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감화서
w.규닝
11.
“도헌, 아무래도 자네가…”
“…….”
“홀려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네. 고 기생년이 천하의 명기이거나 팔백년은 족히 묵은 구미호거나, 둘 중 하나가 틀림없을 진데…. 그 향은 대체 뭐란 말인가? 기생년이 선물로 주던가?”
우현의 방우가 못마땅한 기색을 온 얼굴에 드러내며 가부좌를 튼 무릎에 손을 짚었다. 그래, 말 좀 해보게나. 들어나 보세. 그러자 방 한 구석에 드러누워 소간을 집어 먹던 다른 방우도 옳타꾸나 하며 화두를 덥석 물었다. 사기그릇을 휘휘 저으며 향 조각을 풀어 넣던 우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뭐야? 니들이 왜 맡아? 내가 맡으려고 피우는 건데.”
“자네 코만 콘가? 멀쩡한 코가 있는데 어찌 안 맡을 수가 있단 말인가.”
“코를 틀어막던가!”
“자네가 마루로 나가는 편이 더 합리적일 거라 생각하네만….”
그가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우현의 고개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오며 싫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건 추워서 싫어. 우현이 향 조각을 살살 젓고 있던 막대를 구들장 위로 소리 나게 내려두었다. 꼭 돌처럼 딱딱했던 것이 물에 녹아 흐려지는 것을 보아하니, 전전날 밤에 보았던 주인 없는 약탕기를 연상케 했다. 우현이 이불보 맡에 놓아 둔 약탕기를 힐끔거렸다.
벌써 삼일이 지난 시각이었다.
정확히 첫눈이 떨어지던 날 찾았던 존경각에서는 혼자 끓고 있는 약탕기만이 뒤늦게 도착한 이를 맞았다. 조금 전까지도 있었을 게 분명했던 사람이 감쪽같이 떠나고 난 뒤의 자리는 놀라우리만치 고요했다. 우현은 그렇게 두어시간을 같은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두고 간 물건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돌아오겠지 싶어 가부좌를 틀고 앉은 다리에 쥐가 났어도 기다렸으나 제가 올 거란 사실을 알고 도망쳤을 이에 대한 서운함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끝내 성규는 다시 도서고를 찾지 않았다. 일단은 늘어진 약제 도구들을 주워 담아 청재로 이고 돌아오는 길에 아주 잠깐 화가 올랐지만 괜찮았다. 그래 아직은, 솔직하지 못한 상대에 대한 이해쯤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우현이 약연기의 막대 끝을 괜스레 돌돌 밀었다.
그 뒤로 이틀, 만나면 보자는 심산으로 늘 가던 시간에 맞추어 도서고를 급습했지만 성규는커녕 그림자도 잡아낼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서생원보다 베일에 싸인 서책 도둑을 더 먼저 잡겠다는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또 무언 사정이 있어서 들리지 않고 있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 떠나기가 무섭게, 그것에 반론하듯 옥색 그릇에는 꼬박 꼬박 엽전이 찼다. 분명 들리고는 있는 것이었다. 매번 찾아오던 시간이 아니라, 우현과 겹치지 않게끔 다른 시간대를 공략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가지가지 한다, 김성규….”
우현은 언젠가 풀어졌던 책보 귀퉁이에서 발견한 적 있는 이름을 기어코 외고 있었다. 약연의 막대를 둘둘 밀던 손이 느려졌다.
하루 이틀 정도는 귀여워서 봐준대도 이제는 제 쪽이 싫었다. 장난으로 쳐 주는 것 치고는 이미 너무 많이 보고싶으니까.
*
성규가 넙죽이 엎드렸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내의원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예판께서 내린 명이다.”
성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감이 없잖아 있어 뵈는 수의 대감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성규가 마른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며칠 전에 대감께 제출했던 작문 시험지 위로 눈을 떨어트렸다.
갑작스러운 대감의 부름을 받고 찾은 자리였건만, 역시나 부득불 우레와 같은 이야기가 찾아 들었다. 성규가 한참동안을 꾸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허나 소인, 아직 내의원으로 옮겨가기엔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생각되어 혜민서에서의 공부를 더 원합니다.”
“그게 어디 네 마음대로 되는 일이겠느냐? 이미 눈독을 탄 인재를 당장이라도 데려오지 않고 내의원에서 네 사정을 봐줄 성 싶냐는 말이다.”
“…….”
“이미 전의감에서도 다 끝난 말일 것이다. 네 이직은.”
수의 대감이 제 눈 앞에 떨어져 있는 머리꼭지를 응시했다.
