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대단하다, 도경수."
"내 동기지만..독해."
그러니까, 도경수가 매일 당직을 서겠다고 한 지 4일이 경과한 날이었다. 피곤에 절은 얼굴을 해서는 스테이션에 기대어 꿈지럭 꿈지럭 차트를 쓰는 도경수를 보고 나와 박찬열이 내뱉은 말이다.
"야, 도경수."
도경수를 툭툭 쳤더니 반은 풀린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아, 해."
내 말에 눈을 도륵 도륵 굴리고 있길래 답답함에 주머니에 있던 홍삼팩을 꺼내서 입으로 툭 뜯었다. 그 때까지도 아-하지 않는 도경수 덕에 한 손으로 도경수 양 볼을 잡아 눌렀더니
"어아는거아.."
뭐하는 거냐며 입을 우물우물 대는 틈을 타 홍삼팩을 쭉쭉 짜서 입으로 넣어주었다. 진짜, 소아과 의사도 아니고 내가 정말. 어제 본 도경수가 정말 쓰러지기 일보 직전 같아서 김준면이 혼자 챙겨먹는 홍삼 팩을 서너개 챙겨왔었다. 하나는 방금 도경수 입으로 들어갔고 남은 홍삼팩을 불쌍한 우리 경수 가운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꼬옥 챙겨먹으라는 당부를 했다. 물론 절대 안 챙겨먹을 성격이란 걸 알지만, 나는 동기사랑의 임무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같은 동기 어디있냐, 응. 경수야."
그 뒤로 박찬열도 도경수 입에 거의 고문하듯 초콜렛을 쑤셔넣었고 멍하니 서있는 도경수를 위해 박찬열은 친히 턱까지 손으로 움직여주었다.
"당 충전 하시고, 당직 좀 넘겨라. 며칠동안 잠을 잘 잤더니 허리가 아프다, 야."
박찬열의 말에 도경수는 그냥 슬쩍 웃을 뿐 손에 들린 차트만 기계적으로 꿈지럭대고 있었다. 당직일 때만 쓰고 있는 안경도 도경수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고 나와 박찬열은 그 모습을 스테이션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짝다리를 짚고.
그 때 도경수 가운 주머니에서는 삐빅삐빅, 하며 PDA가 열심히 울렸다. 너무 차트에 집중한 탓인지 도경수는 제 수신기가 울리는지도 모르고 볼펜만 끄적끄적, 결국 박찬열이 직접 도경수 주머니의 호출기를 꺼내 들었다.
"..어,"
그제야 제 콜임을 알아챈 도경수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박찬열을 쳐다봤고 박찬열은 호출기에 찍힌 글자를 확인한 후 다시 도경수 주머니에 손수 넣어주었다.
"어디야?"
"내가 갈거야, 자식아."
"어딘데."
"이알."
"아냐, 내가 갈게."
"너 나 응급실 좋아하는 거 알면서? 내가 갈거야."
도경수가 어어, 하며 박찬열의 팔을 잡았지만 박찬열은 그걸 아주 매섭게 뿌리치고 이알로 향했다. 아니 근데 내 팔목은 왜 잡고 가는건데...나는 응급실 싫단 말이야.
"아니, 나는 왜 데리고 가는데."
"내가 너 없이 어떻게 다녀?"
"미쳤어?"
"너한테 미쳤지."
"진짜 또라이새끼야."
또라이도 이런 상또라이가 없지. 그렇게 박찬열과 투닥투닥대며 잡힌 손목에 이끌려가고 있는데 박찬열이 어,하며 우뚝 멈춰섰다.
"왜!?"
"승질 좀, 아줌마야."
"왜, 이알 콜 왔다며. 응급실 가는 거 아냐?"
"저기, 의자에 앉아있는 애..블리딩(출혈) 있는 거 아니야?"
어디? 하며 박찬열이 턱짓으로 가르킨 쪽에는 고등학생 정도로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두명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깔깔거리며 웃는 중이었다. 블리딩?
"레프트 어퍼에.."
레프트..어퍼..이미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박찬열을 좇아 따라가며 확인해보았더니 정말 붉게 물든 환자복이 보였다. 서둘러 수액 연결 부위와 줄줄이 달린 기구들을 확인해보니,
"야, 기흉수술 한 것 같은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찬열은 이미 그 여학생에게 도착해있었다.
