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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은 찬 새벽 공기 속에서 눈을 떴다. 슬쩍 보니 장작불이 꺼져 있었다. 으슬으슬 몸이 추웠지만 하녀가 깨어나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하녀를 소리쳐

부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발가락까지 차가워진 몸을 뒤척였다. 불을 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익숙해진 무력감. 무력감은 로빈이 잠을 잘 때 빼고는 늘상

그와 함께 붙어 다녔다. 로빈은 그걸 떼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너무 익숙해져서 떼어내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잠이 안 와.'

새벽 공기는 항상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로빈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베갯머리 옆에 놓고 잤던 시집을 집어 들었다. 오랫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은 탓에

로빈은 성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독차할 수 있었다. 책의 종류나 작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시집이었다.

무게는 작게 나갔지만 두꺼운 책 못지 않게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 좋았다. 로빈의 약한 팔로 두꺼운 책을 집기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청록색 가죽으로 된 표지를 들추니 적당히 눅눅한 책장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로빈은 이 시집을 지난 두 달 동안 읽고 있었다. 꽤나 얇은 두께여서 지난 몇 년 동안

발견하지 못했었다. 우연히 발견한 이 시집은 로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장 큰 이유는 시인 때문이었다. 겨우 14살에 등단해 17세에 시집을 냈다가, 갑자기 폐질환에 걸려

22세에 죽은, 요절한 천재 시인이었다. 시인이 가장 많이 다룬 주제는 삶의 무의미함이었다.

시인의 여동생이 쓴 서문에서 말하길, 그 시인은 평생을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로빈은 시구에 녹아 있는 그 움울하고도 천박한,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우울감이 주는 흥분에 취해 마구 휘갈긴 그 시구들.

 

나는 떠내려갔네. 어렴풋이 날 스쳐간 혼백들

다시금 뒷전으로 잠잠히 가라앉더라!

 

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방과 찬 공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시였다. 이다지도 아름답다니, 로빈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입을 벌리니 마른 공기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입이 까끌까끌해졌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목말라.'

로빈은 잠시 시집을 덮었다. 그리고 옆의 작은 탁자에 놓인 물병을 들어 컵에 물을 따랐다. 물이 졸졸 떨어지는 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갈랐다. 물병이 꽤나 무거워서 물을

따르는 팔이 후들거렸다. 목을 축이고 다시 시집을 폈다.

 

내 건강을 위협받았다. 공포가 왔다. 나는 여러 날 수면 속에 빠져 있었다. 일어나면 슬픈 꿈을 계속하리라.

 

로빈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바로 다음 시구 때문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럴, 이럴 리가 없는데.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쓰지 않았는데.'

 

오 계절이여, 오 성곽이여!

결함 없는 넋이 어디 있으랴?

 

마지막 시구를 읽자 머리가 멍해졌다.

 

그 일이 지나갔다. 이제 나는 아름다움에게 인사할 줄 안다.

 

그 마지막 시구에서 도저히 눈동자를 뗄 수 없었다. 갑자기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숨소리가 가빠졌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로빈은 시집을 내던졌다. 시집은 방문에 부딪쳐

쿵하고 큰 소리를 냈다.

'뭐야, 뭐냐고!'

그 시인은, 그 시인의 시구들은 이 세상에서 로빈을 위로해주고, 공감해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로빈이 느끼는 어떤 것들을 정확히 글자로 써내 보여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일이 지나갔다'니.

"아이고,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문을 벌컥 열고 몸집이 통통한 중년의 하녀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아유, 책을 던지시면 어떡해요? 갑자기 또 왜 성이 나셨어요? 엄마야, 불이 꺼져버렸네! 제가 금방 피울 테니 조금만 참으셔요."

이 통통한 하녀의 이름은 프랑소와로, 본래 생상스 박사가 데리고 있던 간호사였다. 원체 성격이 좋기로 소문이 났는데, 로빈의 성격이 예민해지는 것을 본 생상스 박사가

그녀에게 간곡히 부탁해 로빈의 전담하녀가 되었다. 부싯돌을 딱딱 부딪치는 프랑소와의 모습을 본체만체하고 로빈은 휙 돌아 이불을 뒤집어썼다.

"자, 다 됐어요. 또 이불 덮으셨구먼. 이제 불 피웠으니 따땃할텐데. 아이고, 책 표지가 참 이쁘네요. 요즘 이걸 계속 읽으시던데."

'그냥 가 버려!'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로빈의 입에서는 아예 다른 소리가 나왔다.

"....냐....어.."

프랑소와는 주머니에서 연필과 수첩을 꺼냈다.

"여기 쓰세요."

로빈은 글자는 쓸 줄 알았기에 사람들과 소통할 필요가 있을 때면 항상 수첩을 사용했다. 로빈은 수첩을 냉큼 받아들고 크게 '가 버려!'라고 휘갈겨 썼다.

"왜 화가 나셨는지도 쓰셔야죠."

'갑자기 시가 바뀌었어. 배신자야.'

프랑소와는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 시집을 대강 훑었다. 로빈은 시집을 뺏어서 직접 시구를 찾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학교에서 배웠네요."

