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애니메이션 SPY X FAMILY의 설정을 차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왼쪽 얼굴이 따갑다. 필사적으로 모른 척 하려 해도, 알아들으라는 듯이 쳐다본다.
결국 시선을 돌렸다.
“무슨 하실 말씀 있으실까요...?”
승관 씨가 빙그레 웃는 모습이, 새삼 섬뜩하게 느껴졌다.
“할 말이요?”
“...하하,”
“아주 많죠? 여주 씨가 아시다시피.”
“...그렇...죠.”
“잠깐 탕비실에서 좀 볼까요?”
“...넵.”
조졌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잘 된 거면 잘 된 거고 잘 안 된 거면 안 된 거지 뭔 결혼? 그것도 1년 전에? 대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좀-”
입에 아교가 붙은 것 같다. 당연하다. 승관 씨의 말은 하나같이 타당했기 때문에.
어이가 좀 없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싱글이라고 생각한 두 사람을 기껏 연결해줬더니 알고 보니 1년 전에 결혼한 사이였다? 그 어떤 공작 요원이 와도 고문 없인 납득이 불가능할 법한 상황이다. 그나마 다른 직원들은 이 소개팅의 전말을 모르고 싱글이 아니었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겠다지만, 주선자인 이 사람은-
“그니까, 설명을 좀 해봐요. 잘 되는 건 그렇다 쳐. 뭔 결혼을- 이미 했었다는 게 말이나 돼요?”
“.......”
“애초에 저야 두 사람이랑 다 어느 정도 아니까 뭐 이상한 소리를 해도 넘어간다 쳐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뭐 어떻게 얘기할 건데요? 한 번 들어나 보자고요.”
-논리적인 지적밖에 안 한다. 망할.
분명 어제 민규 씨랑 얘기했을 땐, 승관 씨랑은 본인이 잘 얘기할 테니 괜찮을 거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됐었는데. 그 ‘잘 얘기하겠다’가 아직 실행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은, 윤정한한테 쓰려고 민규 씨 정보를 끌어모아다가 대강 짜본 얘기를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민규 씨가, 서국 이민자 가정 출신이잖아요.”
“...네에.”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분위기가 영 흉흉한데, 제 직장이 아무래도 동국 공공기관이니까... 괜히 노출시켰다가 민규 씨도, 저도 위험해질 것 같더라고요. 민규 씨도 동의해서, 식도 조용히 둘끼리만 올리고 혼자 사는 척 했는데.”
승관 씨의 미간 근육이 살짝 이완되기 시작했다.
설마 먹히나?
“이게, 오빠한테 얘기하다가 결혼을 언급해버리는 바람에... 급하게 대체해줄 사람을 찾다가 승관 씨 소개팅을 잡은 거예요. 민규 씨는 결혼 안 한 입장에서 소개팅 거절하는 것도 애매해서 그냥 한 것 같고...”
“...흐음.”
“나중에 설명하려고 했는데, 사진 받아보고 나니까 민규 씨인 거 있죠. 집 가서 민규 씨랑 얼마나 웃었는데요. 그래서 그냥... 이 김에 공개해버리자, 그렇게 된 거예요.”
마무리까지 하고, 슬쩍 눈치를 봤다. 승관 씨의 미간은 사뭇 다시 찌푸려진 상태였다.
...역시, 통하기엔 조금 허술했나-
“...생각보단, 꽤 납득이 가네요.”
-이게 먹혀?
“민규 형이랑도 얘기는 해보겠지만... 참나, 그럴 형이 아닌데.”
“네?”
“결혼이 필요한 상황이긴 했으니까, 뭐...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뭐... 네.”
승관 씨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유지한 채 나를 빤히 보다, 오른쪽 볼을 살짝 긁었다.
“그래도 잘 결혼했네요, 그 형.”
“...네?”
“자-알 맞는다고요. 여러모로.”
에휴, 한숨을 푹 내쉰 승관 씨가 목을 한 번 크게 돌렸다. 우두둑, 뼈 맞춰지는 소리가 꼭 내 탓인 것만 같아서 괜히 양심에 찔렸다.
