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둘이 잘 어울리죠?"
"그걸 말이라고. 아기 계획은 있구?"
"아직 계획은 없어요. 근데,"
"........."
"낳으면 저는 우리 아내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대에게 물들다::
열번째
"...지금이요?"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세상 모르고 편하게 자고 있던 여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더듬었다. 조용하던 방 안에 전화 벨소리가 가득 울렸다. 떨어뜨릴 뻔한 핸드폰을 겨우 집어들어 누구인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받아든 여주가 흘러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준비 다 했어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건넨 기현은 그녀의 가득 잠긴 목소리에 금방 입을 다물고는 눈을 굴렸다. 여주 또한 이 아침에 무슨 일이냐며 푸스스 웃어보이려다 자신을 향한 질문에 완전히 눈을 뜨고는 한참 뜸을 들이다 물었다. 지금이요? 불안함이 가득 담긴 물음에 기현이 흠- 숨을 들이쉬고는 애꿎은 바닥을 쳐다보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일어난 목소리도 예쁘네요."
"...지금 몇 시예요?"
"음, 한 10시쯤?"
"...우리가 몇시에 만나기로 했죠?"
"...지금."
아직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질문을 하다 오늘, 기현과 자신이 만나자고 통화로 했던 약속이 떠올라 여주는 어떡해요, 진짜 미안해요- 여전히 이불을 몸에 두른 채로 침대를 구르다 쿵- 떨어져서야 기현의 괜찮냐는 놀람이 담긴 질문에 머리를 가득 흐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현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곧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나- 하나- 햇살을 받아 투명한 창문을 속으로 세다 정확히 14층에 시선을 멈추게끔 했다.
"안미안해 해도 돼요."
"진짜 어떡해, 나 미쳤나봐요."
"사실 나도 좀 늦는다는 말 하려고 전화헀어요."
"...거짓말 하지 마요. 그럴수록 내가 더 미안해진단 말야."
"어, 진짠데?"
"솔직히 말해봐요. 기다리고 있죠?"
"천천히 나와요. 여주씨 예쁜 모습 기대하고 있을게."
여주가 더욱 사과를 할까싶어 얼른 전화를 끊은 기현이 건물에서 시선을 거두곤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핸드폰을 붙잡은 채 유리문에 이마를 맞대고 쳐다보고있던 여주가 소리를 지르며 핸드폰을 침대로 던졌다.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원래라면 30분 넘게 걸렸지만- 20분 만에 씻고나와 꽃이 알알이 그려져있는 블라우스와 끝이 퍼지는 하얀빛 치마를 입고는 화장대에 앉았다. 최대한 머리를 빠르게 말리고 능숙하게 손을 놀려 화장을 끝냈다. 다급한 마음이 가득 겹치다보니 화장이 평소보다 약간 엉성해보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핸드폰을 집어든 그녀가 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비 다 했어요. 연분홍빛 구두를 신으며 하는 소리에 기현이 알겠다며 차 문을 열고 나서는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렸다. 조금만 기다려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누르고는 전화를 끊은 여주가 곧바로 올라온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벽에 고정되어있던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약간 흐트러져있는 앞머리를 고정이되게끔 정리를 하고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이정도면 됐겠지. 1층이라는 기계음에 흠-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여주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달리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서였다.
저멀리 입구에 서있는 기현이 어렴풋이 보였다. 미안해요- 라며 사과를 하려는 찰나, 으악! 별안간 비명소리가 나왔다. 깜짝 놀란 기현이 달려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 몸을 숙였다. 발목을 삐끗하며 계단을 넘어 바닥에 넘어진 여주가 괜찮냐는 기현의 물음에도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무 아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아파 죽을 것 같아요..."
"그러니깐 뭐하러 그렇게 뛰어나와요. 운동화 신은것도 아니면서."
기현이 표정을 찌푸리곤 조곤조곤 말을 건네자 결국 여주가 우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짚던 한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가렸다.
"늦었잖아요."
"........."
"안그래도 보고싶은데 기현씨 기다리게하면 안되잖아요."
"이럴때보면 여주씨도 참 애기야."
"...애기까지는 아니거든요?"
"내가 우리 애기를 위해서 직접 올라갔어야되는건데. 실수했네."
기현이 품에 안아 등을 다독이며 하는 소리에 여주가 눈가를 정리하며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그 덧없는 웃음에 기현도 한층 차분해진 마음으로 허리를 곧게 세우고는 손을 뻗었다. 여주도 그 낌새를 알아채고 그 손을 잡아들어 천천히 일어났다. 상처난 무릎과 발목이 아파와 휘청거리니 기현이 끌어당겨 한 팔로 허리를 감싸안아 몸을 고정시키게끔 했다. 여주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늘도 이렇게 예쁜데 밖에서 데이트는 못하겠네요."
