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뭐야 저거."
원과 환은 차마 말을 다 이을 수 없었다. 운은 완벽한 승리. 도전자를 가지고 노는 듯한 경지였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했음에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으며 차림세 마저 정갈했다. 표정 역시 산책을 나온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쿵. 그소리를 끝으로 마지막 도전자 마저 쓰러졌다. 운은 태연하게 주최자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가져가면 되는 겁니까?"
"아, 예... 그것이..."
"형! 위험!"
하지만 순간, 쓰러진줄 알았던 도전자가 일어나 칼을 꺼내들고 운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운이 제빨리 몸을 뒤로 빼, 다치지는 않았지만 운의 머리카락이 조금 잘려져 머리카락으로 감추었던 그의 가면이 들어났다. 운은 황급히 손으로 가면 부분을 가렸지만, 이미 그 장면을 보아버린 사람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가면 아니야?"
"왜 반쪽짜리 가면을 쓰고 있지? 설마 얼굴에 끔찍한 흉터가 있는거 아니야?"
"막 저주처럼 벌레가 기어다닐 수도 있어."
"어떻게 얼굴에 상처가 난 흉인이 수도에 있는거지? 흉터가 아닌가?"
거슬리는 말이 많아졌다. 그중 일부는 선명하게 귀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수근거리며 눈으로 운을 흘긴다.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가지며, 그와 동시에 우월감을 느낀다.
"뭐야... 이상해..."
그 말소리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은 환이었다. 환은 옆에 있던 원을 잡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모두 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절대로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는 눈초리. 시선 만으로 사람을 죽일것 같은 숨막힘이었다. 원 역시 이런 분위기가 낫설었다. 환만큼은 아니었지만 달라진 분위기에 숨이 막힌 것은 매한가지.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운은 그런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은듯 태연하게 몸을 돌려 상품을 받으러 왔다. 그에 경기 주최자는 바나나를 던지듯 운에게 던져주었다. 운은 태연하게 와서 원에게 바나나를 준다.
"오늘 순찰은 여기서끝. 난 들어간다."
"..."
운은 곧바로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원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환에게 물었다.
"안 쫒아가요?"
"왠지 그냥..."
환은 말끝을 흐렸다. 왠지 그냥...
"쫒아가면 안될거 같아."
***
운은 조금 늦게 궁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없는 사이 검은 시장을 알아본 것이지만, 사실 둘의 얼굴을 보기 껄끄러워 그랬던 이유가 컸다. 운은 가면을 만지작 거리며 피식 웃었다. 가면이 들어난 것만으로도 이렇게 수근거리는데, 가면을 벗은 얼굴을 보면 놀라 기절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걷다보니 궁 안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밤이었다.
"??"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두워져야할 황자궁의 빛이 환했다. 아니, 정확히 황자궁에 갈려면 가로질러야 할 무투장 주변에 횟불이 여러개 걸려 있었다. 운은 고개를 갸웃하며 무투장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일어나자."
"..."
황자들이 모두 있었다. 3명의 황자는 무투장 밖에 앉아 구경을 하고 있었고, 무투장 안에는 연과 원이 목검을 들고 겨루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연이 일어나라 강요하고 있었다.
"함부러 놀러간 값은 치뤄야지?"
"..."
"그런 소란을 피운 값까지 쳐서."
연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마치 산에서 도망치던 자신을 관람하던 얼굴처럼. 운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인기척을 알아버린 환은 울듯한 표정이 되어 운을 불렀다.
"운이형님! 연이형님 좀 말려줘요! 저러다 원이 죽어!"
"...무슨 일인데."
"형님이 가고 형님에 대해 우리에게 묻길래, 원이랑 싸움이 붙어서..."
콰직! 순간 무언가 묵진한 것이 날아와 환의 다리옆 의자에 박혔다. 운은 놀라서 환에게 다가갔다. 가볍게 앉아 있는 황자들과 다르게, 환은 묶여 있었다.