“나중에 집들이나 한 번 갈게요.”
“네네! 언제든지.”
“네, 뭐, 그럼... 일하러 갑시다.”
문을 열고 나가는 승관 씨를 따라 살살 이동했다.
...살았다. 일단은.
***
민규 씨네 집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혼자 살기 거대한 걸 넘어서서, 4~5인 가족이 살아야 적절할 만한 수준이었다.
“엄청 큰데, 되게 깔끔하네요.”
“정돈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오, 그건 나랑 공통점이네. 나도 정리 잘하는데.
이쪽은 사람 정리니까, 좀 별개의 문제다만... 깔끔하게 뒤처리하려면 결국 청소는 필수란 말이지.
“혼자 하시는 거 안 힘드세요?”
“방 하나는 창고라 거의 안 건드리고, 다른 두 곳은 손님방이라 누구 올 때나 관리해요. 서재랑 제 방이랑 거실 정도니까 뭐...”
“...그렇게 들으니까 되게 힘드실 거 같은데요.”
“그런가요?”
싱긋, 민규 씨는 다시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발끝까지 떨어지려는 심장을 간신히 잡아 올려야 했다.
위장 결혼 계획을 세우는 며칠 동안 본 민규 씨는, 처음 봤던 날처럼 웃음이 매력적인 남자였다. 특히, 상냥하게 접히는 눈매가 아주 다정한.
“이제 여주 씨랑 나눠 할 수 있을 테니, 좀 편하겠네요.”
그래, 저 눈.
“...제가 요리엔 젬병이라, 청소는 도맡아서 할게요.”
“아, 그러실 것까진 없는데...”
“청소하는 거 좋아해서 그래요. 크고 잘 빠진 집을 보니 쓸고 닦고 싶은걸요?”
한없이 다정한 그 미소의 진의를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 거실이랑 주방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 방이랑 서재에는... 개인적인 게 좀 많아서.”
“...그래요?”
“네. 저도 여주 씨 방은 안 건드릴 테니 걱정은 마세요.”
이 남자의 미소는, 일종의 사회적 선이었다. 마주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짓는, 마음을 쉽게 열게 할 부드러운 접근법 정도. 그다지 특별한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러니까, 그 말은.
“일단 식사할까요? 외식은 어때요. 짐 정리하느라 집엔 먼지가 많을 테니.”
“...좋아요.”
민규 씨가 짓는 이 미소는, 직장 동료에게나 아내에게나 똑같단 소리다.
기분 더럽게도.
***
“민규 씨.”
“네.”
“뭐 하나 질문해도 돼요?”
“...흠, 할아버지에 관한 거죠?”
...하여간 민규 씨는, 왜인지 모르게 아주 눈치가 빠르다.
그래, 나에게 이유가 있듯, 민규 씨에게도 결혼의 이유가 있었다. 가업을 받아 의사 일을 하던 중 조부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시 외곽에 있는 큰 정신과 병원을 그대로 상속받으려면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그래서 1년 전이라는 기한이 필요했던 거고.
다만 내가 궁금한 건,
“민규 씨 할아버님은, 왜 하필 결혼을 조건으로 내거신 거예요?”
왜 하필 결혼이냐 이거다.
“...흠.”
민규 씨는 식기를 내려놓고 팔짱을 끼더니,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할아버님 마음을 다... 알 순 없는데.”
“.......”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좀 더 제대로 정착하길 바라셨던 모양이에요.”
“그런가요.”
“어쨌든 본질은 서국 인간이니, 가정을 꾸리지 않고 계속 있다 보면 정보기관 눈에 띄기도 쉽고... 손주 고생하는 거 보기 싫으셨던 거겠지 싶어요.”
“...서국 사람은, 아직 이방인이긴 하죠.”
“아무래도 그렇죠. 어릴 때부터 살아서 티가 안 나는 게 장점이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왜 민규 씨가 그렇게, 습관적으로까지 웃는지.
