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이야기 : 막창먹으러 회식감
"쌤은 좋겠다.."
시끌벅적한 옆 테이블과 달리 보미와 나만 따로 나앉은 요 테이블에서, 보미는 내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부러움을 표시하는 중이었어. 나는 막창을 입에 와구와구 넣으면서 물었지. 왜?
"그냥, 변백현 쌤이랑 같이 일하니까요.."
"아니야, 사내연애 별로야."
"이제 연애아니잖아요!"
그래, 이제 애도 있지..그 말은 차마 못하고 그냥 씁쓸하게 웃었어. 너도 김종대랑 같은 병원이었으면 신랄하게 싸웠을걸?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 김종대가 얼마나 보수적인데..
"왜 같이 일하고 싶어?"
"그냥, 얼굴보면 힘나잖아요."
"에이, 아니야."
얼굴보면 더 힘들어.
"쌤 모르죠? 변쌤 맨날 쌤 얼굴 보려고 찾는거?"
"어?"
"맨날 죽을상으로 병동 두리번거리면서 쌤 얼굴 보고 가던데."
그리고 웃어요. 하면서 보미는 젓가락으로 막창을 톡톡 찔렀다. 하여튼 변백현 팔불출.
"그거 보면서 우리 오빠도 같은 병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너 그러면 여기 절대 못와."
김종대도 보수적이라서 이런거 아주 싫어해. 예를 들면 회식이라든지, 회식이라든지..
"그래서 오늘도 싸웠어요."
"어이구, 김종대가 화도 내?"
"화 잘내는데.."
살면서 김종대가 화내는 걸 본 게 손에 꼽을 정돈데, 제 여자친구에게는 아주 독할 정도로 보수적이구나 했지.
"그래서 술도 못 먹구.."
그래서 여기 앉았구나. 보미도 이제 발 단단히 매였다 생각하며 슬쩍 웃었어. 그러다 슬쩍 백현이가 있는 쪽 테이블을 바라보았더니 백현이는 아주 넙죽넙죽 교수님이 건네는 술잔을 다 받아먹고 있었어. 좀 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저게 다 사회생활이려니 했는데...
"어,"
보미가 어, 하며 나를 쳐다봤어. 백현이가 테이블에 머리를 쾅 박았기 때문일거야.
"좀 많이 드신 것 같은데.."
곧 다시 일어난 백현이는 생긋 웃었어. 저러니 괜찮은 줄 알고 교수님이 또 먹이지..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어찌 도와줄 방법이 없었기에 화장실가는 듯 나가는 백현이를 따라 화장실쪽으로 향했어.
비틀비틀 걸으면서 화장실 앞에 선 백현이는 어지러운 듯 벽을 짚었어. 그리곤 휙 뒤를 돌아보더니 그대로 직진해서 가게 밖으로 나갔어. 나를 못본 건지 스윽 지나가는 백현이를 따라 나도 가게 밖으로 나갔지.
가게 밖으로 나가 벽에 기대 선 백현이는 눈을 감고 숨을 푹 내쉬었어. 술 냄새가 심하게 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백현이에게 다가갔어.
"백현아."
내 부름에 눈을 번쩍 뜬 백현이가 나를 쳐다봤어.
"막창 많이 먹었어?"
술이 많이 들어간 듯 웅얼거리듯 물어. 고개를 끄덕였더니 백현이가 두 팔을 벌렸어. 안아달라는 뜻이야.
"많이 마셨어?"
백현이 윗배를 문지르면서 허리를 감싸 안았어. 으, 술냄새..
"많이 마셨어..."
내 어깨에 고개를 묻는 백현이 숨소리가 귀 뒤에 와 닿았어. 나는 또 술냄새가 심하다고 생각했어. 대체 얼마나 먹였으면 몸에서 술냄새가 진동을 해.
"운전.. 할 수 있겠어?"
"응, 힘들어? 지금 갈까?"
"밤인데..."
