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준 민윤기 김석진
가장 보통의 존재 2
석진이 하얀 윤기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담배, 피고 싶네. 석진이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윤기가 고개를 돌려 석진을 바라봤다. 석진이 괜시리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윤기가 아무 표정도 없이 석진을 등지고는 바지에 하얀 다리를 꿰었다.
“밤도 늦었는데.”
“아직 차 있어요.”
“자고 가.”
석진의 말에 윤기가 꿋꿋히 가방을 챙겼다.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석진은 윤기와 자기 사이에 벽이 있다고 느꼈다. 다 넘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높아지는 벽.
“늦었다니까.”
“막차 시간까지는 아니에요.”
“……말 진짜 안 듣지.”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요.”
누가 보면 남이라고 생각될 대화였다. 석진이 입술을 깨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윤기가 석진에게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윤기의 붉은 손가락 끝이 석진의 미간에 닿았다. 인상 쓰지 마요. 그 말에 석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나서 윤기를 꼭 끌어 안았다.
“좀 자고 가면 덧나?”
“진짜 바빠서요.”
“뭘 한다고.”
“내일 형 출근도 해야 하고,”
“출근 안할게.”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나 내일 아침에 또 발표 있고, 아무튼 오늘은 안 돼요.”
맨날 오늘은, 오늘은. 언제가 되냐. 석진이 투덜거렸다. 윤기가 작게 소리내며 웃었다. 재밌어, 지금? 석진의 말에 윤기가 고개를 내저었다. 윤기가 툭 튀어나온 석진의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일 회사 앞으로 갈게요.”
“……”
“됐죠? 내일은 저녁 밖에서 근사하게 같이 먹어요.”
“……”
“그리고 내일은 자고 갈게요.”
그 말에 석진이 윤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 진짜 가요. 이번 버스 놓치면 20분 넘게 기다려야 돼요. 그렇게 말한 윤기가 운동화를 꿰어 신었다.
“조심히 잘 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
“알았어요.”
“무슨 일 없어도 전화.”
“알았어요. 집 가자마자 할게요.”
석진이 나가려는 윤기의 목덜미를 붙들고 입을 맞췄다. 짧게 떨어진 입술에 윤기가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석진이 공허해진 맘으로 소파 위에 엎어졌다. 그나마 윤기가 있을 때는 이 집이 작아보였는데, 윤기마저 가버리고 나니 모든 것이 공허해졌다.
/
“어…….”
버스를 기다리던 윤기의 시선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피했지만, 눈치 없게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얼굴 덕에 그 계획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안녕하세요. 선배.”
“어.”
“또 보네요. 오늘. 두 번째죠?”
“어. 뭐. 그러겠지.”
남준이었다. 윤기의 심드렁한 말에 남준이 웃으며 윤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윤기의 말에 남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요.”
“그래.”
“몇 번 타세요?”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윤기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남준이 짧은 시간에 윤기의 표정을 캐치했다. 대화를 나누기가 싫은 모양인 듯 했다. 남준이 천천히 윤기의 눈에서 부터,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까 점심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딘가 지저분하고 흐트러진 느낌이다. 그게 딱 어디라고 짚을 수 없지만, 그냥 전체적인 느낌이 그랬다. 남준이 천천히 다시 고개를 올리며 윤기와 눈을 마주쳤다.
윤기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옮겼던 그 시선 중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 본인은 안 보일거라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37번. 윤기가 말을 할 때도 눈을 쳐다보지 않고 말을 하는 목덜미를 바라봤다. 말을 하는 그 모양 그대로 목울대가 움직인다. 그 붉은 자국 또한 움직였다. 남준이 한참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거뒀다.
“……그렇구나.”
“어.”
“전 52번 타는데.”
“그렇구나.”
심드렁한 윤기의 대답에서 ‘나 대화 존나 하기 싫어. 너랑.’이라는 느낌이 확 느껴졌다. 남준이 한참 윤기를 쳐다보다가 이어폰을 꽂았다. 버스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남준이 말이 없다는 걸 느낀 윤기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 남준을 바라봤다. 남준의 두 귀가 하얀 이어폰으로 틀어막혀 있었다. 싸가지 없는 놈. 말 걸어놓고 자기는 이어폰이나 꼽고 있고.
