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일어나.”
“아..시러..”
“아 일어나라고오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날 이렇게 괴팍하게 깨우는 사람은 정재현밖에 없다. 엄마는 등짝 한대 때리고 말지 정재현 얘는 이불부터 걷어내고는 날 쥐고 흔들기 때문이다. 토요일이라 모처럼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 꿀같은 시간을 방해하니 짜증이 올라왔다. 야 나 어제 과제 끝내느라 해 뜨는 거 보고 잤어..(이악물) 베개로 귀를 막고 다시 잠에 들려 몸을 웅크리자, 이번엔 내 볼을 잡고 늘리며 일어나라 소리친다. 이런 미친..
“김여주 일어나라~~~~~~~!”
“..”
“일어나ㄹ..”
“아 아침부터 와서 왜 난리야!!!!! 죽을래!!!!!!!!!!!!!!”
“..너 방금 아침이라 그랬어?”
결국 눈을 뜨며 소리를 빽 질렀다. 예상대로 멀끔하게 날 내려다보는 정재현이 시야에 가득 찼다. 나는 항상 성질을 죽이고 살려 노력하는데 정재현이 그걸 다 망친다. 내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녀석을 노려보자,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 내뱉더니 곧 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여준다. 아직도 아침같냐?ㅋ 정재현이 비웃었다. 환한 빛을 내뿜으며 눈 앞에 놓여진 화면엔 13:01 이라는 숫자가 정갈하게 적혀있었다. ..뭐야...아침이 아니네..ㅎㅎ..
“..지금 한시야..?”
“알았으면 일어나.”
“넌 왜 왔냐..?”
“너 이렇게 퍼자고 있을 것 같아서 왔지.”
눈을 비비며 무겁게 늘어졌던 몸을 일으켰다. 버럭 소리를 친게 무안해져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쩝 다셨다. 왜냐면 정말 퍼자고 있었으니까 할 말이 없기 때문..! 정재현은 그런 나를 보며 두어번 혀를 찼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어제 새벽 네시 정도에 잤으니까 거의 아홉 시간을 잔거네~! 이 정도면 충분히 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는 무슨. 꾸물꾸물 다시 누우려고 하자 정재현이 내 목덜미를 잡는다. 어딜~! 나와, 밥 먹게^^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저런 말을 한다. 재수 없는 놈.. 입술이 저절로 삐쭉 나왔다.
“아 밥은 무슨 밥이야! 그냥 라면 끓여 먹으면 되는데.”
“너가 맨날 그런거만 먹으니까 이모가 걱정 하시잖아.”
“아 나 요리 못 해. 안 해.”
“누가 너보고 하래? 오빠가 해줄테니까 넌 저기 가서 짱구나 보고있어.”
염병 진짜.. 저놈에 오빠 소리 한번만 더 꺼내면 입을 꿰매버릴까 생각 중이다. 몇 달 먼저 태어났다고 툭하면 오빠란다. 일어나기가 너무 싫어서 떼 아닌 떼를 부리자, 대신 밥을 해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정재현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왜 저래 또. 무슨 바람이 분거야. 불안한 마음에 이번에야 말로 정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정재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정재현네 부모님과 부부동반 여행을 간다며 어젯밤부터 요란하게 짐을 싸시던 엄마 아빠가 안 계시니 집안이 고요하다.
“야 김여주, 김치볶음밥 먹을래?”
“몰라 알아서 해..”
“알아서 하라 했다 너. 나중에 왜 김치볶음밥을 했냐는 둥 이런 소리 하면 죽는다~!”
너 김치볶음밥은 할 줄이나 알고 그러는거야…?(측은) 그 고요함을 뚫고 쩌렁쩌렁 집 안을 울리는 정재현의 목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내 기억으론 쟤 라면도 겨우 끓이는데….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지만 부엌에 서 있는 모습이 너무 자신감에 차있어서 나대지 말고 나오라는 소리도 못하겠다. 한참을 뒤에서 서성거리다 결국 정재현 말대로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틀었다. 아 뭐 그릇 하나 깨먹으면 정재현이 그랬다고 하면 되니까~! 태평하게 누워 리모콘을 만지작거렸다. 때마침 즐겨보던 드라마가 재방송을 하길래 채널을 멈추고 편한 자세를 잡았다.
