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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새 - 남혜승 및 박상희

본 글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을 배경으로 나아갑니다.




경성블루스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나왔다. 피가 잔뜩 배어 너덜너덜해진 수의를 입고. 꽤 오랜 시간 곪은 듯한 얼굴 상처는 짐승이 뜯어 먹은 듯 찢어져 있고, 다 빠진 손톱과 힘을 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듯 늘어진 왼쪽 다리는 괴로워 보였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눈은 웃고 있다. 동시에 휘어진 그의 반달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때가 되면 늘 그렇듯 깨닫고 만다. 아, 이거 꿈이구나.

연은 살아 계실 적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늘 미소가 만개한 아버지의 입가에는, 다정한 말들과 따뜻한 부름만이 맴돌았다. 그러니 단박에 알 수밖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던 때에도 따뜻하게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돌아오는 날에는 좋아하는 시집을 한 부 사다 주겠다며 웃어주셨다. 그런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집에 전해지기까지, 나는 바보처럼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니 나는 이 처절한 꿈을 오늘도 꿨구나, 할 수밖에.




나라를 잃었다. 1930년도, 조선은 일본의 지배로 인해 완전한 식민지로 몰락한 상태였다. 수많은 조선인이 제 나라에서 쥐 죽은 듯 살아가고, 그 위에 일본인들이 당당하게 자리를 꿰찼다. 신분과 상관없이 조선인이라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물론, 뻔히 죄지은 입장이 누구인가 확실한 상황에도 정당한 처분을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1910년도에는 길거리에서 일본 순사에게 구타 당하는 조선인을 매일 아침 해를 맞이하는 마냥 볼 수 있었는데, 그런 때에 비하면 검문과 폭력이 잦아든 시대가 되었대도 제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에게 위로가 될 리 만무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삶을 살다 결국 돌아가셨다. 이따금씩, 어쩌면 독립운동이 아버지를 앗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자식의 서글픔이 올라올 때마다 그것을 외면하느라 고생했다.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되니까. 아버지의 죽음을 허무하게 만들면 안 됐다. 눈가 끝에 걸린 깊은 주름과 세월이 녹아들어 피어난 손등의 검버섯들을 떠올릴 때마다, 미어지는 마음 한 켠으로 꿈에라도 마주치길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바라는 그림으로 나와주진 않으셨다. 매번 피가 깊게 배인 수의와 처참한 몰골로 무엇인가 갈망하는 듯, 눈물만 흘려 보내시는 모습이 태반이었다.




“ 아버지가 꿈에 나오셨어 ”



마루 위에 걸터 앉아 신발 끈을 동여매고 있는 태형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런 반응도 없어 말을 듣기나 한 건지 의아하단 생각이 들 때 쯤, 끈을 다 묶은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빤히 쳐다본다. 네가 아버지 꿈 꾸는 게 하루 이틀 일이야?



“ 그래도 이번엔 좀 오랜만에 찾아 오셨네. 아들 꿈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양반이. ”

" 오늘은 좀 달랐어. 뭔가... "



달랐는데, 정말. 방금 막 꿈을 꾼 듯 생생히 기억나는 아버지의 표정, 달싹이던 그 입꼬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짐짓 심각해진 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태형. 그러니까, 네가 그런 꿈 꾸는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며 지나쳐 간 태형이 따라 나서지 않는 나를 뒤돌아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 가자. 늦겠다. "




태형과 나란히 걷는 길은 같은 날 같은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늘 지루한 적막이 일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하기엔 이미 명확한 시점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한 날, 태형의 눈에는 이전과 다른 세상이 닿았다. 슬픔과 분노, 후회와 허망함. 독기 그 어딘가. 그 뒤로 태형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고, 바보처럼 웃는 일 역시 없어졌다. 천진난만하게 장난치고 괴롭히던 태형의 행동들은 사라지고, 학문 서적과 소식지를 손에서 떼지 못하는 모습들로 바뀌었다. 그런 태형의 변화가 내심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기에 할 말은 없었다.


