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산소
요즘 들어 힘든일이 참 많아. 올 한해도 점점 끝이 보이는데 왜 내 걱정에는 끝이 없는건지. 오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심을 가득 담은채 집으로 돌아왔어. 혼자 사는 집에 뭘 바라겠냐마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냉기에 괜시리 더 슬퍼지는거 같아. 외로워서 그런가? 개라도 한 마리 키워야겠어. 그래, 강아지든 고양이든 일단 지금은 너무 추우니까 보일러부터 틀고…….
"우와……"
실내 버튼을 누른 뒤 아무 생각없이 베란다 쪽을 바라봤다가 평소와 다르게 하늘에 떠있는 별들에 눈을 떼지 못했어. 밤 하늘을 수놓는… 뭐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도시에서 이 정도 별들을 볼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놀라웠거든. 듬성듬성 떠있는 별들을 보고 있자니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할머니댁에 놀러가서 별을 보다 잠든 기억에 잠시 멍해지더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추워서 덜덜 떨었으면서 저 별들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고 싶어서 담요를 챙겨 베란다문을 열고 난간에 기대 하늘을 바라봤어. 아 근데 좀 많이 추운데?
"엣취!"
"아 놀래라."
"으아아 깜짝이야!!!"
차가운 겨울바람을 계속 맞고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재채기가 나왔어. 괜히 멋쩍어서 코를 훌쩍이는데 옆에서 왠 동굴 목소리가 들리는거야. 와 나 진짜 귀신인줄 알고 심장 멎을 뻔했다. 놀란 가슴을 쓸면서 누구세요…? 라며 조심스레 물어봤는데,
"옆집사람인데요."
아, 네……. 그렇게 당연한걸 나 왜 물어 봤지? 얼굴이 확 달아올라 후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잠시 정지상태가 되버렸어.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음을 땡 시켜준건 다름아닌 아까 그 동굴 목소리였어.
"맥주 드실래요?"
"……주신다면야."
옆집 베란다랑 우리집 베란다랑 이렇게 붙어 있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네. 팔 뻗어봐요. 동굴 목소리를 가진 옆집남자의 말에 팔을 쭉 뻗었더니 내 손에 떡하니 맥주를 올려주더라. 영문도 모른 채 받은 맥주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일단 받은거니까 마시기는 하는데, 혹시 이거 뭐 탄거 아니야? 내가 따기전에 주사기같은걸로 약같은걸 넣어놨다거나…….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거니? 하긴, 그랬으면 티가 났겠지? 담요로 몸을 돌돌 말고서 베란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안주도 없이 맥주만 홀짝홀짝 마시고 있자니 그 모습이 또 너무 처량한거야. 에휴. 조금 크게 한숨을 쉬었더니 그게 또 옆집남자한테까지 들렸나봐?
"담배도 줄까요?"
"마음은 고맙지만 담배 안 피워요."
"의외네."
"뭐라구요?"
뭐? 내가 담배 피우게 생겼어? 아니 애초에 너 나 모르잖아. 기분이 팍 상해서 이제 그만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베란다 문을 드르륵 열고 한 발짝 들어섰을때,
"무슨 고민있어요?"
"……."
"혼자 속앓이하면 마음 다 상하는데."
"저기요."
"네?"
"제 얘기, 들어주실 수 있어요?"
"뭐 들어주는것 정도는."
무슨 정신으로 얼굴도 모르는 옆집남자한테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는지 모르겠어. 그냥 편했어. 그 동안 힘들었던거, 슬펐던거, 꺼내놓지 못하고 혼자 속에서만 담고있던 말들을 누구한테 털어놓는다는거 자체가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했던거 같아. 쉴새없이 내 얘기만 하다가 30분쯤 흘렀을까? 간간히 추임새만 넣어주던 옆집남자가 드디어 말을 건냈어.
"힘들었겠다."
"네. 엄청나게."
"근데 그거 알아요?"
"뭐요?"
"당신이 무슨 결정을 하던, 전부 다 잘될거라는거."
