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고스러지다. 작가: 젤리탱 ※무단 배포 금지, 공유 금지, 커플링, 내용 수정 금지. 뱃속에서 아기가 한 달 가까이 자라고 있을 무렵 미영은 태연에게 함께 동거해도 되냐고 질문했다. “이사님이랑 같이 살아도 되나요?” 태연과 특별한 사이를 가진 것도, 호감을 확인한 것도 아닌데 미영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예요.” “미영 씨, 뜬금없네요. 그 질문 내게 매우 실례되는 질문 같은데.” “이사님 눈 볼 때마다 항상 느껴요. 저 가지고 싶어 하시는 거.” “......” “제 말이 틀렸나요?” 미영이 태연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태연의 풀어진 셔츠 첫 단추를 끼워주었다. 얼굴을 바로 마주보고 있으니 태연의 귀가 빨개졌다.
“같이 사는 거 허락해 주실 거죠?” 태연이 미영의 얼굴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미영은 빨개진 태연의 귀를 보고 귀여워서 순간 웃음이 나올 뻔 했다. “그만 나가봐요.” 태연은 허락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대답을 회피했다. 미영이 말한 게 다 맞았다. 미영이 궁금하고 가지고 싶었다. 나에게선 절대 보여주지 않은 아름다운 눈웃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었다. 설령 보려고 하는 과정이 나쁘더라도. 미영의 유혹하는 듯한 행동은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태연은 입술을 깨물며 참아야 했다. 미영의 말투도 딱딱하고 몸짓도 딱딱한데 태연은 일전의 일이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미영이 넥타이를 정리해주는 손길이 있고나서야 태연은 허락했다. 미영은 태연이 안 넘어오면 어쩌나하고 조마조마 했던 마음을 거뒀다. 미영은 감사하단 말을 끝으로 이사실을 나갔다. 미영이 이사실을 나가고 태연은 한 번 코를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미영에게서 나야 할 페로몬 향이 나질 않았다. 히트 싸이클 때는 억제제를 먹었다고 해도 쉽게 지워질 향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드는 단어 '임신'. 미영이 임신 했을리 없다고 태연은 확신했다. 본인 문제는 잘 해결하는 사람이었기에 피임은 확실히 잘 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도 드는 찝찝한 기분은 지워지질 않았다. 미영은 데스크에 앉아서도 업무를 잘하지 못했다. 틈만 나면 식은땀을 흘리고 가방엔 먹을 걸 잔뜩 들고 다녔다. 불규칙적으로 위액만 나오는 입덧을 하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 와중에 억제제는 꼭 챙겨 먹었다. 데스크에 앉아서 업무를 보다가 순규에게 대뜸 부탁했다. "순규 씨….나 귤 먹고 싶어요." 순규는 당황해 하면서 미영에게 대답했다. "미영 씨, 여름인데 귤을 어디서 구해요. 구해도 맛없어요. 제철이 아니잖아요." 미영은 울상을 짓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밖으로 나가 마트로 향했다. 순규도 귤을 찾고서는 '미영 씨! 귤 여기 있어요.' 라고 말했지만 미영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네요." "에?" 미영은 아이스크림 코너로 달려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쿠앤크 아이스크림을 사고 회사로 돌아갔다. 맛있게 먹는 미영을 보며 순규는 미영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귤을 먹고 싶어 하다가 대뜸 아이스크림을 찾다니. 겉으로 보기에도 건강했었던 미영은 얼굴이 수척해졌고 힘이 없어 보였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데스크로 복귀한 둘은 태연과 마주쳤다. 순규는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미영은 불편한 기색을 비추며 인사했다. 태연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든 미영의 모습을 보고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미영은 전과 다르게 낯빛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연은 헛기침을 내며 입은 순규에게 눈은 미영에게 물었다. "둘이 어디 갔다 와요?" "미영 씨가 점심시간 전부터 귤을 먹고 싶다 해서 마트 갔다 오는 길이었어요." "잘 먹었어요?" "아니요. 미영 씨가 아이스크림이 당긴다고 그래서 아이스크림만 먹고 왔어요." 