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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알라 클럽

 

 

 

 

 

 

 

 

앞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돈을 쓸 수는 없습니다, 여왕님.”

설령 그렇다 해도....”

돈이란, 함부로 쓰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벨랴코프 공작, 이정도 위험은 처음부터 예상한 것이에요. 당장 성과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지원을 멈춰서 안 됩니다.”

성급하게 예단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건 성급한 예단이 아닙니다. 내게 어느 정도 확신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나요?”

벨랴코프 공작은 말이 없다.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제임스가 옆에서 불안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타일러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는 다시 얘기하죠. 다들 돌아가세요.”

벨랴코프 공작을 필두로 대신들이 방을 빠져나간다. 여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저렇게 세력을 모으다니.”

예상은 했지만 역시 벨랴코프 공작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신대륙 사업은 시작할 때부터 여왕 자신의 대에서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건 장기적인 투자였다. 하지만 비용은 적지 않았다. 계속 문제가 되었는데, 요즈음 들어 상황이 심각해졌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여왕님......”

아니, 제임스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사실 여왕은 벨랴코프 공작이 척을 지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불안함 때문이다.

슬슬 초조해지는 거지. 제이콥과 마르티노가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되었으니까. 그 전에 가능한 한 세력을 확보하려는 속셈이지.’

여왕은 머리를 문질렀다.

여왕님,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잠깐 쉬시는 게.....”

타일러가 걱정을 담아 말했다.

아니에요. 서류가 산더미인데 어딜 쉬겠어요.”

아닙니다, 마침 이렇게 당사자도 와 있는 상황입니다. 저와 후퍼 대공이 충분히 다 처리할 수 있습니다. 따로 상의드릴 게 있으면 그때 보고 드리도록 하지요.”

맞습니다. 저희 둘만 아니라 샤키야 대공도 도와줄 겁니다.”

제임스와 타일러 모두 단호한 어조이다.

하지만...”

여왕님. 여왕님께서는 좀 더 몸을 아끼셔야 합니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임스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했다. 그는 몇 달마다 띄엄띄엄 아내를 보는 사람이다. 늘 볼 때마다 일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니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다.

결국 여왕은 제임스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

.... 여왕님, 이거..... , 맛있는데요....”

, 고마워요.”

다니엘이 과자 하나를 힘겹게 권한다. 그저 과자일 뿐인데,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항상 볼 때마다 너무 달라서 놀란다니까. 나비 도련님은 언제쯤이면 쑥스러움을 안 탈런지.’

스눅스 가의 어린 다니엘은 린데만 가의 다니엘과 많이 다른 사람이다. 나이도 그렇지만 풍기는 분위기나 진중함도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시녀들 사이에서는 나비 도련님이라 불렸다. 정작 당사자는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여왕은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는 참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고, 불편하지 않은 사람과 향기로운 차가 함께 한다. 마음이 절로 편안해졌다.

좋아, 이제 말을 걸 때다.’

수없이 재고 쟀던 순간을 드디어 잡았다. 다니엘이 말을 걸려는 순간.

앉을게요.”

웬 의자가 하나 더 생기더니, 타쿠야가 턱 앉는다.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다니엘의 찻잔을 뺏어 마셨다.

별론데. 이걸 왜 마시는 거죠?”

무례하게 행동하기라는 제목으로 책 한 권 내지 그래요.”

벌써 책 제목도 정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거기, 과자 좀 더 가져와.”

아키코는 어쩌고요?”

괜찮아요, 돌봐주는 사람 있어요. 믿을만한 녀석이죠.”

순식간에 주도권을 뺏긴 다니엘의 얼굴은, 그야말로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요즘 왜 그렇게 일이 많아요?”

원래 이 자리가 그래요.”

언제나 돈, , 돈이죠.”

어떻게든 해 봐야죠.”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다시 아키코 얘기가 나올 거다. 다니엘은 최대치로 머리를 굴렸다. 아이 얘기가 나오면 끊기가 어려워지는 법이다.

지난 번 줄리안과 이런 자리를 갖다가 크게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여왕과 줄리안이 마엘 얘기를 하는 동안, 다니엘은 두 시간 동안 시간을 죽여야 했다.

기회를 재자! 기회를 재자!’

돈이란 게 널려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부자들을 많이 아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에요.”

