜 대가리 몇 개들이 일정히 움직였다. 씨. 진짜. 짜증 나. 오늘 단축수업이었는데……. 원래 점심만 먹고 끝났을 날임에도 나와 이 녀석들, 더불어 저 운동부 놈들은 정상수업이다. 화난다. 화가 난다! "……야, 좀. 민윤기. 옆으로 계속 밀리잖아. 똑바로 써." "천재는 악필이랬어." "그래, 그러겠지. 알았어." "말투 똑바로 해라." "글씨체나 똑바로 하지? 전정국. 너 이게 다 쓴 거야? 나 이거 찢어도 돼?" "할 말이 없어." "머리를 쥐어짜내. 즙처럼. 그럼 할 말이 뚝뚝 떨어질걸." "그거 드립이냐?" "드립커피? 정호석, 담배에 관한 이야기가 없잖아. 네가 지금 여기 왜 불려왔어. 망할 담배 때문이잖아." "하지만 담배는 잘못이 없는걸……." "그럼 담배 잘못을 있게 만들어. 박지민 너는 풍기문란에 대한 것도 써. 미성년자인 여자를 지켜 주지 못한 죄도 쓰고. 김태형, 야, 당근 같은 새끼야." 죽을 것 같았다. 진심으로. 반성문이라도 제대로 쓸 것 같았던 내가 병신이지. 창문을 깨고 탈출하고 싶었다. 차라리 다리 부러져서 병원에 실려가고 싶다. 그럼 난 며칠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을 거고 선생님도 얘네들을 나에게 부탁하지 않으시겠지. 평소와 같이 순탄한 학교 생활을 하면 될 거다. 좋아, 결심했어. "야, 김태형. 여기서 내가 뛰어내리면 네가 잡아. 저기로 내려가서." "그럼 네가 아니라 내가 병원에 실려가거든? 빨리 쓸 테니까 그냥 앉아." "집 가고 싶어. 내가 학교에 오래 있으면 죽는 병이 있어서 그런데 빨리 좀 써." "박지민, 쟤 네 눈웃음에 안 넘어가니까 그냥 고개 박고 써." 내가 멍을 때리고 있는 도중에, 박지민은 나를 쳐다보며 계속 웃음을 지었나 보다. 민윤기는 아까보다 조금 더 빨라진 손놀림을 유지하면서 박지민을 타박했다. 내가 눈썹 하나를 들어올렸다. 박지민은 헤, 하고 웃더니 반성문을 마저 작성했다. 진짜 떡같이 생겨 가지곤. 나는 자신의 반성문을 봐 달라는 정호석의 말에 반성문을 천천히 읽었다. 학교에서 큰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그저 저는 뭉게구름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선생님께서 저를 혼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담배를 사는 것은 불법이나 피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뭐야 이게. 그 네 문장이 반성문 다섯 장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야, 민윤기. 정호석 머리 좀 때려라." 빡. "아! 왜애! 잘 썼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야?" "넌 이게 선생님을 가르쳐드는 거지 반성하는 거냐? 이리 와 봐. 연필 쥐어. '학교에서 큰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저의 호기심으로 인한 잘못된 선택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써." "담배 피지 말라는 거잖아!" "몰래몰래 피면 되는 거야. 선생님 앞에서만 안 걸리면 된다고. 너 하루에 담배 얼마나 펴." "반 갑……." "학교 올 땐 담배 들고 오지 마. 좀 줄일 필요가 있어. 학교에서만 피지 말고 집에서는 네가 담배 네 개를 물고 피든 상관 안 해. 학교에서만 한 달 간 조심하라고, 시발. 네가 또 걸리면 고생하는 건 네가 아닌 나니까." "응……." 결국 정호석을 이겼다. 만세. 하나도 기쁘지가 않지만. 정호석은 내 말대로 지우개로 글씨들을 싸그리 다 지우고 내 말을 옮겨 적었다. 김태형도 다 되었는지 나에게 반성문을 긴장되는 표정으로 슥 밀었다. 어디 보자. 학생다운 용의복장을 갖추겠습니다……. 괜찮은데? 긴장하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태형의 얼굴이 웃겼다. 새끼. 내일은 교복 입겠네. 책가방도 매고. 학생다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기대됐다. 우리 학교 교복이 예쁜 터라 핏이 잘 서는 애들이 입으면 진짜 멋있다. 그중 하나인 김태형이 잘 안 입고 다니던 교복을 입을 때면 여자애들이 얼굴이 빨개져선 발만 동동 굴린다. 