'갑자기 바뀌었다니까!'

로빈은 수첩에 꾹꾹 눌러썼다.

"이 시는 그 시인이 가장 행복했던 때에 쓴거라서 그래요."

'왜?'

"사랑을 했거든요."

사랑? 로빈은 의아했다. 그게 대체 무엇이기에 시를, 그 시인을 그렇게 바꿔놓는단 말인가?

"우울증으로 다니던 병원에서 한 간호사를 만났죠. 얼마 안 가서 결혼도 했고요. 이 시집은 마지막으로 갈 수록 초반과 많이 달라져요.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데 죽음 같은 걸 운운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왜 사랑이란 걸 하면 달라지는 거야?'

"으음, 그건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그냥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 달라지고 싶어져요."

로빈은 한동안 잠잠하다가 느릿느릿 수첩에 글을 적었다.

'나도 사랑을 하면 달라질까?'

프랑소와는 크게 미소지었다.

"그럼요!"

***

여왕은 달리는 마차 안에서 마엘의 종알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그런 여왕의 옆에는 마엘의 못 말리겠다는 듯 바라보는 제이콥과

짜증나는 표정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는 마르티노가 앉아 있었다.

"어머니, 진짜 기대돼요! 우리, 한 번도 여행이란 거 가보지 않았잖아요? 어떤 곳일까요? 정말 추울까요? 책에서 읽었는데 정말 추운 날이면 물을 하늘로 뿌리기만 해도

얼음이 된대요!"

"책도 읽었구나, 마엘."

나라는 어느덧 완전한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불만 세력도 많이 가라앉았고, 여왕의 지위도 막강해진 지 오래였다. 문득 한 번도 여행을 가본 적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만큼의 휴식도 괜찮지 않을가, 라는 생각이 들어 여행을 결정했다. 물론 이 여행을 오기 전까지 그녀는 수많은 서류 더미에서 몇 주를 보내야만 했다.

게다가 여왕이 성을 비운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기에, 성에 어떤 부군을 남길 것인지가 최대 문제였다.

여왕은 고심한 끝에 여행길에 줄리안과 스눅스 가의 다니엘, 수잔, 알베르토를 데리고 왔다.

본거지에 귀족 세력을 막을 세력인 린데만 가와 그녀가 신뢰하는 기욤, 두뇌 역할을 해 줄 타일러를 남겼다.

왕자를 가진 린데만 가와 몬디 가의 이해도 이만하면 알맞게 조정했다. 린데만 가에게는 성을, 몬디 가에게는 여왕의 곁이라는 패를 줬으니까. 여행지도 아예 연이 없었던

데이아나 가의 영지를 정했다.

'그리고 일리야는.... 아직까지 견제해야 할 필요가 있어. 누가 뭐래도 그는 여전히 벨랴코프 가의 장남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이제 일리야가 그녀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아주 우연히 마주쳤던 그의 눈빛에 소스라치게 놀라 하루 종일 마음이 심란했었다.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 성에 두고 온 게 잘못한 걸까? 내가 아직까지도 일리야를 너무 정치적으로 대하고 있는 건가? 그는 바뀐 거 같은데.... 역시 데리고

와서 같이 얘기를 나눠봐야 했나?'

"어머니, 제 얘기 안 들어요?"

마엘이 살짝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왕의 눈빛이 살짝 멍해진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으응? 아, 아니야. 다시 얘기해 봐."

"치, 됐어요."

"마엘, 넌 어쩜 그렇게 이해력이 부족하냐? 어머니께서도 분명 네 얘기에 질린 거라고. 아, 시끄러워 죽는 줄 알았네!"

"뭐! 마르티노 오빠 너무해!"

마르티노와 마엘이 서로 으르렁댔다.

"좀 그만 할래?"

제이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지만, 이미 반쯤은 포기한 목소리였다. 줄리안과 여왕이 두 사람을 부리나케 달래기 시작했고, 다니엘은 마차 안의 표정들을 살피고 있었다.

"마르티노, 분명 여자를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잖니."

"아버지, 하지만 마엘은 여자가 아니.... 악!"

마르티노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참다못한 마엘이 손을 뻗어 마르티노의 귀를 잡아당긴 까닭이었다. 소란스러운 마차 안, 오직 수잔만이 평화로웠다.

***

성은 여왕의 방문으로 전에 없이 분주했다. 실로 오랜만의 손님이었다. 게다가 손님이 다름 아닌 여왕과 부군들, 왕자들과 공주였기에 로빈의 전담인

프랑소와까지 일을 도와야했다. 로빈은 난데없이 프랑소와와 떨어지게 되자 심하게 불쾌해졌다. 하지만 시집을 마저 읽어야 했기에 그 불쾌한 감정은 빨리 사그라 들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신기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사람이 바뀔 수가 있는 건가?'

삶에 대한 비탄과 침잠하는 감정들로 가득했던 시들은 점점 밝아지더니 끝으로 갈수록 같은 사람이 쓴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다.

