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윤기 × 스폰서 00 A. "어제 만나 주지도 않고 한다는 게 이거야?" 000은 갑작스레 회사를 찾아온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나는 뻔뻔하게 000 앞에 서서 말했다. 나한테 화를 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비록 못 내는 게 아니라 안 내는 거지만. "또 무슨 일이야." 000은 어른이었다.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들었고, 세상을 살아갈 줄 알았다. 사람을 다루는 요령과 시원시원한 성격. 그것들은 어른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었다. 그리고 그런 000은 항상 나를 달래기 바빴다. 민윤기, 라고 부르기보다는 윤기야, 라고 불렀다. 그저 말을 하는 것보다는 눈을 맞추거나 품에 안아 조곤조곤 말을 했다. 빌어먹게도 나는 그런 거에 쉽게 풀렸다. 이쯤이면 달래 주는 게 아니라 가지고 노는 수준이지. 이를 아득 물었다. 앞에서는 내 말만 듣는 척, 나만 예뻐해 주는 척. 뒤에서는 단지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나 같은 애들이 수두룩. 이게 날 가지고 노는 거 아니면 뭔데? 나는 얼마 전에 분홍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이것도 000이 좋다고 한 색. 000이 손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더 화가 치밀었다. 앉아 있는 000에게 내가 끼친 건 단 하나도 없는데, 나를 돌아보면 온통 다 000 투성이라서. 언제 이렇게 000이 입혀졌는지 몰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000에게 빠져 버린 내가 한심해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던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들을 바닥으로 밀치고 몸을 숙여 그대로 000의 입술을 머금었다. 짜증 나. 짜증이 난다고. B. "일 그만해." "이 프로젝트에 들어갈 제작비가 네 작업실 땅값의 다섯 배야." "그래서, 그게 나보다 중요해?" "땅값이라고 했지 너라곤 안 했을 텐데." "그러니까 일 그만하고 나랑 놀아." "스케줄 없어? 왜 매일 회사에 붙어 있어." "키스할래." "야." C. 소속사의 권유였다. 내가 넘어야 할 산을 넘지 못해 지쳐 있는 상태에서, 회사는 나를 밀어 줄 거대한 이동수단, 아니. 그 산을 깎아 버릴 만한 파급력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게 너, 000이었다. "내가 일정이 빠듯해서. 미안해요. 방금 나도 영국에서 막 왔거든." "……아, 네." "얘기는 들었죠? 그 스폰이라는 거. 근데 나는 몸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를 원하는 것도 아니라서요." 여기서부터 나는 진즉 눈치챘다. 000 이 여자, 나 못지 않은 또라이다. 10분 정도 늦은 약속을 일정이 빠듯하다는 말 하나로 정리하는 것도, 오묘한 반존대도 그렇고. 나는 일그러진 눈썹을 피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리가 계약한 뒤에도 뭐 달라질 건 없어요. 얼굴 비추고 싶음 비추는 거고, 꼴보기 싫음 안 보는 거고. 사실 서류 하나만으로 묶여진 거지. 나는 당신에게 투자할 거예요. 당신은 받으면 되는 거고요. 고맙다는 표시는 굳이 필요 없는 건 알죠? 당신도 이런 거 알고 한 걸 테니까. 어차피 소속사 때문에 한 걸 테니까 잘됐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 "그러면 따로 보는 건 없는 건가요?" "아마도. 나는 엄청 바쁠 예정이라. 당신 스케줄도 없는 건 아니던데요. 그냥 더 성장하고 싶어서 날 택한 거잖아요? 아아, 잠은 많은 편이에요? 내가 욕심이 많아서 웬만한 스케줄은 다 넣어 주고 싶어서." "……잠은 그다지 많진 않아요." "다행이네요. 으음, 맞아. 라디오 좋아한다 그랬죠. 언제가 좋아요? 새벽?" "……네." "공백기이기도 하고 괜찮다. 스케줄은 매니저 통해서 들어요. 그럼 일어날까요? 이게 000과의 첫 만남이다. D. "그만 만져. 일할 거야." "넌 뭐가 그렇게 바빠서 만지지도 못하게 해." "내가 원래 영국에 남아서 있었어야 하는데 갑자기 들어온 바람에……." "안 그래도 궁금했어. 왜 들어온 거야?" "우연히 한국 프로그램을 봤는데 내 스타일인 애가 랩하고 있길래." "……하?" "키스는 안 돼." "그럼 더한 건 되나." E. "김남준이랑 계약했어?"