“혜민서에서는 발 빼라. 지금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게 금상의 어환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게다가 요사이 네가 본청에 올리는 탕약이 아주 좋은 효과를 벌고 있으니 내의원 쪽에서도 네가 절실할 거다.”
“허나 소인은 아직 경험도 부족하고, 외고 있는 의서도 적은 데에다가…, 아직 침술은 제대로 익혀본 적도 없습니다.”
“경험은 이미 활인서를 돌며 충당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권지 입번 당일 날, 너와 함께 대유재에서 밤을 샜던 의관 녀석에게 물으니 너는 자다가도 동의수세보원을 줄줄 외는 녀석이라고 했다. 그리고 침술 익히는 곳은 내의원의 침의청만큼 안성맞춤인 곳이 없다. 외려 혜민서의 환경이 그 곳보다 열악하니 네게는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성규의 입이 반박할 여지없이 다물어졌다. 제가 한 마디 겸손을 늘어놓으면 대감에게서는 두 세마디의 변론이 되돌아왔다. 성규가 무릎 아래 두었던 종이 끝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사실 수의 대감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가감 없이 옳은 소리였다. 혜민서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내의원, 전의감보다 의술 습득의 기회가 적어 상대적으로 부진한 부서였기에 발전이 더뎠다. 여태껏 취재(取才)에 목을 매왔던 것도 전부 다 그 탓이었다. 내의원 도제조와 당상관들의 눈에 들어 그 곳으로 입성하는 것. 허나 막상 제 앞에 커다란 상이 차려지자 덥석 숟가락을 빼 들기가 망설여졌다. 가슴 한 구석에 물을 먹은 것처럼 답답했다. 목이 말라갔다.
“…허면…,”
“말 해 보아라.”
“소인이 맡고 있던 일들도 당장에 그만 두게 됩니까? 소인은 지금 동서활인서의 일원인 데에다가 전의감에서 내려오는 조보를 아침마다 혜민서에 가져다 두고 있으며… 성균관 약방에 약제도 나르고 있사온데…”
성규의 말꼬리가 급기야는 흐려졌다. 말을 하는 내내 목구멍 한 가운데를 떡 하니 막고 있던 무엇인가가 끝내 결리고야 만 것 같았다. 성규는 그제서야 알았다. 기뻐야 할 소식에 어찌 이렇게 마음 한 켠이 울렁이고 있는 것인지를. 성균관이라는 말을 입에 담자마자 알 수 없이 답답했던 목구멍이 더욱 꽉꽉 막혀왔다.
“당연한 소리지 않겠느냐? 내의원과는 별개의 문제들이다.”
“…….”
“두말할 것 없다. 곧 기별이 내려질 것이니 혜민서를 정리할 준비에 들어가라.”
“…….”
“실감이 나지 않느냐?”
“예.”
“네가…”
관복을 입게 된다는 소리다.
성규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토록 제가 바래왔던 일이었다. 동기임에도 불구하고 저보다 먼저 줄줄이 내의원으로 입성하는 이들을 뒤에서 지켜보며 악착같이 취재에 이름을 올렸던 것도 모두 오늘을 바라고 해 온 일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곧 어의 등극도 눈앞의 일이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진데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기엔 제 뒤에 두고 온 것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제 와 내쳐버리기엔 너무 큰 의미로 자라버린 사람이었다. 수의 대감 댁의 고래등같은 기와 아래 몸을 기대어 앉아 한참을 바위처럼 넋을 놓았다. 아무리 주먹으로 내리쳐도 쉬이 가시지 않는 답답함이 기도 어딘가에 막혀 웅웅거리며 울었다. 성규가 세게 쥔 주먹으로 가슴팍을 자꾸만 두드렸다. 길을 지나는 이들의 시선이 한 번씩 성규의 얼굴을 다녀갔다.
뒤주머니에 든 시침 상자가 전과 달리 유난히 무거웠다. 아마 제 어깨에 올려진 직책의 무게가 고스란히 옮겨 간 탓이리라. 일전에 대감에게서 받았던 낡은 시침이 뒤주머니 안에서 선연히도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것은 자꾸만 성규의 심장께를 콕콕 찌르고 있었다.
앞으로는 반궁을 찾을 일이 없다…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물기 없이 마른 눈이 노랗게 비인 논두렁 어딘가를 배회했다.