"환이는 입이 너무 가벼워."
환에게 목검을 날린 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환은 순간 딸꾹질을 하며 말을 삼켰다. 환이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고 있는 사이, 연이 운이에게 다가왔다.
"간단해. 황자에 신분도 모르고 몰래 나간 황자가, 시민들이랑 싸웠잖아. 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어. 들키지만 않으면 말이야. 근데 포졸들까지 오게 만들어서 만인이 다 알게 되어버렸어."
연이는 태연하게 환의 의자에 박힌 목검을 다시 뽑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원이에게는 단순한 싸움이었겠지. 그런데 그렇게 모르고 싸운 시민은, 황자와 싸웠다는 이유로 팔을 한쪽씩 자르는 형벌을 받게 됬어. 약 3명의 한팔씩을 가져간 죄는, 법이 못해주면 가족인 내가 치루게 해줘야 하잖아."
"..."
운은 눈을 돌려 원의 상태를 보았다. 같은 목검을 쥐고 있었음에도, 원은 거의 기절 직전의 상태까지 가 있었다. 운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내 잘못도 있어."
"응?"
연은 아기를 달래듯 되물었다.
"나를 위해 싸우다 그런거야. 그러니까 내 잘못이 커."
"...그 말은, 원이 벌을 대신 받겠다는 거야?"
원은 그말에 고개를 들었다. 운을 쳐다보는 눈빛이 하지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연은 운에게 목검을 겨누며 웃었다. 그럼 원이 벌에 대한 연장선으로...
"나랑 겨뤄볼래 운아?"
너의 실력이 보고 싶기도 하고.
***
연과 운은 대련을 위해 두세걸은 떨어진 자리에 멈춰섰다. 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궁금하다. 이렇게 진심으로 겨루어 본적은 없지 우리?"
"..."
운이 대답 대신 검을 빼자 연은 '싱겁긴'이라 중얼거리며 검을 손에 들고 자세를 잡았다. 본격적인 대련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평소에도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었지만, 달랐다. 이제것 늑대가 변해버린 주변 환경에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면, 지금 이건 자신의 앞에 적을 마주보고 있는 경계심. 살기었다. 그것을 음미하던 연의 주위의 기운이 싸악 변했다. 마치 날카롭게 다듬어진 한 자루의 검을 보는 느낌이랄까. 연의 날카로운 기운이 황자들이 있는 곳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저게 사람 싸움이야?"
"난 처음부터 사람으로 보지도 않았어."
환의 물음에 홍이 말했다. 연은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모든 대답을 웃음으로 무마시키면서, 항상 몇수 앞을 내다보는 기이한 사람. 모든 것에 가장 의욕이 없어 보이면서, 모든 일에 간섭하고, 가장 약할 것 같은 이미지를 보이면서, 세상 누구보다 강하다. 적어도, 연은 황자들 앞에서는 한번도 진적이 없었다.
깡!
연이 먼저 운을 공격했다. 원은 눈을 비비며 그들의 싸움에 집중했다. 연이 제법 떨어져있는 운에게 다가가 검을 휘두르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 한눈을 팔고 있었다면 놓쳐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소름끼치도록 깨끗한 동작이었다. 동작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욱 놀란것은, 그 말끔한 동작을 망설임 없이 받아낸 운이었다. 표정하나 변함없이 공중에서 날아온 연의 공격을 막아선 운. 그는 힘으로 연을 밀어냈다.
"오호?"
운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의 검술은 검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기에도 확연히 달랐다. 운의 검술은 투박하면서 묵직한, 최소한의 동작을 하여 상대의 빈틈을 파고 든다면, 연은 빠른 동작과 순간 속력으로 상대방이 다음 공격을 이어가지 못하게 하여 상대방에 헛점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각 검술에는 단점이 있다. 운은 상대방이 빈틈이 생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 연은 상대적으로 많은 움직임을 요구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둘의 실력이 비슷하다면, 이것은 체력전이라는 것이다. 약 1각(15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운이 연의 손목이 빈것을 목격하고 그곳을 파고 들었다. 연은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덕분에 허리가 비었고, 운은 허리에 찾던 단도를 꺼내 연의 허리를 공격했다.