특히 지금 읽고 있는, 아내를 묘사한 시는 더욱 그랬다. 길고 긴 산문시는 거의 세 장에 달했다. 로빈은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별을, 그대의 귓속 깊은 곳에 떨어져, 장밋빛으로 흐느껴 울고

그대의 목덜미로부터, 허리 있는 곳까지, 무한은 그 흰 빛을 굴리고 있었다....

 

***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왕님."

"환대해 주니 내가 더 고맙군요, 데이아나 백작."

"별볼일 없는 저희 영지에 발걸음 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마차에서 보니 매우 아름답더군요. 특히 설원 말이에요. 굳이 깎아내리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데이아나 부인."

"오, 듣던 대로 정말 자애로우시네요. 몸이 곤하실 텐데 식사부터 먼저 하시겠어요?"

"좋죠. 우선 왕자들과 공주부터 챙겨주면 고맙겠군요. 나는 잠시 성을 둘러보다 가고 싶어서요."

"물론입니다. 제 아내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식사하실 분들은 저를 따라 와주시죠."

데이아나 백작이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마엘이 특히 신나서 거의 다려가다시피했다.

살구색 드레스 자락이 팔락이며 사라지자, 복도에는 데이아나 부인과 여왕만이 남았다.

"왜 식사를 먼저 하시지 않고요."

"배가 별로 고프지는 않거든요. 지금은 이곳에 어떻게 생겼는지가 더 궁금해요."

데이아나 부인은 여왕을 찬찬히 살폈다. 여왕은 고개를 들고 천장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매끈하고 긴 목선이 잘 보였다.

장신구는 다이아몬드 귀걸이 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여왕의 아름다움을 해치진 못했다.

하얀 토끼털로 장식된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코트에는 섬세하게 눈꽃의 모양이 자수로 수놓아져 있었다. 게다가 고풍스런 보라색 천을 덧댄 풍성한 치마의 드레스까지.

"...아름다우시네요."

"무슨?"

"어머, 갑자기 실언이 나왔네요. 저도 모르게 그만....그냥 갑자기....그냥.....그냥 저도 옛날엔 정말 예뻤답니다. 정말 예뻤어요......"

데이아나 부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은 새삼스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 뚱뚱한 부인을 바라보았다. 데이아나 부인의 깊은 빛깔의 밤색 눈동자를 보자

과연 옛날에는 깨나 미인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래 보이는군요. 눈을 보니 알 수 있어요."

"오, 아니, 아니에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요즘 제가 정신이 없답니다. 우선 오른쪽으로 가실까요?"

데이아나 부인은 당황해 자신이 로빈의 방 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로빈은 갑자기 방 가까운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두려움을 느꼈다.

'누구야? 누구지?'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 위협적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로빈은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나 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차마 문을 열지는 못하고 열쇠 구멍 사이로 바깥을 훔쳐봤다. 열쇠 구멍 사이로 누군가 보였다.

'아름답다.'

그저 아름다웠다. 낯선 이는 그렇게 그저 아름다울 뿐이었다. 그리고 금방 사라져 버렸따. 로빈은 순간 시인이 처음 아내를 보았을 때도 이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시구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집트의 무희인가? 새벽녘에

불꼬처럼 타서 꺼져 가버리는 것이 아닐까.

거대한 꽃과 무너지는 도시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찬란한 공간 앞에서

너무나 아름답구나! 너무나 아름답구나!

 

***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고 만찬이 준비되었다. 기다란 우윳빛 대리석 식탁에는 부드러운 벨벳 식탁보가 깔려 있었다. 식탁보에는 은색 실로 큼지막하게 데이아나 가문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마엘은 토끼가 귀엽다며 좋아했다. 그러나 곧 음식이 나오자 토끼 이야기는 쑥 들어가게 되었다.

전채부터 장식이 화려하고, 맛도 대단히 훌룡한 요리가 줄을 지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마엘은 진한 초콜릿을 우유와 섞어 만든 소스를 뿌린 야들야들한 소고기 요리를 뭔가에

홀린 듯이 집어 먹고 있었다. 제이콥은 꿀에 절인 따끈한 과일을 올린 고기를 감탄하면서 먹고 있었다. 심지어 그것이 사슴 고기인 것을 안 뒤로도 멈추지 않았다.

마르티노는 장작향이 물씬 풍기는 돼지고기를 거의 혼자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부군들도 음식을 감탄하며 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음식이 부족하진 않은가 모르겠습니다, 여왕님"

"제 아이들 모습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시면 안 될 것 같군요. 이렇게 잘 먹는 건 처음이에요. 제이콥, 마엘 볼에 묻은 것 좀 닦아 주렴. 마르티노, 코에 고기 조각 묻었잖니."

마르티노는 조금 무안해 하면서 조각을 떼어냈지만, 마엘은 그런 기색 없이 제이콥에게 볼을 쑥 내밀어 자국을 닦은 후 다시 먹는 데 열중했다.

여왕은 민물고기 요리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을 입에 넣다가 그 모습이 귀여워 웃어버렸다. 슬쩍 보니 데이아나 백작과 부인도 그런 마엘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데이아나 부인의 눈에 물기가...?'

