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 : http://www.instiz.net/bbs/list.php?id=writing&no=3262315
"야 너 너무 무리하는거 아냐?"
"오빠한테 이건 무리도 아니다."
"지랄하네."
천문학적으로 올라간 가격들이 주르륵 나열돼있는 메뉴판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야 너가 요즘 그 프로듀싱인가 뭔가로 돈 좀 번다는건 알겠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 진심으로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니 권지용이 콧잔등을 팍 구긴다.
"먹고싶은 거 다 먹으라니까?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가 별거라고... 음. 그럼 난 이거. 따..딸리? 딸랴띨레?"
"딸리아뗄레."
"응, 그거로."
버벅거리는 나를 보고 살풋 웃으며 정정해주고는 직원에게 조곤조곤 주문을 한다. 그 모습이 제법 듬직해 보인다고 문득 생각이 든다.
주문을 다 마치고 직원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이면서 끄덕이는 권지용을 보고 설레여하며 걸어가는 직원이 눈에 들어온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픽 상한다.
"너는 원래 그렇게 웃음을 흘리고 다니냐?"
"엉? 갑자기 뭔 소리야."
"방금 직원한테도 되게 매너남인 것 처럼 웃었잖아."
"매너남 맞거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콜라를 들이켰다. 폭죽처럼 터지는 탄산이 잠시 열올랐던 목을 축여준다. 곧 직원이 파스타 두 접시를 테이블에 사뿐 올린다.
직원은 돌아가면서도 권지용과 눈웃음을 주고받는다. 뭐야? 왜저래?
"왜 똥씹은 표정이야?"
"내 앞에서 수작부리지 마, 권지용. 토 나오니까."
"무슨 수작? 이런거?"
가식적인 눈웃음을 하고서는 이런거? 이런거? 라고 떠벌떠벌대는 권지용.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치고싶지만 지금 권지용이 사주는 파스타를 먹고있으니 참기로 하자.
한 입 입에 넣자마자 감탄이 나오는걸 막을 수 없었다. 오- 역시 비싼건 달라. 여기 피클도 뭔가 더 맛있는 거 같다. 들떠서 혼자 나불대는걸 권지용은 묵묵히 듣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하지? 파스타를 거의 비웠을 쯤 눈치챘다. 평소 내 말을 잘 들어주기도 하지만 오늘따라 더 조용하다. 조용하다기 보단 뭔가 생각에 깊게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오늘 권지용은 뭔가 다르다.
근사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권지용한테 오늘 왜 그러냐고 물어볼까? 근데 물어봤자 별거 아니라고 할테고... 따위의 고민들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있었다.
왜 이렇게 조신하게 구는거야? 어색하게. 차마 입 밖에 나오지 못한 내 속마음. 권지용을 살짝 흘겨보는데 내 시야 앞에 하얀 눈송이 조금씩 내린다.
우와, 눈이다. 크리스마스라고 눈이 오네.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오랜만에 보는 환경에 들떠서 주절주절거리는데, 그 때.
"야,"
"아."
핸드폰 알림이 가볍게 울렸다. 핸드폰을 보니 인스타 알림이다.
"헐 대박."
"왜?"
"선배가 하트 눌러줬다!"
핸드폰 잠금을 풀고 생생하게 막 '하트'를 누른 페이지를 권지용 얼굴에 들이밀었다. 대박이지! 추가로 덧붙이는 감탄사와는 다르게 내 눈에 보이는 권지용 얼굴은 어쩐지 어둡다.
뭐야... 이런건 별거도 아니란거야? 나도 알거든. 근데, 나한텐 이런 소소한거마저 중요하다구. 너 그거 알아? 선배가 저번에-
"야 ㅇㅇㅇ."
"응?"
"너 정말로 승현이 형 좋아해?"
"..내가 지금까지 하는 말 뭐로 들었냐? 계속 좋아한다고 했잖아."
"정말로?"
권지용이 얼굴을 불쑥 내민다. 뭐야? 이건 또 무슨... 내가 대답을 어물쩡거리니 권지용이 흐음, 하고는 다시 입을 뗀다.
"너가 저번에 그랬잖아, 좀 로맨틱하게 고백받고싶다고."
"응."
"근데 솔직히 나 말만 그렇게 하지 연애도 잘 못하고 그런거 알지?"
"응..."
갑자기 이런 주제로 넘어가는건 뭐야.
목에 둘둘 맨 목도리를 인중까지 폭 파뭍었다. 왜인지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 같아서 권지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겠다. 그건 권지용도 마찬가지인듯 시선은 정면만 향한체로 말을 이어간다. 내가 로맨틱하게 고백받고 싶다 했었나? 정확히 언제인진 기억이 나지않지만 그런 말을 했던 적은 있었던거 같다.
