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오르비스 4 |
4. 경수는 멍하니 자판기 앞에 서있었다. 몇 초가 지나도 경수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진열대에 놓여있는 음료수들을 눈으로 훑어보지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전 일어난 일 때문에 온갖 생각들이 엎어진 쓰레기통처럼 복잡했다. 김종인은 왜 그랬을까? 그가 했던 모든 행동들의 원인은 무엇일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경수는 방금 전 일을 다시 떠올렸다. * 1교시 전이였다. 조례시간에 바꾼 자리들이 모두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음도 모두 잦아들기 시작했다. 종인은 방금 전의 짧은 대화, 아니 통보를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책상위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기만 했다. 경수는 종인의 정수리가 보이는 뒷통수를 보았다. 칠흙같이 새카만 머리가 단정해보였지만, 그닥 공부를 잘하는 애는 아닐것 같았다. 그때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창가쪽에 앉은 경수는 앞에 애의 뒷통수에 칠판 글씨가 가려져 잘 보이질 않았다. 가뜩이나 몸집이 작아 평소에도 뒤쪽에 앉으면 칠판의 반쯤은 거의 안보이는 셈이였다. 물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몸을 옆으로 숙이고 고개를 틀어보아도 칠판의 삼분의 일 정도가 가려졌다. 가려지는 부분이 사이드 쪽이라 크게 수업에 피해가 오진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불편한 건 사실이였다. 경수는 이참에 그냥 자리를 바꾸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앞쪽에 앉아있는 찬열과 가까워질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아예 짝이 될 수고 있겠다. 경수는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바로 옆에서 엎드려 있는 종인은 여전히 잠만자고 있었다. 종인과 짝이 되지마자 바로 자리를 바꾸는게 좀 찜찜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종인 보다는 수업이 더 중요했으니까. 경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선생님, 저 칠판이 안보여서 그런데 자리 좀 바꿔주세요. " " 뭐? " 선생님이 잘 안들린다는 듯 경수에게 다시 물었다. " 그게 칠판이…, " " 아니예요, 쌤. 도경수 칠판 잘보인대요. " 옆에 죽은듯이 엎어져 자고만 있던 종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잽싸게 경수 대신 대답했다. 종인은 언제 엎드려서 자고 있었냐는 듯 또렷한 눈동자였다. 경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말을 무시하는 종인을 보며 벙쪄있었다. 뭐지 이 상황은?
" 그럼, 경수는 거기 앉고. 자리 이상 없지? " " 아, 그게…! " 선생님까지 아예 못을 박아주셨다.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번쩍 뜨인 경수의 눈이 종인을 바라보았다. 그 속엔 황당함도 섞여있었다. 경수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종인은 순식간에 경수의 말을 뭉개뜨려버렸다. 무시 당하는 기분이 들어 경수는 종인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 뭐야? " " 너 자리 바꾸지 마라." " 갑자기 왜……. "
종인은 능글맞게 웃으며 경수를 보았다. 딱 보아도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경수를 보는게 재미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들이 우스웠다. 경수는 종인의 웃음에 숨이 턱, 막혔다. 거절을 하려 해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완전히 제압 당해버렸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찬열이 뒤를 보아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와 눈이 마주친 찬열은 씩 웃었다. 찬열은 종인과 경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 둘이 짝. ' 경수는 찬열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찬열은 그런 경수를 보며 킥킥 웃었다. 경수는 와중에도 예쁘게 웃는 찬열이 원망스러웠다. 내심 찬열과 짝이 되길 바랬던 마음을 몰라주는 찬열이 야속했다. 그와 동시에 종인은 경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헀다. " 알았지, 응? " 종인은 경수가 거절할 수 없게 콱 도장을 찍어버렸다. '응?'이란 한마디에 경수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버렸다. 종인의 능글맞은 미소와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있는 찬열의 시선. 그것들이 경수를 옴싹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멀리 있다고 해도 찬열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경수는 찬열을 힐끗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으,응. " 경수의 대답이 끝나자 마자, 종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책상위로 엎어졌다. 경수는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감이 안잡혔다. 다시 뒷통수를 보이는 종인을 빤히 쳐다보다 앞자리에 앉은 찬열에게 눈을 돌렸다. 