분명 데이아나 부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있었다. 여왕은 갑자기 의아해졌다.

'아무리 아이가 먹는 모습이 귀엽다지만 저 정도인가? 잠깐, 그러고보니.... 데이아나 가의 아들을 보지 못했잖아. 분명 하나가 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더니 웬 몸집이 통통한 중년 하녀가 놀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프랑소와,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저, 그게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정말이지.... 이런 일은...."

프랑소와가 이렇게 다급했던 적이 없었기에 데이아나 부인은 일어서서 프랑소와에게 다가갔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데이아나 부인이 급히 백작에게 돌아와

다시 소곤거렸다. 백작도 크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요?"

"아, 아니.... 아닙니다. 잠시....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그게 정말인가, 프랑소와?"

프랑소와라는 그 하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프랑소와, 얼른 데리고 와줘요. 아니 아니, 중간에 마음 바뀌면 언제든 돌아가요. 디저트 먹을 시간에는 도착할 수 있겠죠?"

"맡겨주세요."

하녀는 휙 사라졌다. 마엘도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데이아나 부인과 프랑소와가 사라진 문을 번갈아 보았다.

"어머, 죄송해요... 갑자기 소란을....."

"난 괜찮아요. 그냥 설명해 주겠어요?"

"아, 그게... 제 아들이... 올 겁니다, 여왕님."

데이아나 백작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지금 나타나는가? 식사 시간을 처음부터 함께 하지 못할 중대한 이유라도 있었나? 게다가 아들이 있다고 소개도 시켜주지 않았잖나."

알베르토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분명 여왕 앞에서 백작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소개시켜 주지 않은 것은 좀 무례한 행동이었다.

심지어 여왕과 식사를 하던 내내 그런 사실을 언질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정말.... 드릴 말슴이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제 아들이 방에서 나오지 않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저희도 당황스럽습니다. 그것만 알아주십시오."

"방에서 나오지 않다니?"

줄리안이 호기심이 차 물었다. 하지만 백작이나 백작 부인 모두 대답이 없었다.

"말하게."

알베르토가 다시 짐짓 엄하게 말했다.

"사정이 있었겠지요. 일단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겁니다, 몬디 대공."

수잔이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알베르토가 조금 누그러졌다.

".....제 아들을 대답하지 못합니다, 샤키야 대공...."

데이아나 백작이 수잔보다 백 배는 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갑자기 데이아나 부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여왕은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죄, 죄, 죄송해요.... 어쩜 좋아.... 오, 정말 바보 같아요...! 저, 정말 드릴 말씀이...."

"엘로이즈, 진정해요."

"저, 정말 미, 미안해요.... 미안... 오, 여왕님.... 제 아들은.. 저희 아들은 말을 못한답니다.... 여, 열 살 때 실어증에 걸려버려서....그, 그 이후로 우리 가엾은 로빈은

밖에 잘 나오지도 않았어요..... 정말 그 애가 밖에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엘로이즈, 그만해. 눈물을 그쳐."

데이아나 부인은 끅끅 거리며 손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진정시키려 애를 무진 쓰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발작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마침내 이를 앙 다물고

손수건에서 얼굴을 뗐다. 화장이 반즘 지워져 주름이 그대로 보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금방 디저트를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도 단 걸 먹으면 금방 진정될 겁니다. 이보게, 장. 디저트는 아직인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디저트를 담은 접시가 줄을 이어 방으로 들어왔다. 디저트는 달콤했으나 방 안의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엘도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자신 앞에 몽블랑을 포크로 쿡쿡 찌르기만 했다. 여왕은 고개를 들어 데이아나 부인을 보았다.

눈이 벌겋게 돼 데이아나 부인은 더욱 볼품없어 보였다. 통통하게 살찐 손가락으로 연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곧이어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저어, 들어가도 되는지요?"

"오, 프랑소와. 어서 들어오게, 어서 들어와."

데이아나 백작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려 했지만. 말투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로빈이 들어왔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은 로빈을 보고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따. 호리호리하게 마른 몸에 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새카만 머리칼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점은 로빈의 새하얀 피부였다. 미소조차 띠고 있지 않은 창백한 얼굴에서는 생기를 느낄 수 없었다. 으레 또래가 가지고 있을 만한 홍조는

찾기 어려웠고, 오히려 사람 크기 정도의 상아 인형에 옷을 입혀놓은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의 예복은 연한 하늘색 조끼에 북극토끼털로 장식한 외투여서

그런 인상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아.... 소개하겠습니다. 저의 아들, 로빈 데이아나입니다. 로빈, 인사드려라."

로빈은 맥없이 여왕과 부군들, 공주와 왕자들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그것을 트집 잡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 아들, 여기 앉으렴. 엄마 옆에....."

로빈은 소리 없이 걸어가 데이아나 부인과 자ㅔ이콥 사이에 놓인 빈 의자에 앉았다. 제이콥은 유령 같은 로빈의 모습을 흘긋거리며 쳐다봤다.

여왕은 가만히 제이콥에게 주의를 주었다.