태연은 미영에게 눈을 맞춰 왔지만 미영은 끈질기게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자꾸만 눈에 밟히는 미영이었지만 태연은 항상 한 발걸음 뒤로 물러나 줘야 했다. 미영이 먼저 인사를 하고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살폈다. 순규도 미영을 따라 앉았다. 태연도 아무렇지 않게 이사실로 들어갔다. 미영은 데스크에 앉자마자 잤다. 순규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해주며 미영을 배려했다. -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순규는 미영을 조심스럽게 깨웠다. 오늘은 태연이 딱히 부르지도 않아서 미영은 푹 잘 수 있었다. 미영은 손거울로 얼굴을 살피고 잠 잔 흔적을 지웠다. 태연은 사무실 책상을 다 정리하고 챙길 물건들을 챙겨 이사실을 나섰다. 태연은 데스크에 앉아 있는 미영에게 눈짓을 보내고 순규에게 말했다. "순규 씨, 뒷정리 부탁해요. 이따 조심히 들어오고요." 순규는 태연에게 인사를 하고 미영과도 작별 인사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미영은 차에 들어서자마자 곤히 잠들었다. 태연은 옆에서 자고 있는 미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살이 더 빠진 미영의 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오똑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콧대는 미영의 이목구비를 빛나게 했다. 탐스러운 입술은 당장이라도 키스를 부를 입술이었다. 태연은 속으로 참아 내고 제 자리를 찾았다. 태연과 미영을 태운 차는 조용한 소리를 내며 태연의 집으로 핸들을 돌렸다. 서울 중심가에 위치해 우뚝 솟아 있는 타워 펠리스는 사람은 물론이고 주변 건물들마저도 위축하게 했다. 경비마저 삼엄해 보였다. 기사는 태연의 집 앞으로 차를 정지시켰다. 태연은 미영을 흔들어 깨웠다. 미영은 뒤척거리다가 도착했음을 알고 차에서 내렸다. 한 눈에 봐도 좋아 보이는 시설들에 미영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태연은 자연스레 미영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태연은 23층을 눌렀다. 23층으로 올라가는 시간은 길게만 느껴졌다. 미영은 핸드폰을 구경하며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무마 하려했다. 띵 하고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태연과 미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태연이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19890309예요." "네?" "계속 있는 거 아닌가요? 그게 아니더라도 당분간은 있을 텐데 알아두어야죠." "혹시 생년월일이세요?" "네." 미영은 숫자를 다시 되새겼다. 1989년이면 본인과 동갑이다. 태연이 주방에 들어가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사이에 미영은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가야… 저 사람이 네 아빠야. 잊지 말아야 해." 태연에게 말했었던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 보라고 그래서 동거하자고 한 건 거짓 반 진심 반이었다.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였지 다른 깊은 의도는 없었다. 태연은 먹을거리를 들고 미영에게 주었다. 아까만 해도 왕성했던 식욕은 뚝 떨어져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미영이었다. 5개월이면 나올 아기였다.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출산할 때쯤 되면 사직서 내고 본가로 들어가 살면 되는 일이었다. "먹어요." "죄송한데 입맛이 없어서…" 태연은 도로 주방에 갖다 놓았다. 미영은 다시 찾아 온 입덧에 급하게 입을 가리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문을 잠군 후 변기 덮개를 열었다. 태연이 문 밖에서 문을 쾅쾅 두드리며 '괜찮아요?'라고 물었지만 미영은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변기에 멀건 위액을 토해 냈다. 요새는 음식도 잘 받아들이지도 않아서 토하고 싶어도 나오는 거라곤 멀건 위액뿐이었다. 미영은 변기 레버를 내리고 수돗물로 입안을 말끔히 헹궈 냈다. 잠금을 풀고 문을 여니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한 태연이 서 있었다. “어디 아파요? 병원은 다녀온 거예요?” “별 거 아니에요. 몸살 감기 걸렸나 봐요.” 