김태형 싫어하는 애들도 교복을 입은 날이면 아무 말 없다. 내일 강다연도 아무 말 못할 걸 생각하니 괜히 기쁘다. 으하하. "나도, 나도 다 썼어." "못 미더워, 넌." "너무해. 그래도 다른 애들은 그냥 읽어 줬으면서. 차별하는 거 나빠." "토 나오니까 말투 치워." "뭐 새끼야. 내가 너한테 그랬냐?" 역시 박지민의 끼는 남자를 제외한 여자한테만이구나. 완벽한 이성애자네. 보다못한 전정국이 인상을 확 구기니 박지민도 인상을 확 구겨버린다. 나는 혀를 츳 차자 박지민의 관심이 다시 나로 돌아왔다. 동시에 변하는 표정에 조금 놀라 어깨를 흠짓 떨었다. 귀여운 건 죄가 아니잖아요. 어? 나는 반성문을 다시 봤다. 뭐라고……? 다시 봐도 글자는 똑같았다. 귀여운 건 죄가 아니잖아요. 귀여운 건…… 죄가 아니잖아요. 이게 진짜 지금. 민윤기가 내 표정을 보고 박지민의 뒷통수를 빡, 쳤다. 박지민이 숙여진 머리를 금세 일으키곤 끙끙 앓았다. 00아, 내 머리 좀 쓰다듬어 주면 안 돼? 민윤기가 쳐서 아파. 아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박지민이 내게 말했다. 나는 나에게로 내밀어진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쳐다보다가, 냅다 후렸다. "아, 아파!" "나는 강당에서 여자애랑 입술 부빈 것도 이해가 안 가. 어떻게 여자애 순결을 못 지켜 줘? 걔 첫 키스였대, 미친놈아. 처음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래? 생각하니까 화가 나네." "헐, 처음이었어? 나 완전 나쁜놈이잖아!" "잘 아네. 그러니까 반성문 써. 여자애의 첫 키스를 뺏어가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쓰지 말고." "야, 넌 뭐 여자애가 그딴 얘기를 남자애한테 하고 있어." "아냐, 이건 내가 잘못한 거야……. 처음인지는 몰랐어……." "병신아. 그 얘기가 아니잖아." 민윤기가 답답하다는 듯 조금 거칠게 반성문을 놓았다. 박지민은 정말 충격인 듯했다. 왜 저런담. 첫 키스 빼앗은 게 한두 번이 아닐 텐데. 예상대로 깔끔히 잘 쓴 민윤기의 반성문에 감탄하고, 의외로 잘 쓴 전정국의 반성문에 또 감탄했다. 결국 꼴찌로 반성문을 낸 박지민이 책상 위로 축 늘어졌다. 나는 널부러진 반성문들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가방을 챙겼다. 사실 안에 들어 있는 건 왜 비싼지 모를 펜 한 자루, 예쁘지만 더럽게 비싼 메모지, 색이 옅은 립밤 하나가 전부였다. 덜커덩. 서로가 부딪혀 생긴 소리를 무시하고 가방을 대충 한쪽 어깨에 걸쳤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문지기 두 명에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문지기들은 나의 가방을 보고서 상담실 안을 쳐다봤다. 뭘 봐. 지금 날 못 믿는 건가. 눈썹 하나를 들어올렸다. "다 끝난 거야?" "내가 이 새끼들한테 시달릴 때 너 주사위 굴리더라? 게임은 다 끝난 거야?" "……아니, 너무 심심해서." "변명 꺼져. 야, 너. 너는 캔디나 팡팡 터뜨리던데? 어? 니들이 문화찐따야? 요즘 누가 그딴 게임이나 해." "내가 클로버 보내 줄 테니까 화내지 마……." "……나는 하트 줄게." "좋아. 가 봐." 뭔가 삥을 뜯는 게 아니라 클로버와 하트를 뜯어내는 일진이 된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문제아들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문제아끼가 옮나? 막 바이러스처럼? 그런 거 있잖아. 숨만 쉬어도 감염되는 거. 그런 건가? 나는 오늘 하루 했던 생각 중에 가장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에 갈 때가 돼서 그런가. 나는 괜히 늘어지는 기분에 머리를 손으로 빗어내렸다. 운동장에는 네 명이 있었다. 야, 가라! 내 외침에 그 네 명이 고개를 뜨덕이며 갔고, 교문에 있던 두 명도 가방을 맸다. 교문에도, 운동장에도 운동부 애들은 없어졌다. 저어기, 매점에서 키득대는 애 둘 빼고. 당연히 내가 교문으로 향할 줄 알았던 남자애들은 내게 어디 가냐 외쳤다. 나는 그 말을 다 무시하고 매점쪽으로 갔다. 어쭈. 