부자? 많이?’

머릿속에서 번개가 친다.

코알라!”

사방이 잠시 동안 쥐죽은 듯 조용하다.

...라고요?”

? ... ...”

코알라. 엄청 크게, 방금 소리가 났는데.”

너무 크게 말했다.’

이렇게 된 거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다니엘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 돈 많은, , 그 사람들이 있는데요. , 그 부자들이 있는 곳. .”

생각 정리할 시간을 줄까요, 다니엘?”

, 아닙니다! 그러니까요!”

줄 테니까 그냥 정리하지.”

타쿠야가 정곡을 찌르자, 다시 1분 정도가 조용해졌다.

,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아까 돈이 필요하시다고.....”

그랬죠.”

저희 스눅스 가에, 옛날에 좀 취향이 특이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만드신 승마 모임이 있습니다. 모임 이름이 코알라에요. 코알라 클럽.

그게, 그 분 말 이름이 코알라였대요.”

특이한 정도가 아닌데?”

그만해요, 타쿠야. 계속해요.”

다니엘은 또 울 것 같은 표정이다가, 다시 화색을 띤다. 다니엘은 정말이지 다루기 쉬웠다.

, . 그게, 그 모임이 원래 말 타는 곳이었는데, 커진 거죠. 아니, 커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코알라 클럽이라는 게, 저도 회원이고요. 귀족만 있는 데가 아닙니다.

그냥 어느 정도 돈만 있으면....”

그러니까 부자들 모임이다?”

타쿠야가 또 다시 결정타를 날린다. 다니엘은 다시 뭐라 말하기도 전에 타쿠야는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까 돈 깨나 있는 양반들이 득실거리겠네. 그런데 스눅스 가에 그렇게 돈이 많나?”

“....옛날엔 많았어.”

지금은 아니고? 명예야?”

그만해요.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뭐죠, 다니엘?”

그러니까, 제가 연결해 드릴 수 있다는 거죠. 회원들을, 여왕님과.”

***

, . 오늘따라 왜 이래, 니콜? 기분이 안 좋은가.”

물을 더 가져올까요, 도련님?”

, 부탁해.”

블레어는 예민하게 구는 말을 계속 쓰다듬었다.

, 블레어.”

, 알렉스.”

또 니콜을 데려온 거야? 다른 말도 있잖아.”

니콜은 내가 아끼는 녀석이라고. , 너 말 또 샀어?”

이번엔 아니야. 이름은 하이디야.”

말이 대체 몇 마리야.”

왜냐면 난 부자니까.”

남들이 보면 욕해.”

여기 코알라 클럽에서는 아니지.”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에 훌쩍 올라탔다. 둘의 가슴팍에서 배지가 반짝인다. 유칼립투스 나뭇잎을 새긴 배지는 코알라 클럽 멤버의 상징이다.

멤버가 될 수 있는 기준은 단 하나, 재산이다.

알렉스와 블레어, 그러니까 맞추켈리 가()와 윌리엄스 가()는 귀족도 아니다. 대신 유서 깊은 사업을 하는 가문이다.

맞추켈리 가는 대외 운송업, 윌리엄스 가는 건설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본래 승마 모임이지만, 승마는 젊은 회원들 위주로 이루어진다.

보통 말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나이가 되면 회원으로 등록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말 대신 방에서 카드놀이나 대화를 나눴다.

지금 가까이 있는 방에서도 중년 회원들이 모임을 가지고 있다.

오늘 하이디 컨디션은 괜찮은데, 니콜은 별로인가 봐?”

좀 예민하네.”

주인이 그런 건 아니고?”

지금 무슨 말이냐?”

알렉스가 키득거린다. 그런데 알렉스의 표정이 갑자기 바뀐다.

, 블레어. 저기, 저거.”

뭔데?”

승마장에 웬 마차가 들어오는 게 보인다. 보통 마차가 아니다. 마차의 문에 월계수 문양이 있기 때문이다.

왕실에서 온 거야? 저 마차가? ?”

마차는 부드럽게 멈췄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블레어와 알렉스 모두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다니엘?”

둘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쾅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곤 블레어와 알렉스의 아버지를 포함한 코알라 클럽의 중년 멤버들이 우루루 튀어나왔다.

, 그렇지. 이제 다니엘이라고 막 부르면 안 되는구나.’

