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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경수의 방학은 물 흐르듯 아주 평화롭게 지나갔다. 평소처럼 학교로 보충수업을 나갔고 그 수업이 지루하긴 했지만 나름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학교에서 종인과 찬열을 처음 만났을 때 괜히 어색하지 않을까 싶어 어떤식으로 행동해야할지 내심 걱정했지만 그런 것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찬열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예전처럼 저와 종인을 대했고, 종인은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저를 보았다. 확연히 둘 사이엔 보이지 않는 특별한 무언가가 생겨져있었다. 아주 끈끈하고 견고하게 서로를 끌어당기는 인력같은 힘이. 가끔 경수가 문제를 풀다 문득 종인이 생각나 뒤를 돌아보면 앞을 보고있던 종인과 종종 눈이 마주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피어올라 둘은 서로를 보며 살풋 웃었다.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들 중 하나였다. 커다란 고비를 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것에 웃음이 나올 정도로 행복한 나날들만이 우리의 앞에 펼쳐진 것만 같았다. 하루하루가 이리도 감사하게 느껴본 적은 처음이였다. " 다녀왔습니다. " 가볍게 현관문을 열고 경수가 평소보다 일찍 끝난 보충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다. 곧장 방으로 들어가 교복을 벗고 헐렁한 반팔 셔츠와 편안한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도 학교에서 딱히 큰 일이라 말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에 종인이 오랜만에 매점에서 빵을 쏘았고, 빵과 함께 찬열에게는 흰 우유를, 경수에게는 분홍빛 딸기우유를 사다주었다. 경수의 우유와 제 우유를 번갈아 보던 찬열은 은근슬쩍 너네 티내지 마라! 라며 종인을 타박했다. 저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씩 웃기만 했다. 그때의 일을 잠깐 떠올려보며 경수는 혼자서 씨익 웃었다. 별 것 아닌 일이였는데도 제 자신이 종인에게 어딘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옷을 마저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니 목이 조금 말랐다. 경수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라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머리가 찌릿할 정도로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시원했다. 이가 시려워 잠시 입을 떼는 순간,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계시던 경수의 어머니가 경수를 불렀다. " 경수야, 너 우리 가족 이사 가는 거 어떻게 생각해? " " 엉? 왠 이사? 어디로 가는데? " 뜬금없는 엄마의 말에 경수가 아무런 생각 없이 물었다. 학교랑 가까운 아파트? 학교 옆 동네? 아니면 어쩌면 새로 생긴 신도시? 학교 다니려면 멀텐데. 경수는 머릿속으로 나름 통학시간을 계산해보며 걱정했지만 그따위 고민들은 다음에 내뱉어진 엄마의 충격적인 한마디에 싹 사라져버렸다. 그곳은 전혀 예상치 못한. " 대구로 다시 내려가려고. " " ……뭐? " " 거기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시고 무엇보다 할아버지 일을 아빠가 물려받아야 하거든.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
설마 서울에서부터 약 4시간이 걸린다는 그 대구?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음과 동시에 경수는 손에 든 물컵을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놀란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자 여전히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통통통 호박을 썰고 계셨다. 사실 경수는 어렸을 때 잠시 대구에서 자랐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였지만 가족들 일에 관련되어서 7살 때부터 대구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그곳에서 초등학교 졸업까지 하다 교육문제 때문에 서울로 다시 올라오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지방으로 내려간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렇게 온갖 마찰을 겪으며 힘겹게 종인과 만났는데 이대로 생이별을 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죽어도 안된다. 