찬열은 경수를 보고 한번 킥, 하고 웃더니, 갈색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매정하게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미소는 사라지고 판판하고 넓은 등만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 " 안 쓰실거면 좀 비켜줄래요? 도경수씨? " " 네, 네? " 멍하니 있던 경수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찬열은 허리를 숙여 경수의 얼굴 옆에 가까이 대고 있는 채였다. 경수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찬열의 얼굴과 마주쳤다. 경수는 처음으로 사람의 얼굴을 보며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는걸 알았다. " 장난인데 진짜 놀라네. " " 아, 깜짝이야. " " 또, 눈 커졌다! " 경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놀란 맘을 가라앉혔다. 자주 놀라는 것도 병이다, 병. 경수는 찬열이 다른 낯선 사람인 줄 알았다. 그렇게 목소리까지 깔고 존댓말까지 쓰니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찬열이 만연에 개구진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찬열은 웃는 것은 모두 같았지만, 표정은 모두 달랐다. 눈꼬리부터 밑으로 타고 내려오다 움푹 패이는 보조개, 그리고 입모양까지 신선했다. 그런 사소한 것들 마저도 경수가 찬열을 볼때마다 설레이는 이유였다. " 너는 맨날 볼때마다 눈이 엄청 커진다. " " …이젠 작게뜨려고 노력은 해볼게. 될지 안될진 모르겠지만. " " 장난이지! 당연히. 넌 눈 동그랗게 뜨는게 매력이야. " 찬열은 자판기 플라스틱 창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었다. 무얼 먹을까…….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경수는 찬열의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임에도 속에서는 커다란 반응이 일었다. 매력.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 나에게도 매력이란 게 있었나? 경수는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어보는 게 처음이였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몽롱한 느낌이였지만 이미 입꼬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경수는 찬열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몃 미소지었다. 경수는 음료수를 고르는 찬열을 보며 생각했다. 찬열은 존재 자체가 매력이였다. 그가 하는 행동, 말, 표정 모두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강력한 힘이였으니.
찬열이 한참을 고민하다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구겨진 지폐 두 장을 꺼내 자판기에 넣었다. 자판기에 붉은 빛이 반짝이며 들어왔다. 사과 주스 밑에 달린 버튼을 한번 누르고, 콜라 밑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우당탕탕 소리가 나며 음료수가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찬열이 음료수들을 꺼냈다. 그리고는 왼손에 들린 사과주스를 경수에게 건넸다.
" 넌 사과랑 어울릴 것 같아서. 이거 먹어. " 경수는 눈앞에 사과주스와 찬열을 한번 번갈아 보았다. 안받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사과주스를 건네받았다. 건네받은 음료수 캔이 얼음같이 차가웠다.
" 고마워. " 사실 경수는 사과주스보다 콜라를 더 좋아했다. 나도 콜라 좋아하는데…. 물론 속으로만 말했다. 공짜로 받아먹는데 취향까지 가린다면 그건 엄청난 민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은 절대로 진심이였다. 찬열이 준 호의라는 것만으로도 경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경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찬열은 가볍게 짓는 경수의 웃음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여자처럼 예쁜게 아니라, 그냥 표정 자체가 보기 좋게 예쁘다는 소리였다. 작은 무언가라도 건네주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처음엔 그냥 딱딱하고 소심한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경수는 의외로 웃음이 많은 애란걸 알았다. " 찬열아. " " 응? " " 김종인이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 " 뭐? " " 그러니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 "
경수가 부끄럽다는 듯 살풋 웃으며 말했다. 주스캔을 감싸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말에 콜라캔을 따던 찬열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 그러니까… 종인이가 먼저 미안하다 했다고? " " 응. "
경수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경수가 보기에 찬열의 표정은 평소 같지 않아보였다. 항상 웃고있던 입꼬리가 굳어있다. 입꼬리뿐만아니라 날카로워진 눈빛도. 경수는 자기가 말실수라도 한건가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 …그게 왜? "