"어?"
웬 흰 가운 입은 사람이 다가가자 여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학생, 이렇게 나와있으면 안될텐데."
장난스레 눈을 흘긴 박찬열이 나를 돌아보며 이리 와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여기 피나는 거 보이지? 좀 볼게. 얘가 볼거야."
박찬열 말대로 살짝 옷을 걷어 확인 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옆구리에 박아놓은 튜브가 움직임을 견디지 못해 반 쯤 빠져나와있었다.
"야..빠졌어."
내 말에 박찬열은 골치아프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고 나는 튜브가 더 빠질 것을 대비해 일단 테이프로 대충 고정을 시켜 두었다.
"근데 pneumothorax(기흉)면 GS아니야?"
"어, 우리 병동?"
"친구야, 몇 층에서 왔어?"
"칠층이요.."
칠층이면 우리병동이 확실했다. 박찬열이 아는 체 안하는 거 보니 박찬열 환자도 아니고, 내 환자는 더더욱 아니고..
"도경수 환자네."
"내려오라 하면.."
"화낼거야."
그래. 우리가 올라가자. 응급실은 잠시 미뤄두고, 나는 출혈이 더 심해질새라 여학생의 옆구리를 손으로 눌렀고 박찬열은 치렁치렁 달려있는 배액관을 번쩍 들었다. 튜브 더 빠지면 안돼, 그러면 진짜 우리 경수 스트레스 폭발해서 죽을 지도 몰라.
조심조심 병동으로 올라가니 아까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도경수가 보였다. 배액관을 들고 있는 박찬열을 대신해 내가 쪼르륵 달려가 경수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환자..튜브 빠진 것 같아."
놀라지 말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건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도경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헤헤..쌤 죄송해요.."
둘이 딱히 어려운 사이는 아니었는지 여학생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3초간 상태파악을 위해 여학생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스캔한 도경수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버렸다. 우리 경수 스트레스 폭발하겠네. 곧 죽겠어.
"...나가지 말라고 했잖아."
"친구데려다 주려고 잠깐.."
"이틀은 누워있어야 된다고 말 했잖아. 퇴원 안 할거야?"
잔뜩 낮아진 경수의 목소리에 괜히 나도 쫄아버렸다. 여학생은 완전히 쫄아버린건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해요..만 몇 번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괜히 도경수 심신이 불편할 때 사고를 쳐서는. 안쓰러운 마음에 경수 손을 톡톡 쳤다. 애 완전 쫄았어.
"이리 들어와."
벌써 여학생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도경수랑 둘이 들여보냈다가는 정말 저 애가 펑펑 울어버릴 것 같아서 나도 같이 처치실로 들어갔다. 도경수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조용히 옆에서 거즈를 몇개 꺼내고, 소독솜도 몇 개 꺼내고..
"아이구, 안 아팠어?"
긴장하면 튜브도 안들어가는데. 완전 굳어버린 여학생의 긴장을 좀 풀어주려고 우쭈쭈 아기 어르는 목소리를 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배액관을 바닥에 내려놓은 박찬열은,
"야, 나 이알 내려간다."
라며 자리를 떴다. 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 나는 다시 거즈머신처럼 거즈만 수북히 쌓아놓았다.
도경수가 옷을 걷고 튜브가 반 쯤 빠진 그 광경을 눈으로 확인하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까보다 더 삐져나왔나, 아닌가..
"너 이거 넣을 때 아프다고 울었으면서 또 넣을거야?"
조금은 누그러진 경수의 목소리에 나는 용기를 내어 경수 옆으로 폭삭 붙었다. 어디 보자.
"목욕 못 한다고 찡얼거려놓고, 여기는 피 칠갑을 해놓고.."
그러면서 또 다정하게 거즈로 흘러나온 피를 꼼꼼히 닦는다. 옆에서 나는 또 코러스를 넣었다. 아유, 아팠겠다.
"힘 풀어봐. 조금만 넣을게."
장갑을 손에 낀 경수가 조심조심 튜브를 밀어넣었다. 드디어 변합없던 배액관에 기포가 뽀르르뽀르르 차올랐고 그걸 확인한 경수는 반창고로 튜브 주변을 꼼꼼하게 고정했다.