왜 온 걸까?”

모르지. 심각한 일은 아니겠지, 블레어?

.....”

***

다니엘은 어색한 눈빛으로 방 안을 쓱 둘러봤다. 코알라 클럽에서 중장년 멤버들, 그러니까 어느 정도 무게감이 있는 인물만 쓰는 곳이었다.

그 방에서도 다니엘은 상석에 앉아 있다. 군데군데 값비싼 장식품과 가구였다.

, 스눅스 대공? 여기까지는 왜 오셨는지요?”

다니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왕과 코알라 클럽 간 만남은 아주 은밀하게 계획되어야 한다. 잘못 하다간 사태가 커질 수 있다.

그래서 여러 유능한 부군들을 제치고 그가 가야만 했다.

나는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 대신 수완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몇 주간 타일러와 카를로스가 달라붙어서 여러 방면을 조언해주었다.

기욤은 멤버들 간 사업 관계, 자제들, 그리고 전망까지 정리해서 서류로 가져다주었다.

기욤이 그렇게 무서울 줄 몰랐어. 그걸 다 외우게 하다니.....’

다니엘은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는 그 자신이 여왕에게 대단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좋아, 조언 받은 대로 행동. 어깨 펴고, 고개 살짝 들고, 눈매 날카롭게. 됐나? 목소리 살짝 굵게.’

여왕님과 만날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대답하시지요.”

윌리엄스 씨는 잠깐 어안이 벙벙해 몇 초간 말을 잃었다. 그건 방에 있는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이 어린 멤버를 알고 있었다.

말을 타는 모습이 영 시원찮아 조언해준 적도 있다. 맞추켈리 씨는 다니엘에게 말을 선물해주기도 한 사람이다.

더군다나 블레어와 다니엘은 옛날 학교를 같이 다니던 동창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몇 주간 강행된 특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니엘의 누나들도 실패한 옷 문제도 타쿠야가 해결했다. 영 어려보이는 인상이 많이 사라진 것이다.

곤색 셔츠에 청록색 조끼, 검은 바지에 긴 부츠. 그리고 짙은 보라색 망토를 걸쳐 왠지 모를 무게감도 더했다. 다니엘은 타쿠야가 고른 옷은 입지 않겠다며

한 시간 동안 반항했다. 물론 여왕의 설득이 삼십 초가 안 되어 동의했지만 말이다.

지금 여왕님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여왕님께선 지금 예산 문제로 고민하고 계십니다. 잘 아시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요.”

그럼 제가 여기 온 이유를 잘 아시리라 짐작합니다만.”

답은 하나다. 여왕이 협력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저희들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가 없이 돈을 투자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맞습니다. 여기는 자원 봉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혜택을 원하시는군요. 예상한 바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은 귀족이 아닙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 조금은 귀족이 남아있긴 하지요.

 하지만 정말 권력 있는 자들은 여기에 없습니다. 돈보다는 권력이 먼저이니까요. 아시다시피, 돈은 한순간 무너질 수 있으나 권력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몸소 겪고 계시지요. 럭키 굽타 씨?”

, 스눅스 대공.”

굽타 씨는 참깨를 비롯한 대농장을 운영하시는 분입니다. 요즘 유통에 문제가 있으시다고요?”

, 요즘 국내 통행료가 비싸졌습니다. 국외는 맞추켈리 씨가 협력해주고 있어서 문제 없는데, 요사이 갑자기 국내 비용이 증가했습니다.”

그 돈 놀이는 누가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별다바 강을 지나는 다리가 유독 비쌀 겁니다. 그 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귀족이죠. 굽타 씨만이 아닙니다.

이 방에 계신 모든 분이 이렇게 부당한 일을 겪고 계십니다.”

일동이 침묵한다. 몇몇은 화를 식히기 위해 넥타이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다니엘은 몇 주간 잠꼬대로까지 중얼거렸던 말을 내뱉는다.

귀족 위에 있는 단 한 명으로 가는 길이 바로 여기 앉아 있습니다. , 여러분?”

***

아니, 회장님!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제가 얼마나 힘들게 잡은 미팅을 취소하신다고요?”

미안하지만 그건 다음에 잡아주게.”

여섯 달 동안 공들인 겁니다!”

, 그리고 이 저녁 약속도 빼주게.”

