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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윤 전체글ll조회 17032l


[ 가계부 ]


나는 건축과로 유명한 런던의 B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서울시 공공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였으면 좋겠지만) 밑에서 일하고 있는 인턴사원이다. 나의 계획은 석사를 하기 전 한국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회사의 정직원은 마음에도 없었고 유명한 건축가가 운영하는 아뜰리에에서 인턴 경험을 쌓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서초구 서래마을에 위치한 서울시 공공 건축가로 활동하는 건축가 밑에서 일하고 있기에 모든 것이 내 계획 대로 되고 있었다. 내 삶의 방향키를 내가 쥐고 있는 그 자부심 하나는 대단했다.


또 다른 나의 자부심은 독립성이다. 우리 가족은 특히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다행히 운 좋게 아버지가 다니시는 회사에서 유학을 해도 학자금 지원이 나온다고 하여 런던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화려한 생활은 아니었다. 같은 방에 커튼을 치고 다른 유학생과 방을 공유하며 살았고 과제는 많았지만 틈틈이 아시아계열 식당에서 주방 보조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어 썼다. 하지만 그걸로는 물가 감당이 어려워 아버지는 대출을 받아 내게 송금을 해주셨고 나는 그 돈을 학자금 대출이라고 불렀다. 쉽지 않은 유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고 그 사이 집안 형편은 아버지의 늦은 대기업 이직으로 한결 나아져있었다. 물론 내 학자금 대출은 꼭 아버지께 갚겠다고 약속했다. 완벽히 독립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더 이상 손을 벌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미약하게나마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나는 꽤나 혼자서 잘 살고 있다.


이제부터는 현실적인 소리이긴 하지만, 나는 매일 수입과 지출을 점검하기 위해 가계부를 쓰고 있다. 쑥스럽지만 내 한 달 수입은 120만 원이다. 인턴사원으로 소규모 아뜰리에에서 일하고 있고 유명 건축가 밑에서 배우고 있다는 마음으로 다니고 있다. 내가 사는 고시촌의 원룸 월세는 한 달에 60만 원이다. 수입의 절반은 월세로 빠져나가고 나의 생활비는 60만 원. 그러니까 내가 하루에 쓸 수 있는 돈은 2만 원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서울살이는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서 힘들지만 버티고 있다. 나는 실무 경험을 쌓으려고 인턴사원을 1년 간 할 예정이었으니, 딱 1년만 참으면 되는 거니까. 그 사이에 캐드 실력도 실무 경험도 많이 배우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계약서와 4대 보험을 들지 않은 것인데 이 정도는 서울시 공공 건축가 밑에서 배우려면 감수할 수 있을 정도라 생각했다.


나는 인턴사원이지만 회사 복지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점심은 회사에서 주는 백반집 쿠폰으로 회사 근처에서 매일 새로운 한정식으로 즐길 수 있다. 저녁 식사는 매일 야근을 해야 해서 야근 식대로 해결한다(그러니까 나는 식비로 생활비를 거의 쓰지 않는다!). 나를 위해 쓰는 돈은 일주일에 한 번 사 먹는 스타벅스 숏사이즈 아메리카노와 밤 11시 20분에 퇴근해 막차를 타기 전 정류장 앞 지에스25에서 사 먹는 연세우유크림빵이 전부다.


하루에 2만 원이나 쓸 수 있는데 실제로 쓰는 돈은 오 천 원 아래인 이유가 있다. 내가 그렇게 아끼는 이유는 바로 우리 슬이와의 데이트 때문이다.





[ 데이트 통장 ]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지 마라. 인턴사원도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스물다섯이고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슬이와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난다. 물론 나는 더 자주 보고 싶지만 커리어 성장을 생각하면 당연히 밸런스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데이트를 하는 날은 완전히 우리 둘에게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트하는 주말을 위해 돈을 죽어라 아끼고 모으는 거다.


내가 이런다고 친구들에게 말하면(놀랍게도 나는 대학교 때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인턴사원도 사람이에요!) 그들은 섣불리 슬이를 욕한다. 네가 돈을 어떻게 버는데 데이트 비용까지 다 내냐고.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구시대적인 마인드로 섣불리 생각한 슬이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우리 슬이는 대학교 졸업 후 회계사무소에 취직해 정규직의 월급을 받고 있으며 오히려 나보다 월급이 더 높다. 그렇다고 그녀가 나를 구원해 주는 경제적 메시아냐고?(사실 호구라고 쓸뻔했다.) 그것 또한 아니다. 