과자도 까먹었어, 이 사람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야. 내가 온 줄도 모르고 킥킥댄다. "……어이." "엄마악!" "어, 끝났어? 고생했네." "좀 어이가 없네요. 오빠들이 운동부예요? 나도 처음에는 운동부인 줄 알았다고요. 학생부라니 어이가 없잖아." "뭐 어때. 사랑하는 동생을 위한 보호지." "웃기지 마요, 진짜. 그냥 나 놀리려고 그런 거면서." 매점쪽에서 후문을 지키던 사람 둘은 선배였다. 운동부도 아닌, 학생부 선배 두 명. 따라온 다섯 명이 어리둥절해 했다. 특히 민윤기는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인상을 팍 썼다. 귀찮은 거겠지. "반성문은 제대로 썼어? 걱정되네." "제대로 썼어요." "……반성문을 왜 제대로 썼는지 물어보는 거랑 걱정한다는 게 기분이 상당히 나쁘네." 김태형이 중얼거렸다. 못 들었을 리 없는 두 선배는 김태형을 조금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다. 김태형은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것처럼 그냥 두 선배와 눈을 빤히 봤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기 싸움인 거야, 귀찮게. 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을 찾다,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는 좌절할 뻔했다. 시발. 소꿉친구라고 믿고 싶지 않은 놈과 선배 둘의 기 싸움. 이거 자살해도 되는 타당한 이유일까. "윤기도 있었네. 내일은 머리색 바뀌겠다, 그치." "아. 네." 김석진이 화제를 돌려 민윤기와 말을 나눴다. 민윤기가 되도 않는 철벽을 쳐서 그렇지. 나는 넋놓고 있다가 박지민이 조그맣게 흘린 신경 쓰고 지랄, 이라는 문장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00이는 전혀 모르겠는걸! 하하! 하하하……. 시발. 같은 학년 친구에게 으르렁거리는 상황이었다면 내가 어느 정도 중재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상대는 선배였다. 그것도 결코 만만치 않은 선배 두 명……. 아아, 골이야. 내 삶은 어쩜 이렇게 평탄하지가 못하나. 내 팔자인가. 받아들여야 하나. 이 시발. 너무 억울하잖아. 나는 내 옆에 있던 전정국에게 냅다 친한 척을 했다. 조금 밀착해 등을 떠밀었다. 가, 씨발. 내 영문 모를 행동에 발악하던 전정국에게 낮게 속삭였다. 네가 사고치는 거 내가 다 수습해 줄게. 빌어먹을 전정국은 그제서야 애들에게도 훠이훠이 손짓을 하며 가자 말했다. 쓸데없이 영리한 자식.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하던 선배들에게 어색한 눈웃음을 짓고 먼저 가 보겠다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야, 네가 왜 인사를 그렇게 해! 김태형이 또 난리였다. 김남준의 눈빛이 번뜩였다. 나는 이들의 '막 나감'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대충 김남준과 김석진 하면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다 알았다. 워낙 수재로도 말이 많은 선배들이라서. 선생님들이 애지중지하는 건 당연했다. 우리 학교의 위상을 높여 주는 존재라나. 두 선배가 고작 저런 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을 만들어내지 않을 건 잘 알지만, 싸움은 피하는 게 나았다. 어떻게 보면 불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판을 크게 벌려 소문이 퍼지는 일이 생긴다, 그러면 일단 목이 간당간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틈 사이에 내가 끼어 있다는 것도 그렇고. 안 그래도 친구 사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잘나가네. 학교도 잘 나가고, 선배들한테 무례한 짓도 잘 나가. 아주. 나는 김태형과 민윤기를 때려 주고 싶었다. "너네 자꾸 이딴 일 만들지 마." 정호석이 내 눈치를 힐끔 봤다. 