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 마흔살 아저씨 짝사랑하기
w.1억
"헐 나 이거 사고싶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쁘다."
처음으로 애들이 내 가방을 보고 예쁘다고 했다. 나쁘지 않았다. 명품이라면 질색하던 내가 명품보고 부러워하는 애들을 보고 뿌듯해한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게. 관종인가..
"얼마주고 샀어?"
"아, 남자친구가 줘서.. 잘 몰라..!"
"진짜? 대박.. 남자친구가 명품 선물도 줘? 생일선물로?"
"아니..! 그냥..."
"와...내 남자친구는 내 생일선물도 ost에서 시계 사줬어. 근데 네 남자친구는 그냥 선물 주는데 명품백이야?"
"…ㅎㅎ."
한 번도 이렇게 뿌듯했던 적이 없었다. 전에는 거짓말로 남자친구 사줬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거짓말을 하고난 뒤에는 창피해서 집에 와서 숨어버렸는데.
오늘은 너무 뿌듯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유치하다니까.
남들이 남자친구 자랑하면 얄밉고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은 그 얄미운 짓을 내가 하고있다.
술을 잔뜩 마셨다. 평소엔 술 마시면 울면서 토하기 바빴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계속 웃음이 나왔다.
"잘가~ 다음에 또 보자."
내 입으로 직접 저 친구들에게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했다. 빈말이도 이런 말은 하기 싫었던 내가 직접.
집에 가는 길에 아저씨가 떠올랐다. 명품백을 하늘 위로 들고선 한참을 보았다.
까만 하늘에 있으니까 더 예뻐보이네. 내 생각하면서 이거 사가지고 왔을 아저씨 생각하니까 또 웃음이 나왔다. 내 생각이라곤 하나도 안 할 것 같은 사람이 말이야. 평소에 먼저 연락 한 번 안 하면서.
집에 걸어가면서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전화해도 안 받기에 끊으려고 했을까.
- 여보세요.
"아, 맞다. 죄송해요.. 까먹었다.. 아저씨 어디 갔었는지.."
- 응.
"……."
- 집 가나.
"네.."
- …….
"집에 가기 싫어서 전화했는데.."
- …….
"오래 걸려요?"
- 주소 보내줄게.
"……."
- 집에서 기다려. 조금 걸려.
어떻게 알고 저렇게 바로 말해준대. 진짜 눈치가 너무 빨라. '알겠어요오..'하고 작게 말하면 아저씨가 '끊을게'하고선 내 대답을 듣고 끊는다.
아저씨 집은 상상했던대로였다. 깔끔하고 딱 아저씨처럼 차갑고.. 마음만 먹으면 아저씨 집 다 둘러볼 텐데.
뭐가 이렇게 찔리는지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거실을 둘러보았다.
아저씨도 소파에 이렇게 앉아서 있었을 거 생각하니까 웃음이 나왔다. 뭔가 주말에 쉬는 날이 오면 가만히 앉아서 tv만 볼 것 같아서 웃겨.
아저씨가 올 때까지 소파에 누워있으려다가 소파에 있으니 왜 이렇게 속이 안 좋은지..
소파에 있던 담요를 끌어다 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아, 술마시니까 좀 졸리네. 아저씨는 보고 잠들고싶은데.
"왜 여기서 자."
눈을 감았다 떴더니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나 잠들었었나보네.
"…소파에서 자니까. 자꾸 아저씨 생각이 나서."
"……."
"소파에 누웠더니 속이 울렁거려서요.. 바닥에 누우면 괜찮더라구요."
"방에 들어가서 있지."
"…아니에요."
"물 한 잔 마실래."
"…아뇨. 졸려요.."
또 눈을 감았다. 아저씨 보니까 기분이 왜 이렇게 좋지. 아저씨만의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수면제 먹은 것처럼 막 더 졸려.
아저씨가 내 옆에 누운 것 같았다. 팔베게를 해주길래 눈을 천천히 떴다가 감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들어가서 자요."
