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여왕 효과
; 내가 기억하고 있는 너
네가 기억하고 있는 첫 만남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첫 만남과 다르다.
내가 기억하고 너와의 첫 만남은 학기 초의 급식실이었다. 많은 학년이 모여서 밥을 먹던 터라 소란스러웠던 내부에서 유독 조용하게 밥만 먹던 너를 보았다. 짝수가 맞지 않은 것인지 밖으로 툭 튀어나온 너는 너의 친구들과 한마디의 대화도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 물론 너 말고도 툭 튀어나온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 아이들은 최소한의 대화는 오가고 있었기에 나에게 넌 꽤 눈에 튀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넌 언제나 툭 튀어나와 있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어느새 너의 손에는 책이 들려져 있었고 이미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다가 국물이 책에 튀기라도 하면 온갖 짜증을 다 부르는 듯 인상을 팍 찡그렸다.
"넌 맨날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냐?"
"아니야."
김태형이 내 옆에 찰싹 붙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탓에 급히 시선을 떼어냈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 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김태형은 둘째치고 너와 눈이 마주칠 뻔 했기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싱겁다는 듯 떨어진 김태형을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아직 다 안먹었는데?"
매점을 가는 길에는 항상 너의 반이 있었다. 매점을 갈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네가 있는지 궁금해하며 지나가는게 습관이 되었다. 너는 항상 책을 읽고 있었고 항상 손가락은 입가에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난 너의 행동이 궁금했다.
3교시가 끝나고 김태형에게 매점을 가자고 신호를 보내자 뾰루퉁해진 김태형이 입을 열었다.
"나 용돈 끊겨서 돈 없어."
"… 내가 사, 사. 빨리 일어나."
그 때부터 김태형과 돌아가면서 매점 비용을 냇던 것 같다. 그렇게 3월이 지나가고 벚꽃이 지며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을 때 본격적인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그 탓에 매점을 가는 건 택도 없는 일이었고 기말고사에만 매달렸던 것 같다. 마지막 시험 날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을 마치고 가방을 메었다. 넋이 나간 김태형을 이끌고 반을 나와 계단으로 향하고 있을 때 쯤 무언가가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복도 한 가운데 쓰러져있는 모습에 놀라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자 너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교를 하던 애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몰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어떤 여자아이 손에 들린 얇은 가디건을 손에 들었다.
"잠시만 빌릴게. 김태형 업혀봐."
너의 허리에 대충 둘러둔 가디건은 겨우 너의 허벅지나 가리고 있었다. 양호실에 천천히 눕히고 이불을 덮고 나서야 의자에 조금 편히 앉았던 것 같다. 같이 뒤따라온 김태형은 너와 나를 번갈아보더니 무슨 의도인지 '올-'을 외치고선 가방을 들고 떠나버렸다. 아무렴 어때.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너를 보다가 배 위에 올려져있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손가락이 입가에 맴돌던 이유를 그 때 알았다.
"오늘은 공부하러 안 가봐도 돼?"
"괜찮아요. 오늘 시험끝났는데 뭐하러 공부를 해요."
양호실 선생님과 대화를 오가고 있을 때 이불의 부시럭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네가 있었다. 일어났네. 어리둥절해 보이는 모습에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어보이고선 양호실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은 너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아직도 상황이 판단되지 않았는지 두리번거리던 너는 무언가를 보고선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선 이불을 걷어내려던 너는 너의 손가락을 보고선 다시 의아해진 표정으로 바뀌었다.
"손톱이 아주 너덜너덜 하더만."