“오오오, 잠깐만..오오..”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는 애써 무시했다. 저럴 것 같아서 내가 걱정을 했던 건데..(혀를 참) 그래도 자기가 해주겠다며 자신있게 나섰으니 어떻게든 결과물은 내놓겠지. 슬슬 고파오는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보니 조금 있으면 또 내 사랑스러운 첫 과외학생 민형이 보러 가야되네...^^ 한게 뭐 있다고 벌써 30분을 가리키는 분침이 야속했다. 토요일은 항상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간다니까.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티비로 시선을 돌리는데, 정재현이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해맑게 웃으며 다가온다.
“..야.”
“..”
“그냥 나가서 먹자…ㅎㅎ”
손에는 밑바닥이 새까맣게 탄 볶음팬을 들고.
정재현이 야무지게 태운 볶음팬은 대충 물에 불려두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밖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냥 라면을 끓여 먹자니까 그건 또 절대 안된단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오늘 쓸 과외 자료와 문제집을 모두 챙겨 나왔다. 이럴꺼면 그냥 처음부터 나와서 먹을걸 그랬네(심기불편) 내가 옆에서 계속 툴툴대는게 신경이 쓰인 건지 정재현은 힐끔 내게 시선을 두더니 옆구리를 쿡 찔러온다.
“우리 뭐 먹으러 갈까.”
“몰라.”
“뭐? 우리 여주 순댓국 먹고 싶다고? 그래 가자!”
네가 먹고 싶은 거겠지 새꺄..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주먹을 꾹 쥐며 이를 바득 갈았다. 엄마한테 너가 태웠다고 꼭 말해라! 꼭! 이미 열 번은 더 말한 말을 한 번 더 사납게 내뱉었다. 내 말에 정재현은 알았어~ 라며 능글맞은 웃음을 보이더니 곧 어깨동무를 해온다. 놓으라며 팔을 쳐내려 했지만 곧 못 이기는 척 정재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너무 배가 고파서 화도 못낼 지경이라 일단 뭐라도 먹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정재현은 예상대로 (술 마신 다음 날) 자주 가는 순댓국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음식점이 즐비한 길가로 들어서자 갖가지 음식 냄세가 후각을 자극했다. 순식간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며 정재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 너무 배고파. 태평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거의 다 왔다며 머리를 헤집는다.
“너 길 알잖아. 거의 다 왔어~”
“아 오늘따라 너무 멀다고!”
“여기만 건너..야, 야 잠깐만.”
배고픔에 예민해진 신경을 가라앉히며 횡단보도를 건너려 몸을 반쯤 돌린 순간, 정재현이 나를 막아섰다. 어깨동무를 하던 팔을 풀고 양 팔로 내 어깨를 꾹 잡고는 잠시 당황하듯 눈동자를 데굴 굴린다. 왜. 정재현 덕에 횡단보도를 등지고 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 그 뭐야 그 엄마 선물 사야돼. 잠깐 저기 좀 가자.”
건너야 하는 길을 앞에 놔두고 다짜고짜 오른쪽으로 나를 끌고 가는 정재현은 끝까지 내 시야가 횡단보도로 가는 것을 막았다. 팔을 잡은 손이 단단하다. 정재현이 가리킨 곳은 악세사리를 파는 작은 샵이였다. 그 곳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전처럼 화를 낼 수 없었다. 횡단보도 반대편에 서 있던 문태일을 이미 봐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까 이모 좀 있으면 생신이시네.”
“어어. 너랑 나온김에 사야지. 올해도 너가 좀 골라주라.”
“그래, 얼른 가자.”