"히끅,"
우에엥-,하며 여학생이 울음을 터뜨렸다. 울컥울컥하며 움직이는 가슴팍에 나는 또 튜브가 빠질새라 얼른 등을 토닥였다. 울지마, 울다가 튜브 또 빠지면 도경수 정말 병원 폭파시킬지도 몰라..
"알았어, 미안해. 아팠어?"
도경수가 그제야 슬쩍 웃으면서 장갑을 벗었다.
"이제 나 밉지? 귀 큰 선생님으로 바꿔줘?"
장난섞인 농담을 던지자 우는 와중에도 여학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왜, 잘생겼다며."
그래도 고개를 젓는 아이에 기분이 좋았는지 경수는 목소리가 점점 나긋해지고 있었다.
앞으로는 화장실 갈 때 빼고 침대에서 절대 내려가지 않겠다고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을 하고 나서야 여학생은 무사히 병실로 옮겨졌다. 그렇게 큰 관문을 통과하는가 싶었는데,
"망함."
박찬열이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처치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스테이션에서 얼굴이 빼꼼 튀어나왔다.
"우리 예쁜이가 펑크낸 이알 콜 내가 막았어."
민석 선배였다.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네 동기가 불었어."
이 박찬열 미친새끼가..나의 동기가 불어서 변백현이 알게되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민석선배는 홀연히 사라졌다.
"아니..나는 선배가 응급실에서 나오길래, 당연히 치프쌤도 같이 있었는 줄 알고.."
"알고?"
"...뒤에 치프쌤도 나오길래 죄송하다고 했어."
그래서 알았구나. 너무나도 눈치를 보는 내 동기 덕에 우리 셋은 쪼르르 의국으로 불려가 신나게 탈탈 털려야했다.
ㅡ
"야, 봤냐? 아까?"
"뭐?"
"치프쌤 손가락."
스테이션에서 볼펜을 끄적이며 수다를 떠는데, 치프쌤 손가락이라는 박찬열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어..손가락? 왜?"
"손가락에 노란색 캐릭터 밴드가 붙어있더라니까."
"아..그래?"
"아까 털리는데 그거 보고 어후, 매칭이 안돼서 웃음 삐져나오려는 거 겨우 참았다."
거기서 박찬열이 웃었다면 나는 정말 박찬열의 명치에 주사기를 꽂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튼 별 말 없이 넘어간 치프쌤의 손가락 밴드이야기 덕에 나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별, 괜한걸로 심장이 내려앉고 그래..
"근데 도경수는?"
"그러게, 이제 이알 내려가야하는데."
레지던트 1년차의 꽃, 응급실 근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경수가 보이질 않았다. 이것도 늦게 내려가면 정말 치프쌤은 우릴 몽땅 해고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스테이션 진득이가 어딜갔대."
박찬열이 전화를 해봐도 받지 않는지 몇 번이고 다이얼을 눌렀다.
"아, 왜 안받..어, 여보세요?"
드디어 전화를 받았나보다.
"어? 잔다고?"
박찬열이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끊었다.
"무슨 말이야?"
"튜브빠진 여자애가 받았는데..잔다는데?"
"뭐?"
"자기 병실에서 자고 있대."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야. 박찬열과 나는 서둘러 그 여학생의 병실로 향했고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정말 그 여학생의 말대로 엎드려 자고 있는 도경수였다.
"나랑 놀아준다고 왔는데, 나 화장실 갔다왔더니 자고 있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병실에서 이러고 있냐, 경수야.
"야, 도경수."
어깨를 잡아서 흔들흔들 했더니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일으켜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도경수 양 볼을 손으로 잡았는데,
"야,"
손에 전해져오는 뜨거움에 순간적으로 손을 확 떼어버렸다.
"왜?"
"얘, 열.."
"어?"
"열..열 나. 너 체온계 있어?"
어,어. 박찬열이 주머니에서 체온계를 꺼내 도경수 귀에 집어넣었고 체온계에 선명하게 찍힌 39.8도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도경수, 괜찮아? 야!"