*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어느새 잎 하나 없이 빈 가지 위로 쌓였다. 첫 눈이 있은 직후 나흘 정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뚝 끊겼던 것이 곧이어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이 선 서릿발 같은 것이 아니라 함박눈이었다. 알 굵은 눈송이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청재의 마당 우에 내려앉았다. 섬돌 위, 채 걷어가지 않은 신들 위로 쌓인 눈이 볼록하게 그것을 감춰냈으며 어린 재직이 쓸다 내버려 둔 빗자루 위에도 그것은 소복이 쌓였다. 눈은 쉼 없이 설렁거리며 흙바닥을 채워 나갔다. 눈길 위를 밟는 유생들의 복숭아뼈 정도는 가뿐히 덮고 날 만큼의 눈이 반궁 안으로 쌓여 들었다.
네다섯 명의 유생들에 시침을 놔 주고 돌아가려는 길이던 구휼 전담 의관의 앞에 멋들어진 도폿자락이 길을 막고 섰다. 의관의 머리가 숙여졌다. 그러나 인사치레로 돌아올 법도 한 상대의 목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의관이 몸을 비켜 그의 옆을 지나가려 했으나 단호히 움직인 그의 몸이 의관의 앞을 버티고 섰다. 다른 쪽으로 비켜 가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제 길을 막아서는 유생에 의관의 표정이 의아하게 구겨졌다.
“상유께서는 제게 무슨 일이십니까? 저를 자꾸 붙잡아 두시는데.”
“자네가 구휼 전담 의관이오?”
“예. 그렇습니다만.”
우현의 표정이 마뜩찮게 굳었다. 의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우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현이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느리게 훑었다.
“자네는 왜… 관복을 입고 있는 거요?”
“궐내각사의 관리이기에 입고 있는 것이지요.”
“혜민서의 의관은 입고 있지 않던데?”
우현의 의문에 의관의 표정이 무슨 섭한 소리를 하냐는 듯 떫어졌다.
“당연한 소립니다. 내의원과 혜민서는 응당 다른 것이니까요. 혜민서는 궐외각사인 데에다가 궐의 일이 아닌 서민들을 구료하는 잡일을 맡고 있기에 관복을 입기에 여의치 않습니다. 헌데 왜…?”
이번에는 의관의 눈이 의심스러운 구석을 띠고 우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의관의 말이 한 마디 한 마디가 계속될수록 우현의 눈에 심술이 차올랐다.
대궐에서 하사한 관복은 그야말로 때깔이 좋게 빠져 있었다. 홑장의 도폿자락보다 곱절은 더 따뜻해 보이는 파란색의 관복이 손목까지 꼭꼭 채워 늘어져 있었다. 겨울 한파도 끄떡없을 정도로 두터워 보이는 옷감은 성규가 입고 다니는 허름한 도포와 확연히 달랐다. 덧대어 입는 것도 없이 낡은 천 한 장만을 옷 위에 걸친 성규의 행색이 눈앞에 선 의관의 관복과 겹쳐 보였다. 우현이 입술을 비죽였다. 내의원이나 혜민서나, 다 거기서 거기인 삼의사(三醫司)구만… 우현이 의관이 쓴 멋들어진 관모를 알게 모르게 노려보았다. 사실은 그것마저도 성규의 낡은 갓과 비교가 되어 이골이 난 것이었다.
“허면 그대는 그리 대단한 내의원의 의관이니 침 하나는 기가 막히게 놓겠소?”
“예? 기가 막히게요?”
“아주 한 번 놓고 나면 앉은뱅이도 자리를 개운히 털고 일어날 정도로 대단한 침술을 지녔나 보오. 아, 맥은 잘 짚으시오? 나병은? 그대들한테 나병 치료는 뭐 식은 죽 먹기겠소?”
“그게 무슨 논리…,”
“허면 약제 제조는 어떻소? 탁월하오? 내가 아는 의관 녀석은 약제 감별에 있어서 아주 감이 좋던데.”
줄줄이 쏟아지는 우현의 가시 돋친 말에 의관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굳었다. 제 눈을 똑바로 쳐다봐 오며 몰아붙이듯 말하는 우현의 목소리에 넋을 빼고 있던 의관이 고개를 기웃했다.
“저는 침술에 주를 둬서… 탁월 까지는 아니지만 감별은 가능합니다. 아직 제조에는 이력이 없습니다만…”
“어째서요? 내가 아는 의관 놈은 약제 제조를 밥 먹듯이 하고 있는데.”
“…….”
“궐외각사 혜민서의 의관이오. 그대가 말했던 것처럼 응당 구분되어야 마땅한 부서의 사람이란 말이오.”
은근히 혜민서를 낮잡아 말했던 의관을 향한 치졸한 빈정거림이었다. 우현이 구겨져가는 그의 표정을 느긋이 훑어보며 이죽였다. 의관의 안색이 티가 나게 굳어졌다.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당장에라도 그렇게 따져 묻고 싶은 것을 애써 참은 의관이 잇새로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이만 길을 비켜가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 앞을 다시 막아 선 것은 우현의 뻣댄 어깨였다.
