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을 줄 모르는 얼굴의 열기를 느낀 윤기는 먼저 씻어도 되냐고 묻고는 옷을 빌려달라 부탁하고 샤워기를 틀었다. 사실 남준은 아까부터 미칠 것 같은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손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운전하고 오면서도 뭐부터 해야하나,어떻게 해야하나, 그날과 똑같이 해야하나, 괜히 섣부른 판단으로 사이를 망치는건 아닐까, 내가 윤기씨를 달래서 돌려보내야 하나까지 생각하는 찰나, 윤기가 문을 열고 나오는 동시에 훅 따라나온 열기를 휘휘 저어내고 미리 갖다두었던 자신의 옷을 입은 윤기를 보자 생각이 멈췄다. 정말 말 그대로 멈췄다. 뚝,하고 회로가 끊겨 이을 수 없게 된 남준의 텅 빈 눈동자를 눈치챈 윤기가 가까이 다가가 왜 그러냐고 어깨를 흔들자 남준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은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그럼 이,이제,제가,네,어,뭐라도 보고 계세요 리모컨은 저쪽,네, 욕실로 들어와 문을 닫은 남준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르륵 주저앉아 자신을 책망했다. 이 등신같은..말은 왜 더듬는데..아..아아..미치겠다 진짜, 정말 미치기 전에 샤워나 해야지. 하고 일어서서 고개를 들자 뜨거운 수증기로 뿌옇게 변한 세면대 거울에 쓰여있는 '빨리 씻고 나와' 이...이..위험한 남자야!! 를 속으로 수십번 외치며 애국가를 3절까지 부르고 15분만에 샤워를 완료한 남준은 다급하지 않은 척 윤기가 있을 방으로 들어간다. 침묵 가득한 둘의 방 안은 정말 영양가 없는 다큐 프로그램의 나레이션만 흘러나오고 그래도 열흘동안 장난치고 같이 밥 먹으면서 어색함은 많이 사라진줄 알았건만 역시 뻘쭘한 상황은 어쩔 수 없구나 싶은 남준에게 윤기는 말한다. 뭐해? 이리와. 뭐지 되게..뭔가..개가 된 기분이야 생각하면서도 끈을 조여놓은 가운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며 윤기 옆에 털썩 앉자마자 윤기가 물어온다. 그 날 내가 어떻게 했어요? 뭐부터 했는지 알려주세요 라고 하면 제가 순순히 행동으로 옮길 줄 아시네요, 잘 아시네.응 남준은 말했다 "그럼 윤기씨가..아니 그때 나한테 반말했으니까 나도 놓을게 형도 말놔, 그리고 기억해. 그때 그대로 해줄테니까" 말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려던 윤기의 목을 순식간에 끌어당기는 남준. 맥을 못출만큼 야하고 느릿하나, 섬세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생생한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남준을 밀어내려다가 다른 한 손으로 윤기의 허리를 감아 자신쪽으로 끌어당겨 틈을 용납하지 않는 남준에 소름 돋았던 팔의 방향을 바꿔 남준의 목에 둘러 감싸안는 윤기. 올라간 남준의 입꼬리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가 탐탁치 않은 윤기가 얼굴을 떼고 "집중해" 단호한 어조에 입꼬리를 내리고 다시 숨을 나누는 둘.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니고 아프고 설레는 첫경험도 아니지만 하나의 벅참과 둘의 호흡과 하나의 바램이 섞여 뜨거운 소리를 모아낸다. 아득한 머릿속과 두근거리는 심장은 비단 하나의 크기만은 아니였다. 남준과 윤기의 처음 '그날 밤'과 두번째 '밤' 이후로 사흘, 정국과 태형의 이별 이후로는 열흘. 태형은 여전히 정국에게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술에 의존하기를 몇몇일, 담배에 기대볼까 하다가 죽어도 받지 않는 연기 냄새에 구역질을 수십번, 음식도 안먹겠다, 일도 안하겠다,아무도 만나지 않겠다 엄포를 놓고 온종일 방에서 골골대기만 하고있다는 비서의 말에 아버지인 회장은 하나있는 자식 새X가 저 모양 저 꼴이라니.. 심히 애통해한다. 사실 정국은 태형의 반응이 궁금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때 태형에게 몰아붙였던 말과 표정은 모두 연기였다. (이 일로 여태까지 역시 나는 탑배우라며 콧대가 기고만장이다) 뭐..