그렇게 생각한 윤기가 자기도 이내 이어폰을 꽂았다. 아까의 대화를 곱씹어 보는데, 생각해보니 싸가지 없는 건 남준이 아니라 윤기 본인이었다. 그렇구나. 그래. 어. 딱 세 개의 대답으로 이루어진 대화였다. 먼저 물어본 건 다 남준이었다. 아무리 남준이 별로 좋은 이미지는 아니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윤기가 고개를 남준 쪽으로 돌렸다.
“저 먼저 갈게요.”
“어, 어. 그래라.”
남준의 앞에 멈춰선 초록색 버스에 윤기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가. 남준이 버스에 타서도 유리창 너머로 윤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였다. 뭐야. 결국은 말도 못 걸었네. 윤기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만 어루만졌다. 52번 버스가 저 멀리 멀어졌다. 난 버스 언제 오냐. 윤기가 괜히 혼자 중얼거렸다.
/
꿈에선 남준과 윤기의 입장이 바뀌어 있었다. 입장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냥 윤기가 남준에게 계속 한도 끝도 없이 말을 걸고 남준은 한도 끝도 없이 무시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윤기는 속으로는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꿈이라 그랬는지 마음처럼 그렇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뻔히 다 아는 사실들을 물어보고, 또 더 깊숙한 것들을 물어봤다. 남준은 그런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
네, 아뇨, 그러세요, 아닌데요.
짧은 대답으로 대화를 끊기 일쑤였다. 윤기는 처음에는 그 상황에 관심이 없었지만 자꾸만 대화를 끊으려 하는 남준에 호기심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너 뭐 그렇게 잘났는데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구냐. 목 끝까지 차오른 질문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아.”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아서 깨버렸다. 더운 날씨는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 식은 땀이 흘렀다. 윤기가 땀을 훔치며 일어났다. 기분이 나쁘다. 꿈속에서 자신이 남준한테 매달리고 이래서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다.
꿈 속에서 윤기는 짧게 대답하고 관심없다는 듯 재수 없게 구는 남준을 보면서 ‘이 새끼 잘난 거 하나 없으면서’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꿈에서 깼을 때는 현실에서 자신을 보며 그렇게 생각할 남준이 떠올라서 기분이 나빠졌다.
[자나 보네] 김석진
[도착하면 전화 하랬지] 김석진
[말 드럽게 안듣네 일어나면 연락] 김석진
[나 지금 출근하는데 지하철에서 너 닮은 사람봄ㅋㅋ] 김석진
가득 쌓인 석진의 문자에 윤기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 닮은 사람이 또 어딨다고. 윤기가 천천히 답장을 써내려갔다. 나 닮은, 아니, 나를, 아니. 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짧게 보냈다.
[그랬어요?]
그 답장이 전송되었다고 알림이 뜬지 3초도 되지 않아서 전화가 왔다. 김석진. 그 세 글자에 윤기가 한숨을 내쉬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자다 깼나 보네. 목소리가 자다 깬 목소리야.
“……뭐 방금 깼어요.”
-너 닮은 사람 봤다. 아, 근데 나 지금 회의 들어가야 해.
“끝나면 연락해요.”
-응. 아침 발표 잘하고.
석진과의 전화가 끊겼다. 윤기가 뭐 이런 전화가 다 있어, 하고 생각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회의 간다면서 연락하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알림을 확인했다.
[선배 아침 드셨어요?] 16 김남준
[아니]
[나랑 같이 먹어요 학교 앞에서 기다릴게요] 16 김남준
막무가내라고 느껴진다. 꿈에서도 느꼈지만 이렇게까지 굴 정도가 되면 속으로는 얼마나 자기를 까고 있을지 안 봐도 뻔히 느껴졌다. 윤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불을 걷어버리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가 왜?]
