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금옥을 만나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던 태환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길게 줄지어 선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겼다.
제법 많이 내리려는지 점점 굵게 떨어지는 빗물에.. 여기에 더 머물렀다가는 집으로 온전히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빗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갑자기 왠 비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급한 걸음으로 집에 도착한 태환은 싸리문을 열고 들어서 신을 벗으려다 뒤에서 조용히
느껴지는 인기척에 멈춰섰다.
"..누..누구..."
천천히 돌아서려는 자신의 입을 거칠게 막는 손길에 낯선 이의 얼굴을 확인 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가 뒤로 꺽여졌다.
"선월이란 여인은 어디에 있느냐."
귓가에 속삭이듯 물어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태환은 그의 손에 입이 막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선월이라니...
여인을 찾는 그 물음에 태환의 등자락에 식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다시 묻겠다. 선월이란 여인은 어디에 있느냐..!"
꽉 깨문 이 사이로 내뱉는 물음에 태환은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을 막은 손을 떼어내고 살짝 열린 부엌 안으로 자신을 거칠게 밀어넣는 낯선 이의 손길에 태환은 흙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읏...."
바닥에 넘어지며 날카로운 무엇에 베였는지 팔을 감싼 저고리 위로 붉은 피가 스민다.
"이곳에서 그 여인을 보았다는 자가 있다. 순순히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바닥에 쓰러진채로 고개를 들어올린 태환은 검은 복색을 한 낯선 남자의 섬뜩한 눈빛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무슨..말씀인지... 저는 모릅니다. 이곳은 저 혼자 사는..."
끝까지 모른다며 고개를 내젓는 태환의 말과 행동에 어두운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며 빛을 내는 무언가가 목 언저리에 닿아왔다.
시퍼런 날을 세운 환도.
목에 닿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느낌에 태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떠올렸다.
"정녕 목이 달아나고 싶은게냐. 마지막으로 묻겠다. 선월이란 여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낯선 사내가 부엌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가 잠시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는 순간, 태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궁이 위에 올려져 있던 옹기를 하나 집어
그의 얼굴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술에 취한 취객의 술주정임을 알고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사내는 태환이 던진 옹기에 안면을 가격당하고 그대로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비틀거렸다.
"윽...! 네 놈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에 시야가 가려지자 이리저리 환도를 휘두르며 날이 선 공격을 하는 그의 모습에
태환은 다친 팔을 쥐고 부엌 뒷문으로 몸을 이끌었다.
어느새 빗방울이 굵어져 무섭게 쏟아져내리는 빗속으로 몸을 내맡긴 태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갑자기 내리는 비에 인적도 없어 도움을 청할 사람이 보이지 않자 태환은 빗물에 이리저리 미끄러지며 장터 길로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러다가 뒤돌아 본 곳에 자신을 쫒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장터 근처에 세워진 헛간 뒤로 몸을 숨겼다.
"허..헉..."
가뿐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납짝 엎드린 그는 헛간 아래로 기어들어가 몸을 뉘였다.
고인 흙탕물 위로 쉴새없이 튀어오르는 빗물에 태환은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차가운 빗물이 파고드는 상처에 고통이 일었지만 신음 소리 하나 내지 못한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탁탁탁탁-
비에 젖은 흙바닥에 내딛어지는 발소리에 몸을 잔뜩 움츠린 태환은 눈앞으로 검은 복색의 사내가 지나가고 나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더 이곳에 몸을 숨겨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까스로 도망친것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음에... 태환은 안도했다.
저 자는 누구인가.
무슨 연유로 자신을 쫒는단 말인가.
집까지 알아내어 선월을 찾고 있다니... 태환은 두려워졌다.
"김재호..."
갑작스럽게 눈앞에 떠오른 얼굴 하나에 그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린 태환은 앞으로 다가올 보이지 않는 두려운일들에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빗물에 온 몸이 젖어 시퍼렇게 물든 입술을 덜덜 떨던 태환은 이곳을 벗어나야한다는 마음으로 헛간 아래에서
기어나와 몸을 일으켰다.