걱정하는데도 차갑게 대꾸하는 미영의 태도에 태연은 참는 게 한계였는지 미영의 손목을 잡아 확 꺾었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미영은 태연을 째려봤다. 태연의 눈빛에 돋아 난 살기에 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눈을 아래로 깔았다. “최근 들어 아프냐고 물어도 괜찮다, 괜찮다.” “......” “내 비서 되는 사람이 자신 몸 하나 관리 못해요? 지난주 내내 모든 게 엉망이었잖아.” “태연 씨, 그게 아니라...” “이럴 거면 때려쳐요!” 태연은 진심으로 화 나 보였다. 오래 참다가 터진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뭐요? 변명이라도 있어요?” 미영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변명이 다름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라고 한다면 지금 화 내고 있는 것보다 덜 화를 낼까? “내가 미영 씨 오메가인 거 숨겨준 것도 모자라서 전과 똑같이 대해주니까 만만해보여요? 씨발, 사회에서 매장 시켜 버려야 했는데.” 태연은 빠르게 미영을 벽으로 밀어 붙였다. 등에 밀려오는 통증에 미영은 입술 새로 터질 뻔한 신음 소리를 참아 냈다. 태연이 억지로 키스를 하려고 하자 미영은 발버둥을 쳤다. 최대한 발버둥을 쳤어도 태연의 힘이 워낙 셌기에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나 듯 순규가 집으로 들어왔다. “저 왔어요.” 미영은 순규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그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셋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히고 그런 태연의 허점을 파고들어 미영은 벗어났다. 태연은 가볍게 웃어 주고 잔뜩 성 난 얼굴로 순규와 미영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순규 씨는 신경 안 써도 돼요.” “아… 아가씨?” 미영은 태연이 다가올수록 순규 뒤에 바짝 숨었다. “황미영!!” 태연은 순규의 발목에 매달려 있는 미영을 억지로 떼어내고 안아 들었다. 순규는 종종걸음으로 그 둘을 따라갔지만 태연은 방문을 열고 쾅 닫아 잠가 버렸다. 순규는 노크를 했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방 안에서는 미영 위로 올라탄 태연을 미영이 힘껏 때리고 있었다. 처음에 담담했던 태연이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지 손찌검을 했다. 손찌검은 미영이 반항하는 것과 비례했다. 심한 손찌검에 미영의 정신이 비몽사몽해지자 태연은 침대 위에 놓여있던 이어폰 끈으로 미영의 두 손을 결박하고 옷을 벗겼다. 허벅지를 만지는 손길에 미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 하지 마요!” “왜? 네 몸은 벌써 좋다고 베베 꼬고 있는데 뭘 하지 말라는 거야.” “제발... 하지 마요.” “말과 행동이 서로 맞아야지. 다르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생색 내지 말고 가만해 있어.” “그러지 마요! 하지 마!!” “닥쳐!” 격렬하게 반항했지만 태연에게 통하지 않았다. 태연의 행동을 멈추게 하려고 내 배 안에 당신의 아기가 있다고 말 하려다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참았다. 거친 태연의 몸짓에 쓴 눈물을 삼키고 아기한테 말하고 또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 배는 초기 때와 달리 점차 많이 나왔고 미영은 숨기기 위해 복대를 차고 다녔다. 먹을 걸 먹어도 토 해내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미영은 먹었다. 배를 제외하곤 미영에게 살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스트레스는 받을 대로 받고 짜증은 늘어났다. 임신이 처음이었던 미영은 아기를 위해 뭘 해줘야 하는지도 몰랐다. 검색할 시간이 겨우 생기면 어김없이 순규나 태연이 끼어들곤 했다. 그래도 미영은 산부인과를 정기적으로 찾으며 정보들을 얻었다. 온 전신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어도 일을 계속했다. 다크써클은 눈 밑을 넘어 축 처졌다. 식은땀도 자주 나고 오한이 들기도 했다. 몸은 항시 따뜻하게 유지 시켜 줘야 했는데 미영의 몸은 차가웠다. 쉬는 시간의 짬이 나자 미영은 데스크에 엎드려 가파른 숨을 내뱉었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눈앞은 사물 분간도 되질 않았다. 눈이 깜깜해지면서 미영은 쓰러졌다. 순규는 바닥으로 쓰러진 미영을 흔들어 깨웠다. 