찬열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듯 고개를 확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평소대로 웃었다. 탁, 콜라캔을 따고 찬열이 한입 마셨다. " 사실 종인이가 예전에 나한테 큰 잘못을 했거든. " " ……. " " 근데 그때 나한테 사과한 이후로 먼저 미안하다 한적이 없어. 그게 누구였든간에. " " 뭐? " 경수가 주스캔을 놓칠 뻔한걸 간신히 잡아냈다. 어느 순간부터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 그게 그냥 좀 의외였어. "
찬열이 경수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경수는 찬열의 희미한 미소를 보며 잠시 멍해졌다. 그러니까 그 사과를 나한테 한거야? 찬열의 말을 듣고나니 더 혼란스러워졌다. 방금 전 자리 문제도 충분히 복잡했는데 이제는 더 꼬여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금까지 하지도 않던 말을 왜 자신한테 하는지. 할 수만 있다면 김종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설마 나를 괴롭히려고 하는 걸까? 경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경수는 종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리를 못바꾸게 한것도 가까이서 괴롭히기 위해서고, 미안하다 한 말도 앞으로 조심하라는 경고의 뜻 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다른 꿍꿍이가 있을까? 경수는 어딘가 찝찝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 아무튼 둘이 짝이니까 이참에 종인이랑 친하게 지내. " " 그…럴게. "
경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찬열의 말대로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맞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종인의 웃음기 없는 냉랭한 무표정을 볼때면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아까 한 짧은 대화가 종인과의 마지막 대화였을지도 모르겠다. 순간 경수는 방금전에 보았던 종인의 미소를 떠올렸다. ' 너 자리 바꾸지 마라. ' ' 알았지, 응? '
자신을 보며 말하는 조곤조곤 주변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와 능글맞은 미소. 그 순간만큼은 무언가를 바라는 어린아이 같았다. 생각해보면 종인의 웃는 모습을 본 것이 경수에겐 처음이였다.
종인은 웃지 않을 때와 웃을 때의 차이가 엄청났다. 무표정일때는 주변이 모두 얼어붙은 것만 같이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면, 슬몃 미소라도 지었을 때는 부드러운 느낌을 들게 했다. 경수는 종인이 방금전에 짓던 장난스런 표정이라면 어쩌면 먼저 친해질 용기가 생길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종치겠다, 가자. 음료수는 나중에 마셔. "
찬열이 두손으로 경수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밀며 교실로 향했다. 뒤에서 밀리는 힘에 경수는 발을 움직였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정리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이 안나오는 것들이 구름처럼 둥둥 떠다닌다. 이젠 머리가 아플지경이였다. 경수는 계속 고민하다 훌훌 털어버리기로 했다. 지금까지 종인의 이유모를 행동들도 더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알 수 있을리가. 경수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미는 찬열을 향해 싱긋 웃었다. 찬열과 함께 경수는 교실에 들어섰다. 반 애들 모두 수업준비를 하기위해 부산했다. 경수는 무의식적으로 자기자리 옆에 앉은 종인을 눈으로 찾았다. 종인은 턱을 괴고 앞을 보며 앉아있었다. 종인의 책상에는 교과서도, 필통도 없이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고삼 책상같지 않게 휑했다. 경수는 계속해서 종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쟤가 뭘하고 있는지 알아보려는 심산이였다. " ……! " 갑자기 종인이 확, 뒤를 돌아보았다. 종인은 뒤를 돌아보자마자 바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는 아무런 준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종인과 마주쳐버렸다. 깜짝 놀라 숨을 흡, 들이마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눈도 피하지 못했다. 그저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 뿐이였다. 둘의 맞닿는 시선을 가로는 건 그 어떤 것도 없었다.
5초도 지나지 않아, 종인이 피식 웃으며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경수는 그제서야 숨을 내뱉었다. 그 짧은 순간동안 몸이 경직되어버렸다. 경수는 멀리서였지만 종인의 허탈한 웃음을 보았다. 분명한 건 정말로 웃는 웃음은 아니였다. 기분 나쁜 종류 중 하나다. 이런 반응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경쓰지 않기로 한게 바로 몇 분전인데! 경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집었다. 또 다시 머릿속 한곳에 버려두었던 엉켜있던 실타래가 올라올 것만 같다. 의도적으로 나를 갖고 노는건가? 정말로 어장속의 물고기라도 된 듯 싶다.경수는 종인의 뒷통수를 보며 자리로 다가갔다. 점점 검은색 동그란 머리가 가까워져갔다. 경수는 자리에 앉으며 종인을 힐끗 보았다. 쭉 뻗은 고개는 여전히 앞만 향하고 있었다. 멀쩡했던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사람.
김종인, 넌 뭐야 대체? |
잡담 |
오늘도 홀랑 4편을 던져두고 갑니다 비지엠은 듣고있는데 갑자기 좋아서...ㅠㅠ 분위기에 맞을런지는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