“맥을 좀 짚어 주시오.”
“맥이요?”
난데없는 우현의 말에 의관이 삐딱하게 대꾸했다.
“여기서요?”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듯이, 명의도 자리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우현이 씩 웃었다.
사실은 의관이 맥을 짚으려 손을 대자마자 빼어 버리며 못쓰겠다며 혀를 끌끌 찰 셈이었다. 그것이 혜민서와 성규를 낮잡아 본 것에 대한 마지막 복수였다. 어서 맥을 짚어보라는 듯 허공으로 뻗은 팔에서 옷소매를 걷어냈다. 의관이 마뜩찮게 제 손목을 응시하고 있자 훤히 거둬진 손목을 다른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어허, 춥소. 우현의 닦달에 의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어갔다.
그 때, 우현의 손목을 붙든 것은 의관의 것이 아닌 엉뚱한 손이었다. 반대편에서 튀어나온 하얀 손이 우현의 손목을 붙잡아 섰다.
“죄송합니다. 직장.”
나흘간이나 얼굴도 비추지 않았던 성규였다.
기척 없이 붙어 선 성규가 우현의 손을 거두어내고 제 앞에 선 의관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유감을 표했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란 것은 둘째 치고, 기척의 주인공이 성규라는 것에 두 번 놀란 우현의 눈이 전에 없이 크게 떠졌다. 성규가 조용히 입술을 물었다.
“상유께서 저를 찾아오시던 길에 직장을 만나 뵌 것 같습니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소인이 죄송합니다.”
“야, 네놈이 뭘 안다고 죄송을,”
악! 씨, 우현이 밟힌 발을 뒤로 빼며 허리를 꺾었다. 성규가 끝까지 고개를 조아렸다. 의관은 성규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마뜩찮은 얼굴로 우현을 보다 몸을 돌렸다. 괜찮네. 말은 그리하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를 남긴 의관이 휑하니 자리를 떴다. 성규가 제 밟힌 발을 끌어안고 앉아 있는 우현에게로 눈을 돌리자 우현이 자리에서 멀떡 일어나 도끼눈을 떴다. 야! 넌 진짜!
“네가 뭘 안다고 죄송이야? 죄송이긴. 내가 죄송할 만한 짓 하는 거 봤냐?”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멀리서 보았을 때에도 도헌께서 무례하신 것 같았기에 일단 죄송을 말한 것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도헌이시라면 일단 공대조차 하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품계가 어찌 되었든 관직에 있으신 분인데, 공대조차 거르시고. 게다가…”
성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인지 여쭈어 봐도 말 안 해 주실 것 아닙니까?”
우현의 입가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래! 말 안 해 줄거다!”
우현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얼굴도 꼬박 닷새는 되어 보는 것이었다. 그토록 찾아다녀도 코빼기 하나 보이질 않고 있다가 이렇게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와서 한다는 것이 마음에도 안 드는 타박이었다. 더군다나 순전히 저를 위해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그런 제 마음은 눈꼽 만큼도 모르는 게 무조건 제 탓이라고만 우기고 있는 꼴이 미워 죽겠다. 우현이 성규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펑펑 쏟아지고 있는 함박눈이 성규의 갓머리 위로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백설에 빗대어진 얼굴빛이 더욱 화사히 밝혀진 것도 같았다.
우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이 비실비실 올라가려는 것을 참았다. 잔뜩 성을 내고 돌아 본 성규의 얼굴이 오랜만에 본 탓에 반가운 것은 둘째 치고 생각보다 예뻐, 상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버리려는 탓이었다. 느린 속도로 떨어지는 함박눈이 성규와 우현 사이의 시야에 자꾸만 훼방을 놓았다. 우현의 입매가 슬슬 풀어지려 했을 때에는 성규가 우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우물쭈물하던 입술이 급기야 열렸다.
“그리고…아픈 곳이 있으시면, 기다렸다가 소인에게 말하셨으면 되었을 것을.”
성규가 우현의 손목을 힐끔거렸다.
“왜 다른 의관에게 맡기십니까?”
성규의 목소리에 못마땅한 기색이 묻어났다.
