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두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난 그저 그림이 그리고 싶었던 것 뿐이야.
아래에 바다를 둔 채 길게 뻗어진 다리 위 난간에 기대어 흰 도화지를 펼쳤다. 가지런히 모은 두 발 아래에 보이는 심연 그 깊은 모습이, 숨을 잠시 멈춰야 할 만큼이나 벅차게 다가왔다. 저 멀리서부터 푸르게 굽이치는 파도가 이내 큰 바위에 부딫혀 희게 부서지는 모습이 어째서 그날따라 묘하게 느껴졌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렇게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어 바다의 짠 내음을 고스란히 느껴낸 뒤, 다시 눈을 뜨면, 바다는 내가 일전에 눈에 담았던 그 고요함을 잃은지 오래였다. 넓은 바위 위에 마치 애초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양 태연히 자리잡고 있는건, 소년의 피사체였다. 소금기를 머금은 채 제멋대로 흐트러진 흑단같은 머리칼에, 이미 축축하니 젖어버린 흰 셔츠. 소년의 맨발은 몰아치는 파도에 젖어있었다. 강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탓에 위에서부터 흩날려온 붉은 꽃잎들이 소년의 주변에 어지러이 흩뿌려져 있었다. 무엇일까, 그순간 내게 휘몰아쳐온 감정은. 소년의 모습에 놀란 난 손에 들린 연필을 힘없이 바닥에 떨어트렸다. 난간에 부딫혀 튀어오른 연필이 이내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바위에 부딫혀 둔탁한 마찰음을 냈다. 탁,탁. 그 소리에 소년은 느리게,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조바심이 들 정도로 느리게 고개를 돌리던 소년은, 이내 내 얼굴과 마주하기 한순간 전에 가만히 멈춰버렸다. 그렇게 한동안이나 가만히 고개를 가만히 두던 소년은 이윽고 고개를 돌려 나와 마주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주친.
그의 눈은, 아, 그의 눈은,
그의 두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마냥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그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것은 시린 푸른빛의 사파이어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고통에 가득 찬 붉은빛의 루비였을까. 머릿속의 모든 사고가 정지된 채 그저 그의 눈이 향하는 곳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한참동안이나 저를 들여다보는 내 눈을 마주하며 무표정으로 응시하던 그 소년이 눈을 한번 깜빡이는 순간, 내 발이 제멋대로 난간 위를 밟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분명 저 아래의 바다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발은 멈출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감고있던 그 소년이 다시 눈을 뜨는 순간, 바다를 마주하며 곤두박질치기 직전의 내 몸은, 방향을 바꾸어 반대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내 두 눈은 등허리가 바닥에 닿기 바로 전 그 순간에도 소년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표정없이 응시하던 소년이 이내 제 입꼬리를 비틀었다. 입가에 미소를 잔뜩 퍼트리며 그는 입모양으로 내게 말했다.
"잊지마, 절대."
"너, 단단히 홀렸다며?"