의아해보였던 너의 표정은 금세 울상으로 변해버렸다. 한참을 너의 손톱을 바라보던 네가 고개를 팍 들던 탓에 놀란 마음을 채 누르지도 못한 채로 마주친 눈에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목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피하자 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그리고 너는 무슨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을 치듯 양호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게 네가 기억하는 나와의 첫만남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다음 만남에서 너에게 내가 그렇게 반가운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아채고 말았다. 너의 이름을 알았고 네가 양호실에서 나를 봤을 때와 다른 눈빛의 너를 알았을 때 나는 그 때 무슨 생각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
***
그 이후 달라진 것은 나의 행동이 아닌 너였다. 예전처럼 복도를 지나면 반에서 책을 보던 네가 어느 날부터 복도에서 책을 읽고 있었음을. 그리고 한동안 보이지 않던 네가 다시 급식실에 나타난 것을. 그리고 항상 점심을 먹고 내가 찾아가던 길이 아닌 벤치에서 네가 앉아있음을. 내 머리 속 물음표가 한가득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친구들과 점심 축구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내 앞을 가로막은 여자아이는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선 음료수를 건네었다. 벌써 세번째인데 나는 여전히 똑같은 반응이었다. 그 여자아이의 옆을 지나가던 나는 책을 읽던 너의 모습을 잠시 흘려보다 고개를 숙이며 반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도 점심 축구를 하고 종소리가 치기 전에 올라가려던 내 앞을 막은 인물은 예상을 뒤엎은 인물이었다. 네가 나에게 음료수를 건네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너의 행동의 의문을 품은 나는 너의 행동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저번에 도와준거 고맙다고 주는거야. 오해하지마."
"아…."
짧은 탄식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위해 주변을 맴돌았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너의 손에 들린 음료수를 받아들고 알겠다는 뜻으로 그 자리에서 캔을 열었다. 거의 다 마셔갈 쯤 아래를 쳐다볼 때 어느 정도 길어진 너의 손톱을 보고선 캔에서 입을 뗐다.
"손톱 많이 길렀네?"
이젠 밴드가 딱히 필요없을 정도로 긴 너의 손톱을 보고선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달마다 바뀌는 자습실 자리 종이를 보던 나는 가만히 시선을 멈추었다. 김태형이 이번 달 자습에 빠지면서 김태형의 자리에는 내가 앉게 되었고 원래 내 자리에 앉게 된 인물이 너였음을. 김태형과 자습시간에 논다고 잔뜩 해놓은 낙서가 스치듯 지나갔다. 자습실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교무실로 들어간 나는 매직블럭을 받아 자습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우개로 내 자리의 낙서를 지우고 있는 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에 들린 매직블럭을 가방 속으로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자습시간 종이 치고 나서야 내 자리로 돌아갔다. 깨끗하게 지워진 내 자리를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문제집을 바라보던 너를 건드렸다.
"저기 혹시 지우개 있어? 지우개를 잃어버려서."
새까맣게 변한 너의 지우개를 보니 괜히 웃음이 터져나왔다. 겨우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웃음을 참아냈다.
"낙서 안 지워도 돼?"
"어?"
"선생님한테 말하면 낙서지우는 스펀지 주시던데."
당황한 표정의 너는 입술을 꽉 깨물곤 내 손에 들린 지우개를 낚아채듯 가져가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고개를 푹 숙이고선 한번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너는 자습 종료시간이 되자마자 발에 불이라도 붙은 것인지 후다닥 뛰쳐나가버렸다. 너의 행동에 내가 무언가 잘못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 잘못이 무언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짐을 챙겨 나가려던 내 발걸음을 붙잡은 건 너의 책상이었다.
가방에 들어있던 매직블럭을 꺼내 천천히 닦기 시작한 책상은 곧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고 새까맣게 변해버린 매직블럭을 보고나서야 너의 기분을 조금 알 수 있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스펀지를 바라보던 나는 느리게 발걸음을 돌렸다.
***
어느 날 네가 찾아왔다. 그리고선 나에게 대뜸 물었다.
"그 여자애 마음에 들어?"
뜬금없는 너의 물음에 내 머리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누구를 말하는 걸까. 그 인물에 대해서 고민을 하던 나는 한 명의 인물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인물이 떠오르고 나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
이 때 내가 다른 대답을 했다면 우리 사이는 어떤 사이가 되었을까. 그 이후로 네가 나를 다시 보지 않았을까. 아니면 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었을까.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때 나의 대답에 대해서 후회한다.
디스 이즈 뉴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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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정국의 번외가 15회였습니다.
근데 앞과 뒤의 감정변화가 워낙 심한 편이라 한 편에 모두 담기에 무리가 있어
두 개로 나누어 번외로 넘기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