사실은 약방에 들르기 위해 청재 앞을 가로지르는 길에 우현의 뒷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가 뒤를 돌아볼세라 몸을 숨겨 달아나려 했던 생각을 거두어 간 것은 우현과 함께 있는 다른 이의 존재였다. 다른 샛길로 도망하려던 성규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묶였었다. 관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궐내의 의관임이 분명하건만 우현이 저 이외의 다른 의관과 말을 섞고 있다는 것에 온 신경이 그 곳으로 쏠렸다. 그리고 결국은 우현의 옆자리에 당도하고 나서야 숨을 죽였다. 물론 제 의지가 아니었다. 아랫배 어딘가가 뭉근하게 눌어지려는 것을 채 느끼기도 전에 머릿속의 감성은 충동적으로 성규의 걸음을 우현의 옆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성규가 쭈뼛거리며 우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불편한 게 있으시면…”
“…….”
“지금 말하십시오. 소인이 해드리고 싶으니까.”
우현이 성규에게 잡힌 제 옷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잡은 곳이 팔도 아닌 고작 옷소매임에도 불구하고 심장 밑이 간질간질해져 오는 게, 아마도 이 정도면 중증인가 싶었다. 성규의 손이 다녀가는 곳 하나하나 간지럽지 않은 곳이 없어 큰일이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 본 우현이 저희가 선 곳은 탁 트인 마당 갓쪽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은 아니었지만, 좀 더 발길이 적은 각사 문 뒤편으로 성규를 밀어 넣은 우현이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불편한 건 마음이 그러한데.”
“…….”
“오랫동안 얼굴을 못 봐서 마음이 불편하다. 니가 어떻게 해 줄건데?”
우현이 얼굴을 가까이 했다. 성규의 갓 끝이 문에 닿았다. 성규가 당황하는 꼴을 보기 위해 작정한 우현이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어찌할 거냐고? 구휼 전담 의관도 네 녀석이 쫓아버렸으니, 이제 네가 치료해야 할 것 아냐? 어쩔래?”
“안아드릴까요?”
성규가 덜컥 목소리를 내었다.
그에 실실 웃고 있던 우현의 눈매가 서서히 굳어갔다. 제 말에 또 당황한 나머지 얼굴을 붉히며 땅으로 고개를 숙이는 게 귀여워 그것을 보고자 했던 말에, 오히려 거침없이 응답한 것은 상대 쪽이었다. 우현이 혹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입을 벌렸다. 뭐? 하며 되묻기도 전에 그 작은 입술에서 같은 물음이 떨어졌다.
“안아드릴까요, 하며 물었습니다.”
“…….”
“혹 그것이 체면이 살지 않아 싫으시면…”
성규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휘었다.
“안아주세요. 도헌께서.”
이마 위를 가린 갓을 조금 들어 올린 성규가 눈을 접어 웃었다.
갓 위에 쌓였던 눈이 잘게 부서지며 성규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낡은 도포 위로 찬 기운이 스러졌다. 그와 동시에 우현의 눈이 거짓말처럼 굳었다. 각사 문 뒤로 보이는 함박눈은 여전히 쉼 없이 낮은 곳으로 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를 가린 처마 끝에서 쌓이다 못한 눈더미가 부스스 떨어진다. 낙하하고, 낙하해서 나란히 선 발치에까지 알 굵은 눈은 스몄다. 화사하기 그지없는 얼굴 뒤로 끝없이도 낙하하는 눈송이에 아찔히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것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우현의 입이 얼떨떨하게 떨어졌다.
“아마 내 방우들은 신기가 있는 게 분명하다.”
“…….”
“그렇지 않고서야 네 녀석이 구미호인 것을 어찌 알아 맞췄지?”
성규의 눈은 아직까지 예쁘게도 접혀 있었다. 우현의 입가가 그를 따라 절로 올라갔다.
“안아달라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걸로 안다.”
“예.”
“원초적인 첫 번째 뜻이냐, 아니면 더 나아가서 두 번째 뜻이냐?”
한껏 장난기를 담은 목소리가 그리 물었다. 끝내 소리 내어 웃은 성규가 우현의 손을 끌어다가 손가락 하나를 펴게 했다. 겨울 한기가 옷 속에 스몄다. 쉼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가 볼에, 코에, 팔목에 닿았어도.
“첫 번째입니다. 소인이 구미호 이면…”
“…….”
“도헌께서는 늑대십니까?”
그 때는 춥지 않았다. 정말이지 조금도 춥지 않았었다.
*
“뭐야, 그건 내 베개이지 않은가? 왜 내 껄 가져가는 것인지 이유나 좀 대보게!”
쿵쾅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온 우현이 호들갑스럽게 제 이불보며 화로를 챙겨드는 것을 멍청히 지켜보던 거의 방우가 어처구니없는 말투로 말했다. 그와 함께 고구마를 까먹던 남은 방우도 입을 쩌억 벌리고 우현이 하는 양을 지켜다보았다.