작년에 내가 바락바락 우겨서 면허를 겨우 땄는데, 백현이는 내가 밤에 운전하는 걸 정말 싫어했어. 시야도 좁아지고, 내가 또 겁이 많아서 운전할 때도 사소한 걸로 깜짝깜짝 놀라곤 하거든. 밤에는 그런 일이 더 잦으니까.. 또 응급실에서 음주운전하고 실려오는 환자들을 보면서 백현이는 밤 운전을 아주 진절머리나게 싫어했어.
"저, 선생님.."
백현이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계속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종인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백현이를 확 밀쳤어. 덕분에 균형을 잃은 백현이는 살짝 휘청였고 넘어질새라 얼른 팔목을 붙들었지.
"아, 김종인 진짜..눈치.."
백현이가 살짝 눈을 흘겼어. 장난인데, 종인이는 정말 미안하단 표정을 지어.
"교수님이 찾으세요."
김종인도 술 진-짜 세다. 백현이가 이 정도 먹었으면 종인이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발음도 안 꼬이는게 보통 주당이 아니다 싶었어.
어찌됐든, 백현이의 엄청난 존재감 덕인지 백현인 오래 자리를 비우지 못하고 다시 도살장 끌려가듯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지.
ㅡ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런 시..욕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하는 교수님 앞에서 차마 그런 상스런 말을 내뱉을 순 없었어.
"야, 변백현.."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꿈쩍도 안하는 변백현을 쿡쿡 찔렀어.
"그렇게 이름 부르니까, 또 되게 다정하네요.."
기분 좋으신 교수님은 내가 이악물고 부른 변백현 이름에 꽂히셨는지 행복한 표정을 지으셨어.
"병원에선 사적으로 대화하는 걸 한 번도 못봤는데.."
변백현은 많이 해요. 라고 속으로 외친 뒤 또 멍청이처럼 웃기만 했어.
"백현아, 좀..정신 좀.."
"아무래도 못 일어날 것 같죠?"
네. 고개를 끄덕거렸더니 종인이가 백현이 가방을 챙겨 내게 내민 뒤 등에 백현이를 업었어. 미동도 하지 않는 백현이를 보면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발에 신발을 신겨줬어. 내가 살다살다 변백현 신발 신겨주기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했지.
"미안해요, 내가 변백현 선생을 예뻐해서 그래요."
끝까지 미안하다며 손을 흔드는 교수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종인이와 병원 앞에 주차해 둔 차까지 왔어.
"아, 차키. 종인아, 백현이 바지 뒷주머니에 있을거야."
내 말에 종인이가 백현이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거렸고 나는 휴대폰으로 내일 백현이 근무표를 뒤지고 있었어. 내일 출근해야되는데 술 이렇게 퍼 마신 건가 싶어서.
"아 씨, 근무표..종인아, 백현이 내일 근무 뭔지 알아?"
"어.."
"몰라? 왜 업데이트 안해놨지?"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내 말에 대답없는 종인이에게로 시선을 돌렸어.
"어,"
"아기집.."
종인이 손에는 차키와 까만색 초음파 사진이 들려있었고 당황한 나는 종인이 손에서 사진을 낚아챘어.
"어, 그게.."
"..아기집, 맞는 것 같은데.."
확신에 확신을 거듭하는 종인이에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어. 첫 임신 진단 받았을 때 사진인가, 나는 사진 신청한 적이 없는데..
"맞아요?"
머리가 복잡한 내게 종인이가 재차 물어왔어. 사실 반박할 말이 없었고 찾지도 못할 것 같아서 그냥 고개를 살짝 끄덕였어. 백현이한테도 그랬고 나는 왜 항상 임신사실을 이렇게 예고없이 알려야하는가, 생각했어. 종인이는 마치 제 아기인 듯 수줍은 미소를 띄어.
"신기하다.."
"신기하긴 뭐가 신기해.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봤을 거 아냐."
"근데..선배님 아기니까.."
괜히 민망해지는 종인이 말에 나는 괜히 못들은 척 변백현을 퍽퍽 내려쳤어. 이제 일어나. 좀.
"으으응.."
"일어나, 응?"
내 말에 백현이는 눈을 뜰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고 결국 종인이가 정신못차리는 백현이를 그대로 조수석에 앉혔어.