"저.... 그러고 보니 데이아나 가의 가언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군요. 가문의 문장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었으면 좋겠군요."

사실 여왕은 데이아나 가의 가언이나 문장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으나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그녀는 로빈이 자신을 훔쳐본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희 가문의 문장은 아까 식탁보에서 보셨다시피 순록 위에 북극토끼가 올라탄 모양새입니다. 순록과 북극토끼 모두 겨울을 잘 이겨낼 수 있는 동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일 때가 있지요. 북극토끼가 순록에게 올라탄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든, 그 밖의 인생의 가혹한 시련이든,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저희 가문의 가언은 '천천히, 함께, 눈보라를 뚫고 나아가라'입니다. 데이아나 가를 비롯한 북부의 사람들은 서로 힘을 합치고,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선, 서로 모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럼 서로 책임을 떠넙기게 되지 않습니까?"

제이콥이 불쑥 데이아나 백작에게 물었다.

"절대 아닙니다. 한 곳이 뚫린다면, 누구 하나라도 무너지면 차가운 바람이 틈을 뚫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개인의 역할도 중요하지요. 서로 모인다는 건, 자신을 강하게

세운다는 뜻도 되지요. 정말 지혜로운 질문이었습니다, 왕자님."

제이콥이 빙그레 웃었따. 여왕도 제이콥을 보고 칭찬의 뜻을 담아 웃어주었다.

그 이후로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지게 되었다. 로빈도 긴장한 기색이 없어졌다. 마엘도 다시 식욕이 좋아져서 에클레어 세 개를 번개같이 먹어치웠다.

로빈은 귀를 쫑긋 세우고 새로운 사람들의, 정확하게는 여왕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외모만큼이나 물 흐르듯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집중한 적이 얼마만이지? 이렇게 밖에 나오는 건?'

색다른 분위기에 로빈은 실로 오랜만에 식욕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마카롱을 하나 더 집기 위해 제이콥 쪽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귀에 제이콥과 마르티노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콥, 우리 나중에 밖에 안 나갈래?"

"얼어 죽으려고 환장했어? 너 늑대 때문이지?"

"내가 그걸 얼마나 기다렸는데! 솔직히 너도 기대되잖아, 안 그래?"

"으음..... 그건.."

"내숭은. 그러지 말고 나가자."

"네가 날 형님이라고 부르면."

"치사하긴! 좋아, 여기서 네가 늑대 잡으면 내가 평생 형님으로 떠받든다!"

"너 그거 취소 없기다."

"너야 말로 빼지 마. 하긴 책벌레가 무슨 힘이 있겠어?"

"마르티노 너나 긴장하지. 좋아, 하겠..."

제이콥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로빈이 기이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로빈은 제이콥이 양어깨를 잡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제이콥과 마르티노를 번갈아 보았다.

"그.....! 어억! 어어어! 워어....!"

갑작스런 사태에 제이콥과 마르티노는 얼어붙었다. 여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초가 지나가 로빈은 상황을 파악했다.

로빈은 불안하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왕의 얼굴.......

로빈은 부리나케 방 안을 뛰쳐나갔다.

"이게 무슨.....!"

알베르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데이아나 백작을 돌아보았다. 다니엘과 수잔은 두 왕자를, 줄리안은 겁에 질린 마엘을 달래고 있었다.

데이아나 부인이 의자에 주저앉더니 제이콥과 마르티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훨씬 더 창백해진 얼굴로 데이아나 백작에게 말을 쏟아부었다.

"오, 여보, 어쩜 좋아요.... 보세요, 어쩜..... 파비앙과 로빈을 보는 것 같아요. 제이콥 왕자님과 마르티노 왕자님의 머리색 말이에요.... 오, 어쩜 좋아요, 불쌍한 우리 아들..."

그녀가 몸을 미친 듯이 떨자 백작은 황급히 물을 들이켜게 했다.

"왕자님, 제 아들이 그런 짓..... 을 하기 전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그, 그게..... 제이콥에게 어딜 가자고..."

마르티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확하게 얘기하거라, 마르티노."

알베르토의 엄한 목소리를 듣자 마르티노가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게... 늑대 사냥을 가자고...."

여왕은 백작과 부인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눈길을 돌려 로빈이 사라진 문을 쳐다보았다.

망연히 열려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

로빈은 곧장 방으로 가 문을 단단히 잠근 다음, 침대로 가 이불로 자신을 꽁꽁 쌌다. 프랑소와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지만 로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귀에는 오직 방금 자신이 낸 괴상한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뜬 여왕의 얼굴... 로빈은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따.

'가지 말았어야 헸어. 괜한 용기였어. 쓰레기 같은 짓이었어!'

로빈은 자신이 점점 작아져서, 점이 되어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

깊은 밤이었지만 여왕은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끊임없이 로빈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 상앗빛 얼굴에서 만연히 드러나는 그 부끄러움과 당혹감, 그리고 공포......

'대체 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그렇게 뒤척거리다가 결국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저녁 식사 이후 성의 공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밤하늘과 완전히 대조되었다.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발길이 가는대로 떠돌다가 어딘가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소름이 돋았지만 곧 그 울음소리의 주인이 데이아나 부인인 것을 알아차렸다. 여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인?"