그때 했던 말이 완전히 가짜는 아니긴 했다. 태형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고, 그게 자신을 봐달라는 애정의 몸부림인것도 알았고 그래서 혼쭐을 내어 제 못난 애인이 엉엉 울며 제게 매달리는 꼴이 보고싶기도 하고 이제 한량짓을 그만두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누가 못난이 아니랄까봐 역시나는 역시나. 자존심 강하고 겁 많은 바보는 제 잘못을 후회하고 뉘우치다 못해 자괴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대느라 제 애인의 수를 헤아리지 못했다. 원체 살랑대는 것만 할 줄 알지 눈치는 쪼렙인 태형이 알게된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정국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탓이였다. 정국은 입맛을 다셨다. 결국 또 내가 나서야 하나... 싶다가도 이번만큼은 가만히 있어보자 싶다가도 태형의 생일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날 부르지 않으면 어쩌나..부르지 않아도 가야하나 생각이 늘어갔다. 분명한 것은 태형은 표현의 방식이 옳지 못했고 제 표현 방식은 강도가 높았으며 저는 태형을 알았으나 태형은 저를 알지 못했다. 결국에는 제 발로 들어가 암흑에 빠진 태형을 꺼내기로 마음먹는 정국이다. 한편, 남준은 조금 달라졌다. 전부터 계획했던 라식수술을 받고 혼자선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에 투덜대면서도 주말동안 많이 도움을 준 윤기 덕분에 남준은 더욱 가까워진 사이에 감사했고 윤기는 미묘해진 감정에 혼란스러워 했다. 지금은 좀 더 당황스럽다. 왜? 아니 정말 왜? 이해가 안되네 사람이 라식 좀 했다고 저렇게 변하나? 아니잖아? 왜 갑자기 우리 부서는 물론이고 다른 부서 여자까지 우르르 몰려와선 꺅꺅! 나..남준씨..! 나중에 저희랑 밥먹어요! 번호좀...! 같은 소리나 해대고 있어 장난 똥때리나.. 회사 일이 더럽게 한가한가보지? 허,어이없어 사실 남준의 변화를 요구한건 본인이다 "아니 거, 선반에서 책 꺼낼때 보니까 허리피면 키 크더만 허리 좀 펴고 다녀 임마. 벌써부터 구부정하면 할아버지 되서 얼마나 땅에 붙어 다니려고.." 라던가, "옷이 전부 회색 검은색 밖에 없어? 저승사자도 이것보단 컬러풀 하겠네.. 20대 중반인데 뭘 그렇게 안 꾸며?" 라던가. 심지어 남자향 풀풀 풍기는 향수 추천도 본인이 했으나 자각하지 않으려 하고있다 그렇다, 윤기는 질투중이다. (인정하지 않을뿐) 남준은 기뻤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신경써준다는 자체에 고마웠다. 큰 의미 두지 않으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오랜 짝사랑의 단련으로 많이 무뎌질 수 있었다. 아니, 무뎌진 척 하는것에 능했다. 남준의 눈이 아프지 않고 제대로 떠질때쯤 둘은 같이 백화점에 들러 향수와 옷을 골라주었고 넥타이는 윤기가 사주기까지 했다 신발은 일부러 윤기가 사지 못하게 했다. 신발 선물을 받으면 도망간다는 찝찝한 설 때문이였다. 그런데 윤기의 권유 덕분에 멋있게 차려입고 나타난 오늘, 윤기의 반응을 제일 기대했으나 그는 한마디 했다. "잘했어" 예상보다 너무 미적지근 했다 "무슨 반응이 그래요? 이게 나한테 제일 어울린다면서." 어울리면 어울렸지 왜, 뭐. 괜히 틱틱거렸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ㅡ좀 전에 너한테 꺅꺅대는 여자들 때문에 멋있다고 말하기 싫어졌어ㅡ 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같잖아, 영문을 모르겠는 남준은 탕비실을 나가려는 윤기를 붙잡고 이마를 맞대며 작게 물었다. "왜 그러지.. 어디 아파요?" 아프기는, 비켜 임마- 윤기는 훅 들어오는 남준의 향기가 순간 설레었다 언젠가 맡아본적 있는 달콤함과 닮아서일까. 일거야. 그래야해, 세뇌시켰다. 남준은 당황하며 자신을 밀어내고 후다닥 나가는 윤기의 뒷모습을 보다가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느낌과 함께 뭔가 깨닫기 시작했으나 설마... 