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 Boy!
: 썸의 시작
04
03 화
Final Sentence
집업 두 손에 들고 가라는 거 아니에요.
남자는 제 손으로 허리에 무언가를 묶는 듯 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묶으라고. 다리에 뭐 잔뜩 묻었어요.
나는 남자의 말에 내 다리를 내려봤다. 다리에는 여전히 날아가지 않은 검은 재들이 묻어 있었다. 괜히 반바지를 입어가지고.
그리고 여기서 보니까 너무 짧아. 바지가.
꼭 묶고 가요.
꼭 묶고 가라는 말을 끝으로 남자는 제 갈 길을 향했다.
평소보다 긴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힘없이 쓰러졌다. 남자가 없었다면, 악몽으로 끝났을 하루였다.
남자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내 몸을 지분거리던 사내를 걷어주고, 함께 경찰서에 가주고, 거기에 나도 없는 증거까지 제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깊이 박힐 때까지 쥐고 있었다. 행여나 바람에 날아갈까, 무언가에 묻어서 더렵혀질까. 전전긍긍하며. 지금 생각하니 꽤나 학생같은 행동이었다. 살풋 웃음이 터졌다. 어린 티 제법 냈구나. 누가 머리카락을 주먹에 쥐고 있어. 그냥 주머니에 넣지. 그나저나 머리카락은 언제 뽑았지?
나는 남자와의 기억을 더듬었다. 나를 자기 쪽으로 당기고, 나한테 막 바보냐고 소리치고 - 그러고...
내 어깨를 끌어 안은 남자는 내게 잠시만. 하고 사내에게 달려갔다. 금새 사내에게 닿은 남자는 뭘 한 건지, 금방 내게 돌아왔다.
아. 알 것 같다. 그때였구나.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도 남자는 나를 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쯤 내 얼굴이 얼마나 붉을 지 그려졌다.
미쳤나봐. 나 왜 이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배게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곰인형을 온 힘을 다해 끌어 안았다가,
인형의 배에 내 얼굴을 묻고 비실비실 흘러 나오는 웃음을 막고.
마지막으로는
"진짜로 멋있지? 그치?"
곰인형에게 남자의 멋짐을 묻는 것이었다. 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우리 곰곰이도 분명히 내 말에 동의했을 거야. 우리가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치?
얼마나 잤을까. 창문 너머로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몇 시지.
PM10:32
오래도 잤네. 그래도 꽤나 가벼워진 몸과 마음이었다.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리자 푹신한 무언가가 밟혔다. 러그의 느낌은 아닌데 -
아, 곰곰아.
언제 침대 밑으로 떨어졌는지 모를 곰곰이가 아주 처량하게, 그것도 뒤집혀서 나를 반겼다. 미안해. 남자 때문에 너한테 별 짓을 다했구나. 내가.
곰곰이를 제 자리로 돌려 놓고, 굳게 닫아 두었던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금새 드러난 목덜미를 간질였는데, 신기하게도
그 남자 생각이 났다.
창 밖으로는 몇몇 사람들이 무리지어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가로등 밑에 비춘 사람들을 보니, 다들 교복차림이었다.
야자 끝날 시간이지, 참.
남학생들의 장난기 가득 담긴 욕설과 웃음 소리가 창문을 통해 넘어왔다. 그러자 또 다시 신기하게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교복 입은 그 남자가 그려졌다.
곰곰아. 네 엄마 비상이다.
현관문 앞에서 얼마나 서성였을까. 아직은 그래도 바깥을 나서는게, 전처럼 마냥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냉장고엔 아무 것도 없고,
그 남자도 다시 보고 싶은데.
나는 어릴 적 아빠가 만들어 준, 목각 호루라기를 주머니 깊숙한 곳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섰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맞은 편 주택 앞을 서성이는 남자였다. 본능적으로 주머니 속의 호루라기를 움켜쥐었다. 괜찮아. 탄소야 - 괜찮아.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편의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괜찮다. 하나도 안 무섭...
"누나?"
맞은 편의 남자는 나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누나? 하고 물었다. 낮았을 뿐, 결코 험악하거나 위협적인 목소리는 아니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반응한 내 몸은 극도로 예민했고, 따라서 호루라기를
삐이이이이익 - 삐이이이이익 -
불어댔다.
남자는 그런 내 행동을 보고 꽤나 당황한 듯, 두 손을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마시고, 호루라기에 입을 가져댔다. 하지만 호루라기 보다 빠른 건.
"정국인데."
남자, 그니까 정국이었다.
그것도 교복을 입은.
"ㅇ, 왜 여깄어요?"
"또 밤에 빨빨거리고 돌아다닐까봐, 혹시나 해서 와봤죠."
왜 여깄냐는 나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거린 남ㅈ, 아니 정국이는 또 밤에 빨빨거리고 돌아다닐까봐, 혹시나 해서 와봤죠. 라고 대꾸했다.
남자는 근데 - 하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근데 혹시나가 역시나네요. 또 나왔어. 이 시간에.
"주소는...?"
"진술서에 쓴 거 봤죠. 아. 소름 돋거나 무서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 새끼한테 대한 걸로, 그 새끼가 누나한테 찾아올까봐 걱정되서 본 거예요."