"여.....여, 여왕님?"

"잠이 잘 오지 않더군요."

여왕은 말없이 손수건을 건넸다.

"오, 고맙습니다, 여왕님......"

여왕은 데이아나 부인 옆에 앉아 방을 쭉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깨끗했지만, 어딘가 사람의 손길이 닿은지 오래되어 보였다.

"아까 놀라셨죠, 정말 죄송해요.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사과보다는 자초지총을 설명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군요."

데이아나 부인은 잠시 망설였다. 애꿎은 손수건이 부인의 손에서 구겨지고 있었다.

"부인, 이건 결코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망설일 필요 없다고 난 생각해요."

".....부끄러워서가 아니에요...... 그저, 그저.... 말하기가 힘들어서....."

"무리한 요구였다면...."

"아니에요, 아니에요..... 여왕님께서 옳아요. 설명해드려야만 해요."

데이아나 부인은 눈에서 마지막 눈물을 훔쳐낸 뒤 손수건을 꼭 쥐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에게는.... 저랑 남편 사이에서 난 자식은 로빈 하나가 아니에요. 아니었죠. 로빈에게는 형이 있었어요. 이름은 파비앙이었고요. 정말, 정말 장난끼가 많은 애였어요.

항상 바깥에 나가고 싶다고 저를 조르곤 했죠. 물론 남편도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이 방이 바로 파비앙의 방이에요. 제가 매일매일 직접 청소하죠. 도저히 물건들을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파비앙은 남편을 닮아서 사냥을 잘했어요. 좋아하기도 했고요. 아직도 그 애가 첫 번째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때의 표정을 기억해요. 

정말이지........ 잠시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로빈은 날 때부터 얌전한 애여서 사냥은 별로 안 맞았어요. 그 문제로 둘이 자주 투닥거렸지만. 사이는 좋았죠.

저희 지방에서 늑대가 유명한 건 아시겠죠. 파비앙은 자주 늑대 사냥 얘기를 했어요. 하지만 그 애는 너무 어렸고, 늑대 사냥에는 참여할 수 없었죠. 그래서, 그래서.....

로빈이랑 몰래 밖으로 나갔고...... 그 애는....파비앙은 주, 주, 죽고 말았어요! 오, 그 애는 늑대에게 오른팔일 물어 뜯겨 버렸어요....... 그, 그, 그리고 우리 가엾은 로빈이

그걸 다 보고 말았어요.....! 겨우 열 살에! 부, 불쌍한 내 아들! 얼마나 무서웠을까! 내 아들....오, 파비앙, 로빈......"

데이아나 부인은 다시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여왕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로빈은 제이콥과 마르티노를 보고 자신과 자신의 형을 본 것이다.

그리고 로빈은 두 사람에게 '안 돼! 가지 마! 가면 안 돼!'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말하려고 했었다.

***

로빈은 기운 없이 침대에세 비척비척 일어났따.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식욕이 하나도 없었다. 그 좋아하던 독서도 하지 않고 방 안에 계속 있기만 했다.

스스로가 너무도 비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프랑소와가 살살 달래기도 했고 소통도 쳐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따.

로빈은 멍하니 한낮의 햇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햇살은 길게 늘어저 로빈의 발가락에 걸쳐 있었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분명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로빈은 짜증이 치솟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여왕이 있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팔목까지 오는 긴 연분홍색 소매의 짧은 웃옷은 리본 모양으로 묶어 고정시켰는데, 전혀 유치해보이지 않았다.

웃옷의 왼쪽 가슴팍과 어깨 부근에는 각각 보라색, 파란색, 하얀색으로 나비가 수놓아져 있었다.

짧은 웃옷 아래로 는 백합 무늬의 하얀 허리 리본을 뒤로 묶고 치마는 연노랑, 연파랑, 연보라색의 천 여럿을 세로로 이어붙인 것이었다.

느슨하게 틀어 올린 머리는 꽃 모양 진주 장식으로 고정해 놓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마치, 봄의 전령처럼 보였다. 눈보라 속에 갇힌 로빈의 방에 찾아온 한 마리 봄의 나비.

"앉아도 되나요?"

햇살을 그대로 맞고 있는 여왕의 모습에 멍하니 넋을 잃고 있던 로빈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여왕은 조금 웃으며 침대 가까이

의자를 놓고 앉았다. 가까이서 본 여왕은 더욱 따스하게 아름다웠다. 이윽고 그녀는 그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직접 가져온 것 같았다.

금박으로 장식한 질 좋은 가죽 수첩이었다. 로빈은 잠자코 암녹색의 수첩을 받아들었다. 표지를 들추니 펜도 한 자루 있었다. 한 장을 더 넘기니 내용이 있었다.

'어젯밤 데이아나 부인을 만나서 얘기를 들었어요. 당신은 아마 두 왕자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겠죠. 그건 절대 잘못한 일이 아니에요. 그건 절대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이 말을 가장 듣고 싶었을 테니까요.'

