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미친다 진짜.”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넘긴 태일이 침대에 널부러져 있던 핸드폰과 지갑을 손에 쥐고 문고리를 잡았다. 물론 벽에 붙혀져있던 포스트잇을 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술에 취해 어기적거리는 모습을 재현에게 보여줬다고 생각하니 창피함이 머리 끝까지 솟아 포스트잇을 구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귓등이 붉어진 채로 방을 나가자 마주한 건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거실이었다. 재현의 부모님도 안 계신 건지 태일을 마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심 안도하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세수라도 할까 싶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다른 사람 집도 아니고, 재현의 집이니까.
곧장 현관으로 가려는 태일의 걸음을 멈춘 건 거실 큰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었다. 재현의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와는 달리 너무도 익숙한 곳. 얼마 전에도 한참을 기다렸던 여주의 집이 보였다. 정재현도 아직 여기서 사는구나. 태일은 아무렇게나 쥐고있던 포스트잇을 더욱 꾹 쥐었다. 술에 취한 채 여주에게 전화를 했다는 구절이 얼마나 심장을 내려앉게 했는지 모른다.
“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화목록을 확인한 태일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저가 전화를 걸고, 그 전화를 여주가 받은 발신 표시가 정갈하게 찍힌 화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옅게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꾹 쥐었다. 5분도 안되는 짧은 통화로 무슨 말을 했을까. 취해서 마주한 여주한테 무슨 짓을 한걸까. 분명 여주한테 전화를 했는데 왜 재현의 집에 누워있었던 걸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문을 명쾌하게 답해주는 기억은 아무것도 없었다. 답답할 정도로 기억나지 않았다. 태일이 신경질적으로 눈가를 비볐다. 잠시 눈 앞이 흐릿했다. 그러다 다시 초점이 돌아왔을 땐 거실 벽 한 켠에 자리잡은 재현의 사진들이 두 눈을 메웠다.
태일이 천천히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현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찍었던 사진들이 나이 순으로 나열되있었다. 태일은 가만히 그 사진들을 눈에 담았다. 움푹 파이는 보조개가 한결같은 재현에게는 꾸준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그런 재현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있는 여주.
“….”
처음 걸음마를 뗄 때에도, 처음 유치원에 입학 할 때에도, 처음 해외여행을 갔을 때에도, 처음 운동회 달리기에서 일등을 하고 처음 졸업이란 걸 했을 때에도, 여주와 재현은 함께였다. 같이 시간 위를 걸었고, 감정을 공유했고, 추억을 쌓았다. 재현의 모든 사진에는 여주가 있었고, 태일은 한참을 사진만 응시했다. 문득 태일 저가 알았던 것보다 더 깊은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주를 두 번은 뺏기지 않겠다는 재현의 모습이 왜 그토록 견고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어쩌면 여주는 재현의 전부라 좋아한다고 해서 쉽게 고백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닐까. 여주를 잃는 건 그렇게 전부를 잃는 거라 참고 또 참았던게 아닐까. 때문에 재현은 그 전부를 잃을 각오로 나를 찾아온게 아닐까.
그만큼 소중한 여주가 나 때문에 몇 번을 울었으니까.
태일이 시선을 떨궜다. 여주에게 전화를 건 태일을 제 집으로 데려온 것 부터, 재현은 태일에게서 여주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더이상 슬퍼하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도록. 제 전부를 걸고.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오빠가 집 주소를 말하기 전에 완전히 맛이 가버린 탓에 하는 수 없이 우리 집 앞에서 택시를 세웠을 때, 하필 편의점에 가던 정재현을 마주쳤던 어젯밤..(먼산) 있는 인상 없는 인상 다 찌푸린 채 문태일을 둘러업고 자기네 집으로 걸어가더니 지금까지 문태일의 문 자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 나는 자기 전까지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되나 한참을 고민했는데, 어? 정작 정재현 저 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하게 돈까스를 먹고있다는 거다. 젓가락으로 깨작거린 밥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며 정재현을 힐끔 쳐다봤다. 타이밍을 잡자. 태일오빠는..? 하고 물어볼 수 있는 타이밍을 잡자..!
“야.”
“..엉?”
“너 문태일 물어보고 싶어서 죽겠지?”