경수는 엄마를 설득하기로 생각했다. " 엄마, 나 고삼인데 학교는 어떡해. 나 대구가면 적응도 안돼고 공부도 해야하는…… " " 너는 갈 필요 없어. 여기서 공부하다 대학가야지. " " …에? " 순간 이해가 되질 않아 머리가 멍해졌다. 엄마는 분명 저는 내려갈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 그러면 난 대체 어디서 자…? " " 너는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잠깐 세훈이랑 같이 지내고, 대학 들어가면 너도 이제 슬슬 독립해. " " 설마… 대구 사는 세훈이? " " 응, 서울로 올라왔대. 네 이모가 우리 아파트 옆에 거기 아담한 아파트 알지? 암튼 거기 얻어줘서 자취하기로 했어. 너네 학교로 전학왔다는데 아직 모르니? " "뭐, 정말?! " " 덕분에 잘됐지, 뭐. " " 다행이다! " 경수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종인을 혼자 두고 내려가지 않아도 돼서 정말로 다행이였다. 다 썰은 호박을 끓고 있는 냄비에 조심스럽게 넣으며 엄마가 말씀하셨다. " 조금씩 짐 챙겨놓고 있어. 다음 주부터 세훈이네 가서 지내. " " 응. "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남았네……. 한편으로 경수는 세훈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세훈은 한살 어린 경수의 사촌동생 이였다. 경수가 잠깐 대구에 살았을 적에 둘은 마치 친형제처럼 붙어 다녔다. 초등학교도 같이 나와 학교 등하교도 같이 하고 경수가 매일 세훈의 집에 놀러가거나, 세훈이 경수네 집에서 자며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다. 나이대도 한살밖에 차이가 나질 않아 서로에게 죽이 잘 맞는 친구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경수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게 되며 서로 죽고 못 살던 우애 깊은 사촌형제는 그렇게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그동안 멀리 떨어져 사는 탓에 잘 만나지 못해 서로 얼굴을 본지도 참 오래되었다. 명절 때 가끔 얼굴을 보긴 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거의 못 봤다고 보면 된다. 문득 제가 서울로 올라가던 날, 역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찔찔 울며 기차에 올라탄 기억이 났다. 그 때는 세훈이 참 조그맣고 귀여워서 매일 같이 지내며 놀았는데. 지금은 과연 어떻게 변해있을지. 내일 학교에 가면 세훈을 꼭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경수는 마시던 물을 마저 넘겼다. * 쉬는 시간, 수업 시간에 내치지 못한 졸음을 마저 채우기 위해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정신은 금방이라도 놓을 듯 한데 주변은 더럽게 시끄러워 잠의 세계로 빠질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은, 아니 서울은 대체 왜 전혀 효율성 없는 보충 수업 따위를 강제로 시키는 것일까. 예전 학교는 하고 싶은 애들만 나와서 했는데…. 세훈은 몽롱한 정신인 와중에도 속으로 먹히지도 않을 불평했다. 처음 전학 온 날 이후 어쩌다보니 의도치않게 세훈은 반애들에게 경악스러울 정도의 첫인상을 남겨주었다. 게다가 그 날의 사소했던 일은 어느 순간 부터 2학년 전체에 소문이 쫙 퍼져버렸다. 지방에서 올라온 좀 잘생긴 촌놈이 사투리로 여자애를 울렸다더라 하는 그런 소문. 학교내에선 나름 유명한지 그 여자애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컸다. 야, 2반에 어디 지방에서 올라온 애가 최유정한테 욕했대. 것도 사투리로! 최유정이 자꾸 귀찮게구니까 대놓고 표정 찌푸리면서 저리 가라고 했다던데? 뭐, 이 가시나가 앵기지 말고 꺼지라…? 암튼. 그때 최유정이 교실밖으로 그냥 뛰쳐나갔는데 애 얼굴이 울기 바로 직전이더래. 뭐, 진짜? 엎드려있는데 옆에서 자꾸만 속닥이는 말소리가 들린다. 분명 저를 말하는거였다. 정말 귀찮게도 어느 순간부터 저는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세훈은 쓸데없는 관심을 받는 것이 싫었다. 그냥 반에서 친구 몇명 사귀어서 조용히, 조용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워낙에 차가워 보이는 생김새 때문인지, 전학온 날의 강렬한 임팩트 때문인지 멀리서만 속닥일뿐 아이들은 세훈의 눈칠보며 쉬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세훈은 그런 문제들에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무념 무상. 지금은 그것보다 잠을 자는 일이 세훈에겐 더 중요했다. 시끄러운 소음에 차차 적응이 되어 잠에 들려고 하는 찰나, 누군가 제 어깨를 톡톡쳤다. 아씨, 누구야. 