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06
W. 오알
" 와, 비밀번호 힌트까지 얻어냈다고? "
" 한 씨가 어찌나 의심이 많은지 살살 구슬리고 협박하고 심지어 고문을 취해봐도 꿈쩍을 안 했었는데, 진짜 대단하다-. "
나와 한 씨의 대화로 쏟아진 정보들에 연신 감탄하는 그들이었다. 윤기의 호출에 본부로 모인 그들은 빠르게 작업할 준비를 했고, 윤기 또한 내게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철석같이 나를 믿고있는 한 씨 때문에 사건은 꽤 진전되었지만, 여전히 명확한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종이쪽지를 천천히 펼쳐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내 손 안의 종이조각으로 꽂혀들었다. 상당히 날려 적어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정가운데에 큼직하게 글이 써져 있었다. 나는 눈으로 띄엄띄엄 글자를 읽어내렸다.
' 희미하게 가려놓고, 보여주지 않으려 애썼다
때를 기다리며 감췄다
들키지 않으려 누구에게도 뒤를 보여주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끝까지 숨겼다'
모두들 알아보기 힘든 글씨를 읽느라고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정적이 흐르고, 내 손에서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먼저 고개를 들어 그들의 반응을 살폈고, 그들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꼼짝 않고 글씨를 뚫어져라 읽고 있었다.
" 아오, 이 영감 시를 써라 시를 써. "
한참 종이를 들여다보던 호석이 느닷없이 소리치며 자신의 머리를 짜증스럽게 헝클어뜨렸다.
겨우 네 줄의 짤막한 문장들이었지만 상당히 애매모호한 묘사에 쉽사리 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얼 가리키는 건지, 무엇에 대한 설명인 건지 예측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알아차릴 줄 알고 이런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을까.
다들 큰 소리로 투덜거리면서 노트북들을 켜고, 두터운 문서뭉치들을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쌓으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 일단 관련되어 보이는 건 싹 다 뒤져, 하나도 남김없이. 놓치면 뒤진다. "
윤기는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고, 무전을 받으러 방을 나갔다.
그와 동시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들의 노트북 안에는 온통 복잡해보이는 숫자 창들이 가득했고, 여기저기서 에러음이 들려왔다. 처음 보는 광경에 나는 넋을 잃고 그들을 구경했다. 쉴 새 없이 자료는 테이블 위에 쌓여가고, 바쁘게 고개를 움직이며 노트북과 문서를 번갈아보며 뭔가를 입력하는 능숙한 모습에 그 쪽 팀이 이런 일 전문이라는 게 확실히 실감 났다.
잠시 나가 있던 윤기가 방문을 벌컥 열고는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복도로 걸어나오자 윤기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 위쪽에 같이 가봐야 할 것 같아. 아마 오늘 일 때문인가 본데. "
" 네에? "
생각보다 내가 훨씬 크게 당황스러워하자, 윤기 또한 적잖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 미안해, 나도 안 된다고 거듭 말씀드렸는데도 꼭 데려오라고 하시더라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
위층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층이 올라갈수록 내부장식들은 더욱 더 호화스러워졌다.
평소였으면 또 넋을 놓고 구경했을 테지만, 지금은 몰아치는 긴장감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말랐던 식은땀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30분 간격으로 몸이 뻣뻣해질 정도의 긴장을 반복하니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나를 흘낏 흘낏 뒤돌아보던 윤기가 복도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멈춰섰다.
나는 눈을 느릿하게 뜨고는, 우뚝 멈춰선 그를 올려다봤다.
윤기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그의 행동에 잔뜩 차가워진 내 손이 윤기의 손 안으로 덥석 들어갔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깜박거리자, 윤기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 긴장 풀라고. "
나는 잠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그는 그 행동이 긴장 푸는 데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않고 오히려 심장박동수만 증가시킨 걸 알고 있을까.
