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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자대를 물렀다..., 박 영감의 생각은 절대 아니겠지. 민대승, 또 그 자인가."

"그렇다 합니다, 저하."

"그 잘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구나.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아마 천하에 박 영감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 자뿐일 것이다."

 

 


박 영감이라 함은 현 일양의 황제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는 한 번도 황제를 황제라 부른 적이 없었다. 목구멍에 불화살을 쏟아붓는다 해도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으름장을 놓았다지.
하긴, 제 아비를 죽이고 그 자리까지 빼앗은 자인데 그럴 만도 하겠지. 얼마나 아니꼽고 치가 떨리겠어. 하물며 제멋대로 황제가 되고 난 후 그 자가 지금껏 해온 것들이란, 백성들을 말라죽게 만들고 전장의 화살받이로 내민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어. 폭군도 그런 폭군이 없지. 자리에 걸맞게 나라꼴을 제대로 굴려먹었어도 반절은 봐줄까 말까인데,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고 있어? 절대 황제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면 채비를 하거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무어라니? 태자대도 복귀했다 하니 슬슬 준비를 해야 되질 않겠느냐. 내 당장 월음의 왕을 만나보아야겠다."

"저하... 소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별로 좋은 수가 아닌 듯싶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쩌면, 월음의 왕과 손을 잡는 것은 별로 좋은 수가 아닐지도 모른다. 무얼 믿고 그 자와 손을 잡아. 아니, 그도 전에 그 자가 무슨 이유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그 자에게 일양이란, 그 말만 들어도 역정을 쏟아낼 정도일 텐데. 우리에게도, 월음에게도 과연 이 수가 최선인지 쉬이 수긍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지금 두 나라의 관계라면, 동맹을 맺기도 전에 일양의 세자였던 자가 무방비 상태로 제 앞에 서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당장 목이 베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면 더 좋은 수를 내보거라. 그 대단하다던 태자대에게 꼼짝없이 당하지 않을 다른 수를 생각해내란 말이다. 내 그럼 들어줄 것이니."

"...."

"그것 보아라. 없질 않느냐."

 

 


더는 대답하지 못 하고 입을 딱 다물어 버리는 그 모습에 흥- 콧바람을 내뿜었다. 다른 수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거든. 영 달갑지 않았지만 그 수 말고는 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어느 면으로도 여러모로 상황이 썩 좋지 않아 찬밥 더운밥 가릴 수가 없었다.
한데 딱 보아도 스물은 차이가 나는 듯한 저 어린놈이 웃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어째 되바라진 듯하다. 삐딱한 자세도 그렇고, 아무렇지 않게 하대를 하는 것도 그렇고. 당최 누구길래?



*



대체 언제부터 일을 꾸며왔던 것인지, 대체 어디까지 그의 세력이 뻗쳐있던 것인지. 별안간 박 영감은 제 사병들과 궁을 지키는 근위대장까지 죄다 불러 모아 어떤 특정한 시기도 때도 없이 무턱대고 궁을 쳐들어왔다. 참도 뻔뻔스럽게 대문을 뚫고 들어와 반역을 저지른 것이다. 저를 지키던 근위대장까지 이미 박 영감의 사람이었다는 것조차 제 목에 칼을 들이대는 그 순간 알아차렸으니, 궁 안에 불쌍한 왕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원체 힘이 무던히도 없었던 왕은 한번 반항도 제대로 못 해보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구걸하다 들끊는 붉은 피를 차가운 칼날에 묻히며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궁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온 담이며 벽이며 핏물이 튀지 않은 곳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살고 있는 쥐새끼 한 마리라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헤집고 다닌 이유는 아직 그 행방을 보지 못 한 어린 세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왕과 왕비, 태후, 두 명의 후궁들까지 모조리 차디찬 몸뚱이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부족했던 게지. 그 남은 씨 하나까지 말끔하게 해치워야 뒤탈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니 당최 이 영악한 꼬마가 어디에 숨었으려나.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어린 세자의 무예 스승이자 근위대 부대장 중 하나였던 오장군이 몰래 그를 빼돌린 것이었다. 차마 그 어린 핏덩이가 개죽음 당하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만 없었던 게지. 제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처사였으나 조금이라도 사람의 도리를 챙기고자 몰래 세자를 데리고 궁을 빠져나왔다. 그길로 당장 월음의 국경을 넘어 황제의 눈을 피해 이곳에 숨어살게 된 것이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세자는 피를 벌컥 토하며 박 영감 앞에 무릎 꿇려지는 아비의 마지막 길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아직도 그때의 그 광경이 악몽으로 나타나 세자를 괴롭히곤 했다. 한순간에 제 부모와 모든 것들을 빼앗겼으니 어찌나 원통하겠어. 하나 살아야 제 부모의 원수를 갚고 이 나라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 생각하며 피눈물을 삼킨 채 이제껏 악착같이 살아왔다. 몇 해 째 복수의 칼날을 숨긴 채 시골 깊숙한 곳에 숨어 살며 조용히 군사들을 모았다. 반역까지 꾀하며 나라를 집어삼킨 그 황제란 자의 정치가 하도 꼴사납고 기가 찼으니 그에 반하는 군사들을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서 그동안 모은 군사들의 수가 꽤 된다지. 하지만 그럼에도 수적으로 보나, 수준으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우리가 대면해야 할 태자대를 상대하긴엔 확실히 불리했다. 또한 그 선두에 선 무지막지한 호랑이는, 감히 감당해낼 엄두도 내질 못 했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몇 해째 자리에 눌러앉아 언제쯤 보여줄 빈틈을 기다리고만 있다 문득 떠오른 수가 딱 그것이었다. 월음과 손을 잡아 태자대를 친다. 월음의 수비력과 그 수를 합친다면 지금보다는 승산이 있을 듯했다. 한번 붙어봐도 괜찮겠다, 싶었다. 세자의 생각으로는 월음에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보였거든. 몇 해째 계속되는 지긋지긋한 일양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으니 당연히 이득이지. 게다가 만약 제가 일양을 되찾아 왕이 된다면 그것을 도와준 월음과 상부상조하며 평화롭게 지낼 것 또한 당연했다. 어차피 세자에게 전쟁 같은 것은 매우 귀찮은 것이라 여겨졌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일거양득이 아니겠냐고.