옆에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하던 여자아이가 실눈을 뜨며 내게 속삭였다. 그에 떴던 눈을 다시 감아보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홀리긴, 뭐에 홀려. 태연한 내 대답에 아이는 내게 더 바싹 붙어오며 속삭였다. "무어긴, 마안이지." 그녀의 대답에 얌전히 모은 채 기도를 하던 손이 제멋대로 떨려왔다. 대답 않는 내 눈치를 살피며, 아이가 말을 이었다. "원장수녀님께서 다리 위에서 널 발견하셨을때부터 깨어나기 전까지도, 너는 줄곧 '눈' 얘기 뿐이었대." 그 말에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런적 없어, 나는. 대답이 영 시원찮았는지,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이내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 마안에 홀리면 꼼짝없이 끌려다닐 신세래. 그녀의 말에 줄곧 감고있던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며 물었다. "대체 마안이 뭔데?" 내 물음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고선 대답해보였다. "영묘한 힘을 가진 눈.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 마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듯 가차없이 홀린대." 그 말과 함께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어 속삭였다. 이번엔, 전보다 더 조용히. "그런데 어제 네가 본 그 애가 가진 마안은, 악마의 것이래. 악마의 눈을 가진 탓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가 버렸대." 스산한 분위기를 내려 애쓰며 말한 그녀가 가벼운 어투로 덧붙였다. 아니면, 그 악마가 다 없애버린 걸지도 모르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게 있을 리 없잖아. 어제 난, 그저 피곤했을 뿐이야. 내말에 아이가 헛웃음을 치곤 이내 내게 더 바싹 붙어 소근거렸다. "그거 알아? 어제 신부님께서 널 데려오면서 그 아이도 함께 데려왔대. 그 애 안의 '악마'를 퇴치하려 한다는데." 말을 마친 그녀는 점점 가까워오는 원장수녀님의 눈치를 살피며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제자리로 돌아가 기도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녀를 따라 눈을 질끈 감은 채 두 손을 모으며, 난 머릿속으로 기도문을 외는 대신 어제의 그 눈동자를 되새기려 애썼다. 하지만 나의 노력과는 달리, 그 눈동자는 아무리 애를 쓰고 생각해도 내 기억 안에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내 머릿속엔 자꾸만 소년의 붉게 물든 입술이 아른거렸다. 느리게 움직이며, 그 입술이 줄곧 그리던 말.
어서 날 기억해내.
분명 잠에 들었다 생각했는데, 눈을 떴을 때 보이는건 그날의 푸른 바다였다. 허나 이번에 내가 서있는 곳은, 바다 위 다리가 아닌, 소년이 누워있던 바위더미 근처였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가만히 멈추어 바다를 향해있던 내 몸이 제멋대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뾰족하게 날이 솟은 바위 위를 위태로이 걸음하는 나의 맨발에서 선홍빛 혈이 베어나오기 시작했다. 발이 아려오는 탓에 눈가에 눈물이 고일 때 즈음, 눈 앞에 들어오는건, 그 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 소년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선율에 맞춰 춤을 추며 붉은 꽃잎들이 소년의 주변에 조용히 퍼졌다. 떨어지던 꽃잎 중 하나가 소년의 콧잔등을 간지럽히는걸 물끄러미 보고있으면, 소년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꽤, 늦었네. 내가 널 부른건 분명 몇시간이나 전의 일인데 말이야." 소년의 말에 의아해 질문을 하려다, 이내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그런 날 눈치챘는지, 입가에 미소를 더 진하게 띄우며 소년이 말했다. "말은 필요하지 않아. 여긴 어디까지나 너와 내 무의식일뿐이거든." 그 말을 할 때까지도 소년의 눈은 굳게 감긴 채였다. 문득 손을 뻗어 그가 눈을 뜨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에 본 소년의 눈은, 어땠었지?
"이 무의식에 널 부른 이유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야." 단조로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모노톤의 선율을 연상하게 했다. 마치 내게 노래를 하며 말하는 듯한 착각. "내가 눈을 뜨면, 넌 나에게 찾아올꺼야." 단정짓듯, 짧게 말을 한 그는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채 고개를 내게서 멀리 돌렸다.
눈을 뜨면, 내가 눈을 뜨면....
머릿속에 그의 말소리가 반복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생각을 더 할 새도 없이, 그의 눈꺼풀이 열리며,
"내게 와, 어서."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느새 축축해진 원피스를 펄럭이며, 황급히 머리맡 책상을 손으로 더듬어 성경책을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만져지지 않는 성경책에, 한숨을 쉬며 배게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쳤다. 이럴순없어, 그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갈 순 없어. 차라리 잠을 자면 이겨낼 수 있겠지, 라는 내 생각을 비웃듯, 어두워진 내 의식 너머로 자꾸만 그가 노래하듯 속삭였다. 어서, 어서, 내게로 와. 그리고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들키지 않게 까치발을 들며 복도를 내달린건, 한순간이었다. 누가 내게 말해주지 않아도 난 어디로 가야할지 이미 알고있었다. 내 발이 무작정 지하실로 향했기에. 종종걸음으로 기숙사 밖을 내달리며 내려다본 내 발끝에는, 붉은 상처들이 남겨져 있었다.