는 무슨. 제엔장. 묵묵히 밥만 먹던 정재현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덕분에 보기 좋게 힐끔 거리던 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거기다가 내 속을 읽은 것 마냥 팩트폭력까지 날려주시는 정재현에, 나는 씹던 밥을 꿀꺽 넘기며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정재현이 줄곧 쥐고있던 젓가락을 내려 놓는다. 왜 너가 술 취한 문태일을 데리고 너네 집으로 가려고 한 거냐 물을 것 같아 잠시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재현은 그런 내 걱정을 와장창 깨부수듯 내 침대에 눕혔어, 라고 짧게 말을 하더니 물을 마신다.
“아.. 그래?”
“지금쯤이면 뭐, 일어났겠지.”
팔목에 찬 시계를 보며 말을 덧붙힌 정재현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둔다. 어색하게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애써 그런 정재현을 외면하려 했지만 하도 진득히 쳐다봐 어쩔 수 없이 눈을 마주했다. 마주한 정재현의 표정은 정말 담담했다. 나를 추궁하려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괜히 겁을 먹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랬다. 대신 녀석은 아주 오래 나를 쳐다봤다. 그 담담한 얼굴을 하고 계속 나를 보더라. 나는 정재현이 나를 보는대로 똑같이 정재현을 바라봤다.
“야.”
“왜.”
“왜 계속 보는 건데.”
어느 순간 괜히 민망해진 내가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 말에 정재현이 고개를 내리며 작게 웃는다.
“김여주.”
“..”
“이제 내가 앞에 있을게.”
그러다 문득 그런 말을 한다. 밑도 끝도 없는 이상한 말. 내가 미간을 좁혔다. 작게 웃던 정재현이 다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잠시간 눈만 깜빡였다. 뭐야 뜬금없이.. 그러다 아주 작게 중얼거리자, 녀석이 작게 주먹을 쥐는게 시야 끝에 걸렸다.
“그러니까 넌..”
정재현은 곧 다시 입을 열며 제 식판에 있던 돈까스를 내 밥 위에 올려준다. 깨작이지 말고 다 먹으라는 듯이 꾹꾹 눌러서 얹어준다. 나는 정재현이 올려준 돈까스를 쳐다보다 천천히 정재현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젓가락을 내려놓던 정재현과 다시, 또 다시 시선이 맞물린다.
“넌 이제 뒤를 보지말고 앞을 봐.”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엔 아주 짧은 적막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아 침을 꾹 삼켰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정재현은 곧 평상시처럼 내 머리를 잔뜩 헝클이며 먼저 의자를 끌어 일어났다. 내가 무슨 말이냐 묻기도 전에 수업에 늦겠다며 내 입을 막았다.
“이상해..”
때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정재현을 뒤따라 갈 뿐이었다.
야 근데 나 아직 덜 먹었..(울컥)
“왔냐?”
“일찍 왔네?”
“나도 방금 도착했어.”
마지막 강의가 끝난 후, 재현은 곧장 치타폰으로 왔다. 저보다 늦게 강의가 끝나는 여주에게 약속이 있어 먼저 간다는 문자를 남긴 후 만난 사람은 바로 수정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5분 일찍 도착한 수정은 가게로 들어온 재현을 반기며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둘이서 얘기 좀 할 수 있냐고 먼저 연락한 재현에 수정은 직감했더랬다. 얘가 드디어, 하고.
“뭐 먹을래?”
“저녁은 이따가 김여주랑 먹으려고. 그냥 너 먹고 싶은 거 시켜.”
재현의 말에 수정이 바람 빠진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도대체 어떻게 참아왔나 새삼 놀라웠다. 수정은 텐이 제일 잘 하는 요리와 칵테일을 하나 시킨 후 메뉴판을 덮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텐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재현과 수정을 번갈아 쳐다봤지만 미간을 좁히며 손사래를 치는 수정의 모습에 금방 주방으로 도망쳤다. 저는 얘 사랑고민 들어주는 불쌍한 솔로라구요. 수정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키며 애써 본론으로 들어갔다.
“왜 만나자고 했어? 사실 아는데 일단 물어는 봐줄게.”
“알면 물어보지마. 민망하다고.”
“말하는 거 봐라? 나 그냥 가?”