이건 절대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제가 빼내오려고 고생에 고생을 다 했는데....”

미안하네, 왕 비서.”

비서 얼굴이 다시 와락 구겨진다.

심린이 형, 고생 많네.’

왕심린은 윌리엄스 씨의 젊은 수석 비서이다. 실적이 좋아 일 년 전쯤 고속 승진했다. 윌리엄스 씨는 장남과 왕심린 사이에서 자리를 물려줄 사람을 재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요 몇 달 사이 왕심린은 몸이 부러져라 일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어휴, 내가 다 안타깝다.”

안타까워할 시간이 아닙니다. 공부하실 시간이시죠, 도련님.”

, 마크 선생님.”

마크는 시계를 눈앞에 들이댄다.

벌써 과외 시간인거야? 난 정말 경영학이랑 안 맞는데.”

변명하지 마시죠. 오늘은 중요한 부분을 할 겁니다. 빨리 방으로 가시죠.”

마크는 몇 달 전에 새로 들어온 가정교사다. 과목은 경영학으로, 윌리엄스 씨가 특별 초청했다. 블레어가 가족 중 유독 부진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윌리엄스 씨 은사인 필립 테토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마크의 부친은 심장병과 오랫동안 싸워왔다. 그런데 얼마 전 담당 의사인 잭슨 박사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았다.

필립 테토 씨는 체념한 듯 아들을 병원에서 내보냈다. 생계인 교사직을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그 사정을 알고 윌리엄스 씨가 먼저 연락을 했다.

“326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주제는 인수와 합병입니다.”

, 어제 투자처 외우는 것도 아직 안 끝났잖아.”

경영진 구성 방법이나 다시 불러보시죠.”

블레어는 마크가 저렇게 태연하게 일하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어제 상트페테르부르크 병원에서 편지가 왔는데도 말이다.

표정이 흐려지는 걸 보니 상태가 더 안 좋아진 모양이었다.

병문안, 꼭 가야지.’

***

그토록 지루했던 두 시간이 지나가고 수업이 끝났다.

두 시간 다 됐어!”

아직 세율 계산이 남았습니다.”

내가 오늘 예습할게. 제발, 진짜야.”

으음.... 알겠습니다, 도련님. 대신 예습을 꼭....”

알겠어, 알겠어.”

마크는 미심쩍은 눈길로 잠시 블레어를 쳐다봤다.

삼 분만 더 하겠습니다.”

블레어가 항의하기도 전에 윌리엄스 씨가 마크의 말을 잘랐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나?”

, 물론입니다. 들어오시죠. 막 수업이 끝났습니다.”

항상 고맙네, 마크 군. 그런데 잠시만 자리 좀 피해주게.”

마크가 잠자코 자리를 떴다.

블레어, 이 아비는 사흘 뒤에 성으로 갈 거다. 넌 나흘 뒤에 아비랑 같이 갈 거고. 꼭 가게 만들 거다.”

제가요? 갑자기 왜요?”

장사 중에 장사는 역시 사람 장사지.”

윌리엄스 씨는 씩 웃는다.

***

땅거미가 지는 때다. 아직도 아버지는 성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성에서 무슨 대화를 하고 오실까? 낌새를 보아 하니 부군 문제인 거 같은데.... 설마 나는 아니겠지?’

블레어는 머리가 복잡하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니 머리가 좀 멍해지는 것 같다. 손을 뻗어서 탁자 위 커피를 집었다.

, 식었어. 시드니! 커피 좀 데워줘!”

보통 때 같으면 하녀인 시드니가 달려와 커피를 가져갔을 터이다. 그런데 감감무소식이다.

뭐야? 왜 아무도 없지?”

복도는 옅은 저녁이 깔려 어둑어둑하다. 다시 하녀를 불렀다.

시드니? 왜 아무도 없어?”

답은 여전히 없다.

내가 주방까지 가야 해?”

불만으로 중얼거리며 몇 발짝을 옮기니 그제야 시드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으이그, 속 터져. 넌 이것도 못 하니?”

세탁실 쪽이다. 블레어는 커피 잔을 들고 세탁실로 가보기로 했다.

, 이거 봐! 여기! 때가 아직 있잖아! 이건 뭐야? 어머! 이건 어디서 묻힌 거야?”