 

 


"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나 나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아. 나이가 어리다고 나를 너무 물로 보는 것이 아니냐."

"당치도 않습니다, 저하."

"동지자가 되자는 것이지 그 밑으로 들어가 충직한 사냥개가 되어준다는 것이 아니다. 그 자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박 영감의 목을 쳐내고 나면, 그걸로 끝일뿐."

 

 


정말 알고 있기는 한 건지. 차마 그렇다 대답하지는 못 했지만 세자는 예부터 가끔 승부욕이나 복수심 같은 것 때문에 앞뒤를 따지기도 전에 일단 저지르고부터 보는 경향이 있었다. 늘 패기가 아주 넘쳐흘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 제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두기는 했지만.
지금도 딱 그러했다. 우선 월음의 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난 후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려야지, 태자대가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금이다 싶어 맞대면부터 하려고 하니. 말을 듣지 않는 세자 덕에 오장군만 머리가 딱딱 아팠다. 이용만 당하다 배신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하물며 대체 무슨 방법으로 월음의 왕을 만나려는지 그것 또한 제대로 된 계획이 없을 것이 뻔했다. 다짜고짜 찾아가 내가 일양의 세자인데 왕을 보러 왔다, 이리 말하겠지. 태자대를 치기도 전에 먼저 월음의 왕에게 목이 잘릴 확률이 가장 높았다. 아님, 여기 너희 나라 세자가 찾아왔으니 데려가라 하며 먹이처럼 던져줄지도 모르고.

 

 


"가서 전하거라. 일양의 세자, 정국이 월음의 왕을 뵈러 곧 갈 터이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떡 벌어진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정국의 모습에 오장군은 고개를 저음과 동시에 후- 한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虎熊傳

호웅전 ; 밤에 피는 꽃

06

 

 

 

 

 

 

 

 

 


-

근엄한 자태와 표정을 유지하며 주저 없이 궁을 활개 치던 석진은 이내 눈썹을 씰룩이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에 일제히 그를 따라 길게 늘어선 줄도 자리에 멈추어 섰다. 왕이라 함은 한번 결정한 것에 어떤 미련도 없어야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뒤를 돌아봐선 아니 되는 준엄한 자여야 했다. 하나 막 자리에 앉은 석진의 속은 걸어오는 동안에도 벌써 몇 번은 뒤를 돌아보고도 남았음이라.




"전하, 혹 불편하신 것이라도 있으시옵니까?"




불편한 것이라. 글쎄. 아까부터 찜찜하니 골 한쪽에서 불편함이 느껴지기는 했다. 어째 태형과 그 옆에 서있던 여인을 마주치고 난 후부터였던 것 같은데.




"상선."

"예, 전하."

"김두형 그자에게 족하가 있었던가."