“아 정수정 또 왜 이러실까~”
재현이 하, 하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좁은 테이블에 손을 올리고 몇 번을 쿵쿵 작게 내리치는 동안 계속 고민했다. 이 선택이 정말 맞는 선택일까. 한 번 칠 때마다 심장을 내리치는 것 처럼 재현의 속이 울렁였다. 그러다 그는 곧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수정을 쳐다봤다. 득의양양하게 팔짱을 낀 채 그런 재현을 보고있던 수정이 한 쪽 눈썹을 올렸다. 죽어도 친구는 무슨. 수정이 고등학교 때부터 예상하던 장면이었다.
“나 사실 얼마 전에 태일이 형 만났어.”
“헐 뭐야. 왜 말 안했어!!”
“아 좀 들어봐 계속.”
뜨겁게 고인 침을 꾹 삼킨 재현이 말했다. 그러자 거기까지는 생각 못한 듯 펄쩍 뛰는 수정을 진정시킨 재현은 바싹 마른 입술을 대충 혀로 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오글거리는데..”
“어.”
“형한테 두 번은 안 뺏긴다고 했어.”
재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생각보다 훨씬 대범한 행동을 한 재현의 모습에 수정의 말 문이 막힌 탓이었다. 주문한 음식과 칵테일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는데도 수정은 입만 떡 벌린 채 재현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자신감이 몇 년 전에도 있었으면 아마 재현은 지금쯤 여주와 5년, 아니 6년 째 연애 중이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자 헛웃음이 나오는 수정이었다.
“야 난 꿈에도 몰랐다..너가 그런 말도 할 수 있는지..”
“나도 몰랐어.”
“진작에 좀..! 아오.”
“..”
“야 됐어. 잘했어. 지금이라도 문태일한테 한 방 먹인 거 지인짜 잘했어!”
무조건 참았던 옛날의 정재현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셈이다. 잠시간 재현이 얼마나 예뻐 보이던지, 수정은 앞에 있는 음식을 재현에게 넘기고 싶을 정도였다. 슬슬 목이 탔던 수정은 칵테일을 한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럼 너 이제 김여주 남자친구 하려는 거지? 그 말에 재현이 뒷 목을 쓸어넘기며 조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재현의 모든 결심이 들어가있었다. 주먹도 꾹 쥐었으니까.
“어제 김여주가 태일이 형 부축하면서 택시에서 내리는데 진짜 눈 돌아가더라.”
“이건 또 뭔 소리야. 김여주가 문태일을 왜 부축해?”
“취했더라고.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근데 진짜..”
“..”
“김여주만 아니였음 아마 형 한대 쳤을거야.”
어젯밤을 떠올린 건지, 재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모습에 간간히 움직이던 수정의 포크가 곧 테이블 위로 놓여졌다. 일순 무거워진 분위기에 수정이 가만히 재현을 쳐다봤다. 재현의 목울대가 크게 울린다. 두 눈이 깊다.
“이런 거 보면 나 진짜 친구 못할 것 같아 이제.”
“제발 좀 하지 마라 이제.”
“근데 겁이 나.”
“..”
“친구 안 한다고 하면 김여주가 나 안 만나줄까봐.”
재현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새어나온 숨이 바닥에 가라앉았다. 수정은 앞에 놓인 칵테일을 다시 한 모금 마시며 시선을 돌렸다. 재현은 저 이유 때문에 고등학교 내내 속앓이를 했다. 태일을 보면서 아무 말도 못했고, 여주 옆에서 꾹 참았다. 수정은 그런 재현을 잘 안다. 아직도 그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려는데, 재현이 먼저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나,”
“..”
“진짜 안 뺏겨. 김여주.”
약속이 있어 먼저 간다는 정재현의 문자를 보며 집 쪽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가방에 넣어놓은 숙취음료 박스를 꺼냈다. 요즘 효과가 제일 좋다고 입 소문 난 제품이 여섯개씩 들어있는 박스. 뭘 사가야하나 한참 고민하다가 고른게 이거다. 다른 걸 사는게 더 좋았나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난 이걸 문태일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다. 어젯밤 짧게 쓴 쪽지와 함께. 그럴려면 오빠가 일하는 카페로 가야했다. 번호를 알지만 따로 만날 용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창문을 통해 카페 안을 확인했지만 문태일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얼른 놓고 나오자, 라는 생각으로 카페 문을 열자 경쾌한 종소리가 손님이 온 걸 알렸다. 카운터를 정리하던 아르바이트생이 고개를 들더니 곧 자세를 고쳐 섰다. 괜히 신경이 쓰여 턱을 만지작거리며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네?”