"...다 내 탓이에요."
"왜 또 울려고 그래요. 나 여주씨 울라고 한 소리 아니야."
"........."
"그리고 내가 언제 데이트 못한다고 했어요? 밖에서 못한다고 했지?"
"네?"
"데이트 밖에서만 하라는 법 없어요."
기현의 소리에 여주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일단 차타라며 잡아끄는 손길에 "밖에서 안한다면서요?" 물어보자 기현이 장난스레 그냥 따라오라며 핀잔을 주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 조심히 그녀를 태웠다. 곧 운전석에 탄 기현이 안전벨트를 매곤 일단 약국부터 가자며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 말에 여주가 괜찮다며 말리려들자 기현이 지금 약 발라야된다며 단호하게 거절을했다. 얼마 안 가 길가에 늘어서있는 약국에 기현이 조금만 기다리라며 차를 멈추고 내렸다. 약국을 들어가는 뒷모습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집 한 번 쎄. 어디에 긁힌건지 까져 피가 맺혀있는 무릎을 보았다. 오른쪽 무릎은 상처는 덜했지만, 왼쪽은 얼마 안 가 퍼렇게 멍이 들 것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곧 다시금 유리창에 하얀 약봉투를 든 기현이 보였다. 여주가 싱긋- 웃어보였다. 기현이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타 그녀에게 약봉투를 꺼냈다. 빨리 발라요. 약봉투안에 소박하게 들어있는 연고를 꺼내든 여주가 뚜껑을 열고 짜 무릎에 바르기 시작했다.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근데 지금 어디가는거예요?"
"마트."
"...마트는 뭐하러 가요?"
"장보고 여주씨 집에서 데이트하려고."
"...네?"
너무나 당연하게 내뱉는 소리에 여주가 눈을 크게 떴다. 우리집이요? 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여주가 횡설수설 말을 더듬자 기현이 웃음을 터뜨리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맛있는거 해줄게요."
-
한참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한 기현이 문을 열고 서있는 여주를 보곤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걸었다. 처음에는 안된다며 안절부절했던 그녀도 막상 매일을 혼자 오던 마트에 기현과 함께 왔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 작게 웃음을 흘리며 자연스레 손을 잡았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 식품 매장에 들어섰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기현이 물었다. 뭐 먹고 싶어요? 여주가 한참동안 눈을 굴렸다. '되도록이면 기현씨 편한게...' 하고 생각하다 결국 파스타요- 작게 답을 하자 기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것저것 카트에 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는 모습에 주위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보던 여주가 정신을 차리고는 천천히 다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문득 장난이 치고 싶었다.
"여보."
"........."
"여보오-"
"뽀뽀는 집에 가서 받자, 여보. 응?"
'여보'라는 단어에도 기현이 반응하지 않자 여주가 더욱 고개를 내밀고 애교를 부리는 소리에 기현이 머리에 손을 올려 가득 쓰다듬어주었다. 다른 것을 고르는 기현의 표정은 무덤덤 그 자체였지만 그 말 한 마디에 여주 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갔다. 기현도 더욱 그녀를 예뻐해주고싶었으나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그 마음을 꾸욱 참았다. 우리 여보, 또 먹고싶은건 없어요? 파스타 재료를 다 고르고 다정한 눈길로 물어오는 소리에 여주가 괜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괜히 장난을 쳤구나. 후회심이 앞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현은 또 해 줄 음식이 생각났는지 다시 이것저것 골라 담기 시작했다.
그 때, 약간 멀리서 시식을 해보라는 소리가 여주 의 귀에 흘러들어갔다. 여주가 떨어져있는 기현과 여럿 사람이 있는 곳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조심조심 그에게서 멀어졌다. 사실 아까전부터 먹고싶었으나 기현 때문에 꾸욱 참고있던 터였다. 여주가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주변을 쳐다보고는 음식을 한 입 집어먹었다. 그 모습에 놓칠세라 직원이 봉지를 들어보이며 늘어놓는 소리에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여주는 하나 살까- 마음을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그러다 "저기 남편분도 오시네." 직원의 소리에 깜짝 놀란 여주가 고개를 돌렸다. 기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주는 괜히 창피해진 마음에 모르는 척 하려 했으나 기현이 그녀 옆에 서 "한참 찾았잖아요." 넌지시 말을 건네자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부부 사이 맞죠? 그 질문에 여주가 다급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그건 아니구-"
"맞아요."