지하실의 문은 마치 아무도 열 생각을 하지 않은 듯, 뻑뻑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단칸방 치고는 꽤나 긴 계단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그리고 계단의 끝에서 지하실의 바닥을 밟자마자, 그렇게나 제멋대로 내달리던 발이 이내 우뚝 멈춰섰다. 욱신거리는 발을 애써 숨기며, 가만히 내 눈앞에 보이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낡은 의자에,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잔뜩 헤집어진 채 묶여있었다. 돌아가야 해. 머릿속에 붉은 경보를 울리며 의식이 귀띔했다. 돌아서지지 않는 발을 애써 돌리려 안간힘을 쓰던 그 때, 좁은 지하실을 울리며 단조로운 목소리가 귀를 감싸왔다. "겁낼 것 없어, 이리 가까이 와." 그는 여전히 뒤돌지 않은 채였다. 그의 목소리에 자꾸만 움직이려는 발을 멈추며 고개를 저었다. 겁에 질린 이빨이 서로 부딫혀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걱정하지마, 난 널 볼 수 있지만 넌 날 볼 수 없어." 왜일까, 그의 말에 신뢰가 갔던 건. 그의 말에 우뚝 멈춰선 발을 떼어 천천히 그에게로 향했다. 그런 날 느꼈는지, 웃음을 흘리며 그가 말했다.
"잘했어, 이제 어서 내게로 와. 나의,"
나의... 나의... 그는 말허리를 끊은 채 이을 생각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앞에 서 두려움에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면, 그가 보였다. 거칠게 찢긴 옷차림의 그는 두번의 만남과는 다르게, 힘없이 묶여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의 눈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순백의 흰 천 위로 군데군데 보이는 선혈의 붉은 흔적이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눈을 뜨자마자 맞은편의 그는 울상을 지어보였다. "그들이, 내 눈을 해하려했어." 어린아이마냥 칭얼대던 그는, 이내 입가의 감정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지우며 내게 제 몸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내 눈에, 악마가 들었대." 무감정한 어조로 말문을 연 그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넌, 내 눈을 봤잖아. 내 눈은,"
"아름다웠지?"
그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름다웠을까, 아니면 위험했을까. 대답 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있는 날 아는지, 그는 웃음을 흘리며 묶인 제 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말없이 손만을 내미는 그의 모습에 의아하다가도, 어느새 밧줄을 풀어주고 있는 나였다. 이내 제 양손이 자유로워진걸 느낀 그가 피딱지가 잔뜩 얹은 제 손을 내게 내밀어, 원피스 밑자락을 쓸었다. 그의 두 손가락 사이로, 흰 원피스 천이 대조적인 모양새를 띄우며 사락, 하는 소리와 함께 굽이쳤다. 그 모양새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 이내 그가 내 머리칼을 쓸며 입을 열었다. "아, 불쌍한 나의 마리아." 나의 세례명을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듯 발음한 그가 안타깝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내 눈을 마주해버린 딱한, 딱한 나의 마리아." 연신 내 등허리를 쓸던 그의 손이 이내 목덜미에 멈췄다. 제 엄지손가락으로 목덜미 어딘가를 꾹 누르던 그가 내게 자세를 낮추라는 시늉을 해보이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내가 가려진 천을 벗어 눈을 뜨면, 나와 도망치는거야." "멀리, 멀리 도망치는거야. 우리 둘만의 곳으로." 말을 마친 후 목덜미에 키스를 남긴 그가 이빨을 세웠다. 줄곧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든 그가,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눈가의 천을 벗어냈다.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벗겨지고, 그가 닫힌 눈꺼풀을 조용히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눈을 떴다.
"사랑스러운, 나의 마리아."
꽃봉오리 |
회장님 잠시 쿨링타임...! 이제 8화 작업 쳐야겠네요!! |
꽃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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