흔들어도 미영이 깨어나질 않자 순규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일단 119에 신고했다. 벽에 미영을 기대어 놓고 이사실로 들어가 태연에게 알렸다. 태연은 놀라서 눈을 감았다 뜰 수가 없었다. 태연은 급하게 미영에게로 가서 깨우려고 했지만 역시 깨지 않았다. 10분도 안돼서 구급 대원들이 도착했고 미영을 들것에 실었다. 순규와 태연은 뒤를 따라서 구급차에 동승했다. 순규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초조했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고 손은 가만히 두질 않았다. 태연은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했다. 병원으로 가는 5분이라는 짧은 시간이 길기만 했다. 구급차는 응급실에 도착했고 구급 대원들은 빠르게 미영을 응급실 안으로 호송했다. 미영은 이마에 땀을 송골송골 맺힌 것으로 힘들어 함을 표했다. 응급실 안으로 들어간 미영은 의사들과 간호사들한테 둘러싸였다. 긴박한 듯 분주히 돌아다녔다. 태연은 먼발치서 서성거리며 왔다 갔다 거렸다. 의사가 태연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보호자 분 되세요?” 태연은 아니요 라고 답하려다가 맞다고 답했다. 의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뒷말을 이었다. “상태가 좋은 것 같지는 않아서 정밀 검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는 급한 모양인지 자리를 떴다. 태연은 정밀 검사라는 말에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냥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정밀 검사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가끔씩 미영을 실은 침대가 복도를 돌아다녔다. 태연은 손목시계를 확인 하며 몇 분이 지났나를 확인했다. 5분이 지난 것 같아서 시계를 보면 2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순규도 같이 걱정하며 40분을 기다리니 의사는 태연과 순규를 본인의 진료실로 불렀다. 둘은 반색하며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차트를 여러 번 뒤적이는 의사는 썩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뭘 말해야 할지 몰라 하는 것 같았다. 태연은 끈기 있게 기다렸고 의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영양 부족 상태예요. 보호자가 그것도 모르셨어요?” “……” “산모가 스트레스도 받고 영양을 골고루 먹질 못한 모양입니다.” 태연은 방금 잘못 들었나 싶어서 산모라고요? 라고 반문했다. 순규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궁에 있는 아기가 건강하질 못해요. 산모에겐 영양 균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보호자 분은 뭐하셨나요?” “……” “일단 영양제 맞았으니까 퇴원하는 즉시 보살펴 주세요.” 태연은 의사가 한 말이 잔상에 남았다.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미영을 보며 무슨 일인가 싶기도 하고 기가 찼다. 아기가 한 달 됐다는 것도 이제 출산하는 게 4개월 남았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미영은 오랜만에 자는 건지 정말 깊게 잤다. 순규는 병원 밖으로 나가 산모에게 필요한 갖가지 음식을 사러 나갔다. 미영 옷에 가려져 있던 복대를 보고 웃음이 났다. 미영이 조금 뒤척이다가 눈을 찡그리면서 잠에서 깼다. 흐릿해진 시야는 점점 또렷해져 갔고 눈앞에 보이는 태연의 얼굴에 미영은 태연을 바라봤다. 태연도 미영과 눈이 마주쳤고 무표정으로 보기만 했다. 여기가 어디지 라는 생각도 잠시 병원이라는 걸 눈치 챘다. 미영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아기가 있을게 들킨 건가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손을 배에 가져다 대었다. 태연은 헛웃음을 지으며 미영의 손을 차갑게 노려봤다. 미영은 제어되지 않는 눈을 태연에게로 돌렸다. 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미영의 동공은 위태위태하게 흔들렸다. 태연의 깊은 눈 속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잠식 되어 있었다. 태연은 보조의자에서 일어나 미영을 하찮은 시선으로 봤다. “아기 있는 거 왜 숨겼어?” 