"밤인데, 가실 수 있겠어요?"
"나 운전 잘 해."
"조심히 가세요. 홀몸도 아닌데.."
종인이 말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알겠다고 대답했어. 그렇게 당직을 하러 가는 종인이를 보내고 나는 짐덩어리 백현이를 한 번 쳐다 본 후 운전대를 잡았어.
"백현아."
대답없는 백현이를 서너번 부르며 우리집 주차장에 무사 도착했지. 늘 어려워하던 주차도 홀로 어렵사리 해치우고 백현이를 흔들어 깨웠어.
"백현아, 다 왔어."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 뿐이었어.
"내가 너를 어떻게 데리고 가.."
대답없는 백현이를 억지로 끄집어내렸어. 차에서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다행히도 백현이는 내가 당기는 힘에 순순히 따라 나와주었고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지.
"백현아아.."
"으응.."
"일어나, 좀..나 힘들어."
몸에 힘이 없어서 축 쳐지니까 더 무거워지는 기분이었어. 나 힘들어, 하는 말에 백현이는 어렵사리 눈을 떴어.
"..왜,"
"응?"
"왜 힘드러.."
"그거야, 네가.."
이러고 있으니까 힘들지.
겨우 어기적어기적 백현이를 끌다시피 침대까지 데리고 왔어. 침대에 백현이를 던지다시피 올려놓고 셔츠 단추를 풀었어.
"백현아, 옷 갈아입고 자."
축쳐진 몸의 팔을 빼고, 다른 쪽 팔도 빼서 낑낑거리며 옷을 잡아당겼는데,
"..너, 허리 아직도 안 좋아?"
백현이 허리에 떡 붙어있는 파스를 보며 물었어. 하지만 완전히 뻗어버린 백현이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색색 숨소리를 내면서 잘만 자고 있었지.
가슴 아프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마음이 아려왔어. 하긴 앉아있는 시간보다 서 있는 시간, 뛰어다니는 시간이 더 많은데 허리가 남아나는 게 신기할 일이야.
"이리 좀 와, 옷 입게.."
괜히 비죽비죽 삐져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집어넣으며 백현이를 탁탁 쳤어. 움찔거리는 백현이 목에 티셔츠를 끼우고 꿈지럭꿈지럭 팔도 열심히 끼워서 옷을 다 입히고 나서야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스윽 닦아냈어.
"..우욱,"
백현이 추리닝 바지를 찾으려고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백현이가 오바이트하는 소리를 내며 명치를 부여잡아.
"왜, 토할 것 같아?"
등을 쳐주려고 등에 손을 가져다대자 백현이는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어. 주저앉다시피 변기를 붙잡은 백현이는 바로 속을 다 게워내기 시작했지.
바로 화장실로 쫓아가서 주먹으로 백현이 등을 두어번 퍽퍽 쳤더니 백현이가 손을 뒤로 뻗어서 나를 화장실 밖으로 밀었어. 얼떨결에 나는 밀려나왔고 백현이는 화장실 문을 꼭 닫아버렸어.
"백현아, 왜? 등 좀 쳐 줄게. 응?"
내 목소리는 이미 울음범벅이 되어서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고 문을 잠궈버린 백현이 탓에 나는 화장실 문만 두드릴 뿐이었어. 안 그래도 허리 아픈 거 봐서 마음 아파 죽겠는데, 회식 때문에 술 진탕먹고 괴로워하는 백현이를 보니 눈물샘이 폭발한 것 처럼 펑펑 터져나왔지. 병원 일만 해도 힘들어 죽을 지경일텐데, 저렇게 토하고 식도 다 상하려고..
"야, 변백현..."
결국엔 문 열어주지 않는 백현이에게도 서러움이 터졌어. 내가 하는 건 뭐든 도와주려고 하면서 왜 나는 등 두드려 주는 것조차 못하게 하는거야.
"문 열으라구, 문 열어.."
으엉, 으어엉.. 결국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자마자 백현이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나왔어.