"읏...!"
베어진 팔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한발짝도 떼지 못하고 주저앉아 몸을 웅크린 그는 빗물에 축축히 젖은 헛간 벽에 기대어
가뿐 숨을 내쉬었다.
"설화에게... 나를 만났다 전하였을까... 내가 한 이야기를..."
여인의 오라비를 만나 그에게 했던 말이 불쑥 떠올라 쑨양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곧, 청으로 떠나야하는 자신을 꼭 도와달라 건넨 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설화의 오라비에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고백이라도 한 것 같아 낯이 뜨거워졌다.
그 이야기는 설화에게 직접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아쉬움에 쩝..하고 입맛을 다신 쑨양은 서책을 펼쳤다 닫았다 수없이 반복을 하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왠지 쉽사리 잠이 들 수 없을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밤에 또 어딜 가시느냐 묻는 하인에게 대답 대신 환하게 웃어보인 쑨양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밖을 나섰다.
한날은 우울한 얼굴로 식음을 전폐하더니 오늘은 세상 걱정 없어 뵈는 밝은 얼굴로 들떠있는 나으리의 모습에
하인은 어리둥절했다.
"아이고... 사랑이 사람을 잡는구먼.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갔다..! 어휴..."
하인은 못말리겠다는 듯이 힘차게 도리질을 하고 팔랑팔랑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멀리 사라지는 나으리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풋..하고 작게 웃어보였다.
"좋~을때지.. 암..그렇고 말고..~"
'설화를 만날수만 있다면 지금 함께 이곳을 구경하고 있을터인데.'
장터 길에 쭉- 늘어선 물건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하던 쑨양은 여인들의 물건을 파는 좌판 앞에 멈춰섰다.
색색이 고운 장신구들이 제 빛을 발하며 반짝이는 모습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찾으시는거라도 있으십니까?"
서글서글 인상 좋아보이는 주인이 쑨양을 향해 살갑게 말을 건네왔다.
그 물음에 웃음으로 답한 그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뭔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말씀하시면 찾아드리겠습니다~ 말씀해보십시오~"
"저... 여인들이 하는 비녀..."
"아! 비녀! 이거 어떠십니까? 요즘 제일 잘나가는 물건입니다요~"
나비가 달린 고운 비녀 하나를 들어보이는 주인에게 쑨양은 고개를 내저었다.
"혹, 꽃으로 장식된 것은 없소?"
"꽃이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손뼉을 치며 좌판 아래로 몸을 낮추는 그의 행동을 따라 쑨양도 시선을 옮겨 몸을 낮췄다.
꼭꼭 숨겨둔듯한 비단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든 비녀 하나.
어디 상하기라도 할까 손바닥에 올려 보여주는 물건에 쑨양의 눈빛이 반짝였다.
금빛을 두른 몸통에 흐드러지게 핀 꽃을 새겨넣고 하얗고 붉은 색의 꽃모양을 장식한 모습에 여인의 물건을 잘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제법 예뻤다.
흐뭇한 표정으로 비녀를 바라보던 쑨양은 그새 설화의 머리에 비녀가 꽂힌 모습을 상상했는지 혼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괜히 손부채질을 해댔다.
"이거 주시오! 내가 사겠소!"
"허...이것은 값이 좀 나가는 물건이라... 실은 양반집 규수가 내일 사러 오겠다 찜해놓고 간 물건입니다요.."
흥정을 하려는 것인지 물건을 맡아놓은 여인이 있다는 말에 쑨양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낮췄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게 얼마가 되든 사야겠으니 내게 파시오."
당장 사겠다는 그에게 값을 부른 주인은 설마...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쑨양은 이미 돈꾸러미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이거면 되겠소?"
부른 값보다 후하게 쳐서 내미는 돈에 주인은 두말않고 비단 주머니에 비녀를 담아 건넸다.
