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어둠의 온도
10
**
"여기 있어."
그의 집이었다. 통유리로 된 벽면 너머로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아래를 바라봤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나만 변했다. 나만. 그는 제 말에 답이 없는 나를 이끌어 소파 위로 앉혔다. '여기 있으라고' 하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내가 왜 여기 있어."
"그럼."
"..."
"갈 데라도 있어?"
"...지민ㅇ"
"걔네 아빠가 한 짓이라는거."
"..."
"너도 알잖아."
잔인하게도 사실 확인 시켜주네. 정호석. 나는 애써 그의 눈을 피했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쉽게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봤다. 오랜 적막이 흘렀다.
그 적막을 깬 건,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내 휴대전화가 아닌, 그의 휴대선화에서. 발신자는.
박지민.
지민이의 이름 세 글자가 그의 휴대전화 화면 위로 떠있었다.
그는 제 휴대전화를 내 앞에서 보여주며,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지민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껏 격양된 목소리였다.
"미친새끼야."
"인사가 격하네."
"어디로 데려갔어."
나는 지민이와 통화를 하기 위해, 그에게 손을 뻗었다. 휴대전화를 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내 옆에 앉았다. 수화기 너머로는 지민이의 욕짓거리가 계속해서 넘어왔다. 그는 그런 지민이를 신경도 안쓴다는 듯, 단숨에 말을 끊어냈다.
"이번에도 뺏기면"
"..."
"내가 너무 억울잖아."
"..."
"실수는 한 번에서 끝나야."
"..."
"실수니까."
그는 제 말을 끝으로 핸드폰 전원을 껐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바꿔달랬잖ㅇ"
"이번에도 널 구한 건, 나야."
"...뭐?"
"박지민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의 말투와는 사뭇 달랐다. 어딘가 처연함이 잔뜩 묻어나는, 그러한 목소리였다. 그는 제 오른팔에 채워진 팔찌를 어루만졌다. 무의식에 나온 행동 같았다. 내가 그 팔찌를 바라보자, 저도 놀란 듯 행동을 멈췄으니. 그는 생각보다 이 팔찌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챙겨 나왔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는 휴대전화였다. 발신자는 당연하게도 지민이었다. 그는 전에도 몇 통의 전화를 했는지, 화면 상단 위로 수십 통의 부재중 표시가 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내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나는 전화를 쉽게 받지 못했다. 그가 별 다른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음에도, 그냥. 그냥 받지 못했다. 나를 구해준 게 이번에도 자신이라고. 박지민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선했다. 그가 나를 구했던 때를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이 팔찌가 그에게 간 날이었겠지. 지민이가 나를 구해줬다 믿어서, 지민이에게 마음이 피어났던 날. 그 날, 그 마음의 주인공이 됐어야 할 대상이었겠지. 그가.
만약, 지금 내가 이 전화를 받아버리면. 나는 또 다시 그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어느 겨울 밤의 그때처럼. 나는 휴대전화를 무음모드로 바꾼 뒤, 화면을 뒤집어 소파 구석에 두었다. 나 조차도 이해 못할 행동에 나보다 더 놀란 건, 그였다. 나 같아도 그럴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지민이의 아버지도 미웠고, 아버지도 미웠고. 그 아버지 곁의 지민이도 미웠다. 그리고 당장은 나를 구해준, 내 옆의 이 아이가. 내게 유일했다.
*
그는 일단은 자고 일어나라며, 나를 제 방으로 데려갔다. 나도 그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성적인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제 방으로 나를 안내하는 중에도 자꾸만 제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팔찌를 만질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의 방은 지나치게 깔끔했다. 책장과 침대가 전부였다. 창문을 통해서 밝은 태양빛이 들어왔다. 커텐 하나 없는 방이었다.
"...고마워."
나름 엄청난 용기를 내어, 꺼낸 말이었다. 그는 제 방 문을 닫고 나가려다, 나의 말에 멈춰섰다. 나는 괜한 말을 했나 싶어 그의 침대로 파고 들었다. 이제는 그래도 꽤 익숙한 그의 향이 가득했다.