커다란 문 앞에 있던 경호원들이 윤기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아무런 통제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윤기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윤기는 여전히 내 손을 꽉 쥔 채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은 이 건물 로비만큼이나 넓었지만 매우 어두웠다. 햇빛 한 줄기 새어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컴컴한 방 안을 윤기는 능숙하게 가로질러갔다. 비록 어두워서 방 안을 한 눈에 볼 수는 없었지만, 언뜻 보이는 벽에 반듯하게 걸린 그림들이며 이쪽저쪽에 놓인 커다란 조각상들로 이 방이 얼마나 호화스러운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행여나 뭐라도 건드릴까 조심조심 걸었다.
윤기를 따라 방 깊숙이 좀 더 들어갔다. 조명 하나만이 불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한 남자가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상당히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나이는 꽤 들어보였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매서워서 도저히 그와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윤기가 그에게 짧게 목례하고는 입을 떼었다.
" 보스께서 데려오라고 하셨던.. "
" 그래, 이 아가씨군. "
그가 윤기의 말을 자르고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의 얼어붙을 듯한 시선이 나를 향했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내가 한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마저 놀랍도록 차가워서 또 한 번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 혼내려고 부른 게 아니니 너무 굳어있지 말게. "
그가 여전히 나를 향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말했다.
" 덕분에 일이 많이 진전되었다고 들었는데 앞으로도 더 힘 써주길 바란다고 말해주고 싶었네. 젊은 아가씨가 그동안 한 씨 밑에서 고생이 아주 많았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번 건이 우리 조직 기밀문서와 직결되어 있어서 말이야, 잘만 해준다면 아가씨 사정을 생각해서 앞으로의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는 아무 말이 없는 나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낮게 웃었다.
" 허, 말수가 상당히 없구먼. 일단 알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네. 아가씨만 나가보게. "
윤기가 잡고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의자 위에 앉아있는 그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는 도망치듯 빠르게 걸어 방을 나왔다.
등 뒤로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자마자, 참고있던 숨을 바로 내쉬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나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을 뿐인데도 무서워서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그 특유의 무겁고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문 안에서는 희미하게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경호원들이 워낙 문 앞을 단단하게 지키고 있는 통에,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어서 잘 들리지가 않았다.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복도의 맞은 편 벽에 기대어 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쿵-. 무겁게 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툭툭 바닥을 향해 구르던 발장난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윤기가 얼굴을 찡그린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윤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벽에 기대 서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이 쪽으로 걸어왔다.
" 또 먼저 내려가서 길 헤매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잘 기다리고 있네. "
그 말에 얼굴이 바로 붉어지는 나를 보면서 윤기가 소리없이 웃었다. 나는 괜스레 부끄러워져 얼른 걸음을 부추겼다.
복도에는 잔잔한 음악소리만 흐르고 있었다. 오늘 하루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윤기와 나란히 복도를 걷고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말없이 옆에서 걷고 있던 윤기가 갑자기 몸을 틀어 내 쪽을 보면서 말했다.
" 배 고프지 않아? "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하루종일 생각도 나지않던 밥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 네, 완전요. "
" 뭐 먹고싶은데?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한껏 신난 표정으로 뛰어가 앞장섰다. 그리고 서둘러야 한다며 그를 재촉했다.
다짜고짜 윤기를 데리고 온 곳은 거리 어딜가나 있을 법한 평범한 밥집이었다. 나는 들뜬 발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를 골라 앉았다. 윤기가 두리번거리면서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섰다.
" 뭐야, 여기 오려고 그 야단을 떨었어? "
윤기가 픽 웃으며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 여기 진짜 어렸을 때 엄마아빠랑 자주 왔었거든요. 근데 비서 일하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여기 못 왔었어요, 비서실에서 오래 나가있으면 안되거든요. "
" 그럼 이렇게 나와서 먹는 것도 진짜 오랜만이겠네. "
" 마지막으로 나와서 먹은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니깐요. "
나는 부러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컵에 물을 따라 윤기와 내 앞에 놓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기다리는 동안 굉장한 배고픔에 시달렸던터라, 나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바로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한참을 먹고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음식의 반 이상을 먹어치운 나에 비해 아직 3분의 1도 다 먹지 못한 윤기의 앞접시가 보였다.