우리는 커플 통장을 만들었고 매달 각각 똑같은 금액을 같이 넣어놓고 데이트를 할 때 같이 쓴다. 우리 둘 다 알뜰살뜰한 편이고 그녀는 회계사무소까지 다니니 우리는 커플로 연동된 가계부까지 작성해 가며 아주 똑똑하게 데이트 비용을 계획하고 소비한다.


물론 슬이도 신입사원이고 나는 그보다 못한 인턴사원이니 폭죽 터뜨리듯 펑펑 쓰지 못한다. 우리는 카페에 가면 디저트나 케이크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신다거나, 식당은 순대국밥집이나 패스트푸드점 같은 가성비 좋은 곳에 가서 먹는다. 아주 가끔 간절하게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한 주 데이트 비용을 아껴 티몬에서 할인 쿠폰을 구매해 사 먹는다. 특히 기념일에는 매드포갈릭 60% 할인 쿠폰을 구매해 피자와 파스타를 사 먹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데이트 비용은 한 달에 총 28만 6천 원. 남들은 둘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냐고 하지만. 내가 벌이가 없어도, 그녀 또한 아직 사회초년생으로 벌이가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쌓을 수 있는 추억을 모두 쌓고 싶다. 그만큼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나 자신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 ]


처음부터 슬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것은 아니다. 분명 우리 엄마보다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고시촌에 있는 아트박스에서다. 우리 둘은 1월이 조금 지나고 올해에 쓸 스케쥴러를 고르고 있었다. 새해가 지났으니 진열대에는 할인하는 스케쥴러가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넉넉히 남아있지 않았는데, 그중 블랙 커버로 제일 심플하고 깔끔해 보이는 스케쥴러는 집었다. 지금 생각해도 영화 같았던 게 슬이 또한 그 스케쥴러를 동시에 집었다. 그리고 동시에 당황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스케쥴러 보다 상대방의 번호가 더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의 이야기는 뻔하겠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스케쥴러를 양보하겠다고 작은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슬이를 보고 반한 내가 스케쥴러를 넘기는 대신 다른 스케쥴러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아트박스에서 나가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를 좋아했다. 적어도 나는 우리 엄마보다 슬이를 더 좋아했다. 한 번도 사랑해 본 적 없는 것처럼 그녀를 사랑했다. 뭐든 해주고 싶었고 어디든 같이 가고 싶었다.


사회 초년생으로 현실은 녹록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한도라는 뉘앙스의 표현이 더 와닿지만) 안에서 우리는 데이트를 했고 값을 매길 수 없는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 한도 초과 ]


나의 생일이었다. 그날 우리는 파리바게트 케이크를 사기 위해 데이트 통장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미리 구매한 할인 쿠폰으로 매드포갈릭에서 마늘 후레이크가 올라가 피자와 마늘이 잔뜩 들어간 파스타를 먹었다.


그리고 종업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테이블에서 케이크에 7개의 길고 짧은 초를 꽂고 노래를 불렀다. 박수와 함께 그녀와 평생 함께 하고 싶다는 소원을 빌며 초를 불었다. 그리고 슬이는 나를 위해 준비했다며 선물을 건넸다.


검은 포장지로 감싼 작은 박스였다. 나는 슬이에게 뭘 이런 걸 준비했냐면서 포장지를 뜯었다. 검은 포장지 속에 흰 박스에는 숫자들이 오와 열을 지키며 쓰여있었고 그중 하나에는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슬이가 내게 준 것은 명품 지갑이었다. 


나는 손에 들린 명품 지갑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건 신입사원이 된 지 몇 개월 안 된 그녀가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슬아. 고마운데 너 이거 어떻게 산 거야? 


할부했어? 


신용카드를 썼어? 


아니면 네가 붙는 적금이라도 깬 거야?