"..괜찮아?"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바쁘게 닦아내며 백현이를 보고 물었어. 속을 비워내자 술이 조금 깼는지 백현이는 희미하게 웃었어. 그리곤 천천히 걸어와서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어. 천천히 백현이 가슴팍에 눈물 범벅인 얼굴을 묻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엉엉 울음을 토해냈어.
"이게 그렇게 서러울 일이야?"
내 머리 위에 제 얼굴을 올린 백현이가 웃고 있는 지 옅게 떨려왔어.
"나 괜찮아. 왜 이렇게 울어. 응?"
반은 술에 취해서 느릿느릿 내뱉는 백현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늘 백현이가 하던 것처럼 백현이 명치부근을 짚었어.
"괜찮아? 응? 왜 문 잠궜어, 나 진짜..."
나 진짜 아무것도 못해줘서, 그래서 너무 슬펐단 말이야. 뒷말은 잇지도 못하고 다시 얼굴을 박고 눈물을 퐁퐁 뿜어냈어. 백현이는 또다시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고 내가 아까 갈아입혀준 흰 티셔츠는 내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렸어.
"울지마, 아가도 운다."
백현이의 말에 나는 억지로 울음을 꾹 참았어. 그러고도 백현이 품 안에서 몇 분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백현이는 내 얼굴을 천천히 떼내었어.
백현이 두 손 안에 쥐어진 내 얼굴은 무척이나 괴상하고 못생겼겠지만 백현이는 늘 그렇듯 세상에서 가장 예쁜 걸 본다는 표정을 지었지.
ㅡ
"흐으엉.."
백현이는 아침부터 스테이션에 엎드려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어.
"변쌤, 3호실 6번 드레싱이요."
"..네에.."
죽을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몸을 일으킨 백현이는 카트에서 주섬주섬 드레싱 물품을 옮겨 담았어. 느릿한 손놀림으로 거즈를 옮겨 담고 알코올 소독솜을 옮겨담으려 뚜껑을 연 백현이는,
"..욱,'
아니나 다를까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 쪽으로 달려갔지.
"선생님 어제 과음하셨나봐요, 심하게."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어. 아주 뻗었어요, 그냥.
애써 모른 척 모니터를 바라보는데 백현이가 어기적어기적 다시 스테이션으로 돌아왔어. 다시 카트로 향하는 백현이를 잡아서 마스크를 내밀었지.
"쓰고 해. 드레싱하다가 토할거야?"
내 말에 퀭한 눈의 백현이는 얌전히 마스크를 쓰며 쓰린 속을 부여잡았어. 저건 뭐...
"같이 가줘어.."
결국 백현이와 함께 3호실 6번베드로 향했어.
3호실 6번 베드면..
"으아아아가악!!!!!"
4살짜리 남자아기, 그러니까 며칠 전에 복부 수술을 한 아기였어. 4살이면 힘도 세고 발버둥도 많이 치고..제일 중요한 건 말이 안 통한다는 거야.
"재현아-, 어제도 재현이 잘 했지? 응?"
"으아아악아!!!!!!시러어!!!!!!!"
"어? 어제 선생님이 봤는데? 재현이 이거 뚝딱뚝딱 잘하고 사탕 냠냠 하는 거 봤는데?"
어린 아이들은 엄마가 눈에 보이면 더 울고 보채는 경향이 있어서 이미 아기 엄마는 병실을 나가 버린 후 였어. 아이다루는 데 능숙한 백현이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봤자 아이는 엉엉 울어댔지.
"엄마 부를까?"
백현이도 오늘은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서인지 우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물었어. 오늘은 아무래도..
"보호자 분, 들어오셔서 아이 좀 잡아주셔야 될 것 같아요."
결국 아이 엄마가 아이 곁으로 돌아왔고 재현이는 안아달라는 듯 두 손을 쭉 뻗어 더욱 칭얼거렸지.
"재현이 뚝. 눈 감고 십초 세면 끝난다고 엄마가 그랬지?"
엄마의 말에도 요지부동인 아이를 보곤 아이 엄마는 민망한 듯 웃으며 아이 팔을 잡았어.
"다리.."
내가 재현이 다리를 손으로 잡아 누르자 백현이가 맘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었어.
"다리 꽉 잡으셔야해요. 애가 힘이 세서."