표정을 찡그리며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같은반 아이가 제 앞에서 우물쭈물 못하고 있었다. 뭐야, 하며 세훈이 한쪽 눈을 찌푸리니 그 아이는 손가락으로 뒷문 쪽을 가리켰다. " 저, 저기 어떤 선배가 너 부르는데…… " " 나? " 전학와서 날 찾을 사람은 없을 텐데 누구지. 호기심에 세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교실 뒷문쪽에 서있는 경수를 발견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책상이 앞으로 밀려나 앞에 서있는 이름 모를 아이가 깜짝 놀란 것은 개의치 않고 세훈은 경수에게로 반갑게 달려갔다. 잠은 저만치 달아난지 오래였다. 저도 모르게 경수를 부르는 억양에 악센트가 들어갔다. " 경수 형! " " 세훈아, 오랜만이네. 우리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처음인가? " " 응. 아, 나 지금 눈물 나올 것 같다. " 우는 시늉을 하며 반가움에 세훈이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경수는 그런 세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같이 웃었다. 역시나 시간이 지났어도 제게 하는 귀여운 짓은 예전과 똑같다. 어렸을 땐 작고 아담했던 키와 덩치가 몇년새에 커버려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긴 했지만. 경수는 저보다 한뼘이나 더 큰 세훈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 근데 너 되게 많이 컸다. 어렸을 땐 나보다 작았는데. " " 그런가? 형은 예전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 " " …조용히 해. " 세훈이 제 눈높이 정도 오는 경수의 정수리에 대고 놀리듯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자 경수가 발끈하며 손을 치워냈다. " 그나저나 어떻게 서울로 올라올 생각을 했어? 그것도 혼자. " " 그냥 엄마가 강제로 보냈다. 공부하라고. " " 와, 이모 쎄게 나오시네. " " 그래도 나름 살만하다. 아, 형 다음 주부터 우리집서 지내기로 했잖아, 괜찮겠나? " " 응, 당연하지! 내가 대구 안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진데. " " 그럼 담주에 짐싸서 와. " 확실히 세훈이 서울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경수는 부모님을 따라 저 멀리 지방으로 내려갔을 것이였다. 그렇게 되면 종인, 그리고 찬열과 모두 헤어지게 되고 매일 보고싶은 얼굴 한번을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건 절대, 절대로 싫었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나자 갑자기 눈앞의 세훈이 하늘에서 내려준 구세주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보니 더 귀여워 보이는건 내 착각인가. " 귀여운 세훈아, 형이 오랜만에 맛있는 거 사줄까? 서울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었는데 뭐 먹고 싶은거 있어? 다 사줄게. " 경수가 세훈의 두손을 꼭 붙잡고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자, 세훈은 시선을 살짝 아래로 피하며 수줍은 듯 대답했다. 그 끝엔 여고생처럼 수줍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 아니, 그런거 말고 나는… 그냥 뭐…… 서울 구경이나 함 시켜줘. " " 서울? 그래, 어디 갈까. 명동? 홍대? 신촌? 말만 해, 우리 동생이 가고 싶다는데. " "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 " 그렇게 해, 그럼. 이제 수업 시작 할 것 같으니까 가볼게. 수업 열심히 해. " 씩 웃은 경수가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경수가 다시 앞을 돌아볼때까지 세훈도 그 자리에서 서서 손을 흔들었다. 경수의 뒷모습이 더이상 보이지 않자 세훈이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얘기 할때는 몰랐는데 주변의 시선이 느껴져 둘러보니 반 애들 뿐만 아니라 복도에 있는 애들 모두가 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 조용하게 속닥였다. 대체 저 선배 누구야? 쟤… 처음으로 웃었어. 그 순간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세훈은 조금 머쓱해져 뒷머리를 슥슥 만지며 반으로 다시 들어갔다. *** " 그래서 내일 이사를 간다고? " " 응, 그렇게 됐어. " " 말이 이사지, 부모님이 지방으로 내려가시는거고 나는 그냥 사촌동생네서 지내는거야. " " 사촌동생? " " 응, 세훈이. " 한창 창가 옆 자리에서 종인과 동전 따먹기에 열을 올리던 찬열이 다시 되물었다. 쾅쾅, 그 옆에서 경수는 얌전히 앉아 딸기 우유를 쪽쪽 빨며 둘의 게임을 구경하고있었다. 더워서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 대구에 사는데 혼자 서울로 올라왔거든. 우리 학교 이학년으로 전학왔어. " " 어? 어디서 2학년에 대박인 애 전학왔다고 하던데, 걘가? " " 그건 모르겠고, 암튼 되게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동생인데 되게 귀여워! "