내 말에 아저씨는 오히려 날 깨울 생각을 하지않고 나를 안아주었다.
"……."
그리고선 토닥여주는데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저씨는 아무말도 안 해도,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위로가 되는 이상한 사람이다.
정말 이상하게.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아저씨가 말 없이 나를 위로해주는데 또 그게 슬프다. 정말 이상하다.
일어나니까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확인 했을 땐..
[먼저 출근할게. 직원이 사고친 게 있어서 처리 좀 해야될 것 같아서.]
아저씨랑 나랑은 서로 보고싶어서 문자를 주고받지는 않는다. 정말로 할말이 있을 때나 보내.
근데 이게 또 서운하지는 않아. 아저씨를 믿어서 그런 걸까.
전에는 조금만 답장이 늦어도 나를 좋아하지않나 불안했는데.
아저씨가 없는 아저씨 집에서 씻고 준비를 했다. 대충 있는 적은 화장품들로 화장을 대충 하고선 시간을 봤더니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어제는 궁금해도 참을 수 있었는데. 오늘은 왜 아저씨의 집을 둘러보고싶을까.
뭐..
"애인인데 뭐 어때.."
라는 생각으로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었다. 이상하게 이 방이 제일 궁금했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냥 창고같이 쓰이는 방 같았다. 별 것도 아니네..
책상 위에도 보면 청소를 얼마나 안 했는지 먼지가 쌓여있길래 또 웃음이 나왔다. 집은 깨끗하면서 이 방은 왜 이렇게 오래 비워둔 것처럼 청소를 안 했대.
책상 위에는 큰 상자가 있었다. 볼 생각은 없었다. 아저씨 물건을 건드릴 생각도 없었다. 그게 맞으니까.
아무리 애인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된다고 생각하는데. 근데 왜 나쁜 마음을 갖고 이 상자가 열고싶을까. 열고나서 난 후회를 했다.
"……."
전애인이라는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전애인들의 물건들 까지 가득한 걸 본 나는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가도 상자를 닫아버리고선 방에서 나왔다.
또 떠올랐다. 미련을 남게 한다던 그 여자가. 아프다는 그 여자가 떠올랐다.
출근을 해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미련이 남아서 그 여자의 사진을 갖고있는 거면.
그럼 나는 왜 만나는 걸까.. 또 내가 싫어졌다. 지금 당장 내편이 되어준 아저씨만 떠올리면 되는데. 굳이 생각도 하기 싫은 부분들을 떠올려서 스스로 상처를 만든다.
그래. 결국엔 내가 자초한 일이잖아. 그 문만 안 열어봤어도. 그 상자만 안 열었어도.
한가지 의심이 되면 여러개로 부풀려 생각을 하게 되는 내가 싫다. 며칠 내내 바빴던 아저씨가 조금 미워졌다. 혹시라도 내가 아닌 그 여자가 떠올랐을까.
미련이 남는다고 했던 여자가 하루 이틀만에 갑자기 잊혀질 리가 없잖아.
오늘은 하루종일 아저씨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먼저 출근한다는 그 연락 하나뿐. 더이상 그 어떤 소통도 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해도 되는 건데. 한 번 의심하니까 아저씨가 미워졌다. 의심이 됐다. 안 그러기로 다짐해놓고 이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내가 하는 행동이 질리는 행동인 건 알겠는데. 나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이기적이게 된다.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아저씨와 나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내가 자기 집에서 자기 없이 나갔는데 아무 걱정이 안 되나.
지금쯤이면 퇴근 했겠네. 아저씨의 가게 앞으로 향했을 땐. 가게는 닫았고, 작은 불만 켜놓고 누군가와 술을 마시는 듯 했다.
또 성격이 나와버린다. 안 되는 걸 알면서 아저씨에게 다가가 아저씨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그 여자 때문에 힘들어요?"
"……."
"그래서 그렇게 아직도 물건 갖고있나."