"그... 그것이...,"




태형이 제게 거짓을 고했으리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그 여인이 의심스러웠다. 왕인 제 앞에서도 무례하게 이목구비 중 어느 하나 뚜렷이 볼 수 없도록 철통보안으로 싸매놓은 모양도 그러했고. 무엇보다, 저를 향해 흘리는 그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빈말이라 하여도 관심을 두겠다는 이 나라 지존인 석진의 말에 어째 기뻐하는 내색이 아닌 실망을 한 듯한 그 목소리 말이다. 만일 정녕 김두형이 들이댈 왕후 후보였더라도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펄쩍 뛰지는 못 할망정 실망을 하다니 가히 이상하지 않은가. 감격에 겨워 눈물이라도 막 터지려기에 나온 목소리를 착각한 것인가, 싶기도 했다.




"알아보겠사옵니다, 전하."

"아니다, 되었다."




그자에게 여식이 따로 없는 것은 확실하나 친족의 관계까지 어찌 알 터. 잔뜩 당황한 상선 내관이 얼른 덛붙이자 석진은 살살 손사래를 쳤다. 그만 생각하자. 이 모든 것도 근거 없는 추측일 뿐, 정확한 사실도 아닌데 괜한 것에 신경을 두지 말자 고개를 절레 저으며 석진은 마저 길을 밟았다.


평소에도 따로 시간을 내어 자주 찾을 만큼 궁 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서각에 가는 중이었다. 석진의 전용 서고라 해도 될 정도로 특정한 용무가 아니라면 다른 이의 출입이 적었으니 늘 한산했다. 그렇기에 자주 찾는 것인지, 아님 석진이 자주 찾았으니 그를 위해 다른 이의 출입이 드문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 오면 마음이 평온하고 모든 걱정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무조건 아니라만 하는 대신들의 간섭도, 아직도 익숙지 않은 제 아비의 빈자리도, 평생 느껴왔던 어딘가 뻥 뚫려있는 듯한 공허함도.
역시 석진은 모든 잡생각일랑 접어버리고자 마음에 평안을 갖고 여유로이 서책을 팔랑팔랑 넘기었다. 하나 오늘은 어째서인지 얼마 가지 않아 금방 흐트러져 버렸다. 잠깐씩 눈썹을 찌푸리며 영 집중을 못 했으니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았다.




"야화... 야화라...."




머릿속에 빙빙 맴도는 그 이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떨쳐내려 해도 더욱 짙어질 뿐, 통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그 이름이 뭐라고. 이제 보니 그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이름 때문에 이리도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것도 같고.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야화'라는 이름이 이리도 흔했던가. 분명 있을 또 다른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내려 하면 할수록 골만 딱딱 아파오는 것이 답답함에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곁에 호석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답답한 마음을 조잘조잘 털어내며 조금 덜할 수라도, 어쩌면 답을 찾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 싶었다. 대체 이런 때에 어디 있는 것이냐며 호석을 책망하려 했으나 아 내가 보냈지, 아쉬운 한숨만 내쉬었다.

전혀 집중을 못 하고 시간만 버리고 있었으니 지끈거리는 머리를 조금이라도 쉬게 해줄까 설화집을 찾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어려운 서책이 지긋지긋하다 느껴지면 가끔 서책을 보는 척, 많이 읽었는데 하며 옛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꽤 오래 보지 못 했으니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도 가물가물했다. 아, 여깄다.




"곰과 호랑이라."




인과응보. 권선징악. 행한 대로 업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라는 흔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였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는 어린 마음에, 내가 만약 곰이나 호랑이로 변한다면 그 힘으로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 텐데 하는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 요지는 그게 아닌데 말이다.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을 늘어놓아도 어머니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분명 성군이 될 것이라 말씀해주셨다.
그래, 이 이야기는 처음 어머니께서 들려주셨다. 세자 교육에 싫증이 나 서강원을 뛰쳐나온 석진을 다독이며 풀어내었던 이야기였다. 왜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왜 바른 왕이 군림해야 하는지 어린 세자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이었을까. 하긴, 말고도 살아생전 많은 재미난 이야기들을 해주셨지. 그게 얼마나 좋았는지 매번 어머니를 찾아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달라고 졸라댔다. 그럴 때면 한번 꾸지람도 없이 술술 재미난 이야기들을 해주셨는데. 또한 이야기를 끝마치시며 덛붙이셨다. 꼭 기억했다가,




"아...,"




곧 태어날 너의,




"... 상선...! 상선!"




너의 동생에게도 들려주라고.




"예, 예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왜 이제야 떠올랐을까. 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까. 대체 왜 그동안 그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 했을까.
석진의 다급한 부름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상선 내관이 잽싸게 안으로 들었다. 손마저 덜덜 떨리는 석진은 잔뜩 일렁이는 눈으로 상선 내관을 흐릿하게 바라보았다.