까슬한 재질의 양장 교복은 입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해지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사실 옷을 입고 벗는 데에 대한 어색함보다는, 일본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불쾌하다는 말이 맞았다. 사실상 학당을 다니는 또래 여학우들은 여즉 저고리에 치마를 입을 수 있었지만, 태형과 내가 양장 교복을 입게 된 것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물론 원래 같았으면 양장이라곤 거들떠 볼 수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양장은 일본이 조선에게 서양 문물을 입혀 세뇌시키기 위한 제도에 가까웠으니. 돌아가신 아버지를 따라 자식들 마저 독립을 꿈 꿀까 저지하려던 일본의 얕은 수였다.

더구나 아버지는 의열단 단원들 중에서도 가장 거사에 많이 참여했었으므로, 그가 죽은 뒤에도 조선총독부 사람이 집 앞을 수십 번 오갔다. 옛 생각에 괜히 치맛자락을 탁 털며 태형을 바라보았다. 재킷의 가장 위 단추까지 정갈하게 잠근 태형은 퍽 익숙해 보였다.



" 안 답답해? "

" 뭐가? "

“ 단추 말이야. ”



태형은 그다지, 하며 하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정적이 일었다.



집에서부터 학교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대문을 나서서 돌담으로 가득한 길을 한참 걸으면 코너가 나오고, 그 코너를 꺾으면 하천이 있었다. 그 하천을 따라 쭉 이어나가면 장터가 나오고, 그 장터 한복판에는 전차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드넓은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국민복을 입은 남성들과 몸빼바지를 입은 여성들, 거기에 섞인 부유한 층의 서양식 의복. 한 눈에 봐도 조화롭지 못한 그림이 펼쳐졌다.


지붕을 보려면 목이 꺾일 세라 올려다 보아야 하는 건물들. 그 건물 사이에는 태형과 내가 다니는 문화대학교가 있다. 문화대학교는 방년 스물 안팎의 청년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였다. 대개 국민학교 또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 문화대학교로 올라오게 되어 있었는데, 조선인이 입학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적은 편이었다. 문화대학교는 교문을 기준으로 동쪽 방향과 북쪽 방향으로 건물이 두 채 나뉘어져 있는데, 정면에 자리 잡은 북쪽 건물은 남학교, 동쪽 건물은 여학교로 되어 있다. 태형은 별다른 인사 없이 남학교 건물을 향해 가방을 고쳐 메고 걸어갔다. 그런 태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문화학교 내에서 조선인의 비율은 5분의 2가 채 되지 않았다. 애시당초 조선인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줄 일본도 아니었거니와, 일본인 학우들의 괴롭힘으로 인해 그마저 있던 조선인들도 죄다 학교를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다니고 있는 건 태형의 고집이기도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태형은 답지 않게 학문에 열을 올렸다. 일본인 학우가 태형의 책상을 발로 깠을 때에도, 조선어 교과의 책을 변깃물에 젖게 했을 때에도 태형은 굴하지 않고 공부를 했을 정도니. 


교실 문을 열자 몇몇 학우들이 흘깃 쳐다봤지만, 시선은 금방 흩어졌다. 자리로 가서 앉자마자 교실의 문이 다시 열리며 일본인 교사가 교탁 앞으로 다가섰다. 다소 소음이 일던 교실이 일순간 조용해지고 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한다. 그리고는 목을 가다듬는다.



선서. 하나,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둘,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쭈뼛거리며 일어난 반장은 마치 외운 것처럼, 익숙한 듯 어색한 어투로 문장을 일문 그대로 읽어내렸다. 문단이 끝날 때마다 교실에 앉아있는 모든 학우들이 소리쳐 따라 불렀다.



셋, 우리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해 보이는 일본인 교사.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어지는 서사를 따라 읊다, 시선을 그의 머리 위에 자리 잡은 일장기로 옮겼다. 힘 없이 웃던 아버지의 얼굴을 겹치자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손은 더욱 힘이 들어갔다.