나도 그렇게 살았었으니까. 어쩌면 지금까지도.
“짠할까요?”
“좋죠.”
민규 씨는 다시 웃었다. 다른 의미로 심장이 떨어졌다. 얼마나 갈고 닦았을지 알 것 같아서.
챙, 와인잔이 부딪힌 소리가 왠지 무거웠다.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잔을 내려놓는데, 아직 움직이고 있는 민규 씨의 목울대가 눈에 들어왔다. 칼같이 목둘레에 맞춰 잠긴 윗단추, 꽉 조여 맨 넥타이.
답답해 보였다.
“셔츠는 일부러 끝까지 매시는 거예요?”
“네?”
“아까 집에서도 그렇고... 항상 끝까지 채워서 입으시는 거 같아서요. 저는 목이 답답한 걸 못 견디다 보니까 눈이 가서.”
민규 씨의 표정은, 꼭 저가 그러는지도 몰랐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곤 아니나 다를까,
“그랬나요?”
또 웃는다. 생긋, 예쁘게도 웃는다.
“저도 몰랐는데. 매번 느끼는 거지만 관찰력이 참 좋으세요.”
“아하하.”
“이유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뭘 입든 딱 맞는 걸 좋아하긴 하네요.”
“왜요? 저는 조금 크더라도 움직이기 편한 게 최고던데.”
“...흠.”
“...말씀하기 곤란하시면-”
“방심하기 싫어서?”
잔을 내려놓으며 돌아온 답은 예상 밖이었다. 안정감이 있다던가, 강박증이 있다던가, 그런 걸 생각했는데.
“방심이요?”
“옷이 딱 붙으면, 원치 않아도 몸이 긴장되잖아요.”
“그쵸.”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간, 웃지 않는 민규 씨의 눈은 생각보다 검었다.
“살짝이라도 긴장하고 있어야, 방심을 안 하고.”
“.......”
“방심을 안 해야, 실수도 안 하는 거라.”
“...완벽주의자신가 봐요.”
“의사니까요.”
습관적인 눈웃음을 짓기 전, 그 잠깐의 빛은 뜻을 알 수 없이 어두웠다.
계속 쳐다보고 있다간 어딘지 옭아 매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히 목 주위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 참. 오늘 승관 씨랑 얘기했었어요.”
다른 주제, 다른 주제.
“승관이요?”
“네, 소개팅 관련해서 뭐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다행히 성공적이었는지, 민규 씨는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걔도 참... 기다리랬는데, 그걸 못 참고.”
아까의 어두운 느낌은 어딜 가고, 적당히 상냥하면서 적당히 능글맞은 원래의 민규 씨가 돌아왔다.
“그냥 적당히 잘 둘러댔어요. 나중에 집들이 오시겠다고 하더라고요?”
“초대는 한 번 해야죠. 명목상이긴 하지만, 나름 이어준 입장인데.”
좀 전부터 움직이지 않던 식기들이 다시 움직이고, 음식의 맛도 돌아왔다.
...앞으로 가족사는 물어보지 말아야지. 무거워 죽는 줄 알았다.
비록 첫 만남 당시엔 약간의 호감을 보이는 것 같긴 했다만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니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다.
선은 지키자. 이 사람은 그냥, 좀 잘생기고, 좀 키 크고, 좀 몸 좋고 다정한...
...그래, 더럽게 내 취향인 위장 남편이다. 날 동료 보듯 보는, 가족 동료.
“그럼 15일에 정한 씨...? 맞나요. 오신다는 분.”
“네네.”
“그때 승관이도 같이 보는 거 어떨까요. 뭐 더 초대하고 싶은 사람 있으시면 그날 맞춰 초대하는 걸로 하고요.”
“네네, 좋아요.”
“준비할 게 많겠어요.”
고개를 끄덕이고 와인잔을 밀어놓았다. 이 서운한 듯 설레는 듯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술을 들이켰다간, 분명 사고를 치리라.