정말로 동생을 귀여워 하는게 눈에 보일 정도로 경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랑하듯 말했다. 그에 가만히 얘기만 듣고 있던 종인이 불쑥 경수를 보며 물었다. " 단둘이서만 같이 살아? " " 응. 세훈이 부모님은 대구에 계시고, 이제 우리 부모님도 그쪽으로 내려가시고. 독립한 기분이랄까? " 종인의 한쪽 눈썹이 전혀 못마땅하다는 듯 살짝 씰룩였다. 이내 두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강한 진동에 의해 교과서 위에 올려진 학이 그려진 500원짜리 동전 두개가 아슬아슬하게 숫자쪽으로 뒤집어지려다 말았다. 옆에 있던 찬열이 박수를 짝, 치며 탄성을 뱉었다. 아, 위험했다…! " 아씨…… " " 아하하, 너껀 이제 내가 따먹는다. " 막판 뒤집기에 실패한 종인의 앞에서 찬열이 깐족대며 실실 웃었다. 동전을 못 따먹어서 인지, 아님 도경수가 제가 알지 못하는 다른 남자와 단둘이서 살게 된다는게 배 아파서인지 종인은 왠지 모르게 짜증이 차올랐다. 이유는 아마도 후자쪽에 가까웠다. 대체 사촌 동생이 무슨 존재길래 도경수와 한집에서 같이 살 수 있는거지? 눈을 떠서 거실로 나오면 막 잠에서 깬 도경수가 보이고, 나란히 마주보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은 화장실을 쓰고, 어쩌면 같은 방을…! 종인은 그 상태로 책상에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였다. 게다가 도경수는 그 사촌 동생이란 녀석을 눈까지 초롱초롱 빛내며 귀엽다고 말했다.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였다. 그 세훈인지 뭐시긴지 그 사촌 동생은 전생에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이 순간 종인은 그가 너무나도 부러워 미칠 지경이였다. " 나 안해. " " 뭐? 야, 내가 다 이긴건데 무슨. " " 아, 몰라. 짜증나. "
한순간에 잔뜩 표정을 찌푸리고 종인이 의자 뒷받침대에 등을 세게 기댔다. 얼떨결에 다 이긴 판이 사라져버린 찬열은 완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경수를 보며 종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얘 왜 이래? 그에 경수가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랫입술이 삐죽 나와있는 종인은 아무래도 어딘가 심통이 난 것처럼 보였다. 뭣 때문인진 잘 모르겠지만. 경수는 그런 모습이 괜히 애처럼 보여 몰래 씩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경수가 손뼉을 짝, 쳤다. " 아, 내일 우리집 올래? 집 정리도 도와주고, 세훈이도 소개시켜줄게. " " 난 갈래! " 찬열이 싱글싱글 웃으며 단번에 재밌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수가 웃으며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엔 종인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아랫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와 있는 걸 보며 경수가 종인에게 먹고있던 딸기우유를 내밀었다. 마셔. 제 쪽으로 빨대가 들이밀여지자 종인은 우유와 경수를 한번 번갈아보았다. 굴러다닐 것만 같은 커다랗고 맑은 눈이 저를 보고있었다. 도경수는 아마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 같다. " 올거지 종인아? 응? "
경수가 손에 들린 딸기우유를 종인의 입 가까이로 들이밀며 물었다. 딱 3초간만 생각한 종인은 바로 우유를 넘겨 받아 빨대를 입에 물었다. 가서 과연 도경수의 사촌 동생이란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 도경수에게 위험하진 않은지, 또 얼마나 귀여운지 모두 확인하고 올 것이다. 종인이 대답했다. 살짝 볼이 붉어진 듯도 싶었다. " …갈게. "
*** 그리하여 제가 지금 501호라 쓰여진 현관문 앞에서 서있는 것이다. 경수가 카톡으로 보내준 주소가 바로 여기, 이 곳이다. 전에 살던 경수의 집보다 걸어와도 될 만큼 이 집이 오히려 훨씬 가까웠다. 그래서 종인은 여기까지 도착하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원래는 찬열과 같이 오기로 했지만 잠시 일이 생겨 조금 뒤늦게 오기로 했다. 현관문 앞에 우뚝 서있던 종인이 슬쩍 고갤 들어 위쪽에 달린 호수를 확인했다. 501호. 오케이. 단단해보이는 베이지색으로 도색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엔 분명 경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종인은 말라가는 입술표면을 혀로 한번 축였다. 