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 Boy!
: 괜찮아
02
01 화
Final Sentence
남자의 움직을 따라 검은 재들이 흩어졌는데, 그게 꼭 수채화 같았다. 그 수체화에 가슴이 벅차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남자를 주인공으로 글을 써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글은 멜로가 되겠구나. 마지막으로, 저 남자가 사람이 아니라 요정이나 뭐 그런 거일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백열구만이 그 남자를 비췄는데, 내가 봤던 그 어떤 것보다도 반짝거렸다. 남자는 이어폰을 꼽고 제 움직임에 취해 내 존재를 모르는 듯 했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남자의 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실 내 나름 옅게 이런저런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쩐다. 대박. 와. 저렇게 움직이는 게 가능해? 부서질 것 같은데 - 하며.
AM 5:01
핸드폰의 액정이 가리키는 시간은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내가 여기서 세 시간을 있었다고? 저 남자는 세 시간동안 춤만 췄고? 참 나도 나지만, 저 남자도 유별나다.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 다음에 또 와야지. 그 전에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 책장 사이로 두 눈을 빼꼼 내밀었는데.
"귀신 아니네."
남자가 눈 앞에 와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뒤로 넘어갈 수 밖에 없었고, 지금껏 봐왔던 드라마나 인터넷 소설처럼 남자가 나의 허리를 잡는다는 - 뭐 그런 일은 없었다. 덕분에 뒤로 넘어간 몸은 꽤나 우스꽝스러워졌다. 보기 좋게 넘어진 자세로 바라 본 남자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근사했다. 남자의 등 뒤로 푸른 새벽빛이 건너왔는데, 그게 또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남자에 감탄하던 나는 뭐라도 말을 해야 이 상황이 정리 될 듯 싶어, 큼큼하고 목을 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사, 사람이에요."
너무 의식의 흐름대로 말해서 문제였지.
"그럼 일어나죠. 옷 더러워졌을텐데."
"일어나려고 했어요. 방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이에요."
손을 두어 번 탈탈 털어내고, 끙차하고 몸을 세웠다. 이번에도 손을 잡아주고, 그런 로맨스는 없었다.
"아까부터 거울 뒤로 다 보였어요. 그 쪽."
"근데 왜 처음부터 아는 척 안했어요?"
"처녀귀신이 구경 온 줄 알았죠."
"저 처녀귀신 같아요?"
남자는 내 말에 나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뭐야. 이 남자.
"귀신 안같지는 않아요. 몰골이."
남자의 단어선택에 헛웃음이 나왔다. 몰골? 모습, 상태 그런 말 다 내다 버리고 몰골? 아니, 내 상태가 어디가 어때서. 나는 남자의 말에 두 발을 쿵쿵 소리내어 남자가 춤 추던 거울 앞으로 향했다. 걸음걸음 위로 검은 재가 피어 올랐다. 으, 넘어졌을 때 옷에 잔뜩 묻었겠네.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은, 새벽빛까지 받아 완벽한.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완벽한
귀신?
귀신이 뭐야.
귀신아 미안해.
언제 묻은 건지 입가에 잔뜩 묻은 검은 재는 후크선장 뺨을 치다 못해, 패도 될 정도였고.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다리에 묻은 검은 재들은 거의 털복숭이 원숭이? 태어나서 제모를 한 번도 안 한 사람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거무튀튀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방금 전 넘어지며 묻은 검은 재들이 흰 남방을 또 한 번 아름답게 리폼해줬다. 남자가 신고를 안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상태, 아니 몰골이었다.
"본인 모습 어때요."
"지금 신고 안해줘서 고맙다고 생각 중이에요. 나 같으면 신고했을 거 같아요."
원래 성격이 솔직한 편이라 그냥 느끼는 그대로 말했다. 뭐, 사실인데. 고마운 건 고마운거지. 남자는 그런 내 대답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안다니 다행이네요. 하며
"먼저 나가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너무 창피해서."
아무리 초면이라도, 이 모습은 정말 아니다. 게다가 나는 저 남자를 완전 괜찮게 생각하고 있으니, 더더욱!
"별 게 다."
"이건 '별 게'로 치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제발."
"그럼 지금 이 시간에 혼자 나간다고? 여기를?"
"알아서 갈게요. 저 여기 혼자 잘 왔으니까, 잘 갈 수 있어요."
"지금 다섯 시 넘었어요."
"상관없어요. 그냥 가던 길 가세요..."
"그래요. 그럼."
거울 뒤로 비춰지던 남자는 내 말에 수긍한 듯, 자리를 떴다. 사실 남자도 나랑 더 이상 실랑이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나는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아, 혹시 궁금할까봐 말하는데. 새벽 다섯 시가 제일 위험한 시간이래요. 하긴, 누구 하나 잡혀가도 모르기 딱 좋은 시간이긴 하니까."
미친.
*
바깥은 이곳에 올 때보다는 훨씬 밝았다. 손전등을 키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하지만 새벽 안개 탓에 시야는 여전히 답답했다. 게다가 핸드폰은 배터리가 언제 나갔는지 켜지지 않았다. 나는 괜히 손을 앞 뒤로 흔들며, 손뼉을 쳤다. 뭔가 위협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나한테 아무도 못 덤비지 않을까.