"윽!"
생각 외의 공격. 운은 묵직한 공격이 주였지만, 정공 검술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배운 무술. 때문에 투박하고, 거칠고, 언제나 상식을 벗어났다. 운은 기다린 것이다. 연이 운의 검술이 여기까지라 느끼고 느슨해 지는 순간을 말이다. 그리고 운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연이 차고 있던 허리끝이 툭,하고 끊겨 나갔다. 그리고.
깡!
엄청난 소리가 났다. 묵직하고 청아한, 나무에서 날 수 없는 소리. 귀를 울리는 그것은 납으로 만든, 연이 특수로 제작한 3관(약 10.5kg)짜리 허리띠 였던 것이다.
"..."
"공격이 먹혔으니 내가 진건가?"
연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연의 패배라 말하지 못했다. 무거운 허리끈을 차고 날아다닌것. 체력적에서도, 힘적에서도, 이건 운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럼 오늘은 봐줄게. 대신 원. 넌 사흘간 제3궁에서 한발작도 나가지마. 물은 먹을 수 있지만, 고기음식은 안돼. 구호식 이틀치를 나눠먹으면서 견뎌."
"...네."
운은 말이 안되는 처사라고 말할려고 했지만, 원이 나와 운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3명의 팔을 잘라먹고, 그정도 벌이면 감사한 거죠."
"..."
원의 대답에, 운은 입을 다물었고 연은 다시한번 그들에게 말했다.
"황자라는 직위,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위치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 그리고 우리가 하는 사소한 행동이, 그들에게는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 너희가 기침을 내뱉었다고 궁녀가 문초를 당하고, 너희가 말에서 떨어지면 말은 목이 잘리고 말을 돌보던 노비는 다리를 잃어.
조금의 억울한 일을 참지 못하는 황자는, 결국 수많은 목숨을 죽일거야. 난 내 동생들 만큼이나, 내 백성들이 중요해. 그 백성이 옳지 않은 생각을 가진 백성이든, 내 형제를 보고 욕하는 백성이든, 결국 내백성이야. 내 백성들을 그렇게 죽일 동생이라면, 그전에 내가 다시는 그런짓을 못하도록 형벌을 내릴거야."
"...알겠습니다."
"...오늘은 운이가 원을 3궁에 데려다 주고, 거기서 묵도록해. 다들 해산하고."
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원을 부축했다. 원이 기거하는 제 3궁은 제법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원의 방에 들어가 대충 약제를 찾은 운은, 천과 약제를 들고와 멍이든 원의 팔을 치료해 주기 시작했다. 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아서, 차라리 다행이다 하면 제가 웃긴 사람인가요?"
"..."
"연이 형님은 집행과정을 모두 보게 해요. 너가 저지른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나 지켜보라는 거죠. 저, 두눈으로 봤어요. 저 때문에 팔이 잘리는 사람들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것도 봤어요. 집에 지켜야될 자식과 아내가 있다면서요."
"..."
"무섭더라구요. 저는 그냥 간단한 싸움이었는데, 그들은 목숨을 건 일이 되어 버린 거예요. 제가 그들의 삶을 망친거죠. 너무 무섭고, 역겨웠어요. 그래서 연이형님이 아무리 공격해 와도, 막을 수가 없었어요."
"..."
치료를 끝낸 운은, 원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그때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원은 운의 얼굴을 거의 처음으로 오랫동안 마주보았다. 무서운 얼굴, 사나운 인상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따듯한 사람같았다.
"... 오늘 자고 가실래요? 너무 늦었잖아요."
운은 혼자 있으면 잠이 안올것 같다는 원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