그리고 숨을 한번 흡, 들이마심과 동시에 검지손가락 끝으로 현관문 벨을 꾹 눌렀다. 딩동. 벨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내 집 안에서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쿵쿵대는 발걸음 소리가 현관 쪽으로 가까워지고 이제 머지않아 이 앞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제 이 문만 열리면 경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삐리릭, 도어락이 풀리고 그렇게 기대하던 현관문이 제쪽을 향해 열렸다. 그리고 살짝 미소 지을 준비를 하고있던 종인이 표정을 싹 굳혔다. 그 이유는 열린 현관문에서 경수가 아닌 다른 낯선 남자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였다. " 누구세요. " 그것도 급하게 대충 걸쳐입은 것처럼 보이는 트레이닝 바지와 몸의 흰살색을 완연에 드러내며 웃통을 훌렁 까고있는 낯선 남자가. 좀처럼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않았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길래 이 집에서 나오는 것인가. 혹시나 잘못 찾아왔나싶어 다시한번 현관문 앞에 붙은 호수를 확인해보았다. 그 결과 분명 이 집이 틀림없이 맞았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종인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 너 누구야. " " 이 집에서 나온사람이 이 집 주인이지 누구겠어요. "
남자는 불퉁한 말투로 대답했다. 여전히 찌푸린 표정을 풀지않은 채로 종인이 눈으로 그를 쭉 탐색했다. 머리카락 끝이 덜마른 것을보니 샤워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자는 나름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도저히 한국에서 나온 유전자라 보기 힘들정도로 외국인처럼 높이 솟아오른 코가 인상깊었다. 키는 저만큼 큰편이고, 마른 편이지만 넓게 떡 벌어진 어깨와 상체에 적당하게 붙은 잔근육들이 남자답다. 이것이 종인이 몇 초동안 남자를 탐색한 결과였다. 경쟁자인가. " 혹시 도경수 이 안에 있어? " " 있는데 왜요. " 젠장. 설마 저 안에서 도경수와 이 차림으로 돌아다닌건 아니겠지. 종인은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만약 안에서 이 남자가 도경수와 무슨일이라도 있었다간 곧바로 달려들 태세였다. 한편 세훈은 지금 제 앞에서 서있는 사람이 대체 뭔데 저를 노려보고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한건 그저 문을 열어준 것 뿐인데, 다짜고짜 누구냐고 묻더니 정말 한대 칠 기세로 저를 노려본다. 세훈은 어이가 없어 픽, 하고 웃고는 지지않고 종인과 뚱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종인은 생각했다. 확 안으로 쳐들어갈까. 한편 세훈도 나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냥 문 닫아버릴까.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둘에게서 미묘하고 팽팽한 기싸움이 펼쳐졌다. 과장을 좀더 보태자면 서롤 향한 시선들이 한군데서 만나며 불꽃이 파파박 튀는 착각을 일게했다. 그때 집안 화장실에서 문이 열림과 동시에 마저 씻고 나온 경수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걸어나왔다. 옷도 안입고 현관에서 문을 열어놓은 채 서있는 세훈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다가갔다. " 누구 왔어? " " 응. " 왠 미친놈이 왔어, 라고 말하려다 세훈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종인을 발견한 경수가 어느새 세훈의 옆으로 와 반가운 맘에 고개를 쑥 내밀었다. " 어, 종인아! 일찍 왔네. " " 형 아는 사람? " " 응, 형 친구. 그나저나 넌 옷이라도 입고 문이나 열어주던지, 여자였으면 어떡할려구. " " 아니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있는데 갑자기 누가 벨 누르잖아. 그래도 바지는 입었어, 봐. " " 그래, 바지 챙겨입을 정신은 있었나보구나. 잘했다. 아무튼 어서 들어와. 덥지? 여기 에어콘 켜놨어. "