로빈은 가만히 글씨를 내려 보다가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절대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이 말을 얼마나 듣고 싶었던 걸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여왕이 정말로 위로하려던 게 두 왕자에 관한 일이든, 형에 관한 일이든, 로빈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크나큰 고마움을 느꼈다. 로빈은 손을 움직여 글씨를 썼다.

'어떻게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어하는지 알았어요?'

그녀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똑같이 수첩에 써서 다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나도 그랬으니까요. 나도... 오빠를 잃었으니까요.'

그 순간, 로빈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 나만이 아니구나. 나만 이런 고통을 겪는 게 아니구나.'

로빈은 그동안 자신처럼 어린 나이에 형제를 잃은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것처럼 삶을 살아왔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처음 있는 고통이고, 그 고통이 떠돌다 자신에게

들러붙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당신이 이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당신만 고통을 겪는 게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자책하거나 주변을 너무 원망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렇다고 해서 그런 행동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에요. 작든 크든, 희귀하든 평범하든 고통은 고통이니까요. 당신이 겪은 끔찍한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절대 아니에요.

단지, 곁에서 누군가 위로해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로빈은 눈물로 번지는 종이 위로 글씨를 꾹꾹 눌러썼다. 그만큼 진실 되고, 그만큼 타인에게 로빈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

'너무, 힘들고, 슬프고, 아프고, 외로웠어요.'

지나치게 오랫동안 목소리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 그와 그녀는 말없이 손을 잡았다.

***

그 날 이후로 성에는 놀라운 일이 연달아 벌어졌다. 우선 방 안에서 죽은 듯이 지내던 로빈이 문밖으로 스스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데이아나 백작과 부인의 방을, 그러니까 그의 부모님의 방문을 스스로 두드렸다. 데이아나 부인은 예전의 미모는 되찾지 못했을지언정

미소는 되찾았다. 백작은 파비앙의 죽음 이후로 가장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데이아나 부인의 미소는 금세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니? 성을 떠나겠다?"

'여왕님을 따라 가고 싶어요. 그분을 사랑하게 됐어요.'

"하지만, 하지만...."

'저는 저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을 뿐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 목소리로 그분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저는 말하고 싶어요.'

"엘로이즈, 로빈의 선택이잖소."

사실 데이아나 백작도 서운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지만, 아내의 어깨에 손을 다정히 올리며 그녀를 설득했다. 지금 백작의 눈에 들어온 아들의 얼굴 표정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편지 할 거지?"

로빈은 활짝 웃었다.

***

로빈이 성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그는 커다란 두려움과 동시에 대단한 설렘을 느꼈다. 이 성을 나간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그녀와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게 될 미래를 떠올려 보면 몸이 둥실 뜨는 것만 같았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른 봄이었다.

그녀와 수도에 가게 되면, 더 많은 햇살과 꽃을 볼 수 있으리라.

"로빈, 잠시 엄마랑 이야기 좀 하겠니?"

데이아나 부인은 로빈의 손을 꼭 잡고 성의 뒷문으로 걸어갔다. 그는 뒷문으로 빠져나와 어떤 장소로 들어가자, 밀려들어오는 추억에 코가 시큰해졌다. 

그곳은 데이아나 부인의 온실이었다.

"여기 기억하니? 네 형과 어렸을 적에 자주 여기서 놀곤 했었지...."

부인은 작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로빈은 그 옆에 앉았다.

"로빈, 엄마의 원래 성이 뭔지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토투. 엘로이즈 토투란다. 하얀 바탕에 파란 구름 두 개가 떠다니는 모양이 우리 토투 가의 문장이지. 나는 어렸을 적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약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어.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말이지. 너무 쉽게 흔들린다고... 오, 나도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단다. 그래서 원래 네 아버지의 청혼을 받고 망설였어.

나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은 데이아나 가의 안주인이 되면 안 된다고 직접 네 아버지에게 얘기했지. 하지만 네 아버지는 단호했고, 또 나도 네 아버지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기에 결국 결혼을 승낙했단다."

로빈은 갑자기 어머니가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영문을 몰라 그냥 듣고 있기만 했다.

"결혼 생활은 행복했어. 너도 물론 알겠지. 어렸을 때의 난 아름다웠고, 또 너무 순진했단다. 그냥 네 아버지의 품속에서 계속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런 위기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엄마가 너무 쉽게 무너졌나봐. 너무 천진했던 거야."

갑자기 데이아나 부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덥썩 로빈을 로빈을 안더니 한층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로빈..... 엄마가, 엄마가.... 너무 약해서 미안해. 엄마가 강하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너, 너를 더 생각했어야 했는데... 어, 어, 엄마가 너무 야, 약해서 미안해.....

무너지지 말고 너를 지켜줬어야 하는데......"

그 말을 끝으로 데이아나 부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로빈은 미안함을 비롯한 여러 감정이 뒤섞여 따라 울고 말았다.

"오, 미, 미안하구나.... 좋은 날인데 우, 울면 안 되지...... 그럼...."

부인은 손수건을 꺼내어 로빈의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정작 그녀 자신은 닦지 않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온실 한 쪽으로 가 무언가를 정성스레 종이로 포장했다.