그러나 먼저 맞다며 대답한 기현 덕분에 그녀의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여주 의 얼굴이 다시금 빨개졌다.
"몇개월 됐어요?"
"얼마 안됐어요. 신혼부부예요."
"깨가 쏟아지겠네."
"그럼요. 저희 둘이 잘 어울리죠?"
"그걸 말이라고. 아기 계획은 있구?"
그 말에 기현이 입꼬리를 말아올리고는 한 손을 올려 여주 의 머리를 가득 쓰다듬어주었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여주가 아이 같은 소리를 흘리며 옆에 꼭 붙어섰다. 기현이 가득 환한 웃음을 터뜨리며 등을 토닥거렸다.
"아직 계획은 없어요. 근데,"
기현의 시선이 여주 의 얼굴을 향해 떨어졌다.
"낳으면 저는 우리 아내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기현이 작은 소망을 말하곤 고개를 숙여 어쩔줄몰라하는 여주와 눈을 맞췄다. 이거 하나 살까? 봉지를 가리키며 하는 소리에 잠시 고민을 하던 여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끄러운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팔로 어깨를 감싼 기현이 카트에 봉지를 넣곤 가자며 걸음을 옮겼다. 그 옆을 아무 말 없이 따라가다 멍하니 기현이 계산하는 것까지 지켜본 여주는 차에 올라타 집에 오기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너무나 조용한 분위기에 자신의 말이 상처가 됐나싶어 불안해진 기현이 비밀번호를 열고 먼저 들어가는 여주를 따라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는 뒤로 가까이 다가가 어깨 곁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주가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몸을 뒤로 돌려 기현과 눈을 맞췄다. 손을 만지작거리는 습관이 뒤따라왔다.
"부끄러워 죽는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난 그냥-"
"아니, 그런 안좋은 쪽으로 말고...좋아서..."
여주 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기현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난 도통 말이 없길래 화난줄 알았잖아. 한시름 마음을 놓은 기현이 이것저것 재료를 꺼내 준비하며 흘리는 소리에 여주가 자기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나 먼저 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은 기현이 쓰읍-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앉아있어요."
"기현씨만 하는건 내가 못봐요."
"우리 여주가 기특한 말 하나는 잘 하네."
"여보 역할 해줄테니깐 빨리 같이 해요."
기현이 혼자 차지하려던 자리를 나란히 같이 선 여주가 그럼 채소 좀 씻어달라는 기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장지를 뜯어 차가운 물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칼질을 하다 고개를 돌려 가만히 쳐다보던 기현이 다 씻었다며 옆에 붙어선 여주 의 옆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어떻게 이렇게 매일 예뻐. 속으로 말을 되뇌이던 기현이 수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주 의 행동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여보,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하나 말고 이 세상에 있는 질문 다 해도 좋아."
"아까전에 그 말...진심이에요?"
자신을 닮은 딸을 보고싶다던 기현의 말이 생각나 여주가 고개를 약간 수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내심 좋은 대답을 해주길 바랬다. 다시금 얼굴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그 빛이 기현에게도 퍼져 기현이 생긋- 웃음을 짓고는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해주며 눈을 맞추려 들었다. 그냥, 거짓말이라고 해도 난 좋았어요. 여주는 괜히 자신이 착각을 했으면 어쩌나 싶은 급한 마음이 들어 말을 덧붙였다. 기현이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진심인 것 같아요, 아닌 것 같아요?"
"...가짜."
"우리 여보 생각보다 센스 없구나."
"그럼 나 진짜라고 생각해도 돼요?"
"생각해도 되는게 아니라 믿어야 되는거예요."
확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여주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다 힐끔- 기현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막. 그러니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모습에 기현이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나랑..그러니깐..결혼 하고...결혼을... 채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결혼'이라는 단어만 되풀이하던 여주가 자신의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기현과 눈을 맞췄다. 기현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는 한 음 한 음 운을 떼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뭘요...?"
"여주씨 예쁜 웨딩드레스입고 같이 걷는 날이 올거야."
그 고백 하나에 여주 의 마음 속에 꽃잎이 만개하는 듯 했다. 나 이건 믿어요? 기분이 좋아진 여주가 활짝 웃으며 내뱉는 소리에 기현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제 평생 나만 믿어야될걸? 어느새 그 작은 공간에서 꽃이 톡- 톡-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맑은 여름 하늘 아래, 기현과 여주는 걸음을 늦춘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