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000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이렇게 빨리 내 귀에 들어갈 줄은 몰랐겠지. 하. 조소를 흘렸다. 그 좆 같은 비즈니스. 안 들어도 변명은 뻔했다. 아니, 이제는 변명조차 하지 않을 거다. 한숨을 쉬었다. 000 너는 또 이렇게 예뻐서. "어떻게 해야 하냐, 내가." 000이 눈을 감았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게 만들었다. 숨결이 눈 언저리 어딘가에 닿았다 떨어진다. "나만 사랑해 달라고 했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F. "요즘 계약하신 분 없다고 들었는데." "……뭘 말씀이신지." "모르는 척하시 마시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랑 계약해요." 3년차,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연차. 나는 그냥 벽에 가만 기대 둘은 바라봤다. 쟤 소속사랑 싸웠다더니 진짠가. 아까 보니까 매니저랑도 딱히 좋은 사이는 아니던데. 000은 눈썹을 들었다 놓더니 픽 웃었다. 나는 괜스레 혀로 입술을 흝었다. 000이 연예계쪽에서 이렇게 유명인사인가 싶어서였다. 물론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긴 해도 이렇게 바로 알아볼 줄은 몰랐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이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냐, 네가. 동시에 걱정되기도 했다. 방송국쪽에만 오면 엄청 시달릴 것이 눈에 보였다. 종종 회사로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고. 아아, 나는 000쪽이 먼저 컨택을 제안한 게 다행이었던 건가. "저 나름 괜찮잖아요. 아직 앞길도 창창하고, 팬덤도 크고 있고요." "그게 다예요?" "네?" "그거 두 가지만 믿고 나한테 계약하자 그런 거예요? 그럼 좀 실망인데." 000이 습관처럼 콧등을 살짝 찡그렸다. 패기 있게 계약을 요구하던 남자는 표정을 조금 굳혔다. 아니, 굳었다. 쟤 완전 굳었다. 병신 아니야, 저거. 진짜로 해 줄 줄 알았나 본데. 000이 그렇게 또라이로 보이나. 아님 정말로 자신이 있었던 거야? 헛웃음이 나왔다. "내 마음에도 안 들고, 소속사도 답 없고, 끼가 있지도 않고." "……."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 "나 그리고 슈가 같은 스타일 좋아해요. 근데 그쪽은 아니잖아." "……." 가 볼게요. 이쪽으로 오는 000과 눈이 마주쳤다. G. "……아. 미안." "왜." "자국 남았다, 목에." "……." "오늘 친척이랑 식사한다며. 괜찮아?" "뭐 어때. 남자 있겠구나 하겠지. 됐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 "감동받았냐." "……아니. 또 반했네." "이왕이면 반성하길 바랐는데. 글러먹었군." "……." "다음부터는 키스마크는 좀 자제하지, 그래도?" H. "내가 말했잖아. 나만 사랑해 달라고." "또 왜.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그래." 000이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말했다. 이제는 스케줄까지 빼먹고 회사를 들락날락거리는 건 딱히 놀라지 않은 일인 듯했다. 익숙해졌겠지, 충분히. 나는 조금 볼을 부풀렸다. 조금이라도 연하남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왜 다른 애들이랑 계약 파기 안 해?" "……푸흐, 귀엽게 보이고 싶은 거라면 성공했네." 어리광이야, 그거? 000이 턱을 괴며 씩 웃었다. 아, 이렇게 또 넘어가나. 이렇게 능구렁이같이 빠져나가는 널 알면서도 지는 내가 바보다. I. "화보 찍어?" "응." "혼자?" "……아니. 여자랑." "아아, 누군데?" "신인 연기자래." "……지금 네가 어떤 클래스인데 신인?" "……." 000 너는 무슨 그런 걸로만 화를 내냐. J. "어디 갔다 오는데 이렇게 늦었어." "계약 파기하러." "……어?" "어쩌겠어. 불안해 하는 어린 애인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진짜야? 진짜로 파기했어? 다?" "다는 아니지만 뭐 거의? 내일도 계약 파기건 잡혀 있으니까 바쁠 거야. 괜히 기다리지 말고 집 들어가. 알았지." "……." "……민윤기, 너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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