미영은 흔들리는 눈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태연은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한 달 됐다는데, 설마... 나 아니지? 그렇지?” “......” “씨발! 말 좀 해 봐! 사람 미치게 만들지 말고.” 태연은 한 달 전의 미영과의 관계를 떠올렸다. 미영의 아기가 한 달이란다. 시점이 너무 똑같다. 불안해서 미영에게 윽박질렀다. 미영의 손등에 차가운 눈물이 닿았다.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목울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숨기려 했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네요. 이 아기, 태연 씨 아기 맞아요." 태연의 눈빛은 차가워졌고 이질적으로 변했다. 태연이 부들부들 떨었다. 미영을 노골적으로 노려봤다. “피임 하나 못해? 약 안 들고 다녀?!!” “히트 싸이클이었는데 뭘 해요. 사후 피임약? 그거면 히트 싸이클 때 아기 생기는 거 완전히 막아 줄 것 같아요?” 이번에는 미영의 말이 싸늘하게 변했다. “당신이 처음이어서 나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래도 이왕 생긴 귀한 생명 키우려고 내가 이 유난을 떨었다고! 당신이 뭘 알아.” “……” “숨기지 않고 말했으면 허- 나 도와주려 그랬어요? 내 탓도 있으니 책임 져 주겠다고 말해 주려고?” “……” “아니잖아. 나 같은 사람 버리면 그만인데 그거나 이거나 뭐가 달라.” 미영이 태연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미영의 가시 박힌 말에 태연은 얼떨떨했다. 그래도 태연의 눈빛은 오메가가 알파에게 어딜 대들려고 하냐는 눈빛이었다.
“내가 그래서 병원 가겠냐고 물어봤잖아. 낙태 몰라? 낙태가 왜 있는 건...!” 미영이 태연의 뺨을 때렸다. 미영은 태연의 말을 듣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태연은 맞은 제 뺨을 손으로 만졌다. 기가 찼다. 손을 허리에 놓고 낮은 헛웃음을 냈다. 태연이 미영을 때리려 손을 들었다. 미영은 기죽지 않고 태연의 눈빛을 맞받아쳤다. “지금 그게 사람이 할 소리예요?” “이게 진짜!” “김태연 씨가 생각하는 생명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요.” “......” “적어도 사람답게는 살아야죠.” 태연은 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뒤돌아서 응급실을 나갔다. 단호하게 돌아서는 태연의 모습에 미영은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 병원에서 미영이 퇴원하고 나서 미영과 태연의 동거생활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태연은 미영이 집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사람을 붙여 놨다. 자신은 집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순규를 시켰다. 순규는 잠시 집을 들를 때마다 임산부 치고 야위어 가는 미영을 안쓰럽게 보고 나갔다. 미영은 미영 나름대로 아기를 챙기려고 집 안에 있는 재료를 최대한 활용해 음식을 해 만들었다. 재료가 다 떨어지면 라면이라도 끓여 삼시 세끼를 챙겼다. 많고 많은 방 중에 전경이 탁 트인 방을 골라 혼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를 준비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적금이었지만 부모님 도움도 받아서 아기 용품들을 잔뜩 들여놨다. 순규는 퇴근하면 태연 몰래 집에 들러서 미영에게 음식 재료들을 사다 주곤 했다. 미영은 그런 순규가 매번 고마웠다. 이 일상들도 쳇바퀴처럼 돌고 또 돌았다. 미영이 먹고 싶은 음식이 생겨 순규에게 조용히 전화를 걸으면 순규는 미영의 아기가 제 아기라도 되는 마냥 잘 챙겨 줬다. 그리고 간간히 태연의 소식도 들려줬다. 미영은 처음에 태연이 아기를 양육하는 데에 필요 없다고 느꼈지만 날이 갈수록 태연이 보고 싶었고 필요하다 생각했다. 태연을 원망해야 하는데 언젠가부터 태연을 원망이 아닌 보고 싶은 사람으로 인식했다. 싫어하던 감정은 좋아하는 감정으로 발전했다. 태연 집에 놓인 태연 사진액자를 들어 뱃속 아기에게 매일매일 '이 사람이 네 아빠야.' 라고 일러줬다. 순규의 도움과 미영의 부단한 노력으로 아기는 건강하게 자랐고 미영도 살이 찌기 시작했다. 태연이 집을 비운지 열흘 째 되는 날 태연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몸으로 들어왔다. 미영은 반가운 마음도 잠시 태연을 부축했다. 태연을 방까지 뉘여 놓고 새근새근 잠자는 태연을 뚫어져라 봤다. 미영은 손을 뻗어 얼굴을 조심스레 만졌다. 눈을 찡긋거리는 태연의 행동에 미영은 놀라 손을 떼고 만지고 떼기를 반복했다. 깊게 잠든 태연의 얼굴은 아기 같았다. 