너가 고마워 할만큼
착한 사람 아니야. 나.
그의 말을 끝으로 방문이 닫혔다.
**
(호석 시점)
"그래서 지금 집에 같이 있다고?"
"...어."
수화기 너머로 남준이의 표정이 그려졌다. 녀석도 꽤나 복잡할텐데. 거기에 내가 엉킨 실타레를 하나 더, 던져버렸다. 함께 있다는 내 대답에 한동안 답이 없던 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의는 없어."
"..."
"순수하게, 다른 의도 없이 물어볼게."
"..."
"어떤 감정인데."
이번에는 내 쪽에서의 적막이었다. 녀석은 다른 대꾸없이 쉬라는 말을 남긴 채로 전화를 끊었다.
**
(탄소 시점)
그의 방으로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밤인 듯 싶었다. 꽤 오래 잤구나. 나.
나는 둔해진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정호석은 내가 문을 여는 소리에 깬 건지, 소파 뒤로 기댔던 제 몸을 일으켰다. 몇 시간 사이에 더욱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었다. 그와 마주한 상태가 된 나는, 이 다음. 딱히 무슨 행동을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 그대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런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뭐하냐' 하고 물었다. 집에서 나를 데리고 나갈 때에도 그랬다. 뭐하냐. 라고. 참 무심하면서도 둥근 말 같았다. 그래도 자고 일어났다고 마음이 꽤 가라 앉았다.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지만.
"그냥 서 있어."
뭐하냐는 그의 물음에 답했다. 그냥 서 있어. 그러자 그는 짧은 실소를 내뱉었다.
"왜 그냥 서 있어."
"...뭘 해야 될 지 모르겠어서."
"..."
"뭐부터, 아니. 당장 뭘..."
솔직한 심정이었다.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그냥 서 있었다. 그는 내 답을 예상치 못했는지, 다시 또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말을 이었다. 당장 뭘 해야 하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냐고.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내 손목을 잡고는 부엌으로 이끌었다.
"밥 먹어."
맥락없는 그의 말이었다. 이 상황에 밥을 먹어도 되는 건가. 나는 다시금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물었다. 밥 먹어도 되는거야? 그러자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제 몸을 싱크대 쪽으로 기대고 나를 바라봤다.
"너는... 너는 밥 먹었어?"
"...뭐?"
"...우리 아빠가... 너네 부모님한테 그랬다는거 듣고..."
"..."
"...그때"
"어."
"..."
"먹었어."
"..."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나도."
"..."
"밥은 먹었어."
"..."
"근데 넌 부모가 죽었어 아님, 전부 다 잃었어."
"..."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니까."
"..."
"먹어. 밥"
"..."
그와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이어갔다. 물론 일방적인 그의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가 '근데 넌 부모가 죽었어 아님, 전부 다 잃었어.' 라고 물을 때,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두 개 다 해당이었을 것이다. 나의 가족으로 인해. 나는 아랫 입술을 세게 깨물며, 눈물을 참아냈다. 그러자 그는 제 두 팔로 내 어깨를 강하게 감싸며, 내 고개를 들게끔 만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 밥 먹으라고.
결국 터진 눈물이었다.
울었어도 진작에 울었어야 했는데. 아빠의 사건을 듣자마자 울었어도, 지금까지 울고 있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 왜 이제야 눈물이 터진건지. 그는 내 어깨를 잡은 손을 떼어냈다. 유일한 온기가 멀어졌다. 그가 누군가를 잘 달래고 위로해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가 나를 위로해주는 게 얼마나 이기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래도, 그래도 그 이기적인 걸 바랬다. 나는. 그는 부엌에 나를 홀로 남겨두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소리 내어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거실과 부엌의 불이 꺼졌다. 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에 주변을 살폈다. 정전이가 싶었다. 하지만 불을 끈 건, 그였다. 그는 불을 끄고는 침실 옆의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기 전에 멈춰서 나를 바라봤다. 그의 인영이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인영도 사라졌다.
