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던 날이었다. 백현은 회사 일을 마치고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잔뜩 낀 먹구름 탓에 평소보다 밖이 어두워 백현은 더 조심하며 운전했다. 그리고, 집 근처를 지나는 중 어떤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는 벽에 기대 겨우 걸어가고 있었다. 백현은 속도를 줄이고 위태로워 보이는 그 남자를 보았다. 이내 쓰러져버리는 남자에 백현은 조금의 고민 후 차를 멈춰 세웠다. 운전석에서 내린 백현은 쓰러진 남자를 안아 들었다. 뒷자석 문을 열고 좌석 위에 남자를 눕힌 백현이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좁은 차 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달큰한 냄새에 백현이 직감했다. 오메가. 밖에서는 비 내음 때문에 맡지 잘 못했던 향이었다. 병원으로 향하려던 백현이 집 쪽으로 조금 서둘러 차를 몰았다. 집에 도착하고 그 남자를 안아든 백현이 제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침대가 빗물로 젖을 것이 뻔했지만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백현은 그 남자가 갈아입을 옷을 찾아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따뜻하면서도 편안한 옷가지를 손에 들고 제 방을 열자 복숭아 향이 진동했다. 알파인 백현이 혼자 사는 집에 히트사이클 억제제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곤란해진 백현이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이는 남자와 시선이 닿았다. 여전히 나른해보이는 눈이었다. - 길가에 쓰러져계셨습니다. 그래서, 일단 제 집에 왔습니다. - … - 음, 어떻게든 히트사이클 억제제는 구해보겠습니다.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 … - 이거, 옷 젖으셨으니 나중에 갈아입고 나오세요. 그럼. 뒤돌아 나가려는 백현의 손목 언저리를 남자가 붙잡았다. 힘 없는 손길에 백현이 남자를 돌아보았다. 은은하던 복숭아 향이 짙어져 백현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죄책감에 애써 모르는 척 하던 본능이, 짙은 복숭아 향이 백현을 덮쳤다. - 하룻밤을 백현의 집에서 백현과 보낸 경수는 아침에 일어나 침대 옆 협탁에 있는 메모를 발견했다. - 회사 때문에 통성명도 못 하고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입으셨던 옷은 아직 마르지 않았으나 일단 담아두었습니다. 옷은 다음에 돌려주세요. 혹시 연락할 일 생기면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변백현 010 0506 0112 메모 옆에 놓인 쇼핑백에는 경수가 입었던 비에 젖은 옷이 담겨져 있었다. 경수는 결국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제 옷가지를 든 채 백현의 옷을 입고 백현의 집을 나섰다. 하늘은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맑았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볓을 맞으며 경수는 어제 일을 회상하다 끝내 얼굴을 붉혔다. 평소의 경수라면 생각할 수 없는 행실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나는 일을 애써 외면했다. - 이상했다. 가끔 헛구역질이 났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좋아하던 음식임에도 손도 대지 못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백현을 만났던 그 날을 기억해냈다. 한 달이 조금 지난 기간에 경수가 불안한 마음으로 산부인과로 향했다. - …임, 신이요? - 예. 혹시 한 달 전쯤 관계를 가지신 적이 있나요? - 네, 있는데… 콘돔을 분명히 썼는데, 어떻게 임신이죠? - 콘돔이 불량이거나 하면 임신될 수 있죠. 5주차이십니다. - 말, 말도 안 돼요… 그럴, 수가… 절망적이었다. 상대와 부부라거나, 연인이라면 축하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한 번 본 사이였다. 관계는 실수였다. 차마 기뻐할 수 없는 아이였다. 배 위로 손을 덮은 경수가 살살 배를 만졌다. 막막함에 경수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왜 하필, 인생에 단 한 번 뿐이었던 관계에 임신이라니. 서럽게 울던 경수가 침대 옆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쇼핑백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을 마주하기가 두려워 아직 주지 못한 백현의 옷이었다. 그 안에 있는 백현의 연락처를 키패드에 입력한 경수가 주저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네, 여보세요. 도경수입니다. 혹시, 오늘 찾아뵐 수 있을까요. - 백현은 사실 경수의 연락을 꽤 오래 기다렸다. 관계 후, 바로 잠이 든 경수의 옷을 갈아입히고 경수의 옷을 널었다. 바지 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발견했다. 도경수. 반듯해보이는 사진의 얼굴이 아까 마주한 얼굴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사실, 백현은 경수에게 반한 상태였다. 그래서 호의를 베풀었고, 본능을 이기기 어려웠다. 상당히 제 취향인 얼굴이 손을 뻗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평소에 오메가를 하대하며 조롱하는 알파들을 경멸하던 백현이었다. 히트사이클인 오메가는 제정신이 아니니 이 때 관계를 가지는 건 강간과 다름 없다고 생각해온 그이기에 경수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제 자신이 조금 혐오스럽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으니. 그러나 먼저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얼굴과 이름뿐이였다. 그래서 더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적어도 옷을 돌려주러 올 때는 볼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를 전화 너머로 들었을 때 백현은 떨었다. 경수가 제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단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 지. 분명 수치스러워 할 테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내뱉은 말들과 행동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 기억을 되짚어주는 건 조금 잔혹하다. 그렇다고 사과하지 않는 것은 백현의 가치관에 어긋난다. 그리고, 전화 너머로 들은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자신과의 기억을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인지, 아님 다른 이유인지 모르겠다. 백현은 여러가지 추측을 하다 답이 나오지 않자 그만 두었다. 연락이 오고 나서 한 시간하고 반이 더 지났을 즈음 초인종이 울렸다. 백현은 문을 열고 곧 볼 경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 여담 글잡담에 글을 쓰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이 이름으로 찾아뵙는 건 처음인 ' 흐드러지다 ' 입니다. 다른 글을 보다가 어, 문체나 진행 방식이 비슷한데. 싶으면 저일수도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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