윤기가 빤히 내 먹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정신없이 먹었던 게 민망하기도 하고, 너무 빨리 먹어버린 것 같아 신경쓰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먹는 속도를 현저히 줄이고는 아주 천천히 음식을 씹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에 띄게 느려진 내 행동을 지켜보던 윤기가 웃지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돌렸다. 간신히 웃음을 삼킨 그는 아직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 마음 놓고 먹어, 그냥 잘 먹길래. "
아까전부터 은근히 놀리는 듯한 그를 살짝 흘겨보면서 대답했다.
" 전 일할 때 먹던 편의점 음식 빼고는 다 좋아하고 잘 먹어요, 전부 다요. 물론 당근도 잘 먹고요. "
소심한 복수라면 복수였다. 나는 어제 아침식사에서 당근을 골라내던 여느 편식쟁이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당당한 표정과 함께였다.
윤기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두 손을 들었다.
" 알겠으니까 많이 먹어, 됐지? "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장난스럽게 내 물컵을 윤기의 컵에 짠하고 부딪혔다. 내가 한 방 먹인 기념이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윤기는 가득 채워져 있던 컵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입가를 닦으며 씩 웃는 윤기를 가만히 봤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집에 온 첫 날부터 사적인 감정으로 데려온 것 아니라고 선 딱 긋던 남자랑은 더더욱. 하지만 지금 나는 그와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음 어딘가에서 어느새 피어오르고 있는 이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척 나를 들뜨게 한다는 것에서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행복한 와중에도, 내 앞에 앉아서 내 눈을 똑바로 보고있는 이 사람이 갑자기 내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할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섣불리 뭐라 말하지 못하고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냥 속으로만 말했다. 내 옆을 가차없이 떠나던 지금까지의 주변사람들과 그 쪽은 좀 달랐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애매한 관계라도 좋으니 부디 남아있어만 달라고.
문을 열자 여전히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어느새 세 배로 불어나 있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자료의 양에 나는 깜짝 놀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다들 나를 향해 간단한 눈인사만 건네고는 다시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나는 계속 구경하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주춤주춤 테이블로 다가가 서류철 하나를 집어들었다. 호기롭게 집어들었던 처음과는 달리, 잔뜩 써져있는 기호와 숫자들에 나는 이내 당황하고 말았다.
옆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태형이 내 손에서 서류철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 가서 쉬어. 오늘 그 정도 건 수 올렸으면 됐어. "
" 아니, 근데.. "
우물쭈물하고있는 내 등을, 뒤에 서 있던 정국이 가볍게 떠밀었다.
" 의자에서 눈이라도 붙여요. 또 퀭한 눈으로 나 못 잤어요, 하고 광고하지 말고. "
나는 결국 우거지상을 한 채 억지로 의자에 앉혀졌다.
확실히 피곤하긴 했는지 머리가 닿자마자 눈이 감겨왔다. 예전같으면 상상도 못할 스펙타클한 삶을 사는구나, 진짜.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정말, 정말 깊은 잠이었다.
꺆!!!!!!!!!
갑자기 독자분들이 많이 늘어서 전 넘 행복합니다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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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마음에 허겁지겁 준비해왔네요
여러부뉴ㅠㅠㅠ진짜 고마워요♡
[암호닉]
꾹꾸기 / 열렬히 / 삐삐까 / 현기증 / 호비 / 챠이잉 / 주222 / 입틀막 / 연서 / 태태요정 / 굥기야 / 무네큥 / CGV / 콧구멍
빠진 분 말씀해주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