방금 전의 당당했던 태도는 어디가고, 자신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을 꺼내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나는 또 다시 잇새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 번 웃어버리면, 남자가 좋아서 웃고, 단정한 교복이 좋아서 웃고. 계속 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남자는 그런 내 모습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는지, 아 진짜 오늘만 와보고 말려고 했는데. 진짠데... 집 주소도 막 제대로 안외워서 맞은편에서 기다렸던 거예요. 하며 제 뒷머리를 헝클였다.
"큼, 큼. 알았어요."
"진짠데..."
"알아요. 믿을게요."
남자는 순식간에 내 얼굴 앞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가봐도 믿는 표정 아닌 거 알죠. 지금."
"..."
너무 가깝잖아.
"대답도 안해주네."
"..."
너무 잘생겼잖아.
"내가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요. 이번 일은. 미안해요."
남자는 다시 한 번, 제 뒷머리를 헝클이고는 내게 사과해왔다. 그리고는 주택을 벗어나려는 듯, 내게 등을 보였다.
"같이 가요!"
남자는 밑도 끝도 없는 내 외침에 다시 돌아서, 물었다. 어딜?
"그, 편의점...갈 건데..."
"응. 근데?"
"..."
"편의점 갈 건데?"
"...그..."
"말해요."
남자는 모르겠지. 가로등 밑에 제 모습을.
딱 벌어진 어깨에 맞아 떨어지는 흰 반팔 셔츠와 단정하게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바지. 그리고 넓은 등 뒤로 백팩을 맨 자신을.
"그, 편의점을 갈 건ㄷ..."
"편의점을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르겠네."
나 같으면 대충 눈치챘겠다. 아, 근데 또 어리니까 하나하나 다 말해줘야 되나? 편의점을 갈 건데 같이 가자 -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아, 이건 너무 유괴범 같다. 그러면...편의점까지 데려다 줘. 아니야. 이건 너무 애 같아. 아 그럼? 누나가 편의점가지 데려다 줄게. 아니야 이것도 별로야.
"누나."
"ㅇ,어?"
"내가 누나 편의점까지 데려다 주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
"..."
이렇게 훅훅 들어오지 좀 마. 교복아...
"내가 누나 편의점 따라가서 음료수 얻어 먹고 싶은데."
남자가 내게로 걸어온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금새, 내 앞에 닿은 남자는 내게 시선을 맞추고 물었다.
그래도 돼요?
나는 그런 남자의 눈을 맞추고, 마음 속으로 할 말인 '완전 그래도 돼'를 누구보다 씩씩하게.
"응! 완전 그래도 돼!"
외쳤다.
남자는 그런 내가 웃긴지 크게 웃어보이고는, 내 머리를 쓱쓱,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내가 완전 그래도 되는구나. 하고 나를 놀리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고.
"그럼 이것도 완전 그래도 되는 걸로 해요." 하며
제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아왔다.
나 이거 썸, 맞지?
현재 04.
대충 오늘 목표했던 소설 분량을 다 채우고 나서야, 겨우 허리를 필 수 있었다. 노트북만 보고 있으니까 눈 시려워. 이럴 땐 시력에 좋고, 건강에 좋은 우리 정국이를 봐야지.
"꾸꾸야 -"
내 옆에서 제 무대 구상을 짜던 정국이가 물었다. 다 썼어?
새삼 그 목소리가 또 좋아서, 응 - 하고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정국이는 그런 내 두 손을 제 한 손으로 잡고는 고생했어. 하고 내 손을 토닥여준다.
"정국이 너 손 좋아."
"나는 너가 좋아."
"아니. 너도 내 손이 좋다고 해야지."
"너 손 못생겼잖아. 쪼끄매가지구."
평소 손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정국이의 장난스러운 말에도 마음이 금새 모나졌다.
"손 못생긴 여자친구 있어서 좋겠다."
투덜거리는 내 말투에 정국이는 코까지 찡긋거리며, 웃음을 터트린다. 우리 누나. 어쩌면 좋지?
"저리 가"
"내가 너 두고 어디 가."
정국이는 나를 제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는 내 두 손을 방 천장을 향해 높이 들어보였다.
이렇게 쪼그만데, 이 손으로 어떻게 그런 글을 쓰지? 펜은 어떻게 쥐고. 숟가락은 어떻게 들어.
정국이의 손바닥 위를 겨우 넘는 내 손을 보고 있자니, 쑥스러움이 몰려와 몰라아아 하고 대답했다.
"신기해. 손도 발도 키도, 나보다 전부 다 작은데. 나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게."
"야. 그래도 내가 너보다 밥을 먹어도 몇 그릇을 더 먹었는데...!"
쪽.
"뭐, 뭐해."
쪽, 쪽.
"야아 - "
갑작스레 뽀뽀를 해오는 정국이에 당황해 등을 뒤로 빼자, 내 허리를 제게로 당긴다.
심장 간지러워.
정국이는 그런 나를 보며 제 콧잔등을 내 콧잔등에 맞추고, 말한다.
"자, 지금 내가 할 거는 야해. 그니까 - "
제 큼지막한 손으로 내 두 눈을 덮는다.
"눈 감자."
침대 위의 우리 곰곰이도 눈 감자!
*
게으르고 싶지 않아서, 매일매일 글을 올리려고 노력해요. 사실, 설레는 장면들을 더 잘 표현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더 노력해야겠어요.
다음 화부터는 본격적으로 둘의 관계가 나올 것 같아요.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게, 얼마나 큰 애정이 필요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