"내게 누이가 있었느냐."

"예?"

"내게 여동생이 있었느냔 말이다!"

"전하...."

"바른 대로 고하지 못 할까!"




별안간 떨어진 석진의 물음에 상선 내관은 차마 말을 잇지 못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저했다. 그런 상선 내관을 향해 석진은 목청을 높였고 시선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동자는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석진은 잔뜩 화가 나있는 상태였다. 저 자신에게.




"예.... 그것이..., 전하께서 사 세가 되던 해에 공주마마께서... 세상에 나셨사온데...,"




머뭇거리던 상선 내관은 드디어 굳게 닫혀있을 것만 같던 입을 열어 석진의 가슴을 더욱 후벼팔 말들을 쏟아내었다. 제대로 비수를 맞아 확인사살당한 석진은 눈을 질끈 감으며 하-, 울음 섞인 한숨을 내뿜었다.
끝까지 기억했어야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 오래 세월을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채 살았다. 언제부터 잊혀진 건지 가늠도 못 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잊었다.




"비통하게도,"

"되었다. 그만, 그만하거라. 나도... 다 기억났으니까...."

"전하!"




석진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마구 고개를 저었다. 가슴 한편이 저릿하고 먹먹했다. 아팠다. 그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꽉 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세게 내리쳤다. 정말 비통한 일이지.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 어떻게. 한번 따스히 품에 안아보지도 못 한 채 떠나보내야 했던 내 누이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 제 오라비를 알아보았는지 손을 뻗으면 환히 웃으며 잡아주던 그 자그마한 손을 기억했어야 했는데. 끝까지 기억했어야 했는데. 그때의 아픔이 몇 배로 불어나 다가왔다.










-

"아쉽다.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다음에 보면 되지. 다음에 또, 나오면 돼."




꼭 꿈만 같았다. 분명 오늘 아침 설레는 기분으로 잠에서 깬 것이 맞는데, 설마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 하고 꿈속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내내 그런 기분이었다. 함께 저잣거리를 거닐며 이런저런 구경도 하고, 자주 닿지 못 했던 사람들 속에 어울리며 맛있는 것들도 먹고. 아, 궁에서 먹어보지 못 한 것들이 꽤 많았다. 먹어 본 적이 없으니 어색하고 생소해 맞지 않는 것들도 있었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맞아, 어린아이들도 보았다. 어쩜 그리 작을 수가 있는지. 꼭 어린 시절의 태형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긴, 그때를 제외하곤 아이를 본 적이 없으니 신기할 만도 하지. 그땐 정말 작고 귀여웠었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능청스럽지 못 하고 금방 얼굴을 붉히었다. 한데 지금은 어째 바뀐 것인지 모르겠다만.

이렇게 행복한 것인 줄 몰랐다. 그저 함께 걷고 있는 지금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 줄은 정말 몰랐다. 알았더라면 조금 더 먼저 용기를 냈을 텐데. 그리 겁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는데. 궁 밖은 어머니가 해주셨던 말씀처럼, 걱정했던 것처럼 그리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정말 평안하고 따뜻하고,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태형은 그 약조처럼, 정말 공주의 곁에 꼭 붙어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고맙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함께 손을 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혹여 돌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공주보다도 노심초사하며 그리도 챙겨주었다. 하여 공주는 정말 편하게 거리를 거닐며 마음껏 순간을 즐길 수가 있었다.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그렇게 나란히 걸으며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자면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늘이 주색으로 물들어갔다. 언제나 그랬다. 태형과 함께 있으면 다른 때보다 배는 더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항상 아쉽고, 그리웠지. 또한 지금도, 이제 그만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울적하고 더한 아쉬움이 들었다. 다시 별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반은 어찌어찌 넘겼지만 곧 석반을 들고 공주를 찾아올 텐데 별궁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슨 사달이 날 지 모르니.

 

 


"그래, 다음에... 다음에도 또 나오면 되니까. 꼭."