박찬열이 아무리 흔들어도 도경수는 눈만 찡그릴 뿐 몸에 힘을 전혀 넣지 못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여학생과 병실 안 환자들을 신경 쓸 틈도 없이 박찬열은 도경수를 등에 업고 병실을 달려나갔고 나도 그 뒤를 좇았다.
"어디, 어디가야하지!?"
"이알 내려가야하나?"
박찬열도 당황스러운지 보기 드문 동공지진을 보였고 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온 엘레베이터는 다 잡고 올라오지 않는 엘레베이터에 발을 동동 굴렀다.
"계단으로 갈까!?"
결국 우리는 계단을 택했고, 박찬열은 땀을 뻘뻘 흘려대며 응급실 진입에 성공했다.
"쓰러지셨어요!?"
"아니, 쓰러진 게 아니고..막, 열나고..며칠 잠을 못자긴 했는데,"
업혀 온 흰 가운을 본 응급실 간호사는 순식간에 도경수를 침대에 눕혔다. 당황스러움에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어버버거리고 있는데 박찬열이 갑자기 응급실 스테이션쪽을 향해 고개를 꾸뻑 숙였다. 자연스럽게 돌아간 시선의 끝에는,
"선생님!"
우리 치프쌤이 서있었고 나는 반가움 반, 안도감 반에 눈썹을 잔뜩 내려뜨렸다. 물론 쌤은 표정변화 1도 없이 우리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지만 말이다.
"선생님, 경수..."
당황스러우면 이성을 잃기 마련이라고 하는데, 그게 딱 내 상황이었다. 눈 앞에 낑낑거리고 누워있는 도경수 탓에 평소 병원 밖에서 칭얼거리듯 선생님을 불렀지만 선생님은 내게 눈길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랬어?"
"발견한 건 10분 전이었는데 아침부터 컨디션 안 좋아보였어요."
박찬열의 차분한 말에 쌤은 고개를 끄덕이며 체온계를 꺼내 열을 체크했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훔쳐본 체온계 화면에는 아까와 비슷하게 39.7이 찍혀있었다. 아, 우리 경수 죽으면 어떡해...
"루틴나가고 아이스팩 가져와."
넵! 하고 박찬열은 아이스팩을 가지러 뛰어나가버렸다. 어..?
"뭐해, 루틴 안 뽑아?"
박찬열이 나가버린 탓에 도경수의 피검사는 오롯히 내 차지가 됐다. ABGA할 때마다 손을 떨던 나였는데, 그게 치프쌤 앞이라면..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 후 일단 바늘을 들었다. 아씨, 손 떨어도 항상 잘 했는데. 이게 또 아는 사람 동맥을 찌르려니 더 긴장되는거다. 열이 나서 땀으로 앞머리가 죄다 젖어버린 불쌍한 도경수의 동맥이라면 더더욱.
박찬열도 없겠다, 도경수는 의식이 없겠다..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수의 콩닥거리는 동맥을 짚은 후 치프쌤을 쳐다봤다.
"선생님.."
진짜 너무 떨리는데..실습할 때 서로 팔을 찔러봤던 거랑은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일단 실제상황이었고 불쌍한 도경수의 팔목을 두번 찌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최대한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봤더니 잠시 입술을 꼭 깨문 선생님은 손을 뻗어 내가 잡고 있던 도경수의 동맥 자리를 짚었다.
그리곤 고개를 살짝 끄덕.
덕분에 신뢰도 백퍼센트로 경수의 동맥을 푹 찔렀다.
"아으..."
아픈 지 팔을 꿈틀대는 경수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다행히도 동맥혈을 쪼륵 잘 뽑혀나왔고 땀을 삐질거리며 커텐속에서 나왔다.
"9번 ABGA요.."
스테이션에 경수의 동맥혈이 담긴 주사기를 건네준 후
"야, 아이스팩 두개 더 들고 오래!"
다급한 박찬열의 말에 숨돌릴 틈도 없이 냉동실을 향해 뛰어가 아이스팩을 챙겨 경수에게 갔다.
"옷 벗기고 하나 목 뒤에 받쳐놔."
차분한 치프쌤의 말에 박찬열이 빠른 손길로 경수가 입고 있던 수술복을 벗겼다. 스판기가 없어서 더럽게도 안 벗겨지는 수술복에 박찬열은 입술을 꽉 깨물고 아득바득 벗겨낸 후 이마에 땀을 닦았다.