미영은 태연의 손을 잡아 제 배를 만지게 했다. 태동이 느껴지자 미영이 놀라 태연의 손을 놓쳤다. 아기가 반응했다. 미영은 그만두고 태연이 깰까 봐 방을 나갔다. 그리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넓은 창으로 보이는 밤하늘에 미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찬란히 빛나는 별들은 미영의 기분을 좋게 했다. 자수 하듯이 하늘에 박혀 있는 별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가락으로 별자리를 찾아 그렸다. 평소 천체 별자리에 관심이 있던 미영이라서 잠이 안 오는 날, 별이 잘 보이는 밤에 이 별자리 저 별자리 찾길 좋아했다. 새벽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어서 여름철 별자리인 견우별을 그렸다. 은하수 건너편에 있는 직녀별도 그렸다. 견우와 직녀의 설화를 생각하자 눈물이 왈칵 났다. 무릎을 끌어안고 미영은 소리 없이 울었다. * 아침이 되자 깜빡 졸던 미영이 몸을 일으켜 태연 방으로 향했다. 방문은 열려 있었고 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속이 많이 쓰릴 텐데.' 라고 태연을 걱정하고는 순규가 오기를 기다렸다. 순규는 오늘 오후에 시간이 빈다고 미영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과 각종 분식을 사오기로 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따분한 시간을 기다렸다. 괜히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청소도 했다. 태연 방은 침대 아니면 잘 정리하지 않았다. 다른 곳을 건드리는 건 실례라고 생각해서였다. 청소 시간은 운동하는 시간도 됐다. 이 집은 다 좋았는데 환기 할 창문이 없어서 찝찝했다. 그래서 미영은 공기청정기를 하루 종일 켜 두었다. 순규가 올 때까지 TV도 보고, 책도 읽었다. 좋은 명언이나 글귀는 늘 아기에게 말해 주었다. 집 안에서 빈둥빈둥 대다 보니 시간은 느리게도 오후 1시 반을 가리켰다. 미영이 과일을 깎아 먹을 즈음에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밝은 순규의 목소리도 들렸다. 미영은 한걸음에 달려가 순규를 반겼다. 순규 손에 바리바리 들려 있는 간식들에 미영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식탁으로 간 둘은 간식을 나눠 먹었다. “오늘 웬일로 시간이 비워진 거예요?” “모르겠어요. 이사님이 일찍 퇴근하라고 하셨어요.” 미영에게는 순규가 오는 하루하루마다 기분이 좋았고 전과 다르게 웃음도 많이 늘었다. 순규는 그런 미영이 만행(萬幸)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하 듯이 좋은 일에는 반드시 나쁜 일이 있는 법이다. 최근에 들어오는 사람들 보고로는 순규가 자주 집에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겨우 시간을 조정해 집으로 온 태연의 신발장에 순규의 신발이 있는 걸 보고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도어락 열리는 소리에 미영은 순규에게 자신이 나가 본다 하고 현관 쪽으로 갔는데 태연과 딱 눈이 마주쳤다. 태연은 미영을 한 번 보고 지나쳤다. 식탁에 앉아 있는 순규를 보고 태연은 화를 냈다. 미영이 달려와 태연을 말렸다. 태연은 말리는 손길을 뿌리쳤다. “네가 뭔데 황미영을 챙겨?” “이사님, 미영 씨 임산부잖아요. 임산부면 당연히 챙겨야 하는 거고요.” “내 아이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저 오메가년이 다른 알파들한테 다리 벌리고 다녀서 얻은 아이이면 어쩔 거야?” “혹여 이사님 아이가 아니더라도 챙겨야죠. 어쨌든 귀한 생명인데.” 그놈의 생명, 생명! 태연은 화가 나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던졌다. 미영은 함부로 말하는 태연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마른세수를 한 태연이 차갑게 말했다. “확실하게 말하는데 내 애 아니야. 그리고 누구 아이든지 무슨 상관이야. 지 알아서 잘하겠지.” “......” “한 번만 더 이딴 식으로 나오면 너고 네 애고 없애버릴 거야.” 미영은 체념한 듯 순규를 달랬다. 순규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집을 나갔다. 미영은 아기 방으로 가서 문을 잠갔다. 아기 침대를 쓸어 보기도 하고 고개를 기대기도 했다. 태연은 한숨을 쉬었다. 미영이 사라진 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실수로 아기가 생긴 것도 인생이 허무해진 것도 너무나 싫었다.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