 

 


태형 역시 다른 때보다 몇 배는 더한 아쉬움에 입술이 더욱 삐져나온 것 같았다. 조금 더 함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면서. 꼭 보여주고 싶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시작되는 그림자놀이, 피영희 말이다. 처음 홍이와 그걸 본 순간은 정말 잊을 수가 없었다. 저절로 입이 떡 벌어지는 게 어찌나 아름답고 신기하던지. 어두운 천막 속에서 가만히 앉아있으면 구슬프게 뜯기는 가야금 소리가 남과 동시에 흰 막 위로 온갖 형상을 띈 그림자들이 뛰어논다. 어떤 때는 사람이었다가, 어떤 때는 동물이었다가. 얼마나 감명을 깊게 받았는지 그날은 집으로 돌아와 홍이와 호롱등을 들고 마당에 나가 밤새 그림자놀이를 하며 지새웠다. 그때 느꼈던 그 감점을, 짜릿하고 뭉클한 느낌을 전해주고 싶었다. 밖으로 나오게 되면, 제일 먼저 보여주어야지 한참 동안 세워놨던 계획이었는데. 한데 하필 오늘은 집안 사정인지 뭔지로 낮에는 하지 않는다잖아. 해가 지고 나면 다시 오라는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음이 또 있을 테니까. 다음에 또, 나올 수 있을 거야. 그땐 피영희와 함께 밤이란 것도 볼 수 있을 거야. 공주는 그 처음을 꼭 태형과 함께하고 싶었다. 태형 역시, 그 모든 처음이란 순간을 저와 함께 보내주었으면 바랐다. 함께 밤을 맞이하는 것도 하늘 가득한 달을 보는 것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그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땐 못된 졸음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날이 새도록 서로의 눈을 맞추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데려가고픈 곳이 있어."

"어디?"

 

 


그곳만 다녀왔다 다시 별궁으로 돌아가야지. 그곳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태형은 한번 놓지도 않았던 손을 끌며 걸음을 조금 바삐 했다. 얼른 다녀오면 괜찮을 거야.


대체 어디를 데려가려는 것인지 저잣거리를 지나서도 쉬지 않고 걷더니 이내 인적이 드문 고요한 강나루에 이르렀다. 짠, 하며 태형이 공주에게 보여준 것은 물길마저 잔잔한 강에 동동 떠있는 소박한 나룻배. 어느 서책에서 그림으로 본 적이 전부였는데, 덕분에 직접 본 것이 또 늘었네. 이리 고요하고 잔잔한 강도, 그 위에 한적하게 떠있는 나룻배도. 매 순간이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 투성이었다. 하긴, 공주에겐 야전 내 꾸며진 못이 다였으니 이리 크고 넓은 물웅덩이는 난생처음이겠지.

 

 


"물 위에 떠본 적은 없지? 내가 그리해줄게."

 

 


하물며 배를 타볼 일이 있었겠어. 고작해봐야 못에 발을 담그어 참방거리는 것이 다였는데. 두근거림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먼저 배에 오른 태형이 공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뭇조각들이 한데 엮여 사람과 물건을 싣고 물에 동동 뜰 수 있다니, 눈으로 직접 보고 있음에도 믿기질 않았다. 정말 올라도 되는 걸까, 혹 가라앉지는 않을까. 내민 태형의 손을 잡고도 쉬이 발을 뻗지 못 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태형은 괜찮아, 하며 공주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확- 당겨진 공주가 비틀거리자 태형은 얼른 허리를 팔로 감싸 안으며 그녀를 부축했다. 얼마나 가까웠는지 태형이 불어대는 콧바람이 공주의 콧잔등을 간질일 정도였다니까. 코앞으로 당겨진 그의 얼굴이 부끄러웠다. 반짝거리는 그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해서 더는 보지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리자 태형은 푸- 그런 공주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조심해야지."

"...."

"그러다 물에 퐁당- 빠질라."




나긋하고 따뜻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그대로 부딪혔다. 분명 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을 거야. 창피한 마음에 태형의 가슴팍을 조금 밀어내었고 태형은 넘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아가며 공주를 앉혀주었다.




"꽉 잡고 있어. 알겠지?"




여전히 푹 숙인 채 말 대신 고개를 조금 끄덕이자 태형은 맞은편에 앉아 살살 노를 저었다. 강물이 차분하게 일렁이며 배가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을 싣고 물 위에 멀쩡히 떠서. 그 모습이 어찌나 신기했는지 공주는 울렁이는 그 느낌에 창피함도 잠시 잊고 몸을 기울여 손으로 강물을 참방참방 휘저었다. 야전의 못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더욱 시원하고 그 밑을 알 수 없을 듯 깊었으며 맑은 못과는 달리 어쩐지 울적한 느낌이었다. 오늘 새로이 하는 것들이 참 많은데 그중 지금 순간은 공주에게 있어 손가락에 꼽을 수 있었다. 황홀했다. 구름 위에 앉아 떠다니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까, 싶기도 했다.

 

 


"태형아."

"응."