내가 아무것도 못 봤을 거라 생각하는 정재현에게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걸었다. 그렇게 정재현과 카페를 나온 후 처음 보는 문태일의 모습이라 마주치면 분명 아무 말도 못하고 걸음을 멈췄을 것이다. 걸음을 빨리 했다. 문태일도 나를 발견하기 전에 얼른 샵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어서오세요~”
문태일을 뒤로 하고 들어온 샵에는 각종 반짝이는 악세사리가 널려있었다. 자꾸만 맴도는 얼굴을 잊어버리려 앞에 놓여있던 것 중 아무거나 집었는데, ...예쁘잖아..?(미소) 큐빅이 오밀조밀 박힌 머리핀을 이리저리 돌리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가격도 괜찮고, 머리에 슬쩍 얹어보니 예쁘게 딱 포인트를 주는게 구매욕구가 불타올랐다.
“야 대박, 정재현!”
“왜.”
“예쁘지. 어?”
옆에서 이모 생신 선물을 고르는 건지 서툴게 악세사리를 만지작거리는 정재현을 부르며 온갖 예쁜 척을 해보였다. 눈도 새초롬하게 뜨고 고개도 비스듬히 놓고 말이다.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시선을 주지도 않고 어어, 라는 건성한 대답만 내놓는거다. 빈 말이라도 보고 해줄래..(이악물) 15도 정도 틀어놨던 고개를 도로 하며 미간을 좁혔다. 아이씨.. 절로 짜증 섞인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제대로 보고 말해!!!!”
끝까지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정재현의 모습에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담긴 소리였다. 내가 어? 예쁜 척도 막 했는데 진짜 이럴거야? 배도 고픈데! 세모눈을 하고 정재현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내 말에 악세사리만 고르던 정재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더니 곧 나직한 목소리가 작은 샵을 울렸다.
“안 봐도 알아, 너 예쁜거.”
녀석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당황) 너무 진심같은 어투라 머리핀을 슬쩍 내렸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재현을 보고만 있자, 뒤늦게 저가 내뱉은 말을 알아차린 건지 정재현은 나보다 더 놀라며 들고있던 반지를 떨어뜨렸다. 쨍 하고 반지끼리 부딫히는 소리가 귓가를 찔러 들어왔다. 그제서야 나는 바람 빠진 웃음을 내보냈다. 이거이거, 나를 평소에 얼마나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 무의식 중에 저런 말이 튀어나와.. ( ͡° ͜ʖ ͡°)
“나 뭐라 했냐 방금ㅋ…”
“뭐라 하긴~ 나 예쁘다고 했지. 너 그거 진심이다?”
“아니야.”
“맞아.”
“아니라고.”
“빼박임.”
“아니라니까? 나 우리 엄마 생각하다가 나온 소리야.”
“웃기지마.”
“진짜거든? 우리 엄마 안 봐도 예쁘거든?”
봐달라고 할 때는 죽어도 안 보더니 불리한 상황이 되자 바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정재현의 눈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나는 더욱이 얄밉게 웃어보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정수정에게 전화해 야 정재현이 뭐라는 줄 아냐~? 로 시작해 구구절절 방금 전 일을 떠벌리고 싶었지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답지 않은 변명에 손사래를 치는 모습이 안쓰러워 핸드폰은 넣어두기로 했다.
“알았어! 이번 한번만 내가 딱 눈 감고 믿어줄게. 이모가 예쁘신거야.”
“아니, 진짜라니까!”
“알았다니까~ 자 빨리 이모 생신 선물 고르자~!”
쟤가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또 오랜만이네. 덩치에 안 맞게 발끈 하는 정재현에 낄낄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모 생신 선물은 문태일을 피하기 위한 정재현의 핑계라는 걸 알았지만 (아직 3주나 더 남았다) 이왕 악세사리 샵에 들어온 김에 이모가 좋아하실 만한 선물을 미리 골라둘 마음으로 꼼꼼히 매장 안을 둘러봤다. 작년에는 향수를 사드렸는데, 올해는 목걸이가 어떨까 생각 중이었다. 자주 하고 다니시던 목걸이를 잃어버렸다며 한동안 속상해하시던 이모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거 어때? 이모 이런 거 좋아하시잖아.”
한참을 둘러보던 중 눈에 들어온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딱 이모 나이대 분들이 좋아하실 만한 작은 보석이 예쁘게 달려있는 은색 목걸이였다. 그것을 꾹 손에 쥐고 정재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까 내가 서있던 곳에서 무언가를 보고있던 녀석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 어..괜찮네. 내 손에 들린 목걸이를 확인한 정재현은 짧게 한마디 중얼거리며 내쪽으로 걸어왔다.