"솔직히 고민했어. 내가 좋다고 고백해봤자 너가 승현이 형을 좋아하는 중인데 무슨 소용인가 하고."
"..."
"근데 요즘 하루종일 너 보면서 내린 결론이 있는데 뭔지 알아?"
꿀꺽, 하고 가볍게 삼킨다. 대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닐터. 대답은 일체 없고 곁눈질을 하던 권지용이 중간에 나와 시선이 맞닿는다. 날씨때문인지 분위기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권지용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건 나도 피차일반일 것이다.
"너가 좋아하는건 그 선배가 아니라,"
권지용의 눈이 가로등과 함께 반짝거린다. 내가 내쉰 숨이 목도리 밖으로 입김으로 나온다.
"나야."
"... 그걸 니가 어떻게 아는데?"
"10년동안 봐왔으니까."
어이없음에 피식 웃으며 묻는다. 불분명해보이지만 나름 확신에 찬 목소리이다. 10년. 10년이나 됐구나.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 묵묵히 걸어가기만 한다. 일정한 걸음거리와는 다르게 자꾸만 귀에서 울리는 심장소리는 불규칙해져간다. 권지용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다. 뭐라고 해야하지? 아니, 일단 난 뭐라고 생각하지? 내가 선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자기는 날 얼마나 안다고 저렇게 확신하는거야? 뭐 가끔은 권지용이 나보다 나 자신을 더 아는 때가 많긴 한 건 사실이다. 그렇담 정말로 난 권지용을 좋아하는 건가? 물론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래된 친구이기도 하고 제일 내 친한 친구니까. 하지만 남자로서? 너무 갑작스럽다.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내 자신에게 되뇐다. 정말 남자로서 좋다고 생각해본적 없어? 아니, 권지용 자체가 좋다고 생각해본적 없어?
이번에는 정확히 대답을 못하겠다. 그냥, 모든게 혼란스럽다.
"나도 갑작스럽다는거 아는데,"
"그냥. 그냥 좀 혼란스러운데."
"..."
"근데.. 음, 맞는 거 같아."
아마도... 하고 뒤에 작게 덧붙인다. 민망함에 고개가 자꾸만 숙여진다. 천천히, 또 차근히 말하는 내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내 목소리를 묵묵히 듣던 권지용이 묻는다.
"뭐가?"
"응?"
"뭐가 맞는거 같은데?"
"그야..."
이 자식이... 속으로 생각한다. 권지용을 쳐다보니 이미 날 보고있다. 살짝 움찔하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모르겠는데. 확실하게 말해줘.
아 진짜...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거...?"
권지용을 가볍게 노려보고 어렵게 꺼낸 대답을 듣자마자 권지용은 내내 긴장하던 표정을 풀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마지막에 의문형은 뭔데,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예쁘게도 웃는다. 잠깐, 예쁘게? 내가 이런 오글거리는 생각을 권지용을 보고 생각하다니...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 화끈화끈,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이로써 권지용이 내 애인인건가? 내 첫 애인이 권지용이라니. 생각에 잠겨서 보도블럭만 노려보고있는데, 갑자기 권지용이 우뚝 멈춰섰다. 그를 따라 나도 멈추는데 갑자기 꽉 안아버린다. 깜짝놀라 움찔 놀라지만 나는 그냥 가만히 권지용 품에 있는다.
익숙한 권지용 향수 냄새. 낮은 온도 탓에 코가 시리지만 권지용에게 스며든 향기를 깊숙히 들이마신다.
나 정말 너 좋아해
권지용이 고개를 비틀어 조곤조곤 내 귀에 속삭인다. 이게 미쳤나? 부끄러워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멘탈을 겨우 부여잡고 나는 아무말이나 횡설수설한다.
야 우리가 아무리 사귄다지만 미리 예고 좀 해주고 행동할래? 너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깜짝놀라게하는지 자각을 하란말ㅇ
...볼에 뽀뽀 해도 돼?
.....응
쪽. 조용한 밤거리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울린다.
야 너 얼굴이 빨개. 추워?
조용히 해;;;
부끄러워서 그래? 볼에다가 잠깐 한건데?
... 아무래도 우리 너무 빠른 거 같아. 누가 사귀자마자 뽀뽀를 해?
10년동안 봐왔다가 한거잖아. 그렇담 10년만에 '겨우' 뽀뽀를 한 셈이지
ㅋㅋ말만 잘한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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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메리크리스마스ㅠㅠ
뽀뽀해버려 쪽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