백현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 4살짜리 아이 힘 센거야 많이 당해봐서 아는 사실이니까.
"재현아, 잠시만 아야할게요."
소독솜을 든 백현이가 조심스럽게 아이 상처부위를 닦아 내는 순간,
"으아아악!!!!!!!"
"..아윽,"
아이 비명소리와 내 눌린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왔어. 소독솜이 닿음에 놀란 모양인지 아이는 엄청난 힘으로 발버둥을 쳤고 잠시 방심한 사이 아이 발은 내 배를 가격했지.
정말 눈물 찔끔나게 아파서 순간적으로 허리를 움추렸어. 백현이는 안봐도 비디오지.
"괜찮아? 어디 봐, 세게 맞았어?"
손에 들고 있던 모든 걸 내팽겨치고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한 손은 내 배 위에 올려놓곤 미간을 잔뜩 찌푸렸어.
"괜찮아요, 쌤.. 일단 마저 하고.."
당황한 백현이가 내 뱉는 반말에 나도 되려 당황해서 백현이를 슬쩍 밀쳐냈어.
결국 백현이가 한 손으로 아이 다리를 꽉 누른 상태로 드레싱을 다시 시작했고 아이 울음소리만 들리는 병실 속에서 백현이 손놀림은 말도 없이 빨라져갔어.
원래 드레싱을 마친 후 테이핑을 할 때 백현이는 꼭 아이들 대상으로는 직접 아이가 마지막 테이프를 붙이게 해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 테이프까지 백현이가 빠르게 붙여버린 후 드레싱세트를 빠르게 카트에 싣고 병실을 빠져나갔어.
나는 백현이에게 손목을 붙들려 복도 구석까지 질질 끌려갔지.
"괜찮아?"
"괜찮아. 아까는 놀라서 그랬어."
"괜히 데리고 들어가서.."
"괜찮아, 진짜로."
"아기 내려오는 느낌 같은 건 없고? 복통은?"
"없어. 괜찮아."
"너 일 조금만 쉬면 안돼? 조금만..이제 곧 환절기 독감도 돌거고, 너 이러다 결핵환자라도 들어오면 어떡하려고 그래. 약도 못 쓰는 거 알잖아."
"말 했잖아. 6개월부터 쉰다고.."
내 말에 백현이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어. 괜히 또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숙였어.
6개월로 약속을 했었기에 백현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이렇게 별일도 아닌 것에 가슴 졸여하며 걱정하는 백현이 탓에 요 근래 입맛이 뚝 떨어져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사실은 입밖으로 꺼내지도 못했어. 어제 먹은 막창이 마지막 음식이었다는 것도.
"알았어. 그럼 가서 좀 앉아있어. 자꾸 서있으면 안 좋아."
"너나 좀 앉아있어..교수님은 멀쩡하던데, 넌.."
"알잖아. 그 사람 그냥 술고래야, 술고래."
진절머리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백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안경을 손가락으로 한번 추켜올린 백현이가 내 앞으로 몇 발자국 다가오더니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고 몸을 축 늘어뜨렸어. 누가 볼까봐 야아, 하고 핀잔을 줬지만 여기는 복도중에서도 사각지대라는 것을 우리 둘 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백현이도 물러서지 않았어.
"자기야.."
"응?"
"나 속이 너무 쓰려.."
"어떡해, 약이라도 타 먹을래?"
"뽀뽀 한 번만 해주라.."
입 동동 살아서 떠드는 거 보니 죽을 지경은 아니구나. 혐오스럽단 표정으로 백현이를 밀친 내가 먼저 복도를 빠져나갔지. 자기야아..뒤에서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고개를 휙휙 돌리며 애써 유혹을 떨쳐냈어.
"선생님!"
스테이션에 가자마자 나를 찾는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어.
"응?"
"임원석 환자 응급수술 잡혔어요, 지금 바로 내려보내야 될 것 같아요."
"갑자기 왜?"
"아까부터 복통있다고 했는데 장이 꼬였대요. 수술실 바로 내리면 된다고 연락왔어요."