“그건 내 촛대일세! 도헌!”
“아니,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이 우릴 두고 하는 말이네. 그걸 왜 가져가느냐고?”
우현의 약탈에 꼼짝없이 당하고 있는 두 방우의 목소리가 우현의 등 뒤에 대고 아우성이었다. 이불보 위에 화로며 촛대를 던져 놓은 우현이 더 가져갈 것은 없나 하며 벽장 안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은 남은 향 하나였다. 두 개를 받았고, 한 개는 전에 썼으니…, 우현이 제 손톱만한 향 조각을 들여다보다가 챙겨 넣었다. 더 이상은 없겠지. 우현은 뜨악하는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방우들은 개의치 않고 훔친 베개를 비롯한 잡다한 물건들을 챙겨 안았다.
“나 외박일세!”
다짜고짜 외박을 고하는 목소리에 신이 배겨 있었다. 그의 방우가 허, 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유는 궁금하지도 않네! 베개나 달라니까!”
그러나 이미 그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쾅, 하며 닫힌 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눈 깜짝할 새에 물건을 도둑맞은 두 방우가 서로를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전에는 이것보다 넓었던 것 같은데….”
“그럴 리 없다.”
“아닙니다. 분명 전에는 두 사람이 누워도 남아 돌 만큼 자리가 남았습니다.”
“그럴 리 없다니까.”
네가 잘못 안 거다. 우현이 성규의 말을 자꾸만 정정했다. 바닥에 편 이불보가 전과 달리 좁은 것 같은 것은 결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어색한 눈으로 이부자리를 쓰는 손을 끌어 잡아 저를 보게 만들었다. 우현이 그와 마주하다 웃었다. 하나도 안 좁아.
전처럼 두 방우들이 방을 비운 것도 아닌지라 함께 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장소를 물색하던 중 뇌리에 스친 것은 제기고 안의 낡은 다락방이었다. 제향할 때 쓰는 그릇이 많지도 않으면서 쓸데없이 건물만 크게 지어 놓았다며 싫은 소리를 했던 과거가 무색하게끔 지금 우현에게는 가장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널찍한 창고 안엔 쾌쾌한 냄새가 쌓여 있었다. 작게 난 창을 열고나서야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도 같았다. 성규가 저의 어깨며 갓 위에 쌓인 눈을 탈탈 털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이미 해시에 접어든 시각이었다. 아직도 함박눈이 한창인 바깥은 누군가가 일부러 꺼트린 것처럼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제기고 안은 밝았다. 성규가 우현이 가져 온 촛대 위로 화촉(華燭)을 올려 두었다. 빨갛고 노란 밀초 두 개가 환한 빛을 내며 금세 촛농을 떨어트렸다. 성규가 휴, 하고 한숨을 돌렸다.
“다행입니다. 혹 촛대가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마루에 불이 붙으니까…헌데 저기.”
“뭐?”
“너무 가까우신 것 아닙니까?”
성규의 어깨 옆에 바짝 붙은 우현의 얼굴이 너무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다. 초를 켜는 옆모습에 빤히 와 닿는 시선에 얼굴이 간지러웠다. 성규가 공연히 제 코를 긁었다.
“너무 노골적이십니다. 아무리 소인이 안아달라 청하였지만.”
“노골적인 건 오히려 네 쪽 아니냐?”
우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이런 때에 화촉을 켜? 혼례 올리냐? 보통 가지고 다녀봤자 짜리몽땅한 양초 같은 게 전부일 텐데, 도대체 네놈 뒤주머니 속에는 왜 저런 게 들어있던 거야?”
우현이 턱짓으로 화촉을 가리켰다. 성규의 얼굴이 벌게졌다.
물론 화촉은 주로 혼례를 올릴 때 많이 쓰이는 색깔 입은 초였다. 혼례 때가 아니고서야 일반 양초에 비해 비싼 초를 쓸 일이 없는 게 맞는 말이었지만 성규에게만은 달랐다. 본래 예쁜 물건들을 좋아하는 터인지라 갖가지 장신구에도 정신이 팔리는 성규로서는 이왕 쓸 바에는 예쁜 초로 가지고 다니는 그의 습성이 우현의 오해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꼭 작정하고 안아달라 조른 사람으로 몰려버린 것 같았다. 성규가 발끈했다.
“아닙니다! 노골적인 게 아니라, 원래 소인이,”
“변명할 거 없다. 나는 노골적인 게 더 마음에 드니까.”
우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요부인 후궁도 나쁠 거 없지.”