의심이 기대로 변했고 기대가 확신으로 변하길 바라며 윤기와 대화할 점심시간이 기다려졌다. 윤기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으니 마이웨이를 활보하며 적당히 교류하고 적당히 끊어내던 예전처럼 남준과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남준은 더더욱 알쏭달쏭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만 기다렸는데 이 남자 대체 어디로 간거야..! 휴, 옷 좀 차려입고 안경을 벗었다기로서니 말 끝에 흩날리는 하트와 저 되도 않는 비음은 또 뭐람. 겉모습 하나에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겉으로만 상대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해서, 원래 내 알바 아니니 몰려드는 여자 상대할 시간에 윤기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건만 이 남자는 대체 어디로 내뺐는지 윤기와 친하다는 직원에게 물어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윤기는 사람들이 잘 오지않는 서류보관함 구석에서 빵을 씹고있었다. 으적으적. 꼭 흙과 고무를 섞은 뭔가를 씹는 기분이다. 결국 반도 먹지 않고 다시 봉지에 넣어 나가려는데 어딘가에 부딪힌듯한..? 아, 죄송합니다. 모퉁이를 돌다 너무 어두운 나머지 저보다 한뼘작은 여자 직원을 보지 못하고 부딪혀버렸다. ㅡ괜찮아요. 나가려고 했는데 너무 어두워서.. 같이 나가죠 저도 나가려던거라,ㅡ 문을 열자 캄캄한곳에 있다가 갑자기 너무 밝은 불빛에 적응하려는 눈을 두어번 깜빡이고 같이 나온 여자를 쳐다보는데 헐, 고등학교 동창이다. 동시에 소리쳤다 야 민윤기!! 야 한성주!! 뭐야 뭐야를 연신 남발하며 모래 날리던 운동장에서 쌓아올린 나름 단단한 우정의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와 이러면 연예린이랑 박호철도 있어야 되는데. 아 그니까 미쳤다 진짜 대박이네, 근데 닌 어떻게 그대로 컸냐ㅋㅋ 추억으로만 남을 줄 알았던 따뜻한 조각을 다시 입에 넣고 굴려보니 너무 달아서 김남준 같은건 생각 안나...지 않네.. 또 하고 있네... 야 민윤기. 뭐하냐 내 말 안듣냐. 아 어 안들었어 미안. X같은 새X 진짜 1도 안 변했네. 니도. 번호나 줘봐 임마. 윤기는 오랜만에 재회한 친한 친구에 조금 기쁘다. 윤기의 '임마'나 '어' '또..' 같은 말버릇도 학교때 뭉쳐다녔던 친구들에게서 옮은 것이었다. 추억에 푹 빠져서 눈앞의 흰 것은 배경이요 검은것은 글씨니라 정신없이 기억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퇴근시간이라며 자신을 끌고 나가는 아까의 성주. 안 그래도 문자 해댔잖아. 뭐가 그렇게 급하냐,며 아직도 기쁜 얼굴을 하고 자신을 재촉하는 성주를 제지하는 윤기. 야 너무 좋으니까 그렇지 하며 정말 오랜시간 떠들고 저녁을 먹은 뒤 술을 마시며 또 다른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고도 못다한 이야기가 많아 앞으로 한동안 매일 보겠다며 지겨워지면 또 한동안은 보지말고 내년에 만나자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대리를 불러 성주를 바래다주는 윤기. 윤기의 집과도 가까운 동네에 사는 성주에 의외라며 제 집은 여기서 15분만 걸어도 나온다며 기뻐한다. 허나 윤기가 크게 간과한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정의 내리지못한 관계 선상의 남자가 제 행방을 찾고 있었다는 것과 하나는 성주의 술버릇이 옆의 아무나 붙잡고 뽀뽀하는 행동이라는 것. 그리고 이 두가지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다. 생각보다 가까우니 걸어가도 되겠다며 택시에서 내린 두 사람 비틀대는 성주를 공동현관까지 모셔놓고 돌아선 윤기의 어깨를 턱 잡아 돌려세우고 양 손으로 볼을 꾸욱 잡고선 뽀뽀를 시전한 성주를 목격하게 된 남준은 크게 혼란스러워 하며 황급히 뒤돌아 발걸음을 빨리한다. 오해의 시작이였다. D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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