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햇살이 밝았다. 그 햇살은 늘 맞이하던 햇살과는 조금 달랐다.
눈을 뜨기 힘들 만큼의 강렬한 햇빛이 잠에 곤히 빠진 해수를 에워쌌다.
코에 닿는 냄새조차 낯설었다.
아니, 낯설기보다 그리웠다. 마치 고향에 온 듯한 느낌…
……고향?
"뭐야…"
해수는 눈을 번쩍 뜨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이, 정말 맞는건가?
왜 사람들이…하나같이……현대옷을 입고 있는 거지.
아무도 고려옷을 입지 않고 있…
"설마…나, 돌아온거야?"
해수는 잠시동안 하얘진 머릿속을 빠르게 재정비했다.
그래,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은…
내가 고려로 가기 전에…
남자 아이를 구하러 물에 빠지기 전에…
그 때의 나인건가? 나, 정말 돌아온 거 맞는거지?
실없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은 점차 커져갔다.
좋아서 짓는 웃음은 아니었다. 허탈한 감정에 새어나온 너털웃음 같은 거였다.
그 전 고려에서의 있던 일들이 순식간에 꿈처럼 흐려지고 사라지는 것 같아서…
"진짜 꿈인가봐. 술 취해서 꿔버린…"
해수는, 아니 하진은 오랫동안 멍한 채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술에 취했다, 다 꿈이었다'라고 아무리 외쳐봐도,
가슴은 분명히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떻게 그 일이 다 꿈일 수가 있겠어.'
그래, 꿈은 아닐 것이다.
벌써부터 나의 연인, 8황자님이 너무나 보고 싶었으니깐.
꿈 속에서 생긴 감정이라기엔 그 감정이 너무 깊었기에…
그렇게나 돌아오고 싶었던 현대였는데,
왜 나는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하진은 이유를 몰랐다.
다만 가슴이 쿵 내려앉은 듯 아파오는 통증에 따를 뿐.
"술에 취한 거야, 내가 술에 너무 취해서…"
기다리라고 하지 말 걸 그랬나,
황자님만 기다려주신다면 나 또한 기다리겠다 약조했는데…
나만 이렇게 현대로 도망온 거잖아……
말해줘야 하는데… 황자님을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소 황자가 피의 군주가 되지 않게 그렇게 막아야했는데…
그때, 하진은 문득 사천공봉 최지몽의 말이 떠올랐다.
"수 아가씨,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세요."
지금도 흘러가는 대로, 이 아픈 기억을 내버려둔 채 살아야하는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릿 속이 반짝였다.
맞아! 그 때 이 곳엔 나 말고 최지몽도 같이 있었어!!
하진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아까 전부터도 그녀 혼자였던 건지, 그녀 곁엔 술병만이 덩그라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정말 나 취한 거 맞나봐. 꿈 꾼 거 맞나봐.
하진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추스린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 이상 이 곳에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꿈이라면, 꿈이였다면……
이 아픈 기억과 죄책감을 등에 진 채,
있지도 않은 연인을 생각하며 우는 바보같은 짓은 그만하고 싶었으니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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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벌써 현대로 돌아온 지 두 달이 넘었다.
하진은 그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고려에서의 생생한 일상이 늘 꿈에 나와 그녀를 괴롭혔다.
고려를 떠나기 전, 자신을 끌어안던 왕소 황자의 애처로운 눈빛과
피의 군주 '광종'이 되어 황자들을 죽여버리는 왕소의 두 얼굴에 그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특히,
왕은 황자를 잔인하게 베어버린 왕소의 비열한 미소가 담긴 그 장면이
꿈 속에선 끊임없이 그려지며 그녀의 맘을 계속 헤집어 놓았다.
이상하게도 왕욱 황자와의 추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여전히 그에 대한 걱정은 남아있었지만,
그리 애틋했던 감정이 점차 무뎌진다는건 참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고려에 갔던 이 모든 게, 다 꿈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현실에 순응하며 예전같이 살아가야 할 뿐이다.
띵동.
"어서오세…"
"나야, 하진아!
너…지금 밖에 누가 왔는지 알아?!"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다던 점장 언니가 급히 안으로 들어오며,
밖에 손님이 왔다고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에 하진은 왜 그러냐는 듯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뭐, 연예인이라도 왔어?"
"아아, 연예인은 아니구, 엄청 잘생긴 남자가 와 있지 뭐야."
"…잘생긴 남자?"
"응응, 널 보러왔다고 하던데?"
"엥? 나를?"
어떤 남자가 나를 찾다니. 바람났던 전 남자친구는 언니도 봤으니 아닐테고.
지금 내 주변엔 잘생기긴 커녕 괜찮은 남자 한 명 없는데, 누구지?
순간 갸웃거리며 단순한 궁금증으로
날 찾는다는 남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문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남자의 실루엣.
그 모습을 본 하진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황자님?"
며칠 전에 고려에서
내게 울음을 보이며 혼인하기 싫다, 떼를 썼던…
"…안녕하세요"
그 때보다 더 늠름해지고…
현대인의 복장을 한……
왕은 황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달의 연인과 함께하는 뾰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