“ 왜 이렇게 늦었어? ”


지민은 태형을 물끄러미 쳐다봤고, 태형은 이야깃거리로 쓸 만한 정도도 아니라는 듯 말끝을 흐리며 가방을 정리했다.



“ 꿈 꿨단 얘기 들어주느라. ”

“ 힘들었겠다. ”

“ 말이라고. 아주 진이 빠졌지. ”

“ 아니, 너 말고. ”



연이가. 지민의 말에 태형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내가 친구를 잘못 뒀지. 궁시렁거리는 태형을 무시한 채 창문 밖의 여학교를 쳐다보던 지민이 입을 뗐다.



“ 딱딱하게 굴지만 말고. 태형이 너도 그 맘 모르는 거 아니잖아. ”

“ 그리움이 밥 먹여 주냐. 모르는 거 아니고, 아니까 이러는 거야. ”



지민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그런 지민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턱을 괴고 무심히 칠판 위에 놓인 액자를 보았다.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一 | 인스티즈


「 勤勉, 誠実, 知性. 근면, 성실, 지성. 」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 얘들아, 너희 그 소문 들었어? 어젯밤 미츠코시 백화점 골목에서 일본인 간부가 셋이나 죽었대. ”

“ 말도 안 돼. 조선인이 아니고? ”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드려던 찰나, 조선인 여학우들의 대화에 귀가 쫑긋 섰다.



“ 그럼 그 범인은 분명 조선인이겠네. ”

“ 왜? ”

“ 일본인이 일본인을 죽일 이유는 없잖아. ”

“ 그렇긴 하지만… 조선인이 무장한 일본인을 무슨 수로? ”

“ 모르지. 그래도 속은 시원하다. 그런 천하의 나쁜 놈들, 죽어 마땅하지. ”



세 명의 조선인 학우가 옹기종기 한 걸상으로 모여 있었는데, 분명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한 문장도 놓치지 않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 남촌과 가까운 곳에 사는 애들이 밤에 총소리를 들었대. "

" 그럼 당분간 종로 근처에는 얼씬도 않아야겠다. 일본놈들이 또 범인 잡는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게 뻔하잖아. "

" 쉿, 조용히 좀 말해. "



흥미롭다 싶은 대화는 끝나는 듯 했고, 화장실을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돌자, 뒷문 쪽에서 같은 반 후치오카가 삐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복도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들었나? 후치오카 아야메. 교내에서 선생님의 예쁨을 잔뜩 받고 있는 일본인 여학우였다. 물론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그녀가 가난한 조선인 여학우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짧은 단발머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불안한 눈빛으로 무리를 쳐다보자, 개의치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짧은 한숨이 나왔다.



화장실의 가장 끝 칸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 얼마 안 돼 바로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세수대 수도꼭지를 돌리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일행이 있는 듯 대화가 시작됐다.



" 멍청한 계집애들. 조선이 누구 덕 보고 지금까지 버틴 줄 아는 거야? 저런 애들은 퇴학 시켜야 되는데. "

" 나는 같은 교실에 있는 것조차 기분 나빠. "

" 조선인들은 하나같이 다 바보인가? 왜, 걔도 있잖아. 맨날 조선인 남자애랑 같이 등하교 하는 애. 쌍둥이랬나? "

" 아~ 그 아버지 없는 애 말하는 거지? "



후치오카의 목소리. 손을 꽉 그러쥐었다. 암만 생각해도 태형과 저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속 안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불쾌하고 울렁거리는 무언가가.



