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제 걔 만났지?"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받은 카라멜 마끼아또가 내 목구멍을 넘어가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남친의 말에 난 그만 사레에 걸려버렸다. 켁켁. 따가운 목 때문에 기침이 나오는 건 물론이오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격하게 기침을 하는 내 모습에도 굳은 표정으로 팔짱까지 낀 채 바라보는 남친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난 기침을 자제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남친이 화가 난 이유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남친이 말하는 '걔'가 누군지 어느 정도 감이 왔다. 하긴 우리 사이에 불청객이 걔 말고 또 있을까.
하지만 쉽게 인정하면 더 화를 낼 것 같아서 부러 더 뻔뻔하게 시치미를 뗐다.
"걔? 걔가 누군데?"
평소에 남친이 좋아하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항상 그래왔듯 이번에도 애교로 어물쩍 넘어가야겠다 생각하며. 하지만 역효과였나 보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친의 표정이 굳어지다 못 해 썩어가기 시작했다.
"넌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여?"
친구들한테 들었어. 너 어제 김태형 만났지?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에 아랫입술을 지긋이 물었다. 또다. 결국 또 나와버렸다.
"내가 몇 번을 말해! 그놈 만나지 말라고!"
"아니, 내가 만나려고 만난 게 아니라 엄마가 나한테 반찬 좀 갖다 달라고 해서.."
"하.. 네가 걔 종이냐? 반찬은 걔 보고 알아서 가지러 오라고 하면 되잖아."
"엄마가 하도 부탁해서.. 너도 알잖아. 김태형 우리 엄마 아들이나 다름없는 거."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는 남친을 난 그저 바라만 봤다. 괜히 다가갔다 화만 돋울까봐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속으론 김태형에게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하는 중이었다. 아니 이 새끼는 말이야. 반찬 준다면 감사합니다 하고 냅다 달려와야지, 나한테 시키고 난리야. 부모님 해외로 가셔서 혼자 지내는 게 벼슬이야? 하여튼 그런 김태형 불쌍하다고 꼬박꼬박 반찬 챙겨주는 엄마도 문제다. 두 손 두 발 멀쩡히 달려있는데 굶어죽긴 뭘 굶어죽어.
"진짜 지친다."
나는 눈동자만 슬쩍 들어 남친을 살폈다. 내 n년간의 경험상 이때쯤이면 그 말이 나올 즈음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번엔 좀 오래간 것 같기도..
"헤어지자."
역시나. 이번엔 제대로 꽃 피나 싶었던 나의 연애에 종지부가 찍혔다.
그리고 그 원인은 항상 똑같다.
내 오래된 친구, 김태형.
그래. 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이유의 100에 95는 김태형이다. 나머지 5는 그런 김태형 제대로 처신 못 한 내 잘못이고. 하지만 연애하는 동안 잠시 연락 끊자는 내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김태형을 내가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23년 우정 남자 때문에 버린다느니, 나중에 결혼하면 잠수탈 것 같다느니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써가며 섭섭해하는 김태형을 매몰차게 밀어낼 힘이 내겐 없었다. 그래서 항상 차이는 거고. 이젠 이 상황이 너무 익숙해서 붙잡을 힘도 없다. 어쩌면 이제 난 고백을 받기도 전에 맥없이 차이는 미래의 내 모습을 먼저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여. 우리 솔로부대의 동지가 왔네?"
익숙하게 비번을 누르고 김태형의 집에 들어가면 거실 소파에 드러누운 그가 반갑게 날 맞이한다. 손까지 흔들며. 얼씨구? 지금 누구 때문에 헤어졌는데 그런 말이 나와? 지금 당장 저놈의 주둥아리를 묶어버리겠어. 두 손에 들고 있던 술과 술안주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김태형에게 달려갔다. 내 무서운 기세에 식겁했는지 히익 겁먹은 소리를 내던 김태형이 두 손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워. 진정해,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내가 누구 때문에 헤어졌는데!"
"그래서 내가 네 넋두리를 들어주겠다는 거 아니야."
말끝을 늘리며 헤실헤실 웃는 놈의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나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렇게 내가 화를 가라앉히는 동안 김태형은 잽싸게 술을 세팅했다. 소주잔, 맥주잔, 음료수, 젓가락, 오징어, 과자. 그리고 이 자리의 주인공 술까지. 단 몇 분만에 준비한 김태형은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뭐 해. 앉아.
아. 오늘따라 술이 잘 들어간다. 주량을 넘긴지는 이미 한참 지났다. 그럼에도 술은 막힘없이 술술 들어갔다. 기분 좋네. 하늘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김태형은 손에 턱을 괸 채 나머지 한 손으로 바쁘게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술에 취해서 그런가. 새삼스럽게 김태형의 잘난 얼굴에 감탄이 나왔다.