“...집들이하기 전에, 사진이나 찍어놓을까요? 이것저것.”
“...사진 좋죠. 결혼식은 몰래 올린 걸로 했으니까, 대체할 만한 사진이라도 있어야 믿을 만할 것 같네요.”
“네네.”
...사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 적당히만 사심 채우면서 살자. 서운해하지도, 아쉬워하지도 말고.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만 설레면서.
“여기 식당 맛있네요!”
다시 말하지만, 민규 씨의 미소는 더럽게도 내 취향이다.
***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옆방에서 들려오는 동거인의 숨소리도 일정해진 밤. ‘황혼’은 노트를 덮고 램프를 끄려다, 제 책상 위에 올려진 액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단정한 정장을 입은 채 미소 지은 김민규와, 그가 기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 아무 장식 없는 하얀 드레스에 머리를 올려묶은 김민규의 아내는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한 부부의 비밀스러운 결혼사진이라 할 만해 보였다.
“별걸 다 해보네.”
비밀 요원으로서 얼굴의 기록이 남을 법한 것은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건만. 그렇다고 부부라는 사람들이 사진 한 점도 남기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다 찾아온다는 지인도 보통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고 하니, 더욱 면밀히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임무 끝내고, 태우면 되겠지.”
고개를 기울인 채 액자를 빤히 바라보던 ‘황혼’은 아직 손에서 내려놓지 않은 펜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윤정한이랬지.”
윤정한. 윤정한.
친오빠나 다름없는 고향 친지라던 그 이름을 수없이 되뇌길 한참.
“분명 들어봤는데.”
답지 않게 미간을 구긴 채 잠시 고민하던 ‘황혼’은, 결국 덮었던 노트를 다시 펴곤 제 부인의 인간관계에 대한 줄 아래에 몇 자를 더 적어 내려갔다.
“김여주. 28세. 5월 26일생. 미혼. 기혼. 수도 시청 기록관리부 소속.”
“남부 출신으로 예상. 고아.”
“기타 인간관계로 보이는 것은 확인 불가하나 친하게 지내는 남성 1명 존재.”
“- 윤정한. 31세. 정부청사 외무부 소속. 동향 지인으로 가족처럼 생활.”
“큰 문제는 없어야 할 텐데.”
면밀하게 준비는 해두겠지만, 전해 들은 바로는 의남매로서 보통 애착이 있는 것이 아닌 듯 하니 속여넘기기 쉽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해나가며 더 적을 것이 있는지 고민하던 그때, 시청에 잠입한 동료의 전언이 문득 ‘황혼’의 머릿속을 꿰뚫었다.
- “그나저나 여주 씨, 거짓말 잘 하시더라.”
- “뭘 확인했길래.”
- “당황할 만한 상황에서 어떻게 잘 대처할 만한지 보려고 떠봤거든.”
- “쓸데없는 짓을.”
- “글쎄... 우리가 스파이라 망정이지, 일반인이었으면 깜빡 속았을 정도였는데.”
- “.......”
- “조사했을 땐 깨끗하긴 했는데...”
- “...적당히 더러운 것보다 깨끗한 게 무서울 때가 많지.”
- “그건 그래.”
- “신경 써야겠네.”
거짓말을 능숙히 만드는 것까지야, 전쟁 기운 덜 가신 흉흉한 나라에서 이상하게 볼 것은 없다. 어린 시절 고아로 자랐다 했으니, 오히려 일상이었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거짓말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거짓말을 파훼하기도 쉽지.”
지금껏 김민규로서 내뱉었던 스토리를 다시 한 번 주워삼긴 ‘황혼’은, 다시 펜을 들어 맨 아랫줄을 추가했다.
“담배 연기를 혐오. 검은색과 붉은색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편.”
“신체 능력이 좋고 감각이 기민한 편. 동거 시 주의 필요.”
“정리 정돈 속도가 빠름. 심하지 않은 수준이나 강박증적 성향이 있음.”
…
“허위 사실 구성 능력이 준수함. 플롯의 모순점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