새벽 골목은 내 박수 소리만 일정하게 짝. 짝. 하고 울렸다. 머리 속으로는 박수 개수를 셌다. 헛생각 못하게. 원래 상상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상상력은 끝도 없어서 끝 없는 공포를 만들기에 딱 좋으니까.
짝, 짝, 짝, 짝, 짝, 짝, 턱.
이백일, 이백이, 이백삼, 이백사, 이백오, 이백육, 이백ㅊ...
뒤로 뻗은 손뼉 뒤로 무언가 닿았다. 턱- 하고. 그리고 동시에 들려왔다.
"조용히 가자. 여기 너 도와줄 사람 없으니까."
나는 박수를 쳐대던 두 손을 힘 없이 아래로 떨어트렸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거라고 텔레비전에서도 수 없이 보고, 책으로도 몇 번이고 봤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뒤의 사람은 그런 내 모습이 우스운지, 내 귓가에 킬킬하고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박수는 계속 치지? 덕분에 내 발자국 소리도 못들었던 것 같은데.
얼굴조차 보지 못한 남자의 투박한 손이 내 허벅지를 지분거렸다. 박수 치라고. 아까처럼.
나는 바보같이 다시 박수를 쳤다. 뒤로 뻗어 치지는 못하고, 앞으로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말 바보같이. 짝, 짝.
십 분쯤 걸었을까. 방향감각은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냥 남자가 귓가에 대고, 오른쪽 왼쪽 말하면 그대로 걸을 뿐. 남자는 박수소리가 작아질 때마다 내 귓가를 제 혀로 핥아댔다. 소리가 작아. 하며.
"가지가지하네. 진짜."
순식간이었다. 좀 전의, 그니까 지하에서 본 남자가 내 옆으로 온 건. 남자는 어디서 나타난 건지, 내 어깨를 제 쪽으로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내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너 그 노숙자 새끼지.
내 뒤를 밟던 사내는 남자의 말에 뒤를 돌아 달렸다. 빠르지 않은 속도였다. 사내는 한 쪽 다리를 절며 달렸다.
맞네. 그 새끼.
내 어깨를 끌어 안은 남자는 내게 잠시만. 하고 사내에게 달려갔다. 금새 사내에게 닿은 남자는 뭘 한 건지, 금방 내게 돌아왔다.
"괜찮아요?"
남자의 한 마디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주저앉았다.
"그니까 아까 같이 나왔으면 좋았잖아요."
"..."
"박수를 치긴 왜 쳐요. 바보야? 나왔으면 빨리 집을 가던, 사거리로 가던 했어야지. 나 여깄어요.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
"일어나요. 뭘 잘했다고."
남자는 자신의 말에도 움직임이 없는 내 행동에 화가 났는지,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곤 물었다.
"그 새끼가 어디 손대거나 한 데 있어요?"
"..."
"있냐고."
"..."
"아까 거기선 말 잘했잖아요. 왜 지ㄱ."
"ㄱ, 귀..."
"귀?"
"...귀를 핥았는, 핥았는데... 귀를 남자가... 귀를..."
방금 전의 상황이, 사내의 뱀 같은 혀가 떠올랐다. 눈물이 차올랐다. 나 이런 일을 당하고도 지금까지 안 운거야? 도와달라고 말 한 마디 못하고. 그, 그 사람 말대로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바보 같이 박수나 치고.
남자는 내 눈물에 당황한 듯,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래. 이렇게 우는 거예요. 누가 만지ㄱ, 아니. 누가 괴롭히고 힘들게 하면, 화내고 하지 말라고 하고. 그래도 너무 속상하면, 우는 게 맞아."
남자는 그렇게 한참을 내 곁에 있어줬다.
어느새 출근시간이 된 듯, 사람들이 하나 둘 골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지만. 남자는 그래도 내 앞에 있어줬다.
눈물이 서서히 멎어가자, 남자는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진짜 일어나야 돼요.
남자가 나와 함께 온 곳은 경찰서였다. 버벅거리는 나를 대신해 상황설명을 마친 남자였고, 그런 남자의 말을 전해 들은 남자 경찰관이 내게 다가왔다. 그러자 남자는 경찰관에게 '저기 - 죄송한데, 여자 경찰관 분은 안계실까요.' 하고 물었다. 경찰관은 남자의 말 뜻을 알아차린 듯, 미안하다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여자 경찰관과 함께 나타났다.
"괜찮아요. 이거 받고, 귀 한 번만 닦아줄래요?"
여자 경찰관이 내 손에 쥐어 준 건, 면봉이었다. 더 이상 바보 같이 울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또 다시 바보가 되는 건, 싫었다. 스스로 몇 번이고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고 손에 면봉을 쎄게 쥐었다. 경찰서에 도착한 이래로 계속해서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친 건.
괜찮아.
라고 입모양을 벙긋거리는 남자였다. 그리고 어느새 남자의 검은 집업이 내 무릎에 덮여 있었다.
현재 02.
정국이의 입술이 내 귀 언저리에 닿았다. 여린 간지러움과 그때의 악몽이 떠올랐다. 동시에 정국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귀가 제일 예뻐."
"..."
"내 잘생긴 목소리 잘 담아서 너한테 전해주잖아. 네 귀가."
정국이의 간지러운 말에 부끄러움은 오늘도 나의 몫이다. 물론 고마움이 더욱 크지만.
*
한 분이라도 읽어주시는 독자 분이 계시고, 반겨주시는 분이 계시니 많은 힘이 되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