나도 알고있어. 내가 화가난 건 아저씨 때문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그 여자 때문이야. 근데 아저씨한테 화를 내.
내가 화난 걸 알아달라고 유치하게 표현하는 거야.
"미련 있는 사람 물건 갖고있으면 말 다한 거 아닌가요."
"……."
"난 그러는데. 미련 남으면 그 사람이 준 선물들 못버려요. 근데 미련이 없어지면 너무 보기 싫어서 당장은 찢어버리고."
"……."
"아저씨도 그렇다고 했잖아. 미련같은 거 없는데. 그렇게 만든다면서요."
"……."
"몰래 봐서 미안한데. 봐버렸어요."
"나가서 얘기하지. 우리만 있는 거 아닌데."
"……."
뒤늦게 아저씨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보였다. 상관 없다는 듯 눈짓으로 인사를 하기에 덩달아 받아쳐주고선 아저씨와 밖에 나왔다.
그래놓고 난 또 등신처럼 이중인격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저씨한테 뭐라고한 게 뻘쭘해서 비아냥 거리며 말을 하게 되었다.
"죽기라도 한대요?"
"……."
"왜 미련 못버렸는데요."
"……."
"3개월 남았다더라."
쿵- 하고 무언가 내 머리를 무거운 망치로 때리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정말로 내 말처럼 죽을 사람인지는 몰랐지. 내가 아저씨한테 상처를 준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으니까 3개월 뒤면 없을 걔를 떠올리니까 미안해서 떠나지도 못하고 계속 비위나 맞춰주고 있었어."
"……."
"불쌍하잖아. 아직 젊은데 죽을병 걸려서 나 좋다고 난리 치는 거."
"……."
"근데 네가 그렇게 만들었다."
"…네?"
"걔한테 미련 하나 안 남더라."
"……."
"두달이 넘도록 그 방안에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었던 물건들이."
"……."
"널 만나고 하루만에 정리가 돼서 그 상자 안에 담겼어. 아련해서, 아끼고싶어서 둔 게 아니라. 다 버리려고 그런 거다. 며칠 동안 바빠서 집에 오면 바로 잠들어서 버릴 시간이 없었어."
"……."
"걔 흔적을 없애버리면, 걔가 죽고나서 죄책감이 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속이 다 후련하더라. 그래서 너한테 고맙다."
"……."
"……."
"……."
"생각보다 네가 엄청 신경쓰여."
"……."
"거슬려 막."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고갤 들어보면 아저씨도 날 따라서 작게 웃었다.
"오늘도 폭주해서 질렸어요?"
"아니."
"그럼요?"
"나였어도 화났어."
"……."
"쌍욕 박았을지도."
"……."
"걔랑 모든 관계가 끝나면 제일 먼저 말해주려고 했어."
"…창피해요."
"……."
"결국엔 또 혼자 의심하고.. 오해였고.. 다 내 잘못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화부터 낸 게 너무.. 화가 나요."
"……."
"미안해요."
"정말 강아지냐. 물고서 미안하다고 하고."
"……."
"오늘은 내가 먹고있던 간식 뺏다가 물린 거니까. 창피해하지 마."
어이가 없어 진짜.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하루에 한 번이요."
"…뭘."
"연락. 아저씨든 저든.. 꼭 하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이요."
"……."
"어떻게 뭐하냐고 한 번을 안 물어봐요. 연락을 안 해."
"아침에 네가 씹었잖아."
"…아니 그건."
"……."
"그렇기는 한데.. 일단.. 알겠어요."
"뭘 알겠는데."
"친구분이랑 술마시던 거.. 마저 마셔요.. 제가 방해한 거잖아요. 전 집에 가볼게요.. 창피해서 못있겠어요."
"택시타고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거든요."
"그래."
"그 전에 잠시만요.. 여기서 기다려요.."
"……?"