" 그래, 걔. 아비 죽은 충격에 어미는 말을 잃었다던데? 벙어리 됐다더라. "

" 모녀가 쌍으로 그리 됐나?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어야지. ”

“ 아닐걸? 그 반반하게 생긴 남자애랑은 말하는 것 같던데…. 걔네 아빠가 독립운동도 했었대. 우리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조선인은 전부 멍청해서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다더라. 벌 받은 거지. "



칸막이 하나를 앞에 세워 둔 채, 세상이 산산조각 나는 듯 균형이 일그러지고 수렁텅이로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입을 열 수도, 걸음을 뗄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다. 내 아비와 어미가 저들의 입방아에서 난도질을 당하고 있는데,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다. 그저 내가 이 칸 안에 있다는 걸, 이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 저들이 모르게끔 숨기는 수밖에. 치마를 꽉 쥔 손등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언젠가 한번, 태형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다니자. 그러다 엄마 진짜 제 명에 못 살고 돌아가신다. “



“ 그 조선인 남자애는 이름이 뭐랬더라? 태영? 태형? ”

“ 몰라. 그건 왜? ”

“ 조선인 외양치고는 잘생기긴 했던데, 만나자고 해 볼까~ 해서. 나같은 미인이 만나 준다고 하면 껌뻑 죽겠지. ”

“ 얘, 그러다 너한테 푹 빠져서 못 헤어나오면 어째? ”



깔깔깔. 재밌다는 듯 웃는 목소리가 귀가 찢어질 듯 울려왔다. 당장이라도 이 공간을 박차고 나가 후치오카의 머리채를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기어이 참았다. 아버지의 얼굴, 김태형의 목소리, 허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동자. 그 모든 것이 내 발목을 붙잡고 놓지 않았으니.

후치오카와 그녀의 무리가 화장실을 나가고, 조심스럽게 칸막이를 열고 나와 거울 앞에 섰다. 부스스하게 늘어진 머리칼과 흐트러진 교복. 거울 속에 서 있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멍청이. ”




늘 그랬듯 교문 앞에 서서 태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지나가는 여학우들의 비웃음 소리와 함께. 학교 자체에 조선인이 별로 없었기에 신분 하나만으로도 눈에 띄기 쉬웠지만, 태형과 같이 다닌다는 이유로 조선인 남매는 더욱 눈에 띄었다. 그렇게 매일 하굣길에 교문 앞에 서 있는 나를 지나치던 일본인 여학우들이 슬슬 없어질 때 쯤이면, 남학교 입구 문이 열리고 남자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주위는 또 다시 시끌벅적해지고, 바닥만 향하던 고개를 들어 남학교 건물쪽을 쳐다보았다.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한참을 기다리던 그때,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이거 놔! ”

“ 네년이 우리 일본을 모욕했다며? 감히 조선인이 일본인을 모욕해? 천왕폐하의 은혜를 받으며 사는 평민 나부랭이가.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교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애 한 명이 조선인 여자아이의 머리채를 잡아다 모래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재밌는 구경거리 하나 생겼다는 듯 주위에 몰린 학생들은 하나같이 여자아이의 꾀죄죄해진 모습을 비꼬았다. 고개를 돌리며 쳐다보니, 역시나 불길한 예감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까, 그 옆자리에서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풀던 최덕희였다. 


’ 모르지. 그래도 속은 시원하다. 그런 천하의 나쁜 놈들, 죽어 마땅하지. ‘


마구잡이로 덕희를 밟는 남자아이의 옆엔 후치오카가 서 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후치오카의 오라비쯤 되겠구나. 그정도 판단이 섰을 때, 덕선은 옷이 흙더미로 망신창이가 되고 뺨은 붉어져 손을 모아 싹싹 빌고 있었다.



“ 미안해. 내가 미안해. ”

“ 일본말로 해야지. 이 미개한 조선인 같으니라고. ”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으며 사람이 몰려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테이프가 감아지듯 머릿속을 휘감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만하고, 태형을 불량식품 다루듯 제 입으로 놀리는 후치오카. 순간적으로 정신줄을 놓았음이 분명했다. 화장실에서의 수모를 참아낸 것이 무색하게,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 넌 뭐야? ”



무릎을 꿇고 앉은 덕선의 앞에 다가가 섰다. 흙과 먼지로 인해 더러워진 복장과 긁혀 피가 난 한쪽 뺨.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어나. 한 번에 이목이 집중되고, 후치오카의 오빠는 꽤나 삐딱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옆에 선 후치오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제 오라비를 힐끔거렸다.