그러다 내가 말하는 '너네'에 자신이 포함이 안 된다는 걸 알아차리곤 다시 정면을 봤다. 김태형이 끽 걸음을 멈췄다. "아무 짓도 안 했어." "나도 대답밖에 안 했어." 김태형과 민윤기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아주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걸었다. 이쪽 일에 아주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치켜떴다. "너네 때문이야." "아니야." "억지야." "시비 건 게 누군데 그래." "그건 김태형." "야!" 뭐, 새끼야. 뭐뭐. 민윤기와 김태형이 투닥댔다. 둘이 그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나는 배려라곤 하나도 없는 남정네들의 발걸음에 맞추려 노력했다. 옆에 있는 김태형이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또 시비 걸고 난리야, 이게. 그래도 내 팔을 잡아끌어 발걸음을 맞춰 주는 걸 보고 가만히 있었다. 이제야 좀 편하네. 조금 풀린 표정에 말을 할 기회를 보고 있던 정호석이 치고 들어왔다. "니네가 친구가 맞긴 맞나 보다." "누가 친구야, 씨빨." "……야." "……너 왜 반응이 그러냐." 아. 이런. 나도 모르게 내 입이 먼저 반응했다. 민윤기와 김태형이 나를 똑같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른 건 다 괜찮아도 유독 친구 사이를 부정하면 크게 반응하는 둘을 잊고 있었다. 나는 정호석에게 질문부터 빨리 다시 하라고 눈치를 줬다. 그러나 정호석은 빵 터져 허리를 굽히며 웃고 있는 중이었다. 염병.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내가 주는 눈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웃고 있었다. 어이가 없네. 나는 코를 훌쩍였다. 민윤기와 김태형은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친구지. 그럼. 우리가 언제부터 알았지, 친구들아?" "가식 떨지 마." "오키." 가식인 거 티 났음 말궁. 나는 웃음이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보면서 먼저 자리를 뜰까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다 우리 집 근처에 살았다. 이 주변에는 신기하게 두 아파트 단지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신기할 일은 아닌가. 사실 내가 그런 걸 잘 몰라서. 아무튼. 전정국은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로 104동, 김태형은 112동이었다. 정호석과 박지민, 민윤기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나와 휘적휘적 걸으면 2분 정도 걸리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다. 민윤기는 106동이었다. 정호석이랑 박지민은 무려 같은 동인 102동이었다. 이건 다 매 주말마다 이들을 마주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거였다. 우리 학교, 그것도 이 다섯 명이 나와 가까이 산다는 건 무척이나 짜증 나는 일이었다. 씨발. 지금까지는 거지 같은 몰골로 안 마주쳐서 다행이지. 아. 거지 같다. 지난번에 전정국이랑 만나서 어찌나 놀랬던지. 쟤가 왜 104동이고 내가 왜 105동인지 진짜 이해가 안 갔다. 엄마한테 자취 얘기를 꺼냈다가 내쫓길 뻔도 했다. 내 인생이란. "피곤하니까 집은 조용히 가자." "피곤한 게 우리 때문은 아니겠지, 설마." "존나 맞으니까 닥치고 가자, 제발." 피곤해.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내 말에 전정국이 표정을 썩혔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조금 늦췄다. 아, 개피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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