"……."
"니 인생의 주인공은 너니까. 주인공이 죽는 해피엔딩봤어요?"
"만약 내 인생이 새드엔딩이면요?"
"아니, 니 인생은 무조건 해피엔딩이에요."
"치……."
"감기걸리겠다, 이제 들어가요."
"음, 저기요."
"네."
"내일도 여기서 이렇게 얘기 해도 되요?"
"응, 당연하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꼭 베란다로 나오셔야되요! 알겠죠?"
"알았으니까 얼른 들어가요."
"네! 내일 봐요!"
오늘따라 침대에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것 같아. 불이 꺼져 어두워진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잘될거라며 위로해주던 옆집남자의 말이 귓속을 맴돌았어. 남한테 그런 말을 들어본적이 있었나? 빈말이든 아니든 엄청 힘이 된다는건 사실이니까.
***
그 날 이후로 옆집남자와 나는 베란다 벽 너머로 이것저것 많은 얘기를 나눴어. 아 참 우리 말도 놓기로했다? 나이가 같더라구. 따지고 보면 난 생일이 빠르니까 누나지만 그렇게 집요하게 누나소리 듣고싶은것도 아니고 그냥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기로했어. '박찬열' 옆집남자 이름이야. 처음 듣고 되게 이쁘다- 라고 생각했어. 이쁘지않아? 뭐 어쨌든간에 오늘도 베란다에서 찬열이랑 만나기로했어. 밤 10시가 되면 몸에 담요를 돌돌 말고서 베란다로 나가.
"왔어?"
"응. 춥다."
"또 담요만 덮고있지? 옷 입으라니까."
"패딩입었으니까 걱정마."
"참, 너 케익 좋아해?"
"응? 좋아하지."
팔 뻗어봐. 그 말에 이제는 익숙하단 듯이 팔을 뻗으니 찬열이가 뭔가 커다란걸 건네줬어. 힘들게 받아오니 케익상자…? 난 무슨 작은 조각케익 주는 줄 알았지…….
"이거 뭐야? 나 왜 줘?"
"오늘 생일이라 받았는데 나 단거 안좋아해."
"뭐? 너 생일이야?"
"응. 그니까 빨리 축하해줘."
"아 뭐야 미리 알려줬으면 선물 준비했을텐데……."
"됐어 코묻은돈으로 사준 선물 사양할게."
"야, 내가 따지고 보면 너보다 누나거든?"
"아 그러셨어요? 누나?"
됐다 말을 말자, 그래도 생일인데. 뭐라도 해줘야 마음이 편해질거 같아서 찬열이한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를 뒤졌어. 분명 여기 어디 있었는데……. 아 찾았다. 작년 파티때 썼던 꼬깔모자. 내꺼 하나 찬열이꺼 하나 챙겨서 다시 베란다로 나갔어.
"자 이거 받아."
"뭐야? 설마 이거 선물?"
"아 일단 빨리 써. 나도 썼단 말이야."
"넌 왜쓰냐. 자, 썼다."
"흠흠, 생일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박찬열~ 생일축하합니다~"
"아 진짜 ㅇㅇㅇ 귀여워 죽겠네."
"감동이야? 감동먹었어?"
"어 지금 눈물흘리고있어."
"짜식……. 거짓말하지마."
약간 민망한 내 축하 노래가 끝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어. 뭔가 큰 어색함을 느끼고 급하게 말을 꺼내려고했는데 딱히 할 말이 없더라구……. 그러다 그냥 갑자기 찬열이에 대해 궁금해졌어. 사실 나는 이것저것 고민상담하면서 다 말했는데 찬열이는 내 얘기만 들어줬지 말해준건 별로 없었거든. 어떤 학교를 다니는지, 아니면 회사를 다니는지. 어쩌다 한번 쯤 문 앞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법도 한데 한번도 마주친적이 없으니 나로썬 궁금할 수 밖에.
"찬열아."
"왜?"
"너 백수야?"
"뭐?"