온기 대신 어둠을 주었다.
**
(호석 시점)
뉴스에서는 두드림 회장의 구속수사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회장이라는 작자는 수사를 받으러 가는 길에 멈춰서, 모든 것은 오해라고 말했다. 자신이 진실을 밝히겠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저는 청렴하다고. 그렇게 짖어댔다. 가증스러운 태도에 절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동시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남준이의 문자였다.
'유검사 담당으로 넘어갔다더라. 어떻게 다른 방법 알아볼까?'
시발. 하필이면 또 유검사야. 높으신 분들 뒤고 앞이고 다 봐주는, 돈 몇 푼에 제 알량한 자존심까지 파는. 왜 또 그 새끼냐고.
제 딸은 두려움에 떨다가 지쳐서, 잠으로 도망쳤는데. 저 새끼는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나는 남준의 문자에 내일 회사에서 이야기 하자는 답을 남기고, 소파로 몸을 기댔다.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른 그림이었다.
그들에게 서명서만 던져주고, 그 뒤로 천천히 목을 조여갈 생각이었다. 저들의 죄에 두려움에 살게 하고, 숨통이 막혀갈 때 쯤. 죽음에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갖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져 잠이라도 자볼까 하는 찰나에, 굳게 닫혔던 방문이 열렸다. 그녀는 문 앞에 서서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여전히 초점없는 눈빛이었다. 그녀가 나오기 전에 뉴스를 끈 게 다행이다 싶었다. 제 자리에 서서 움직일 생각조차 없어보이는 그녀에게 물었다. 뭐하냐. 그러자 그녀는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서 있다는, 가장 일차원적이고 솔직한 답을 내놓았다. 아홉의 내가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못한 이유기도 했다. 지독히도 닮았네. 너랑 나.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부엌으로 이끌었다. 아홉의 나를 내가 만난다면 해주고 싶었던 행동이었다. 밥 먹자고. 밥 먹으라고. 넌 잘못한 게 없다고. 그래서 그녀에게 말했다. 밥 먹으라고. 하지만 그녀는 내게 되물었다. 자신이 밥을 먹어도 되는거냐고. 순간 치밀어 오른 화였다.
어. 먹었어.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나도. 밥은 먹었어. 근데 넌 부모가 죽었어 아님, 전부 다 잃었어.
마지막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제 가족이 한 짓이니, 나를 볼 자신이 없었겠지.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니까. 먹어. 밥
내 말을 끝으로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서럽게, 제 모든 걸 뱉어내듯이.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순간, 그녀의 몸이 얕게 흠칫하더니 더욱 더 떨려왔다. 저를 잡고 있던 유일한 것이 사라졌으니. 나는 그녀를 지나쳐, 집 안의 불 스위치를 껐다. 순식간에 물든 어둠이었다.
나는 그랬다. 그때의 나는.
아무도 내가 우는 걸 보지 않았으면. 그래야 내가 더 울 수 있으니까. 마음 편히.
졸지에 가해자의 가족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눈물은 사치일 수도 있다.
그녀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제 잘못이 아닌데.
그래서 어둠을 주었다.
아무도 네 눈물에 돌을 던지지 않는다고.
심지어,
나조차도.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저도 곧 있으면, 개강이네요! 엉엉. 요즘 회사 일과 개강준비로 나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다정한 핀잔'이 있어서 힘이 나요.
여러분하고 소통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
11화와 12화부터는 다시 단단해진 여자 주인공과 마음 정리를 마친 호석이를 만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화에서는 두 사람에게 다른 방식의 '위로'가 전해졌으면, 싶습니다 -
날이 갑자기 추워졌어요. 여름이 변덕을 부려요...! 다들 몸 관리 잘 하셔야 해요!
다정한 사람들
- 암호닉 신청 했는데, 없으신 분들은 말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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