손에 비녀를 받아들고서야 만족한듯 웃어보인 쑨양은 머리 위로 갑자기 떨어져내리는 빗방울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급히 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뒤에서 들려오는 인사를 받을 새도 없이 비를 피해 발걸음을 내딛던 쑨양은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에 어쩔수 없이
길에 세워진 헛간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겼다.
"갑자기 왠 비가.."
차가운 빗물에 젖은 두루마기를 툭툭- 털어낸 쑨양은 손에 들린 비단 주머니를 품속에 고이 넣어두고
거세게 쏟아지는 빗물에 시선을 두었다.
"으...으..."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쑨양은 급히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빗소리때문에 잘못 들은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돌아서려던 그가 다시금 들려온 신음소리에 헛간 뒤편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거기..누구 있습니까?"
누군지 모를 이에게 말을 건네며 헛간 뒤로 다가간 쑨양은 어두운 벽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체에 곧 걸음을 멈추었다.
"으.....으........."
빗물에 흠뻑 젖어 몸을 떨고 있는 사람의 형체.
조금씩 가까워지자 눈에 들어온 낯익은 모습에 쑨양은 화들짝 놀라 그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어찌 이런 일이..."
가까이 다가서고서야 눈에 들어온 팔을 적신 핏물에 쑨양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급격히 떨어진 체온에 몸을 떨던 태환은 흐려진 시야에 들어온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서도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힘없이 그의 팔에 기대어 몸을 일으킨 태환은 자신을 부축해 나서려는 쑨양의 팔을 붙들었다.
"그냥 가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어찌 이 모습을 하고 괜찮다 하십니까. 일단 저희 집으로..."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그의 말에 태환은 힘겹게 고개를 내젓고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겨우 떼어 목소리를 내었다.
"저는 괜찮으니..그냥..."
"쉿..!"
갑작스럽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몸을 낮추는 그의 행동에 태환은 흠칫 놀라 다음 말을 삼켰다.
어두운 건물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의 모습에 쑨양은 몸을 감추고 그자의 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복색과 살기 가득한 얼굴, 그리고 허리에 꿰어 찬 환도.
태환과 관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숨을 죽인채 계속 그를 주시했다.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낯선 자의 모습을 눈으로 쫒다가 자신의 손을 천천히 떼어내는
태환의 손길에 쑨양은 시선을 돌렸다.
"저는 이제 괜찮으니.. 돌아가십시오."
"일단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이리 가시면 설..아니, 선월이 놀랄겁니다."
쑨양의 입에서 나온 이름 하나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 태환은 헛간 벽을 손으로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그를 지나쳐 뒷 길로 발을 내딛던 태환은 자신의 손을 세차게 당기는 손길에 힘없이 몸이 돌려져 그의 가슴에 안겼다.
".........!........."
자신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처량하게 몸을 떠는 그를 붙든 쑨양은 언젠가 느껴보았던 장면 하나가 떠올라 그대로
멈춰섰다.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거친 숨을 내어쉬는 그를 내려다보던 쑨양은 덜덜 떨리는 태환의 어깨를 양손으로 감쌌다가
곧, 손을 떼었다.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지 힘없이 비틀대며 자신에게 의지해오는 그의 모습에 쑨양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거친 숨을 내어쉬는 그의 입김이 나의 가슴에 스며든다...
그날 밤, 목채 건물 앞에서 내품에 안겨 울던 설화의 울음이... 가슴에 스며들었었다.]
".....불편하시다면... 약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그제서야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태환의 답에 쑨양은 자신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거친 숨을 내쉬는 그를 등에 업어 빗속에 발을 내딛었다.
힘없이 축- 처지는 그의 마른 손을 잡아 자신의 어깨위에 올리며 쑨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닐것이다... 이번은...이번만은... 내가 틀린것이다..."
빗소리에 묻힌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잠겨온다.
***
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짠!
오늘은 여유가 되어...폭풍 연재합니다.
연속 두편을 썼더니 머리가..띵~하네요.
쑨양이...뭔가를...느낀것 같지요...?
드디어 터지기 시작하는 걸까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음이야기로 다시 만나요~
늘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감사합니다♡♡♡♡♡
굿밤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