"나를 데리고 나와줘서 정말 고마워. 니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직도 야전 못에 발을 담그며 평생 넘지도 못 할 담 너머를 그리고만 있었을 거야. 언제나 나갈 수 있을까, 그저 꿈에 그리고 있었을 거야."




선선한 바람마저 도와주는지 노질 몇 번에 작은 나룻배는 두 사람을 강 한가운데에 올려다 놓았다. 지고 있는 해와 몽실한 구름이 어울러져 그려낸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배경 삼아 두 사람은 더욱 아름답고 애틋해졌다. 이렇게 행복하고 평안한 순간이 꼭 마지막인 것처럼. 이대로 저 멀리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강을 건너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곳으로 가고 싶어. 너무 멀어서 감히 다시 돌아올 엄두조차 나질 않는, 그런 아주 먼 곳으로. 금방 끝나버릴 것 같은 노을을 바라보며 공주는 생각했다.
또 이런 기회가 찾아오겠지,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겠지. 소망했다.




"사실 지금도 꿈을 꾸는 것 같아.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뜨면 사라지는 꿈 말이야. 그저 좋은 꿈을 꾸었다, 하면서."

"...."

"하지만 그렇지 않겠지? 이 모든 것은 결코 꿈이 아니겠지?"

 

 


지금 넌 노을과 어우러진 너의 모습이 얼마나 눈이 부시고 고혹적인지 모르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절경인지, 아마 넌 절대 모를 거야. 하고 태형은 생각했다. 제 눈을 꽉 잡아 바라보며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건네는 그 말들은 어딘가 서글프고 안쓰럽게 들려왔다. 공주의 두 눈엔 확신이 아닌 애처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태형이 그걸 읽어내지 못 할 리 없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 해가 지고 있으니 시간을 더 지체하다간,"

"조금만. 조금만 더 있자."

"...."

"나와 조금만 더 같이 있자, 야화야."

 

 


잡아오는 그 말이, 그 눈빛이 공주의 마음을 쥐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가고 싶지 않았다. 곧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올 텐데, 그와 함께 밤을 맞이하고 싶었던 것은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풍경 또한, 분위기 또한 이리도 맞춰주는데. 이리 금방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갑갑하고 외로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야화, 라 그리 다정하게 불러주면 차마 안된다고 딱 잡아 거절할 수가 없잖아. 지금 망설이며 흘러가는 시간마저 아까운 듯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면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되어버려라, 다 놓아버리고만 싶었다.

 

 


"있지, 난. 늘 홍이와 이곳에 오면 생각해. 이대로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다고. 너와 함께 어디든 여기서 아주 먼 곳으로 도망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

"실은... 실은 야화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뒷말을 채 다 꺼내놓지 못 하고 태형은 괜한 입술을 꾹꾹 누르며 잠시 고요함을 깔았다. 공주를 보았다가 다시 내리깔았다가, 시선이 한 군데를 잡지 못 하고 여기저기로 방황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실은 오래전부터 털어놓아야지, 사실대로 말해야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말이었다. 덜컥 꺼내놓고 나면, 그 후엔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너와 나 사이는 어떤 비밀도 없는 그런 솔직하고 깊은 사이이길 바랐다. 서로 숨기는 것도, 찝찝한 것도, 거짓도 없는 사이이길 바랐다. 그랬기에 공주를 볼 때면 가끔씩 죄책감 비슷한 것이 가슴 한 쪽을 꾸욱- 눌러왔다. 알면서도 차마 꺼내놓지 못 했다. 날 미워하게 될까 봐.

 

 


"실은... 내 아버지께선 내가 이 나라의 왕이 되길 바라셔. 네 오라비를 몰아내고 왕이 되길 바라셔. 한데 난 싫어. 왕이 되는 것도, 네 오라비를..., 난 그런 거 못 해. 난 절대 아버지의 뜻을 이뤄드릴 수 없을 거야."

"...."

"해서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었어. 멀리 도망가서... 너와 행복하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왕 같은 거, 공주 같은 거. 그런 거 다 잊고 행복하게만. 그랬으면."

"...."

"나와 함께 도망쳐달라고 하지 않을게. 그러니... 그러니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줘."

