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두준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으로 준형의 얼굴을 때렸다. 그리고 그 힘에 밀려 바닥으로 쓰러진 준형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씨발. 그 여자,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터진 입가를 매만지는 준형을 향해 두준이 물었다.
"그럼 오늘 그 여자 만난 건 뭐야."
"어디서 사냐고... 사채업자한테서 전화가 와서 저를 찾아왔어요."
두준은 잡고 있던 멱살을 집어 던지듯 놓았다. 뒷걸음질 쳐 침대에 걸터 앉은 두준은 얼굴을 쓸어 내렸다.
잠깐만...
"아니야. 내가 먼저 너를 봤어...교무실에서. 그 여자가 학교에 왔을 때."
"...그 날. 엄마가 형 사진을 보여줬어요. 교무실은... 저도 몰라요."
"그럼 언제."
준형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엄마가 형 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날이요."
두준은 기억을 더듬었다.
집에 오는 여자가 바뀌지 않았던 것이 궁금해 결국 아버지의 뒤를 쫓았다.
다정한 모습으로 호텔에 들어가는 아버지와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몸에 달라붙어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길게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칼.
아버지가 벗어 어깨에 걸쳐주는 코트를 여미며 환하게 웃던 그 여자에게서 엄마를 찾고 싶었다.
아니, 이미 어렸을 적 흐릿하게 기억에 남은 엄마의 환한 미소가 그 여자와 겹쳐보였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추억에 잠기고 싶었다.
그러다 손등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올해의 첫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놀랐어요. 비싸보이는 옷을 입고있었는데 저희는 그럴만한 돈이 없었으니까요."
"그래. 빨간 원피스."
초점없는 두 눈을 한 두준이 중얼거리는 말하자 준형이 웃으며 두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맞아요. 빨간 원피스. 엄마는 빨간색을 좋아했어요."
준형이 두준의 턱을 잡고 고개를 올려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준형이 두준과 눈을 마주치고 말을 이었다.
"제가 빨간색을 좋아했거든요."
"사이가 안 좋은게 아니었나보네."
"네."
준형이 표정을 구기며 웃었다.
"저는 지긋지긋했어요. 그 가난함이. 옷 살 돈이 없어서 수거함에서 주워입고, 먹을 게 없어 몇 날 며칠을 굶고!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게 짜증이 났어요."
준형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허탈한 듯이 말했다.
"그러던 와중에 엄마가 사랑에 빠졌데요. 참 웃기죠.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소녀처럼 뺨을 붉게 물들이고 말하는데.."
준형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역겹던지."
준형이 실없이 웃었다.
그 표정을 보던 두준이 말했다.
"그 축처진 개새끼같던 모습이 아니네. 내가 너를 의심하는 순간 계획은 틀어진건가?."
"아니. 그런 건 상관없어. 계획을 틀어버린 건 나야. 네가 의심하건 말건 상관은 없어. 윤두준."
"뭐?"
준형이 두준의 어깨를 힘주어 잡자 두준이 인상을 썻다.
"자기도 다를 바 없는데 나를 동정하는 모습이 짜증이 나서. 그 동정이! 나는 너무 짜증이 나."
두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동안 자신이 겼었던 감정들이 싸늘하게 식은 게 느껴졌다.
내가 쓸데없는 곳에 감정을 썼네.
싸늘한 눈빛을 한 두준이 준형을 손을 쳐냈다.
"그래. 그래서 계획이 뭔데."
"너를 죽이고 그 자리에 들어가는 거."
두준이 준형을 잡아당겨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두준이 두 손으로 준형의 목을 졸랐다.
"알아? 너는 내가 될 수 없어. 그러니까 그 계획 열심히 해봐. 나는 나대로 내 계획을 좀 틀어볼테니까. 네 말대로 동정 같은 거 안 하려고."
두준은 준형의 흰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이게 지금 뭐하는!"
준형이 두준의 손을 붙잡았다.
"이게 내 계획이야. 동정. 싫다며 그래서."
준형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두준이 준형의 뺨을 쓸었다.
"아직 어리네. 분노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분노는 너를 망가뜨릴 뿐 더 이상은 없어. 그러니까 분노를 누르고 차분해져. 그게, 네가 나를 죽이는 방법이니까."
두준이 준형을 누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두준은 허탈했다. 순둥순둥할 줄만 알았던 애완견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기분은 끔찍했다.
"한없이 가여운 강아지 일 줄만 알았는데..."
예전의 순하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집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바뀌었다. 집을 뛰쳐 나갈줄만 알았던 준형은 계속 오피스텔에 머물렀다.
그리고 살얼음 같던 분위기는 결국 깨지고 말았다.
새벽. 준형이 두준의 방 문을 열었다. 거실만큼 커다란 방이 오늘따라 더욱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준형은 두준의 침대로 다가갔다.
인기척에 두준이 눈을 떴다.
"뭐야.."
잠긴 목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난... 너가 될 수 없어. 맞아. 너 대신이 될 수 없어."
준형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너..지금 뭐하는..!"
"나 좋아하잖아. 윤두준."
두준은 자신의 위로 올라오는 준형을 잡아당겨 끌어 안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이 꿈꿨던 이 상황이 막상 닥쳐오자 두준은 우스웠다.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다 기다리고 상상하며 마음 졸였던가.
"알아?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