“이거 사고 나중에 다른 거 하나 더 사서 드릴까? 편지랑.”
“그래! 백화점에서 뭐 하나 사서 같이 드리자.”
내게서 목걸이를 가져가 요리조리 살펴보던 정재현은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대로 슬쩍 발을 옮겼다. 백화점에서 또 하나 사려면 돈 좀 모아 놔야겠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정재현의 뒷모습에 눈을 두었다. 능숙하게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아까 녀석이 내뱉은 말이 떠올라 또 옅게 웃어버렸다. 짜식..그래, 누나가 좀 예쁘긴 하지! (뻔뻔) 그렇게 팔짱을 낀 채 정재현이 계산을 끝내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매장 문이 열리며 예쁘게 꾸민 여자 두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 재현 선배?”
“어머 선배님~! 왜 여기 계세요?”
…(;◔д◔)… 누구신데 정재현을 그렇게 소름돋는 호칭으로 부르시는 건지..? 샵에 들어온 후 정재현을 발견하자마자 꺄르르 웃으며 계산대로 직행하는 두명의 모습에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선배라고 부르는 걸 보니 같은 과 후배인 것 같다. 음, 정재현네 과에 저런 애들도 있구나..예쁘네. 괜히 어색한 상황에 정재현과 일행이 아닌 척 멀찍히 떨어져 상황을 지켜봤다. 정재현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리더니 어, 안녕 하며 반갑게 그 두명과 인사를 한다. 아씨, 난 어떻게 해야돼. 가서 어색하게 난 정재현 친구야^^ 하고 인사를 할까 아님 먼저 나가서 기다릴까.
“선배님! 여기서 만난 것도 신기한데 저희 밥 사주시면 안돼요?”
“저희 아직 점심 안 먹었어요오. 선배님 밥 드셨어요?”
내가 손을 꼼지락 거리며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저쪽에선 벌써 밥 얘기가 오간다. 안되는데..정재현 나랑 순댓국 먹으러 가야 되는데..(눈치) 쟤 없으면 나 혼자 밥 먹으러 가야된단 말이야..!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건지 계산을 끝낸 후에도 같은 과 후배들의 얘기를 다 들어주던 정재현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찾는다. 녀석은 구석에서 멀둥히 저를 바라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로 걸어온다.
“미안. 난 우리 여주 먹이는 것도 버겁다.”
“..네?”
“먼거 갈게~ 얘 지금 배고파서 빨리 입에 밥 넣어줘야 돼.”
가자 김여주! 내 앞까지 걸어오며 개소리를 지껄인 정재현의 팔이 어깨를 감쌌다. 야 씨…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밥에 환장한 사람 같잖아…(이악물) 정재현에게 무슨 말을 하는거냐 화를 내고 싶었지만 빤히 나를 바라보는 네개의 눈동자에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정재현의 같은 과 후배로 확신하고 있는 여자 두명은 내 어깨에 둘러진 정재현의 팔을 보며 약속이나 한듯 미간을 슬쩍 좁힌다. 뭐야 쟤네, 표정 왜저래;
“선배님, 누구..”
“그건 몰라도 되고. 밥은 너네끼리 먹어라.”
나도 같이 표정을 굳히기 전에 정재현은 나를 데리고 샵을 나갔다. 나는 누구냐 묻지도 않았는데 나오자마자 그냥 같은 과 후배들이야, 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알아, 선배선배 부르길래 대충 예상했어.”
“쟤네한테 관심 조금도 없어 나.”
“아 알았어. 뭐 너가 관심이 있던 없던.. 아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파.”
날 바라보던 그 두 사람의 표정에 이미 기분이 퍽 상한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내 반응에 정재현은 목덜미를 쓸어넘기며 내 뒤를 따라왔다. 다시 찾은 횡단보도 건너편에는 다행이도 문태일이 보이지 않았다.
“이모 여기 순댓국 둘이요.”