 

 


한번 그런 말을 한 적도, 티를 낸 적도 없었기에 태형의 말을 듣고 난 공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어떤 답을 줘야 하는지. 그저 입을 조금 벌리고 놀란 표정 그대로, 멈춰있을 수밖에 없었다.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의 뜻은 그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왕이 되길 바라신다. 현왕인 제 오라비의 목을 자르고 그 자리에 대신 앉길 바라신다. 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대로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다, 제 진심을 털어놓았다. 함께 멀리 도망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혼란스러울 것이 당연했다. 제 오라비의 자리를 원하는 자를 어찌해야 하는 걸까. 그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연모해도 되는 걸까. 그럼에도 태형을 향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제 뜻은 그게 아니라고, 나와 함께 도망치자고 그리 말하잖아. 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그리 말하고 있잖아. 그런 태형을 어찌 밀어낼 수가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꾹꾹 누르면 참아왔던 사실과 제 진심을 이제야 털어놓는 태형의 눈빛이 너무도 애절해 보여서, 꾹 물고 있는 그 입술에 내가 다 아려와서. 꼭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 있어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게 잡아왔다. 지금 헤어지면, 다신 못 볼 사이처럼.

 

 


"함께 도망 칠게."

"... 뭐?"

"너와 함께 도망쳐줄게."

 

 


모든 걸 다 버리고 싶다고. 왕 같은 거, 못 한다고. 다 싫다잖아. 이대로 우리 둘이 도망가 버리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오라비는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고, 난 그 새장과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어차피 난 아무도 기억하지 못 하니까. 나 하나쯤, 사라진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질 일은 없어. 곧 울 것만 같이 터질듯한 태형을 보며 공주는 결심을 굳혔다. 그와 함께 떠나겠다고. 그와 함께 행복하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있지 않은 공주로 계속 남아있을 필요가 없잖아. 이 세상은 그리 험하고 무서운 곳이 아니었으니까. 함께 이곳에서 사라져버려도, 괜찮을 거야.

 

 


"아주 먼 곳으로 떠나 너와 행복하게, 평범하게 살고 싶어."




어느새 해님의 머리끝이 산 뒤로 숨어 붉게 물들었던 세상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찾아오고 있었다, 밤이란 것이.




"그러니 나를 데리고 도망쳐 줘. 그리하고 싶어."


 


태형의 눈은 커다란 돌덩이를 던진 강처럼 넘실넘실 일렁였다. 한번 물어라도 봐주지. 너와 도망가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고. 나와 함께 가줄 수 있냐고.
단 한 번도, 감히 평생을 살았던 이곳을 벗어나 다른 어떤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가끔 별궁 밖은 어떤 곳일까, 동경해오긴 했으나 온전히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공주로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운명이라고, 평생 이곳에서 사는 것이 운명이라고. 진작 태형이 제 마음을, 진심을 말해주었더라면 더 일찍 용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버린다, 그 말이 공주의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정신을 딱 깨주었다. 진작 그리했어야 했는데. 그럴 수 있었는데. 사실 이곳을 떠난다 해서, 남아있을 어떠한 미련도 없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진 것. 그래, 내겐 아직 남겨진 가족이 있었지. 내 오라버니. 그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내 오라버니. 이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 나라의 왕이 된 내 오라버니. 제 앞에 나를 두고도 기억조차 못 하는 내 오라버니. 내가 떠나도, 갑자기 사라져버려도 아마 알지 못 할 테지. 공주에게 있었어 떠나기 전 가장 미련이 남고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제 친 오라비가 아닌 호석뿐이었다. 늘 찾아주고 웃게 해준. 외로울 때, 늘 곁에 있어준. 그 어떤 다른 이도 아닌 호석 말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겨져 하루하루가 괴롭고 쓰라렸을 때, 호석이 따스한 햇빛처럼 다가왔다. 텅 비어버린 손을 잡아주었다. 가족이, 오라버니가 되어주었다. 태형과 함께 유일하게 공주란 존재를 알아주고 나조차 잊지 않게 상기시켜주는 사람. 너무도 소중한 사람. 내가 떠나면 오라버니는 슬퍼하실까. 그리워하실까. 아마 나는 그리울 거야. 많이 그리울 거야.

그뿐이었다. 이곳을 떠나게 되면, 그리게 될 단 한 사람. 해서 공주는 태형과 함께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호석이 아주 많이 그리울 테지만 이젠 예전과 같이 사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고맙다고 생각했다. 공주와 달리 태형은 가진 것이 많았으니까. 해서 버려야 할 것도 많았다. 그의 가족, 그의 부, 그의 명예.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행복하게, 평범하게 살고 싶다 그리 말했다. 어쩌면 공주와 함께 도망 쳐주는 것은 태형일 테지.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공주와 도망 쳐주겠다는 것이었다.
 

 

 

"야화!"

