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씨가 경찰 불렀어요?"
"왜 그랬어요." "네?" 어딘가 잘못됐다. 혼자 사는 옆집 남자 집에 생각 없이 온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첫째로 생각해야할건 지금 순간부터 제 앞의 남자가 엄청나게 수상하고 이상하게 두려워졌다는 것이었다. 평소 이런 이미지가 전혀 아니었기에 더욱 이질감이 느껴졌다. 제 앞의 낯선 김원식은 더 이상 알던 김원식이 아니었다. 검은 모자를 눌러써서 눈이 반쯤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무언가 섬뜩했다. 얼어붙는 분위기에 온 몸의 털이 서는 기분이었다. "정의감이 쓸데 없이 넘치시네. 저는 죄 안짓고 사는 사람 못봤는데. 평소에는 아무 죄책감 없이 죄 짓고 살다가, 남들이 저지르는 불의에만 못참고 주제 넘게 끼어드는 그런 사람이요. 제일 쓰레기라니까요. 별빛씨도 아시려나? 특히 이 동네에 정말 많더군요. 아, 그래서 이렇게 음산한가. 혼자 살면 무섭지 않아요? 조심하세요. 혹시 알아요. 별빛씨가 여자만 죽인다는, 그 연쇄살인범의 표적일지." 생긋- 무서운 말을 하고 나서 잘도 웃는다. 그 웃음이 마치 제 뇌를 간파하고 있는듯 해서 관자놀이가 저릿했다. 원식은 별빛의 표정변화가 매우 흥미로웠다. 점점 커지는 눈이라던가, 좁혀지는 미간, 벌어지는 입술같은 것 말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하나도 빠짐 없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거의 본능이었다. 언젠가 저거보다 더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싶었다. "재밌네요. 당신." 원식은 개의치 않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려고 데려온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생각보다 제 앞에 있는 여자를 놀리는게 재밌다고 느껴졌다.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 굴러들어온 꼴이다. 마음 같아선 일침을 가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온건, "그게 무슨..." 이 따위 나약해빠진 말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경찰을 부른건 별빛이었다. 지난 몇달동안 끊이지 않는 연쇄살인에 온 동네가 들썩였다. 민중의 지팡이는 무능하고, 범인은 어찌나 날쌔고 똑똑한지 잡히지도 않았으며, 그저 젊은 여자만 노리는 젊은 남자라는 찌라시에 불과한 얘기만 떠돌 뿐 아무 단서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건이 발생했다. 새벽에 주책 맞게 보름달을 구경하겠다고 커텐을 걷은 게 화근이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리고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긴 머리카락같은 뭉텅이를 잡고 있었다. 얼핏 하이힐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땅을 보고있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정확히 별빛을 쳐다봤을 때, 별빛은 바로 커텐을 쳤다. 설령 그가 그녀를 본게 우연이었을지라도 그녀는 한동안 벌렁거리는 심장을 잠재우지 못한 채 한 손으로는 112를 눌렀다. 워낙 소심한 성격 탓에 배달 음식도 혼자 못시켜먹는게 그녀인데, 용케 용기를 낸 것이었다. 아마 온 지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함부로 신고하지도 못하고 홀로 맘고생을 했을게 분명했다. 덕분에 난생 처음 서에도 불려가보고, 살다보니 별 일을 다 겪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별 일이었다. 오며가며 가끔 보기에 안면은 있던 옆집이 대뜸 차나 마시자 말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말투도 다정하니 내심 맘에 두었던 남자였지만 갑자기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얼이 빠졌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얼떨결에 그의 청을 받아들이게 됐고, 둘이서만 만남을 갖게 됐다. 그랬더니, "별빛씨가 경찰 불렀어요? 왜 그랬어요. 나 경찰 되게 싫어하는데." "네?"
"귀엽긴. 농담이에요. 속았죠? 신경 안써도 돼요. 차 한 잔 하세요." 이렇게 된 것이다. 그의 사고방식은 정상적인 범위에서 한참을 이탈했다. 아직 골목마다 경찰이 와글대는데도 별빛에게 뻔뻔하게 본색을 드러냈다.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놓고 아무렇지 않게 푸스스 웃으며 차를 권하고 있다. 모든게 정지됐다. 여기서 얼른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호흡이 가빠졌다. 그의 눈을 더이상 마주하면 질식할 것만 같았다. 별빛은 버벅대며 급히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 잡아놓은 먹잇감이 눈 앞에서 도망치려 한다. "아아, 아니에요. 저 가볼게요." "그럼 데려다드릴게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요, 여자 혼자 다니면 절대 안돼요." 원식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그녀가 비명을 빽 지르며 그의 손을 냅다 뿌리쳤다. "됐어요, 이거 놔요!" 그녀 딴에는 대단한 용기였다. 원식의 얼굴이 싸늘히 식는 줄도 모르고 별빛은 씩씩거리며 원식의 집을 나섰다. 그는 그녀가 남기고 간 찻잔을 쳐다보다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씨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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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아 미안해 내가 죄인이다 흐긓걿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