덥지?, 라고 말하며 경수가 종인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경수의 손은 물기가 묻어 시원하고 축축했다. 종인은 제 손목을 잡은 손을 한번 내려다보고 경수를 보았다. 그도 이제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온듯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몸에서 향긋한 바디클렌저와 샴푸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아직 덜말린 머리에서는 물기가 뚝뚝 떨어져 가는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흐르고 수건으로 갓 닦고나온 얼굴은 습기를 머금어 마치 뽀얀 복숭아를 연상케 했다. 헐렁한 티셔츠를 입은 새하얀 금욕적인 모습이 오히려 제속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그러다 문득 지난번 보았던 경수의 벗은 몸이 떠올랐다. 하얗고, 부드러웠던. 멍하니 서있던 종인은 괜히 큼큼거리며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수의 옆에있는 남자는 거의 매일 이 모습을 보게될 것 아닌가! 혹시라도 경수에게 다른 맘을 품을까봐 불안함과 동시에 미친듯이 그가 부러웠다. 지금껏 종인은 제가 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어느순간부터 전형적인 속좁은 남자의 표본이 되어있었다. 이런 행동을 하면 할 수록 제가 쪼잔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종인은 여전히 세훈을 탐탁치 않은 눈으로 흘겨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에어콘을 빵빵하게 틀어논 덕에 쾌적하고 시원했다. 집구조는 거실 하나와 작은 방 2개에 화장실 하나로 둘이 살기 적당한 구조였다. 짐정리가 안된 탓에 아직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박스들 사이로 종인이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그사이 경수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사이다를 꺼내 종이컵에 따라 종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자기도 팔로 무릎을 감싸안은 자세로 앉았다. " 마셔. " " …근데 아까 쟤 누구야? " 거실에는 세훈을 뺀 둘밖에 없었다. 세훈은 옷을 입기 위해 잠시 방에 들어가있기 때문이였다. 그 사이 사이다가 담긴 컵을 입에 문채로 종인이 세훈이 들어간 방쪽을 턱으로 슥 가리켰다. " 아, 놀랐지? 쟤가 내 사촌 동생 세훈이. " " 읍…컥…! " " 괘, 괜찮아? 물 줄까? 어, 어떡하지? " 넘기던 사이다가 뒤로 잘못 넘어가 사래가 들렸다. 가뜩이나 톡톡 쏘는 탄산이 이상한 곳으로 들어가 목구멍 속에서 폭죽처럼 펑펑 터졌다. 얼굴이 시뻘개져 종인이 컥컥대며 기침하자 경수가 어쩔줄 몰라하며 등을 쓸어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이 된 종인은 그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수를 보았다. 쟤가, 네, 사촌동생이라고? 정신없는 와중 다시 한번 물었다. 경수는 당연한걸 뭘 묻냐는 듯한 반응이였다. " 응, 맞는데 왜? " 대답하는 얼굴이 너무도 천진난만해서 거짓말이라는 의심을 할 수도 조차 없었다. 그때 옷을 다입은 세훈이 문을 열고 방에서 나왔다. 핏이 딱 맞는 티셔츠가 청소년의 발육상태라고는 믿기 힘든 넓은 어깨를 부각시켜주었다. 세훈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경수가 웃으며 이리오라며 손짓했다. " 잘왔다, 서로 정식으로 소개 안했지? " " ……. " " 이쪽은 말했다시피 내 사촌동생 오세훈이고, 여기는 내 친구 김종인. 친하게 지내. "
경수만 홀로 하하호호 웃고있는 가운데 세훈과 종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이른바 똥씹은 표정을 몸소 보여주며. 그러다 먼저 세훈이 입을 열었다. 마치 엄마가 강제로 시켜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9살 초등학생의 말투와 비슷했다. " …예…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해봐요. " " 어, 그래 동생. " 싸가지 좀 봐라. 종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제 머릿속의 세훈의 이미지는 키도 작고 여리여리하고 아직 변성기도 오지않은 눈웃음이 귀여운 어린 남자아이같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건…… 제 앞에 서있는 세훈을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 보니 더 커보이는 세훈은 답지 않게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종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얘는 아마 슈퍼가면 담배도 그냥 뚫릴거다. 맘같아선 경수를 붙잡고 따져 묻고 싶었다. 넌 이게 귀엽니? 징그럽도록 다 큰 남자애가 귀여워? 어? 그리고 또, 사실은 쟤보다 네가 더 귀여워,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 종인은 저도 모르게 되도 않는 질투를 하고 있는 중이였다. |
잡담 |
이제 본격 카디 러브라인 행쇼S2 여기까지 오는데도 참 힘들었네요ㅠㅠ 일을 너무 크게 벌려놨어 ㅇ<-<.. 쥬금 그나저나 암호닉을 신청받거나 딱히 표시해드리진 않지만 신청하신 분들은 다 기억하고 있어요! 너무 감사해서ㅜㅜ
저는 언제나 여러분을 사랑ㄴ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