우현이 깔아 놓은 이부자리 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성규가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다 자연스레 시선을 그 곳으로 옮겨갔다. 우현이 빈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성규가 어색하게 우현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들어와? 급기야는 목소리로 재촉한 우현이 한 손으로 머리를 받쳐 누웠다. 성규가 그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턱 끝에 매인 갓 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리저리 꼬물거리고 있는 손이 잠시 후에는 갓을 풀어냈다. 눈송이가 녹아 물기에 젖은 양태를 두어번 털어내고 마루 위에 올려놓자 어서 제가 들어오기만을 바라고 있는 시선에 더욱 진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제 쪽에서 자초한 일이었지만, 아직도 가까이 하기에는 심장이 울어 어려운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 성규가 곧바로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이불 밖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우현은 어쩐 일인지 참을성 있게 성규를 기다렸다. 그 성격에, 억지로라도 잡아끌었으면 끌었지 그토록 차분해 보이는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외려 더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제 볼을 간질인 성규가 이윽고 달보드레한 이부자리를 손으로 쓸었다. 성규가 꾸물거리며 이불 위로 올라왔다.
악! 그러나 이불 위로 앉기가 무섭게 팔을 당긴 우현에, 넘어지듯이 누운 성규가 저를 안은 팔위로 머리를 얹었다. 덕분에 조용히 심박수를 올리고 있던 심장이 더욱 박차를 가하며 뛰어대기 시작했다. 우현이 그 동그란 뒷통수를 끌어안았다. 성규의 코가 우현의 목 언저리에 묻혔다.
“왜 이리 늦게 온 것이냐?”
“그,그건… 도헌께서 너무 빤히 쳐다보고 계셨기에 섣불리…”
“왜 이리 늦게 들어온 것이냐고 물은 게 아니다.”
우현이 성규의 머리 위로 얼굴을 묻었다.
“너무 늦게 내게로 온 것이라…”
“…….”
“꾸짖는 거다.”
민망함에 달았던 성규의 표정이 천천히 식어갔다.
어쩐지 가슴팍 한 구석이 차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으나 우현은 알 턱이 없었다. 우현이 묘하게 굳은 성규의 팔을 잡아끌어 제 허리에 감도록 했다. 더욱 바싹 붙어 안은 몸이 서로에게 열기를 더했다. 그 탓에 우현의 품 안에 더욱 얼굴을 묻게 된 성규의 표정이 그의 속적삼 위에 감추어졌다. 우현이 잠자코 제게 안겨있는 성규의 뒷통수를 더욱 끌어다 안은 후에 웃었다.
“답이 없는 것은, 반성 중이란 의미인 것으로 해석해도 되는거냐?”
“…….”
“그러면 입.”
성규의 뒷통수에서 손을 뗀 우현이 이번에는 그 미지근한 두 볼을 손으로 잡았다. 품속에서부터 들어 올려진 머리가 우현의 눈을 마주했다. 장난기를 담은 우현의 눈이 웃고 있었다. 걱정 하나 없어 뵈는 눈을 잠시 동안 마주하다 성규가 입을 가져다 댔다.
쪽. 한없이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우현의 입 위에 찰나처럼 가 닿은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머릿속이 아찔했던 것도 잠시였다. 서니 앉고 싶고, 앉으니 눕고 싶다는 말처럼 입술을 얻으니 더욱 안달이 나는 기분이었다. 성규는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을 부리고 싶은 사람이었다. 꼭 지금처럼. 우현이 제 코를 툭툭, 두드리자 성규의 입술이 주문처럼 그 곳에 따라가 닿았다. 우현이 다시 볼을 가리켰다. 성규가 그 곳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가리켰다. 잠깐의 간격 후에 다시 입술은 우현의 입에 가 닿았다.
그리고 이내 그것은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갔다. 감길 듯 말듯 떠졌던 우현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가늘게 감겼던 얇은 눈매도 아득히 떠졌다. 둘의 숨 사이로 성규의 목소리가 먼저 뱉어졌다.
“도헌은 아십니까?”
“무얼?”
어느새 절반 잠긴 목소리가 물었다. 성규가 우현의 허리를 감은 손으로 그의 등 위쪽에 손바닥을 올려 당겨 안았다. 어느새 다시 얼굴은 가려졌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에 따르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고, 그것에 의하여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운명(運命)이라 하고,”
“…….”
“날 때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일컬어 숙명(宿命)이라 합니다.”
제 목 아래에 간질거리며 와 닿는 숨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성규의 말끝에 우현의 입꼬리가 희뭇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올라갔다. 우현이 저에게 붙은 성규의 머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다 알고 있는 것을 이리 자세히도 일러 주는 것은 각인시키려 함이냐?”