"아니, 그냥……. 맨날 밤에만 보이니까. 낮에는 뭐하나 싶어서."
"음, 휴학하고 지금 아무것도 안하니까 백수 맞나?"
"뭐야 맞네."
"그래도 너 먹여 살릴 수 있어."
"니가 왜 날 먹여살려? 나 부자한테 시집갈거야."
"어쭈?"
"뭐! 뭐! 어떻게 먹여살릴건데?"
"울 아빠 부자야."
"어 좀 설레네."
나 진심으로 설렜는데……. 속물이라 미안하다 흑흑. 아무튼 간에 찬열이도 입이 트였는지 평소처럼 영양가없는 대화를 이어나갔어.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누구보다 찬열이가일 편하거든. 마치 10년 된 친구처럼. 진짜 우리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이렇게 친해졌지?
"야 ㅇㅇㅇ."
"왜."
"너 나 안보고싶냐."
"뭐래."
"안궁금해? 나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긴 해."
"나 안볼거야?"
"뭐야 왜 그러는데."
"지금 갈까. 너네 집으로."
"미쳤어? 오지마 진짜 문두드려도 안열어줄거야."
"사실 지금 몸만 숙여도 볼 순 있어."
"아 하지마. 나 들어갈래. 내일 봐 안녕."
물론 찬열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그것도 무지무지 궁금한데……. 아직은 내 마음의 준비가……. 좀 그렇잖아. 얼굴보고 실망하면 어떡해? 아 내일 우리 집 찾아오는건 아니겠지? 제발…….
***
어제 다짜고짜 얼굴을 보자던 찬열이때문에 급하게 자리를 피한거 때문에 하루종일 신경쓰여 죽는 줄 알았어. 화났으면 어쩌지? 만약 진짜 집으로 찾아오면 어떡해?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미치겠네 정말. 오늘은 그냥 집에 들어가지 말까? 에이, 내가 집 말고 갈 곳이 어디있어……. 최대한 집에 늦게 들어가기로 하고 애꿎은 친구만 나한테 붙잡혀서 고생했지 뭐.
"휴……."
아무리 뻐기고 뻐겨도 더 이상 할게 없다는 결론이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야. 자정이 넘은 지금,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아냐 이 시간엔 찬열이도 자고 있겠지. 자고있어야해! 어두운 밤길에 천천히 가려던 생각과는 달리 발걸음을 조금 재촉했어. 괜스레 무서워서 조금이나마 빨리 가려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는데 가로등 아래 누군가 서있는거야. 이렇게 추운날 등에 땀방울이 한방울 흘러내렸어. 엄마 어떡해 무서워……. 신경안쓰는척 하면서 핸드폰을 꺼냈어.
"여보세요? 어, 나야. 지금 집 거의 다왔어."
이 시간에 누구한테 전화를해! 당연히 하는척이지! 대충 그럴듯하게 혼잣말을 하면서 걷고있는데 가로등 아래에 서있던 사람이 자꾸 따라오는거야. 나 어떡해……? 그냥 같은 방향일거야. 라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우리 아파트단지까지 들어왔어. 심지어 엘리베이터 앞까지. 이, 이건 아니잖아……. 하필이면 바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탈까말까 고민하는 사이 날 뒤쫓아온 남자가 먼저 탔고 난 눈치를 보다가 따라탔어.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층수를 안누르기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눌렀지. 더 이상 전화하는척도 힘들어 그냥 끊는 척을하고 내일 아침 뉴스에 뜰 나를 생각했어. 아니야 지금이라도 경찰에 신고할까? 어떡하지?
"저기요."
"아아아악!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무슨 소리세요……."
"……네?"
"아 진짜 ㅇㅇㅇ 골 때린다."
"누구신데 제 이름을……."
설마……. 에이, 설마…….
"ㅇㅇㅇ 이쁘네."
"……박찬열?"
"안이쁘면 안먹여살릴라 했는데."
"어……?"
"내가 먹여 살려야겠다."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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