일이 꼬이려니 이렇게 꼬이냐, 급하게 수술실 내릴 차트를 체크하는데 백현이도 옆에서 정신없이 타이핑을 하고있어. 임원석환자가 백현이 환자였던가.
"네 수술이야?"
"응, 아..속 쓰린데."
"힘들면 약 먹고 가. 수술 짧은 거 아니잖아."
"응급이라서, 갔다올게."
내가 차트를 체크해서 환자 침대에 꽂자마자 백현이는 침대를 끌고 바로 엘레베이터에 올라탔어. 아까 뽀뽀해 줄 걸 그랬나, 살짝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수척해보이는 백현이는 그대로 사라져버렸어.
백현이에 대한 안쓰러움도 잠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탓에 백현이는 잊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세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어. 조금 있으면 백현이도 수술 끝나고 올라오겠구나. 만나면 수고했다고 말해줘야겠다 생각하며 내심 백현이를 기다리고 있었지.
"선생님, 마취과에서 전화왔는데.."
어리벙벙 신규가 전화를 들고 쩔쩔매는 모습에 수화기를 건네받았어.
"네, 전화바꿨습니다."
-임원식 환자 수술 끝나고 바로 내시경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내시경 동의서가 빠져서요, 혹시 차트에 같이 안 보내셨어요?
"내시경동의서요? 어, 보냈는데. 잠시만요."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차트를 뒤적거렸더니, 내시경 동의서가 빼꼼 얼굴을 디밀어. 이런..
"아, 저희가 빠트렸네요.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마취과요?"
아까 백현이한테 동의서 받으면 차트에 끼워놓으랬는데, 깜빡했나봐. 이를 바득갈며 전화를 끊었어. 제가 다녀오겠다는 신규를 뒤로하고 동의서를 손에 팔랑팔랑 든 채 계단을 내려갔지. 백현이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긴 정말 안 좋은가봐. 마취과에 도착해 죄송하단 말과 함께 동의서를 건네주고 백현이가 수술했다는 임원식환자 얼굴도 한 번 스윽 지나가며 본 채 마취실을 빠져나가려는데,
"어, 혹시 변백현 선생님.."
나를 붙잡는 백현이이름에 깜짝놀라 고개를 돌렸어.
"변백현 선생님 아내 분, 맞으시죠?"
내 이름표를 보고 맞냐며 어색하게 물어보는 질문에 맞다고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어. 백현이가 사고를 쳤나, 나를 왜..
"이 쪽, 화장실 한 번 가보시겠어요?"
또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간호사에 나는 회복실 안에 있는 화장실로 발걸음을 돌렸어. 살짝 문이 열려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더니 웬 수술복 입은 낯익은 등짝 하나가 보여.
"..어휴,"
그 안에선 백현이가 세상 모든 고통을 짊어진 듯 속을 토해내고 있었어. 쯧쯧, 혀를 차며 내가 들어갔더니 백현이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슬쩍 쳐다봤어.
"아 씨.."
들킨 게 분하다는 듯 백현이는 두 눈을 꼭 감았어.
"약 먹고 가랬지. 수술하다 토한 건 아니지?"
"할 뻔 했어..참느라 죽는 줄 알았어."
다가오는 나를 팔로 저지한 백현이는 어제 밤 일이 생각났는지 이내 팔을 거뒀어.
"수술 시작한다고 베타딘으로 문지르는데, 나 죽을 뻔했어. 자기야.."
속을 다 비웠는지 어기적어기적 일어나는 백현이를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지. 내가 대학생때 술먹고 백현이에게 진상 부린 일들 이렇게 되돌려받나 싶었어.
"그래도 얼굴보니까 좋다."
헤헤 속없이 웃는 백현이를 보며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저런 것도 의사한다고..
ㅡ
이런 연재텀에도 기다리는 여러분은....진정한 더쿠들...더쿠조건 1순위가 인내심이자나여ㅎ ,,후...저는 인내심이 없어서 항상 덕질이 힘들었답니다 얼른 결혼하고 싶고 막 얼른 애도낳고 싶고..물론 백현이랑.. 요즘은 덕질할시간도 부족해서 인생의 낙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