"뭐해? IV 연결 안해?"
"아, 네, 네."
우리 경수 아이브이, 아이브이.. 박찬열이 준비해 온 정맥주입세트를 얼른 꺼내들고 경수의 팔을 잡았다. 학교 다닐 때 IV를 배우긴 했지만, 사실상 임상에서는 간호사들이 하는 게 대부분이라 의사들은 IV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그래서..
"내가 할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본 박찬열이 나에게 물었고,
"네가 해."
단호한 치프쌤의 말에 박찬열이 내민 도움의 손길은 무색해져버렸다. 아이스팩을 온몸에 대고 있는 탓에 도경수의 혈관은 잔뜩 쪼그라들어 있었고 난 도경수의 팔이 동강날 정도로 토니켓(지혈대)을 세게 묶었다.
"애 팔 괴사되겠다."
아니나다를까, 토니켓 세게 묶었다고 한마디 던지는 치프쌤의 말에 나는 주섬주섬 토니켓을 풀었다. 아 그럼 아이스팩 대기 전에 아이브이 잡으라고 하든가..
"이쪽으로 와."
넵, 바로 치프쌤 옆으로 간 나는 경수의 왼팔이 아닌 오른팔에 토니켓을 묶고 팔을 탁탁 쳤다. 아, 따뜻하다. 우리 쌤 손바닥에서 옮겨졌을 온기가 느껴졌다. 내 바늘이 들어갈 혈관을 넓혀놓기 위해 치프쌤은 내게 핀잔을 주면서도 경수의 팔을 꽉 잡고 있었던 거다.
"..됐다."
단번에 성공한 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오더는?"
"데노간, 100cc NS(식염수)에 믹스.."
열나니까, 해열제..치프쌤의 질문에 대답한 뒤 곁눈질로 박찬열의 표정을 살폈다. 끄덕끄덕, 맞다는 말이다. 박찬열은 내가 치프쌤의 질문에 병신같은 답을 하면 두눈을 꼭 감는다. 하지만 지금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내게 무언의 칭찬을 보내고 있으니, 맞았다는 거다.
"투약만 할거야?"
"아, fever(열) 체크.."
"몇 분 마다?"
"5분, 15분, 30분이요."
이번에도 박찬열의 눈은 크게 떠져있다. 쓰러진 건 도경순데, 몰려드는 질문에 내가 쓰러질 지경이다.
"커텐 걷고 열 떨어지면 퇴원수속 시켜서 당직실에 눕혀놔."
"네."
"둘 다 마스크 써. 플루면 옮아."
네. 서둘러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당직 대타는 알아서 정하고."
네..매정해, 매정해. 나는 속으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매정한 지에 대해서 되뇌였다. 애가 아파서 쓰러졌는데 걱정스런 말 한마디 안해주고 표정하나 안 변하고 당직 대타나 정해놓으라니. 그거야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애가 헐떡거리는 앞에서 꼭 해야할 말이냐고.
내가 속으로 욕을 하든 말든, 치프쌤은 응급실을 빠져나갔고 나는 땀에 젖은 경수의 머리를 손끝으로 만졌다. 불쌍한 내 동기.
"헐, 미친."
커텐을 걷었던 박찬열이 튀어나오는 욕을 막으며 빠르게 커텐을 쳤다.
"왜? 이불로 덮어 놨는데."
우리 경수 윗통 까고 있어서 그런건가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더니, 박찬열은 다시 쳐진 커텐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밖을 확인한다.
"왜, 뭔데."
"야, 기다려. 커텐 절대 걷지말고."
"열나는데.."
커텐 안의 공기는 후끈후끈한데..내가 중얼거리든 말든 박찬열은 커텐 밖으로 빠져나갔다. 난 박찬열이 하는 말이면 뭐든 듣는다. 내 동기 중 가장 엘리트니까. 그래서 박찬열이 올 때까지 커텐 안에 꽁꽁 숨어 박찬열을 기다렸다.
"야, 어떡하냐?"
10초도 안되어 다시 커텐 속으로 들어온 박찬열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옆 베드에 도경수 애인이야."
ㅡ
의사 배켜니는..좀만 기다려주세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