“죄송한데 제가 주문을 하려는게 아니라..”
“..”
“이거 혹시 문태일..씨 한테 전해주실 수 있으세요?”
“네! 저 주세요.”
정갈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아르바이트생이 흔쾌히 박스를 받아줬다. 은근 민망해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재빨리 카페를 나왔다. 그때까지 태일 오빠와는 마주치지 않았다.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걱정되는데, 머리카락도 안 보인다. 만나지 않는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걸음이 쉽게 떼지질 않아 고개를 푹 숙여야했다. 어제 오빠가 울면서 한 말은 새벽까지 나를 잠 못 들게 만들었다. 미워하지 말아달라는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더라. 자기도 나를 위해서 떠난 거면서, 울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모습이 아팠다. 나는 아직 오빠를 보면 마음이 쓰리다. 사실 이름만 들어도 그렇다. 오빠도 그래서 그런걸까?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나를 나를 깨우듯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정재현이었다.
-어디야?
“나 집 근처. 왜?”
-저녁 먹자.
“너 약속 있다며.”
-방금 끝났어. 보쌈 먹으러 갈래?
나는 그제서야 발을 옮겼다. 전화를 받으며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저녁으로 보쌈이 어떠냐는 정재현에게 좋다고 대답하자, 지금 내 쪽으로 오겠다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린다. 그에 나는 거절했다. 내가 가겠다고 했다. 여기로 정재현을 불렀다가 또 문태일을 만날까 걱정되서였다. 치타폰 근처에 있다는 정재현의 말에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까맣게 물든 화면을 짧게 눈에 담다 다시 걸어갔다.
카페와 완전히 멀어지면, 문태일과 영영 끝이라는 생각으로 걸었다.
“형, 아까 이거 어떤 분이 전해달라고 주고 가셨어요.”
“누가요?”
교대 시간에 맞춰 카페에 온 태일에게 정우가 내민 것은 여주가 부탁한 숙취음료였다. 초록색 박스를 얼떨결에 품에 안은 태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 하고 말 끝을 흐린다.
“저번에 저희 카페 오셨던 여자분 있잖아요.”
“여자..요?”
“그때 어, 다른 남자 분이 데리고 나가셨던 분이요.”
“..”
“그 분이 이거 형 드리래요.”
정우의 말에 잠시간 시선을 내린 태일이 다시 문 쪽으로 달려갔다. 손에는 아까 전까지 여주가 꾹 들고있었던 숙취음료를 쥔 채로 카페 밖으로 나선 태일이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박스 속 병끼리 부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태일의 귓전을 때렸다. 나 어제 술 마셨다고 숙취음료 사온 거야 김여주? 태일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잡아야 하는데, 여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
헝클어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떨구던 태일의 시야에 작은 쪽지가 들어왔다. 박스 옆 쪽에 테이프로 붙혀져있던 여주의 쪽지였다. 태일은 빠르게 쪽지를 떼어내 펼쳤다. 꾸깃 주름진 종이 위로 여주의 글씨가 깔끔하게 적혀있었다. 변함 없는 글씨체에 태일의 코끝이 시렸다. 그런 그를 자극하듯 옅게 풍기는 여주의 향은 정말이지 잔인했다.
[ 일어나보니 재현이네라 많이 놀랐지. 미안해 오빠. 우리 집으로 가다가 정재현을 마주쳤거든. 속은 괜찮아? 직접 못 물어보고 이렇게 쪽지 남겨. 나 사실 오빠를 많이 미워했어서 이제와서 오빠를 마음 놓고 만날 수가 없어. 오빠 사고 났던 것도 모르고 너무 많이 욕을 해서 오빠를 보면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해. 그러니까 이제 우리 보지 말자 오빠. 우리 이미 너무 많이 울었잖아.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그땐 웃으면서 인사하고 싶어.
노래는 다시 하는 거지? 포기 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원망만 해서. 난 애초부터 오빠를 미워할 자격이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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