싸가지 없을 거면 아예 싸가지가 없어야지. 이렇게. 윤기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남준과 아침을 먹을 건 아니지만 어쨌든 학교에 가야 하기에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윤기가 입고 있던 반팔티를 벗어서 세탁기 안으로 집어 넣었다. 식탁 위의 폰이 한 번 더 진동했다. 윤기가 칫솔에 치약을 짜고는 입에 물었다. 거품을 한껏 낸 채로 거실로 나와 핸드폰을 확인했다. 거품이 뚝 하고는 식탁 위에 떨어졌다. 확인하지 말 걸 그랬다.
[같이 먹고 싶으니깐요] 16 김남준
말이 안통하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
“모기 물렸네요.”
“어, 어.”
“아직 초여름인데.”
“그러게.”
윤기가 심드렁하게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깍두기를 입에 넣었다. 얼떨결에 뼈해장국을 두개 시켜 하나씩 먹고 있었다. 어제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해장하듯 마주보고 앉아서 대화도 없이. 아니, 대화가 없는 게 아니라 대답이 없이. 윤기는 꿈에서 그렇게 겪었지만 대답해줄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맛 없어요? 다른 거 시킬까요?”
“돈 많냐?”
“나름요.”
“아껴 써라.”
윤기가 크게 한 입 떠 먹었다. 남준이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윤기를 한참 바라봤다. 윤기가 남준의 그릇을 바라봤다. 반도 채 먹지 않았다. 거의 새거라고 다시 내놓아도 될 정도로. 몇 번 숟가락으로 휘적인 것이 끝인 상태였다.
“안 먹을 거면 왜 시켰는데?”
“말했잖아요. 선배랑 같이 먹고 싶었다구요.”
“……진짜 좆같게.”
실제로 남준에게 욕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근데 욕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존경이고 나발이고 뭘 원해서 이렇게 자꾸 치덕이는 건지. 이 정도 표현 했으면 알아서 떨어지고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선배 나 싫어하죠.”
드라마 같은 대사를 치고 앉았다. 윤기가 사레가 들렸다. 남준이 윤기의 손에 물컵을 쥐어주었다. 왜 그래요. 정곡을 찔렀나. 그 무신경한 듯한 말투에는 날이 박혀있었다. 진짜 또라이 새끼가. 윤기가 남준을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싫다고 하면 어쩔 건데.”
“어쩔 수 있나요. 계속 이렇게 서로 얼굴 붉히고 마주쳐야죠.”
“꺼질 생각은 안 하고?”
“선배는 내가 왜 싫어요?”
남준의 표정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윤기가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 놓았다. 밥맛 떨어지게 노네. 윤기가 지갑을 꺼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물어봤는데.”
“어쩌라고.”
“내가 왜 싫냐구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여전히 남준이 윤기를 다 안다는 듯 쳐다봤다. 모기 물렸네요, 그 말도 기분 나빴다. 알면서 뭘 물어. 모기가 남긴 자국이 아니라 사람이 남긴 자국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아껴 써요.”
남준이 윤기의 카드를 윤기의 바지 뒷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카드를 꺼내 계산했다. 윤기가 인상을 팍 쓰고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남준이 뒤늦게 따라나와 윤기를 붙들었다.
“놔라.”
“말해주면요.”
“그냥.”
“그냥요?”
“어. 이유 없이 좆같아. 그니까 그만 치덕대라. 뭐하는 거야. 이게.”
“나돈데.”
말이 안되는 소리들을 짓걸이는 남준이 미쳤다고 생각됐다. 윤기가 인상을 쓰고 남준을 쳐다봤다.
“나도 이유 없이 선배랑 친해지고 싶어요.”
“……”
“그냥, 이유 없어요.”
그리고선 굳게 입을 다물고 윤기를 쳐다보는 남준에, 윤기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붙잡힌 손을 놓아버렸다. 아침부터 기분이 복잡하다. 윤기가 남준을 두고 그대로 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윤기는 사실상 남준이 마음에 들지 않나 봐요.... 약간 관심이 생길 것 같으면서도 관심이 사라지는 그런 느낌....? 남준이는 윤기에게 무한정으로 치대고... 석진이랑 윤기는 라브라브 중.. 언제 쯤 어떻게 관계가 변하게 될까요..!가장 보통의 존재 2
1) 보통 베스트셀러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