“ 그만해. 그만 괴롭혀. ”

“ 친구라고 감싸는 거냐?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닐텐데. 맞기 전에 그냥 가지? ”



친구라고 하기엔 친하지 않았고, 화가 났다기엔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방관할 수 없었을 뿐. 두려움과 불안함 사이, 이상한 반항심과 적대심이 고개를 빼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후치오카 남매에 대한 반항심만이 아닌 둣했다. 허리를 숙여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놈은 꿋꿋이 자리를 지켜 서서 비키지 않는 내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 너 안 비키면 후회할텐데. ”



두피가 뜯겨져 나갈 듯한 고통과 함께 몸이 휘청였다. 오른손으로 내 머리채를 쥔 놈은, 마구잡이로 흔들어 놓다가 멈추고 자신의 얼굴 앞에 내 얼굴을 갖다 놓았다.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았다.



“ 건방진 조선인. 기회를 주어도 배움이 없으니, 이걸 어째. ”

“ 네 놈이야말로. ”

“ 뭐야? ”

“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걸 보니, 배움이 없이 자란 것은 네 놈인 듯 해서. ”



입이 떡 벌어진 후치오카와 이마에 핏줄이 선 그의 오라비. 이젠 될대로 돼라, 싶었다. 주변은 이 광경을 방관하는 학우들이 전부였고, 개중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저 멀리 교사들이 지나가는 듯했지만 관심 밖의 일처럼 정말 지나가버리기만 할 뿐. 그때 내 머리카락을 쥔 놈이 왼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 들었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뜨자, 그는 모래바닥에 나뒹굴고 있고 그 옆엔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지민이 서 있었다. 



“ 연아,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



지민의 이마에 송글 맺힌 땀방울들은 그가 꽤나 다급히 달려온 것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놀라 벙쪄 있는데, 지민이 성큼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어설프게 정리해 주며 나를 확인했다. 눈이 마주쳤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민망해 소매로 급하게 닦아냈다.



“ 어이, 네놈! 지금 날 쳤어? ”



분한 목소리로 씩씩대며 일어난 그가 지민을 향해 소리쳤다. 지민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다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 지민이 후치오카와 그의 오라비를 번갈아 쳐다봤다.



“ 후치오카 토오루. ”



낮게 깔린 지민의 음성. 지민의 등이 넓어 보인다.



“ 힘자랑이 하고 싶은 거면 엄한 애 건드리지 말고, 나랑 해. ”

“ 박지민…. ”

“ 건들지 말라는 말이야. 경고했어. ”

“ 망할! 죽고 싶어 환장했어?! 나야말로 경고하는데, 후회할 짓하지 마라. 천한 고아새끼 하나쯤 학교에서 매장시키는 건 파리새끼 한 마리 죽이는 것보다 어려운 일도 아니야. ”

“ 해 봐. ”

“ … ”

“ 학교는 안 다니면 그만이지만, 난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해 봐. ”

“ … ”

“ 네 말대로 잃을 것이 없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 줄게. ”

내 손을 잡은 지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황한 후치오카는 웅성거리는 주변 아이들의 반응을 흘깃 쳐다보곤, 분한 듯 소리를 내지르며 가방을 바닥에 던졌다. 

“ 두고 보자, 고아새끼. ”

씩씩거리며 우리를 지나쳐 간 후치오카. 아야메는 그의 가방을 챙겨 헐레벌떡 뒤를 쫓아 달려나갔다. 지민은 후치오카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내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꽉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곤 당황해 손을 놓으며 말한다.

“ 아, 미안. 나도 모르게…. ”

헛기침을 하는 지민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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