“둘이 어제 또 술 마신겨?”
“아뇨~! 그냥 순댓국 먹고 싶어서 왔어요!”
드디어 음식점에 들어왔다(감격) 익숙하게 주문을 한 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심때가 훌쩍 지난 시간인데도 손님이 많았다. 시끌벅적한 주변 말소리를 노래 삼아 고개를 까딱거리며 손거울을 꺼냈다. 화장이 뭉개진 곳이 있나 없나 확인을 하는데, 앞에서 그런 나를 쳐다보던 정재현이 혀를 한번 찬다.
“왜, 너무 예뻐서?”
“아이씨..”
“킄ㅋ컄ㅋㅋ캌”
길이 남을 흑역사를 탄생시킨 정재현은 내 말에 입술을 깨문다. 잊을만 하면 생각나서 나도 미치겠다. 그래도 너무 웃긴 걸 어떡해? 아까의 짜증은 싹 잊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데, 테이블 위에 놔뒀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천천히 웃는 걸 멈추며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하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민형이 어머님] 히익,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뱉은 나는 바로 핸드폰을 쥐고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님! 안녕하세요!”
나는 어머님이 앞에 계신 것 마냥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런 내 모습에 이번엔 정재현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웃지 말라는 식으로 손짓을 해보이곤 다시 전화에 집중했다. 언제 들어도 명랑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선생님~ 오늘 집 수리가 있는데 깜빡하고 말씀을 못 드렸어요. 집이 시끄러울 것 같은데, 오늘만 민형이랑 밖에서 수업 해주실 수 있으세요?
“아, 네! 그럼요! 조용한 카페 찾아서 민형이랑 거기서 공부 하겠습니다.”
-너무 죄송해요~ 민형이한테는 미리 말 해놨으니까 선생님이 연락 한번 해주시고 장소 정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어머님. 들어가세요~”
전화는 그 말을 끝으로 끝났다. 참았던 숨을 내쉬며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렸다. 진짜..어머님과의 대화는 아직도 너무 떨려..(입틀막) 밑반찬을 입으로 가져가며 나를 바라보던 정재현이 궁금하다는 듯 무슨 일이냐 물었다. 오늘 다른데서 수업하라고. 짧게 대답한 나는 그제서야 자리에 앉았다. 야외 수업이라니. 나야 상관 없지만 민형이가 걱정이었다. 조용한 카페를 찾는게 쉬운 것도 아니고, 민형이네 집 주변은 더더욱 지식이 없어 딱히 내가 정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민형에게 의견을 물어봐야 한다는 건데...
“어휴..”
이건 뭐 그냥 미래가 빤히 보이는구만 껄껄. 쩝 입을 다신 후 정재현에게 짧게 시선을 줬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빤히 나를 보고있던 정재현의 눈썹이 작게 꾸물거렸다. 별 다른 말 없이 한숨을 한번 내쉬곤 이마를 긁적이며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또 뭐라고 답장이 올까. 하도 많이 깨져 더 부서질 쿠크도 없었다. 바로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홀더키를 눌러 화면을 끈 후 핸드폰을 내려 놓음과 동시에 주문했던 순댓국이 테이블에 도착했다. 정재현은 손을 뻗어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 앞에 놔준 후 먹으라며 짧게 말을 했다. 고맙다. 힘 없이 대답하곤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 입 떠먹었다. 마음을 달래주듯 속이 따뜻해진다.
“왜. 너 과외 학생 아직도 그래?”
“차가워…얼음왕자야 아주..”
“아, 얼음왕자가 뭐야. 구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밥이나 먹어!”
괜한 거에 눈쌀을 찌푸리는 정재현에게 버럭 성질을 낸 후 순댓국에 코를 박았다. 과외 시간이 다가오는게 생각만해도 가슴이 아려와 순댓국으로라도 마음을 계속 달래야했다. 내가 이러고 돈을 번다..(울컥) 그래도 용케 안 짤리고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거 보면 나 좀 잘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생각이나 하며 묵묵히 밥만 먹고 있는데, 까만 핸드폰 화면에 메세지 팝업창이 떴다. 밥을 씹던 걸 멈추곤 바로 화면을 확인했다. 민형이의 답장이었다.