 

 


언제쯤 일렁이던 물결이 잔잔해질까, 굳은 제 결심을 보여주듯 단단하고 확신에 착 눈으로 태형을 보며 떨어질 답을 기다리고 있던 공주는 저를 부르는 태형의 목소리에 덜컥 몸을 놀랬다. 태형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고 그 때문에 배가 울렁이는 것에도 아랑곳 않으며 공주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진 시선에 공주는 숨을 훅- 참은 채 눈을 깜빡이며 태형을 보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공주에게 답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크게 방황하며 덜덜 떨리고 있었다. 숨까지 조금은 거칠게 내쉬던 태형은 공주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이내 휙, 팔을 덮고 있던 소매를 걷어젖혔다.

 

 


"어째서... 어째서...,"

"응?"

"여기 좀 봐! 이게,... 이게 대체,"

 

 


태형의 태형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그의 말에 공주는 시선을 제 팔로 돌렸다.

 

 


"태형아... 나..., 내 몸이 이상해.... 내 몸이...,"

 

 


소매가 걷혀진 팔에는 제 머리칼과도 같은 흑색의 털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주 두껍고 거친 털들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수북하게 자라고 있었다. 반대쪽의 소매를 걷어보아도, 치마를 걷어 다리를 보아도 모두 검은 털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제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공주는 얼굴이 간질거리기에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더니 보드랍고 매끄러운 볼이 아닌 가슬 가슬한 촉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기괴한 그 광경에 놀라지도 못 하고 공주는 온몸이 죄다 뜯기는 듯한 통증에 먼저 비명이 터져버렸다. 누군가 사지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열이 나는 듯 뜨거워지며 뼈가 부러진 듯 온몸 구석구석이 아팠다. 그 통증에 몸부림을 치며 참지 못 하는 비명이 터졌다. 삽시간에 검은 털로 덮인 손은 그 사이로 날카로운 발톱이 자라났고 부풀어 오르는 몸을 견디지 못 하고 옷가지들이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널브러졌다. 정신이 없었다. 죽을 듯 아파오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야화!"

 

 


결국 공주는 통증에 몸부림을 치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균형을 잃어 몇 배는 크게 부어오른 몸을 물속으로 던져 넣었다. 첨벙- 소리와 함께 물길이 커다랗게 일었다. 귓속엔 끊임없이 불러대는 태형의 목소리가 들리다 멍멍하게 잦아들었다. 뜨겁게 열이 올랐던 몸에 차가운 물이 닿아와 찌릿함을 주며 식어갔다. 불어난 덩치만큼 평소보다 몸이 몇 배는 무거워져 빠르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꼼짝없이 가라앉았다. 물속 가득 담기며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곧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던 통증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고 몸에 불을 붙인 듯 타오르는 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름다웠다. 물 밖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세상이 온통 새까맣게 물들었어. 마치 먹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까맣게. 밤이란 것이구나. 해가 지면, 세상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구나. 일렁이는 물결 때문에 어지럽게 흔들렸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황홀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잠겨버리고 싶었다. 점점 멀어져 갔다.

 

 

 





 

 

 

 

 

 

 

 

 

드디어 다 나왔다ㅠㅠㅠㅠㅠ 정국이까지 이제 모두가 등장했네요!ㅎㅎㅎㅎㅎ

하지만 오늘도 태형이가 다 해먹었다....ㅠㅠㅠㅠㅠㅠㅠㅠ 뭐 중요한 인물이니 어쩔 수 없다만.... 전개가 느린 것도 한몫하는 것 같아서ㅠㅠㅠ 아주 잘 한다....

어찌 되었든! 제 글을 봐주시는 분들이 또 늘어났고! 감사합니다ㅠㅠㅠㅠ 열심히 연재해야지!!!

 

암호닉♡

새싹 슈가코팅 자몽해 카모마일 지쟈스 난나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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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난나누우 에요 오늘은 여주가 더 안쓰러워 보였던 편인거같아요... ㅠㅠ
작가님 와주셔서 감사하구용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8년 전
독자2
[쀼리링] 암호닉 신청해보아요...ㅎ
ㅠㅠㅠ정말 너무 스토리전개가 좋나요ㅠㅠㅠㅜㅜ태형아ㅠㅠㅠㅠ너무애잔해요...ㅠㅠㅠㅠㅠ드디어 정국이의 출연...이번화...넘나좋습니다........ㅠㅠㅠㅠ

8년 전
독자3
새싹입니다 갸아아악 드디아정구기규ㅠㅜㅜㅜㅜㅠㅠㅠㅜ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ㅜㅠㅠ태형이 넘 스윗합니다ㅠㅜㅜㅜㅠㅠㅠㅜ다정해ㅠㅠㅠ착해ㅠㅠㅜㅜㅜㅜㅜ 최고애ㅠㅜㅠㅠㅠㅠㅠㅜ
8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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