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w. 이후
죽음은 사랑을 생생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서로 헤어져야 한다.
부모건, 친구건 언젠가는 모두 죽고 헤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은 더욱 소중하다.
잃을 수 있는 것이기에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하고 절절하지 않은가.
진정 사랑하고 싶다면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열일곱 살의 인생론 中
늘 왔던 길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
익숙한 길, 반복해서 걷다 보면 주변의 안 보이던 것도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한 손은 엄마 손, 다른 한 손은 사탕을 쥐고 가는 아이,
시간에 쫓겨 앨리스의 토끼마냥 시계를 확인하며 달려가는 직장인들,
예쁘게 차려입고 애인을 기다리는지 길 옆에 서서 주변을 계속 두리번 거리는 여자 등.
그러나 남준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는 할까.
나름의 직장 때문에 윤기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없는 남준은
주말만 되면 늘 불안에 휩싸인 채 그를 찾아간다. 특히 오늘은 왜인지 더.
혹시나 자신이 없는 사이에 죽어버렸을 까봐.
형, 나 왔는데 뭐 해요. 눈길도 안 주고.
…….
나 좀 봐요.
…….
와, 끝까지 안 쳐다보네.
이 형이 왜 대답이 없어. 하며 아까부터 지속되던 불안함을 지우려 횡설수설 대지만
끝나지 않는 정적에 뒤로 남준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작은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는 그의 뒷모습이 마치 죽어버린 인형 같아서.
설마, 설마. 마음속으로 외치며 손에 들고 있던 짐들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달려가 윤기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의 방향으로 거칠게 돌린다.
갑작스러운 남준의 행동에 놀란 토끼눈으로 그를 껌뻑껌뻑 쳐다보는 윤기.
뭐야. 깜짝이야.
아…….
언제 왔어?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니에요.
거친 행동과는 달리 미적지근한 남준의 반응에 윤기는 고개를 갸웃하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가자.
…네.
겉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먼저 병실을 나서는 윤기를 그 안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본다.
…젠장.
어디 갈 거야?
…….
준아.
아, 네. 뭐라고요?
어디 갈 거냐고.
아…. 어.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멍한,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듯한 남준의 모습에 윤기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얘 왜 이러지. 기분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은 느낌, 덩달아 윤기도 다운돼버렸다.
평소엔 별 신경 쓰이지 않던 적막이 오늘따라 어색하다.
어색함을 무마하려 차 안을 뒤적거리던 중 구석에서 몇 개비 남지 않은 찌그러진 담뱃갑 한 통을 발견한다.
나름 윤기를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인지 입으로만 하던 금연을 시작했던 남준이었는데
쉽게 끊을 수 없는 건지, 신경 쓸 일이 많아 습관적으로 무는 건지,
아무래도 윤기가 없는 곳에서 계속 피우나 보다.
김남준.
네.
담배 안 피운다며.
아, 안 피우는…. 어, 그거 어디서 발견했어요, 아!
끼익-
안 피운다며 용기 있는 거짓말을 시도하려다 차 사고 낼 뻔한다.
윤기가 발견한 담뱃갑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앞과 옆을 1초에 세 번은 번갈아 본 것 같다.
아씨….
괜찮아요? 큰 일 날 뻔 했네.
미친놈아. 나 죽일려고 작정했냐?
아,
윤기는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에 순간 아차 싶다.
남준의 눈치를 본다기 보다는 왜인지 하고 싶지 않았던,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발언이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는지.
그에 대해.
그 말을 한 자신도 무너져내렸으니까.
죽지 마요.
가요.
어.
그날처럼 하얀 옷을 그대로 걸친 채, 부축하려는 남준의 손을 잠시 쳐다보던 윤기는
가벼운 실소를 뱉으며 제 힘으로 일어난다.
됐어. 몸 아껴서 뭐 해. 어차피,
형.
……. 알았어.
윤기는 흘끗 남준을 쳐다보고는 터덜터덜 병실 밖으로 향한다.
하얀 그를 빤히 쳐다보던 남준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돌린다.
꺼지기 직전의 빛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듯이 그는 하얗게 빛난다.
그 하얀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도록.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티 내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윤기는 오늘따라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무거운 것 같다고 느낀다.
턱 선을 타고 내려오는 식은땀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숨을 가쁘게 내쉰다.
그저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예감이 좋지 않게 스치운다.
그는 차 안 조수석에 앉았지만 자신의 상태를 들킬까 단 한 번도 왼쪽을 돌아보지 않는다.
형.
…왜.
그냥 같이 갈래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다가듬고 힘겹게 한 마디를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간다는 그 말이, 그 의미가 단순히 어딘가를 향해 가자는 뜻이 아닌 것쯤은 무거운 그의 눈빛에서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김남준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지금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너까진 필요 없는데.
형 혼자는 심심할까 봐.
눈은 앞을 곧바로 향했지만 눈동자의 움직임은 어색하다.
목소리는 꿋꿋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
말은 덤덤하지만 그는 떨고 있다.
나 혼자는 무서워요.
나도….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