"이걸 받으렴. 이건 토투 가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귀중한 식물이란다. 이름은 '눈송이(snow drop)'란다. 기르는 방법 같은 건 봉투에 들어 있는 종이에 다 써놨단다.

평소엔 아주 예쁘고 작은 하얀 꽃이 피어서 사랑스러울 거야. 이걸 보면서 집을 생각해 주렴... 넌 분명 뭐든지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내 가문의 가언처럼 말이야."

데이아나 부인은 로빈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로빈은 이렇게 또렷한 어머니의 눈동자는 난생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약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보다 강하다.' 토투 가의 가언이지. 엄마는 약하다는 것만 알았지 한 번도 어떤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어. 

하지만 너는 문을 나섰단다. 그걸 꼭 기억하렴."

로빈은 소중히 선물을 받아들었다.

"....고.....므....마...."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데이아나 부인은 단박에 그 뜻을 알아차렸다.

'고마워요, 엄마.'

***

여왕의 성에 타일러의 학생이 하나 늘었다. 사실 실질적인 선생은 마엘과 줄리안에 가까웠다.

"아......안...."

"안녕! 안녕!"

늦은 봄빛의 오후로 가득한 정원, 어눌한 목소리으 로빈과 쨍쨍한 목소리의 마엘이 열심히 말을 연습하고 있었다. 줄리안이 온갖 손짓과 표정을 동원해 

로빈을 격려하고 있었다. 줄리안이 온갖 손짓과 표정을 동원해 로빈을 격려하고 있었다. 어찌나 적극적인지, 만약 마엘과 로빈이 없었다면 당장에 정신과 의사를

불러야할 모습이었다.

"....아.....나....."

"잘했어! 안녕!"

"좋아! 안녕이라고! 안녕! 이거 가르칠 맛이 점점 나는구만!"

마엘은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로빈은 활짝 웃으며 둘을 쳐다보았따.

"자, 이제 맛있는 거 먹으라 가요! 마카롱 먹고 싶어요!"

로빈은 자신을 향해 뻗은 마엘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어허, 친구. 남의 딸의 손을 그렇게 함부로 잡는 거 아니지."

줄리안은 장난스레 말하며 로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로빈은 다시 웃었다. 가까운 곳에 눈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中

 

***

생상스 박사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오늘 기분이 유달리 좋아보이는군, 생상스 박사."

"아, 잭슨 박사. 이제 왔나? 데이아나 대공에 관한 편지라네. 프랑소와의 편지에 따르면 아주 열심히 치료를 하고 계시다는 군. 분명 다시 목소리를 찾으실 거야. 그렇지 않나?"

그거 희소식이구만 그래. 내 환자는 아무래도 가망이 없어 보여."

"지난번에 말한 필립 테토라는 그 늙은 환자 말인가?"

"맞네, 나이도 나이인 만큼, 심장도 지친 거지. 어쩔 수 없지 않나. 아들이 참 헌신적으로 간호를 했는데, 안타까워."

"거 마린스키 박사 환자와는 영 딴판이로군."

순간 휴게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또 다른 의사가 한 명 들어왔다.

"아, 생상스 박사..... 거기 잭슨 박사도 있었나?"

"마린스키 박사, 또 커피인가?"

"잭슨 박사, 이게 없으면 의사 생활을 도저히 못 해먹겠단 말일세. 나에겐 단순히 커피가 아니라 신비의 영약이랄까...."

마린스키 박사는 털썩 앉으며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생상스 박사가 그런 모습에 혀를 찼다.

"또 그 환자인가?"

"그 환자 말고 더 있겠나? 이것만 마시고 빨리 식사나 하러 가세.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정말, 돈만 아니면 당장 그만두겠는데."

"여기 상트페테르부르크 병원을? 허, 참 잘도 나가시겠군."

"자자, 그만하고 점심 뭐 먹을지나 정하지. 아, 노마 간호사! 차트 정리는 다 했나?"

 

 

 

 

+)죄송합니다, 너무 오랜만에ㅠㅠㅠㅠㅠㅠㅠㅠㅠ

죄송해요 그동안 몸이 안 좋고 넘 바빠서ㅠㅠㅠㅠㅠㅠㅠ 떡밥을 조금 많이 풀었슴다 ㅎㅎ

시도 정말 많이 삽입했습니다. 따로 작가를 달지 않은 시구는 모두 랭보의 시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혹시 궁금하시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어떤 랭보의 시인지 알려드릴게요!

로빈은 여왕과 공통점이 있는 인물이죠. 그리고 앞으로 말을 하는 능력도 늘게 될 겁니다. 수다쟁이 둘이 붙어 있는데 못하는 게 더 이상하지요 ㅎㅎㅎㅎ

다음 편은 더 빨리 갖고 올게요ㅠㅠㅠㅠㅠㅠ


 



 
독자1
장..장위안...장위안이 보고 싶어요호...아예 앞으로 나올 일이 없나요....?
7년 전
난슬
쪼오오오만 기달려주세요... 더이상은 스포주의
7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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