아저씨를 지나쳐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맥주 한모금 마시던 아저씨 친구분이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물음표를 한가득 달고선 말이다.
그럼 난 친구분에게 고개 숙여 말한다.
"죄송했습니다. 아저씨 친구분 앞에서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제가 너무 예의가 없었어요."
"…에? 아, 괜찮아요."
"아저씨 친구분은 처음 뵙는 거라.. 잘..보이고 싶었는데."
"……."
"저 생각보다 그렇게 예의 없고 미친사람 아니거든요. 오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어휴.. 진짜 괜찮다니까."
"……."
"형이 알려줬어요?"
"네?"
"안 알려줬나 아직?"
"……."
"다음에 한 번 같이 밥 먹어요."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선 밖에 나오면, 아저씨가 뭐했냐는 듯 바라보기에 조용히 말했다.
"그냥.. 죄송하다고.."
"……."
"폭주해서.."
"오토바이 하나 사줘야되나."
"…에?"
"ㅋㅋ."
"…뭐래요 진짜."
[점뭐먹]
- ?
- 네?
아저씨한테 갑자기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저런 카톡이 왔고.. 뭔가 싶어서 답장을 보내니 바호 답장이 온다.
[점심 뭐 먹어.]
- 뭐예요. 어디서 배웠어요??? 줄임말???ㅋㅋㅋㅋㅋ
- 저 우동 먹을 것 같아요.
- 실습하던 친구 오늘 실습 끝나서.. 혼자 먹어요 ㅠㅠ
- 회사 앞에 새로 생긴 우동집!
[언제]
-10분 뒤에 점심시간이라. 바로 가게요! :)
그러고선 답장이 없다. 뭐야.. 읽고 씹어?? -_-..
그래도.. 연락 하라니까 또 바로 해주네. 귀엽네 진짜.. 혼자 중얼거리면서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가게에 도착했을까.
"해피야."
분명 아저씨 목소리였다. '해피야' 소리에 정적이 흐르던 가게 안에 사람들이 모두..
아저씨를 보았다. 뭐야 아저씨가 왜 여기있어. 그나저나.. 해피? 놀란 표정으로 아저씨를 보면, 아저씨가 웃긴지 살짝 웃으며 말한다.
"시켜놨어. 와서 먹어."
"…뭐예요."
아저씨 맞은편에 앉아서 빨개진 볼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왜 해피라고 해요..진짜.."
"해피라고 하니까 또 봤잖아."
"아저씨 목소리만 들렸잖아요. 나 말고도 다 쳐다봤는데?"
"얼른 먹어. 배고플 텐데."
"…저 혼자 먹는다고 해서 온 거예요?"
"응."
"…치."
"……."
"완전 감동."
계속 웃음이 나왔다. 어제 폭주한 건 새까맣게 잊고선 말이다. 아저씨도 내가 웃기겠지.
조용히 먹다말고 오늘 서러웠던 걸 아저씨한테 알려주고싶어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선 말했다.
"오늘 완전 어이없었어요. 팀장님이 본인이 실수한 거 괜히 저한테 막 화내는 거예요. 본인도 창피했는지 얼굴 빨개져가지고..
제가 일은 잘 못하는데. 팀장님 보다는 조금 더 잘할 것 같아요. 그만큼 실수도 엄청나게 한다니까요. 어떻게 팀장 됐대.. 생긴 것도 완전 괴상하게 생겼어요. 화장도 괴상하게 하고. 으..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요.
나이도 있는 사람이 저만 보면 맨날 난리. 아무래도 제가 젊어서 부러운가봐요."
"……."
"팀장이 나한테 못된 짓한 것만 몇백개는 되거든요. 내가 이거 나중에 한 번에 다 말해줄게요. 아저씨도 알면 진짜 화날 걸요."
"……."
"근데 여기 우동 짱이다. 그쵸."
"응."
"…국물이 진짜 레전드야."
"……."
"……."
"뭐야."
"……."
"전쟁하러 온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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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뾰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