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흐....음....."
온 몸에 닿는 서늘한 기운에 태환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올렸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에 얼굴을 찌푸린 그는 얼굴을 매만지려던 손에서 느껴지는 흙내음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정신으로 돌아온건지 전날 밤 기억을 천천히 떠올리다가 옷이며 손, 발에 잔뜩 묻은 흙먼지에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없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긴장이 한번에 풀려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든 모양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된 것인지...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태환은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두루마기...!"
매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던 태환은 그제서야 잊고 있었던 나으리의 두루마기가 떠올랐는지 어깨를 만졌다가
방 구석구석을 눈으로 훑었다.
어디에다가 떨어뜨리고 온 것인지 보이지 않는 그의 옷에 태환은 이마를 짚어보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어쩌면 좋아..."
머리에 얹혀진 엉망이 된 가채를 내리고 여인의 옷을 모두 벗어던진 태환은 자신의 옷으로 급히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나으리의 두루마기며 급히 도망나오느라 챙기지 못한 비단 보자기까지 찾아야 할 것이 많았다.
대화방으로 가야할지, 두루마기를 찾으러 가야할지 고민하던 그는 일단 금옥을 만나 현 상황을 물어보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인의 집으로 급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금옥 계시오?"
여인의 집앞에 다다라 싸리문 앞에 선 태환은 고개를 쭉- 내밀고 집을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몇번쯤 불렀을까 방문을 빼꼼히 열고 얼굴을 내민 딸아이의 얼굴에 태환은 손짓을 해보였다.
"어머니 어디 가셨니?"
"장터 순이 아주머니댁에 가셨어요."
"주막에? 이 시간에?"
되묻는 태환의 말에 딸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태환은 알았다 답하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싸리문밖으로 나섰다.
날이 추워 한가하던 장터에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피해 주막을 향해 바삐 걷던 태환은 저멀리 보이는 익숙한 여인의 모습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전날 험한 일을 당했음에도 밝아 보이는 얼굴에 다행이다 싶었다가, 저리 멀쩡해도 되는건가 싶어
태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옥!"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언가를 하다가 퍼뜩 고개를 돌린 금옥은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태환의 얼굴에
반갑게 손짓을 해보였다.
"왔소?"
"어찌 된 일이오. 어제 험한 일 당한 사람 맞소..?"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여인의 모습에 태환은 찜찜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럼 울기라도 하오? 차라리 잘 되었지. 매일 힘들게 눈치보며 장사하였는데..차라리 낫소.
이제 태환도 고생 안하고... 그 사내도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진 않을것 아니오."
"참으로 낙천적이시오. 난 도망가느라 진을 뺐는데..."
"어제 나으리와 함께 하지 않았소? 무슨 일 있었소?"
그제서야 피곤해보이는 태환의 안색을 알아챘는지 금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거칠어진 손을 붙들었다.
"아니오..별일은 무슨...아, 혹시 모란실에 두고 온 보자기 못 보았소?"
"보자기? 아니, 보지 못하였는데..."
보지 못했다는 여인의 말에 기운 빠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자 금옥은 중요한 것이냐 다시 물어왔다.
태환은 말할 기운도 없어 고개를 내젓고는 대화방으로 가보겠노라 답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힘없이 터덜터덜 걷는 태환의 등뒤로 금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태환! 해가 떨어지면 가시오. 혹, 모르니... 그리고 초경쯤에 주막으로 다시 나오시오!"
금옥의 외침을 듣는둥 마는둥 손을 흔들어보인 태환은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장터 길을 나섰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하루를 꼬박 서안 앞에 앉아만 있던 쑨양은 짙은 땅거미가 창호지를 물들이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잔뜩 흐려진 어두운 얼굴로 방을 나선 그는 누마루에 앉아 신을 신고 무거운 걸음을 떼어 마당을 가로질러 나갔다.
"흠...허....작년에..왔던 각설이....~"
"......?......."
마당 구석진 곳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는 하인의 모습에 쑨양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죽..지~도 않고...또...왔네..~"
"뭐하시오?"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하인은 두 손을 모으고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갑자기 나오면 놀라신다기에... 노래를 좀 부르면서 나왔는데..."
"허....."
허탈한 웃음과 함께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는 그의 모습에 하인은 에? 하는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냥... 나오던대로 나오시오. 오늘은 놀랄 기운도 없소."
기운 빠진 목소리로 답하는 그의 모습에 하인은 그제서야 나으리의 얼굴이 수척해진것을 알아채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드시질 않으시고...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시는겝니까...?"
걱정스러운 하인의 물음에 쑨양은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고는 그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주었다.
"오늘도 먼저 들어가 쉬시오. 많이 늦진 않으니...걱정은 하지 마시오."
걱정을 놓지 못하고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하인에게 엷은 미소를 지어준 쑨양은 다시 걸음을 옮겨 집밖으로 나섰다.
제발... 단 한번만이라도 마주칠 수 있기를...
쑨양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어두워진 길을 잰걸음으로 내딛었다.
"아씨와 싸우기라도 하셨나...하루 종일 물 한모금을 안 삼키시고... 에휴..~ 사랑도 할 것이 못되는구먼."
멀리 사라져가는 나으리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하인은 쯧쯧..혀를 차고 천천히 대문을 닫았다.
나무 사이사이로 몸을 숨겨가며 대화방에 다다른 태환은 빛 하나 없어 어두컴컴한 목채 건물에 가까이 다가섰다.