“예. 감히 도헌께 각인시켜두려 함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충분히 각인 되었다. 그러니까 다시 입.”
또 뻔뻔하게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우현을 향해 머리를 들어 올렸던 성규가 픽 웃고는 다시 그 목 아래에 얼굴을 묻었다.
“끝까지 들으십시오. 소인은 두 가지 숙명을 가지고 있는데…”
다시 이어지는 목소리가 속적삼 위로 간질이며 닿아왔다. 그러자 입술을 두드렸던 손가락을 거둔 우현이 한시라도 성규의 숨을 놓치기 싫어 마주 안은 몸을 끌어당겼다. 말을 하느라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갇힌 품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 중 하나인 겁니다.”
“뭐가?”
“소인이 방금 도헌께 입을 맞춘 것은, 숙명이 저를 가리켜 그리 하라 일렀기에 그런 것이지 결코 소인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리 변명을 하고 싶더냐?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것이라 말 하면 될 것을.”
“아닙니다. 하고 싶든, 하고 싶지 않든… 숙명은 그러합니다.”
“…….”
“정해진 길을 가게끔 만드는 거란 소립니다.”
이성이나 의지는 결코 그것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성규가 우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더 이상의 말은 잇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실로 그 이후로는 눈에 띄게 성규가 말을 잃었다. 무엇이든 알겠다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우현이 얌전히 안겨있는 성규의 뒷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감성이 깊어진 건지,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리 넘겨짚은 우현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어디서 배워 오는 거냐? 의서에 적혀 있는 것이냐? 매일같이 도서고에 드나든다 했더니, 그런 책이나 보고 있었던 거로구나. 이리 일가견이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그렇다면 나도 오늘부로 경전은 멀리하고 의서를 우선으로 익힐 것이다.”
그러자 잠시 동안 침묵에 빠져 있던 입술이 품 안에서 나직이 웃는 것 같았다. 우현도 성규의 웃음소리에 따라 서늘하게 굳었던 등허리가 사르르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성규가 누운 뒤편에 난 작은 창 밖에서는 아직도 쉼 없이 함박눈이 한창이었다.
경전을 멀리하면 망하십니다. 웃는 듯 마는 듯 하는 목소리가 천천히 느려지더니 그것은 이내 가지런한 숨소리로 바뀌었다. 우현은 성규가 베고 누운 팔이 저릿하다는 것도 아주 한참이 흐른 시각에서야 알았다. 잠자코 내려다보기만 해도 시간이 가는 줄 모를 만큼 곱게 감긴 눈이었다. 언젠가 또 이끌리듯이 입을 맞추었던 적이 있는 눈꺼풀이 거짓말처럼 가까운 곳에서 그 때처럼 감겨 있었다. 한 치의 떨림도 없이 곤히 감긴 눈꺼풀이 다시금 제 입술을 부르고 있었다.
우현이 다시 그 눈 위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야 겨우 두 번째로 맞는 입맞춤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 굳이, 세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나 끝없이도 눈을 나렸던 새벽의 장막이 겨우 걷히고 났을 때 쯤에는, 전 날 밤에 들었던 쓸데없는 숙명론(宿命論)에 파도처럼 마음이 일었다.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재직의 기침이라는 소리에 먼저 눈을 뜬 것은 우현이었다. 도기 장부에 이름만 적어 놓고 돌아오리라 하며 제기고를 나섰던 것이 이토록이나 후회스러운 뒷일을 남기게 될 줄은 몰랐다. 잠에서 깨어, 타다 말은 밀초 옆에 향 조각을 올려 두고ㅡ 잠에 빠져 있는 뒷모습을 남겨둔 채 제기고를 나섰지만 돌아왔을 때에는 다락방을 가득 채운 매화 향만이 돌아오는 이를 맞았다. 우현이 화촉 옆, 정갈하게도 접힌 종이를 들었다.
두 손으로 눈을 가려도 하늘은 가릴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시작한 글씨가 간밤에 부는 서릿발처럼 우현의 창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소인의 사사로운 감정이 어찌 법도를 앞설 수 있으며, 하늘이 제게 가르치는 뜻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치기어린 감정에 눈이 멀어 도헌의 앞길에 악을 씌우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소인의 나머지 숙명입니다.
우현의 마음 끝에 불길이 일었다.
*
제기고[ 祭器庫 ]
제향때 사용하는 그릇들을 보관하는 장소
화촉[ 華燭 ]
빛깔을 들인 밀초
궐외각사 · 궐외각사
궁궐 내에 위치한 부서와 궐 밖에 위치한 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