…우리 민형이가 또..^^ 예상을 깨지 않는 찬바람에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이 새끼.. 내가 부산 가자고 하면 어쩔려고…(막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었다. 집 수리는 왜 하필 오늘이야! 그 집 주변에 아는 곳 하나도 없는데! 어디 가라고! 어머님이나 민형이 앞에서는 하지도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키며 핸드폰을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야, 입술 깨물지마.”
앞에서 정재현의 잔소리가 날라왔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핸드폰을 꾹 쥔 채 한자한자 답장이 될 문장을 타이핑했다.
솔직히 내가 이렇게 눈물(ㅠㅠ) 까지 흘리면서 메세지를 보냈으면 좀 다정하게 답ㅈ..ㅏ..
…(말잇못) 아니 내가..뭐..잘못 한거야..? 한번만 더 찡찡거리는 메세지를 보내면 진짜 말로 한대 맞을 것 같아 얼른 우리집 근처 조용한 카페 주소를 복사해 보냈다. 아 몰라, 자기가 우리 집 쪽에서 하자고 했으니까 알아서 오겠지 뭐. 마지막으로 보낸 메세지의 1이 사라지기 전에 화면을 끈 후 핸드폰을 던지듯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왜 또 표정이 그러냐.”
“사는게 힘들다..돈 버는게 힘들어..”
울상을 지은 채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그래도 배는 채워야되니까.. 국에 말아놓은 밥을 조금 떠 천천히 입에 가져갔다. 그런 나를 잠시간 바라본 정재현은 먹던 걸 멈추더니 악세사리 샵에서 산 목걸이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쟤 밥 먹다 말고 뭐해. 입에 넣은 밥을 오물오물 씹으며 정재현의 행동을 지켜보는데, 녀석은 곧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자.”
“..헐, 뭐야 이거?”
“아니 뭐..아까 보니까 갖고싶어 하는 것 같길래..”
정재현이 손에 쥐어 준 걸 확인했다. 아까 샵에서 한참을 만지작거린 그 예쁜 머리핀이 시야에 가득 잡혔다. 아니 아까 예쁘냐고 물어볼 때 보지도 않아놓고 이걸 어떻게 알고 사온거야. 놀란 마음에 눈만 감빡이다 고개를 들어 정재현을 바라봤다. 녀석은 민망한지 눈썹 주위를 만지작거리더니 또 한번 입을 연다.
“그, 뭐야 그 내가 볶음팬도 태워먹고 너 배고프다는데 가게 끌고가고 그래서 미안해서 사주는거야.”
“..누가 뭐래냐..”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알았어..고맙다구..”
민형이의 쟈가움에 상했던 속이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요 예쁜게 결국 내 손에 들어오게 됐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헤헤 웃으며 좋아하자 앞에서 가만히 날 응시하던 정재현이 따라 작게 웃는게 보였다.
“야, 나 간다!”
“뛰다가 또 넘어지지 말고..!”
“알았어!!!”
밥을 먹고 나온 후 과외 시작까지 애매하게 시간이 남았던게 문제였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노래방에 갔는데 분명 맞춰둔 알람 소리를 못 듣는 바람에 신나게 놀다가 간당간당하게 시간을 남기고 나서야 노래방을 나오게 됐다. 우리집 근처에서 수업하게 되서 다행이지, 민형이네 집 근처 였으면..(말잇못) 같이 가주겠다는 정재현을 거절한 후 급히 카페 쪽으로 뛰었다.
“아 죽겠네 진짜.”
괜시리 민형이네 집에 처음 간 날이 떠올라 더 힘을 내 속도를 높였다. 이민형보다 먼저 도착해야 했다. 먹었던 순댓국이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딸리는 체력을 겨우 짜내며 카페 앞 골목길에 들어섰다. 잠시 발을 멈추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후, 하고 깊게 숨을 내쉰 후 마저 뛰어 골목길 끄트머리에서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는 또 한번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민형…아..?”
“…”
아슬하게 서 담배를 물고 있는 이민형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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