인기척과 빛이 없을뿐이지 아무것도 훼손된것이 없어 보이는 멀쩡한 겉모습에 혹시나..하는 작은 기대를 품고
바람에 흔들려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밀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발소리를 죽여 어두운 복도를 따라 모란실로 급히 걸음을 옮긴 그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탁자 위로 시선을 두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탁자 위.
얼굴에 땀범벅을 하고 온 보람이 없어 태환은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포도청에서 가지고 간 것인가..."
다시 나으리를 만난다면 미안해서 무어라 말을 해야할지 걱정이 밀려왔다.
축-쳐진 몸을 잠시 기대려 의자에 앉은 태환은 물끄러미 빈 탁자만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어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는 못 만날수도 있지... 이곳 사람도 아닌데... 신분도 다르고... 이곳도 사라지면....."
마음과는 다른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며 씁쓸한 미소를 지은 태환은 다신 오지 못할 이곳을 기억하기 위해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닿은 맞은편 의자 하나.
그곳에 앉은 수많은 손님들은 기억에 없었지만... 오직 한 사람.
자신을 향해 따스한 미소와 다정한 말을 건네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그가 자주 손을 올려두던 탁자를 손끝으로 매만지던 태환은 곧 그 손을 떼어내고 입술을 꼭 깨문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란실을 빠져나왔다.
긴 복도를 지나 밖으로 향하는 문을 밀어 차가운 흙바닥에 발을 내딛던 그는 자신의 앞에 드리워지는 기다란 그림자 하나에
소스라치게 놀라 그대로 멈춰섰다.
불빛 하나 없는 목채 건물 앞을 서성이던 쑨양은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현실에 실망이 밀려왔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찾아왔다.
여인이 두고 간게 있으니...혹시나 찾으러 오진 않을까...
낮에 다녀갔을까...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어두운 표정으로 목채 건물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는 멀리서 불어오는 시린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설마... 이대로 만나지 못하는건 아니겠지요."
대답없는 물음을 던진 그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두루마기자락이 신경쓰여 천천히 목채 건물 입구로 걸음을 내딛었다.
여인을 기다리는 동안 모란실에 잠시 머무는것이 좋을듯 싶었다.
흔들거리는 문을 당겨 그 안으로 몸을 들이려던 쑨양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형체에 흠칫 놀라 그대로 멈춰섰다.
".........!!!!!!.........."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서야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만보다가 다시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쑨양은 그를 안으로 밀고 건물 안으로 몸을 들였다.
태환은 그임을 알아보고서야 황급히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추고 그의 손길에 밀려 내부로 뒷걸음질 쳐 들어갔다.
"저희 집에 일감을 가지러 오셨던 분...아니십니까?"
"..................."
"이곳엔 어쩐 일로....."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등장에 쑨양은 궁금증이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에 쑨양은 어찌 할 줄 모르고 이리저리 눈만 굴리는 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엔 왜 오셨습니까..?"
".....아...아..저는 누구의 심부름으로..."
심부름이라...
말을 얼버무리며 심히 당황한듯한 남자의 모습에 그를 바라보던 쑨양의 눈빛이 서서히 반짝이기 시작했다.
"혹, 누이의 심부름입니까."
"......?!........"
"누이가 있다 하셨지요. 그 누이가 혹, 이곳에서 일을 하던 여인입니까."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강하게 물어오는 그의 목소리에 태환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곳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자신의 표정이 그나마 감춰져서 다행이라고 태환은 생각했다.
"집에 일거리를 가지러 오셨을때...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맞습니까? 그대의 누이가 이곳에 있던 여인이."
당장이라도 대답하라는듯 끝없이 재촉하는 그의 물음에 태환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어쩔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을 그의 기세에 태환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 보았을때 혹시나...했었다니.
나으리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거라 생각하였는데 그는 태환의 모습에서 설화를 보았던 모양이었다.
어쩔수없이 고개를 끄덕인 태환의 모습에 쑨양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신 만나지 못할까 두려웠는데... 그의 오라버니를 만나게 되다니.
쑨양은 너무 기뻐 이 상황을 믿을수 없었다.
"그 누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곳에서... 선월이라 불렸다 들었습니다...."
태환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반가운 이름 하나에 쑨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태환의 두 손을 맞잡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올리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나으리의 얼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시간에 여기에 있다니... 설화를 찾으러 다닌 모양이었다.
자신을 여인의 오라비라 여기고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 태환은 한없이 죄스러워 다시 고개만 푹- 숙였다.
"여인에서 전해 줄 서찰이 있습니다. 어찌 전하면 되겠습니까."
"...저에게 일을 주셨던 김씨네 비단 가게에 맡기시면... 제가... 전하겠습니다....."
하루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자신의 손을 꼭 붙들고 한없이 반가워하는 나으리의 모습에
태환은 무너지는 가슴을 다잡고..또 다잡았다.
***
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오늘은 비가 내리네요...추운데 비까지...ㅠㅠㅠㅠㅠㅠㅠㅠ
건강 잘 챙기세요! 감기..무섭습니다...내일은 더 추워질거예요...ㅠ
만나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다시 마주쳤어요.
태환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이지만요...ㅎㅎㅎ
16회를 기점으로 두 남자 사이의 꼬여있던 매듭들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얼른 해결되길 바라고..밝혀지길 바라셨던 부분들이 빵빵! 터지지 않을까.....
슬쩍~ 생각해봅니다ㅎ
다음이야기도 열심히 준비해서 다시 돌아올께요~
늘 재밌게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항상 감사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