슬이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받으라고 했다. 자신이 해주고 싶었고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저렴하게 샀다고 했다. 나를 위해서 조금 힘쓴 것뿐이라고. 나는 이내 화를 멈추고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지만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내가 해줄 수 없는 선물을 슬이에게서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명품 선물을 받아 기쁜 마음, 그녀가 준비해 준 선물에 대한 감사함이 아니라 나 자신이 못나보였다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들끓는 자기혐오와 이게 내 현실이라는 것 때문에 추락하는 자존감.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하루 이틀 안에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까지. 아무 능력 없는 내가 하찮았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선물을 꺼내보았다. 나에겐 너무 값비싼 지갑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못난 내 상황이, 내 능력이, 내 모습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내가 나를 가만 두지 못할 것 같아서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 정도로 스스로가 한심하고 짜증 났지만 현실에서 그 아무것도 던질 수 없었다. 어떻게 내가 그녀가 사준 명품 지갑을 던질 수 있겠는가. 이렇게 화가 나는데도 그런 생각이 드는 내 모습이 비참해 보였다.

나는 지갑을 다시 박스에 넣고 박스를 움켜쥐며 울었다.


나는 너에게 이런 선물해줄 수 없는 게 현실인데 어떻게 해야만 하니. 


나 어떻게 해야 하니.






[ 나보다 더 사랑한 누구는 없었다 ]


다음 주에 그녀를 만났을 때 선물로 받은 명품 지갑을 돌려주었다. 나는 모든 것이 새 제품과 똑같으니 영수증이 있으면 반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녀를 도리어 화를 내기보다 내가 원하는 데로 명품 지갑은 반품할 테니 헤어지지는 말자고 했다. 


나는 그녀가 뭐가 부족해서 나를 붙잡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찌질해서 더 이상 그녀와 사귈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돈이 없어서 너를 사랑할 수가 없다. 말했다.


내가 내 상황을 알지 못하고 너를 만났고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연애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라 말했다.







찰싹.


그녀가 내 뺨을 때렸다.


그녀는 자신과 만나면서 돈은 없어도 사랑은 있어야지라고 말했다.


돈 때문에 사랑도 없는 남자친구인 내가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고 했다.


우리가 언제 서로의 경제적 능력을 따져가며 만났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아껴 쓰고 맞춰가지 않았냐고 말했다.


우리가 서로 조건이나 상황을 보고 만난 게 아닌데.


그 순수한 마음을 너는 이렇게 더럽히는 게 날 더 아프게 한다고 말했다.


너도. 나도. 서로만 있으면 되는 건데.


왜 그걸 못하는 거냐고 말했다.



그녀의 눈망울에는 눈물이 고였고 결국 뚝뚝 몇 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나는 너보다 내가 더 중요한가 보다. 미안하다.


끝까지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우리는 헤어졌다. 그 후로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 스물다섯 살 연애의 꼬락서니 ]


나는 인턴사원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런던의 모교로 돌아갔다. 석사 생활은 학부때와 비슷했다. 더 나아진 점이 있다면 아버지께 학자금 대출을 더 받을 수 있었고 대학원생으로 조교를 알바 대신 하면서 쏠쏠하게 생활비를 챙겼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6개월간의 취업 준비 끝에 나는 대기업 계열사의 대형 건축사사무소에 입사하게 되었다. 세상이 무서운 게 런던에 계신 교수님을 내 취업에 아무 도움을 못 주었지만 인턴사원으로 일했던 아뜰리에의 대표님이 뒤에서 슬쩍 나의 대기업 입사에 힘을 보태주셨다.


입사를 하고 첫 월급은 받고 제일 생각난 사람은 윤슬. 내가 만약 그때 이렇게 취업이 돼서 인턴사원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좀 더 오래 보는 사이가 되었을까? 좋은 곳도, 맛있는 것도, 재밌는 영화도, 많은 도시도 다녔겠지? 그러다가 둘이 함께인 미래도 그리고.


하지만 나같이 나밖에 모르는 찌질한 남자는 절대 그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겠지. 그때는 돈이 없어서 사랑을 못했는데. 이제는 돈이 있어도 사랑할 사람이 없구나. 나는 윤종신이나 토이의 노래에 나오는 남자들처럼 뒤늦을 후회를 하는 찌질한 남자가 된 것 같았다. 왜 항상 떠난 뒤에야 사랑이 그 무엇보다도 값지다는 걸 깨닫는 걸까.



벌 받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보다 그 누구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찌질한 남자의 연애는 항상 실패로 끝난다. 가장 구차하고 멋없는 모습의 실패의 꼴. 


때문에 사랑도 없는 그런 모습이 지난 스물다섯 연애의 꼬락서니다.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어요


 
독자1
혹시 작가님이 겪은 실화인가요?
14일 전
한도윤
100% 실화는 아닙니다 😭
14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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