정말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다. 그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넘치지. 김태형 인기야 아주 어릴 적부터 대단했다. 그 어리디 어린 유치원생일 때부터 지금까지 김태형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리고 그것과 비례해 나에겐 항상 큰 곤욕이 따랐다. 인기 많은 남사친 때문에 나는 모든 여자아이들의 적이었다. 학기 초 친구들을 사귀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김태형과 관련된 일로 뒤에서 까이기 일쑤였다. 그게 너무 서러웠다. 딴 이유도 아닌 단지 김태형 하나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게. 나는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웠고, 그래서 행동으로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남자친구를 사귄다든가.
"탄소야, 나랑 사귀자."
그나마 다행인 건 나에게 고백을 해주는 애들이 꽤 자주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 난 살짝 고민하는 척 시간을 때우다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나쁜 애였다. 별 마음에도 없는 애를 단지 필요하다는 이유로 받아주었으니. 처음엔 좋아하며 나를 찾던 아이들도 적정선이 넘으면 철벽을 치는 나와 김태형의 존재를 이유로 들며 헤어지자고 했다. 처음엔 미안함에 몇 번 잡기도 했다. 그러다 점점 익숙해져 잡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래도 대학생이 된 이후론 아무나 막 사귀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호감이 있는 사람에게 나름대로 진심을 다해 사귀었다. 하지만 이런 내 변화에도 그들에게 김태형의 존재는 큰 걸림돌인가 보다.
"뭘 그렇게 빤히 봐."
여전히 턱을 괸 채 고개만 들어 날 바라보는 김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크게 울렁이는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확실히 김태형을 향한 것이었다. 난 급하게 손을 뻗어 소맥을 원 샷했다. 뭐든 입에 넣어 그것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김탄소, 그만 마셔."
너 그러다 집 못 들어가. 태형이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내 소맥을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에 나 또한 인상을 찌푸렸다. 내 소중한 소맥을 가져간 것도 짜증이 나긴 했지만 저, 저 어린애 혼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내려보는 김태형의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내 수울 왜 가져가능데! 내놔!"
술을 돌려받기 위해 열심히 손을 뻗지만 몸은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음만은 펜싱 선수 못지않게 뻗고 있건만 현실은 흐느적흐느적 오징어가 따로 없다. 그런 내 모습에 웃던 김태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절대 안돼. 더 이상 취하면 내가 널 못 데려다줘.
"씨이.. 집 안가며는 댈 거 아냐!"
내가 꼭 집에 가야대? 어차피 방두 많으면서. 나는 가누지 못하는 고개 때문에 힘겹게 눈동자만 들어 김태형을 살폈다. 김태형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만 까딱거리고 있었다. 저 버릇은 김태형이 불안할 때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뭐야. 내가 집에 있는 게 불안하다는 거야, 뭐야. 걱정 마. 너 안 죽여.
"너 다른 남자 앞에서도 그런 말 쉽게 하냐?"
숙이고 있던 고개를 갑자기 팍 든 김태형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화가 난 표정이었다. 화와 불안, 짜증 등 여러 감정이 얽히고설킨 듯한 표정. 갑작스러운 김태형의 말에 당황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데.. 너랑 상관없자나.
"뭐가 상관이 없어."
표정을 굳히며 머리를 쓸어올리는 김태형의 눈이 오늘 헤어진 남자친구의 눈보다 차가웠다. 허, 참.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남자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나. 없었다. 심지어 내가 남친과 데이트 한 얘기를 했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주던 김태형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당황스러움에 허허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다가도 갑자기 열이 뻗쳤다. 저기요. 내가요, 이 나이 먹도록 500일 기념 한 번 가지지 못하게 한 사람이 누군데요. 그런 사람한테서 남자 얘기가 왜 나와!
"야아. 내가 누구때무네 남친이랑 헤어지는데. 너 때무니잖아! 근데 왜 네가 화를 내?"
김태형이 작게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와 마주했다. 그 눈동자엔 여태껏 김태형에게서 보지 못 했던 감정이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 하나 때문에 쉽게 나가떨어지는 새끼들이랑 잘 돼봤자 뭐 하냐."
어? 내 귀를 의심했다. 자신감에 번뜩이는 그 애의 눈이 뜨거웠다.
"23년 동안 항상 네 옆에 붙어있는 애가 여기 있는데."
"그냥 사겨. 나랑."
절대 헤어질 일 없을 테니까.
어.. 뭔가 되게 급전개인 것 같지 않아요?
사실 더 길게 써야하는데 기빨려서 중간 부분을 많이 빼먹었어요.
다음에 더 추가해서 올릴게요ㅠㅠㅠ
번외는.. 태형이 시점으로 써보고는 싶은데 과연 내가 쓸 수 있을지..
+제목은 임시에요 곧 바꿀거에요오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