시드니는 어린 하녀를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어린 하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잠자코 있다.

시드니?”

, 도련님.”

블레어가 나타나자 시드니는 그제야 입을 다문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아직 어린애잖아. 잘 가르칠 생각부터 해야 하는 거잖아. 괜찮아?”

어린 하녀는 반응이 없다. 얼마나 기가 죽어 있는 상태이면 그럴까 싶어 다시 한 번 물었다.

괜찮아?”

저어, 도련님. 얘는 못 들을 겁니다. 귀머거리거든요. 못 듣는 데다 칠칠맞아서 보통 얘한테는 다들 크게 말합니다.”

그건 크게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소리 지르는 거라고. , 이거나 데워와. 그리고 코코아도 한 잔 새로 가져오고. , 나랑 가자.”

블레어는 변명하는 시드니에게 쏘아붙여 말했다. 그리곤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발걸음을 돌렸다. 방에서 보니 어린 하녀는 더욱 추레해보였다.

헝클어진 머리가 덥수룩해서 눈을 가릴 정도이다. 옷은 얇고 더럽다. 앞치마를 두르지 않았다면 그냥 거지인 줄 알았을 것이다. 긴장으로 어깨를 벌벌 떠는 모습을 보니

절로 측은한 마음이 든다.

, 여기. 많이 추운 거야?”

블레어는 손수 담요를 둘러주고 의자에 앉혔다.

도련님, 시드니입니다.”

, 들어와. 코코아도 가져왔지?”

, 도련님.”

어린 하녀를 보는 시드니의 눈빛이 여전히 곱지 않다. 그 눈빛을 느낀 듯 어린 하녀도 어깨를 더 움츠린다.

시드니. 이거 내려놓고 과자 좀 갖다 줘. 빨리.”

? 예에...”

블레어는 시드니를 내쫓다시피 바깥으로 내보냈다. 어린 아이를 이렇게 대하다니. 아무리 칠칠맞게 일을 한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

, 괜찮아. 시드니는 갔어. 이거 좀 마셔봐. 이 코코아 되게 맛있는 거야.”

어린 하녀는 천천히 코코아를 들이켰다. 얼굴에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걸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언제까지 몸짓발짓을 할 수 없어서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이름이나 나이, 여러 가지를 써서 내밀었다. 하지만 뚫어져라 보기만 할 뿐이다. 한참동안 가만히 있더니 도리질을 한다.

글자를 모르는구나.... , 미안.”

도련님. 말씀하신 과자입니다.”

, 생각보다 빨리 왔잖아.’

과자를 내려놓자마자 하녀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과자를 입으로 우겨넣어 씹었다. 목이 막히는지 급히 코코아를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시드니가 인상을 구겼다.

세상에. 도련님, 이 정도에서 친절은 멈추세요. , 이렇게 지저분하게 먹을 거니?”

그만 둬! , 잠깐. 너 이게 뭐야? 다친 거야?”

블레어는 어린 하녀의 왼팔이 조금 이상하단 걸 눈치 챘다. 사실 아까부터 하녀는 왼팔을 거의 쓰지 않았다. 블레어가 왼팔을 잡자 하녀는 기겁을 하며 몸부림쳤다.

 그러다 그만 블레어의 얼굴을 치고 말았다.

이런, 맙소사!”

시드니는 험악하게 어린 하녀를 붙잡았다.

그만 둬! 시드니! 저것 봐! 다쳤잖아!”

어린 하녀의 왼팔에는 손바닥까지 길게 흉터가 나 있었다. 거뭇한 색깔 때문에 더 흉해보였다.

당장 나가, 시드니! 어서!”

시드니는 씩씩거리며 나갔다. 태도를 보아하니, 이대로 가다간 이 어린 하녀는 더 구박받을 게 뻔했다.

어떻게 하면 좋지?”

일단은 다시 담요를 덮어주고 자리에 앉혔다. 고민하는 표정을 짓지 않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아버지의 말을 떠올랐다.

'장사 중에 장사는 역시 사람 장사지.'

***

블레어는 웅장한 천장과 복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긴장이 되어서 목이 자꾸만 탄다.

블레어,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 아버지.”

여왕님께서 부르십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침착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과연 여왕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름모꼴 다이아몬드를 이어 만든 목걸이에 노란 드레스가 돋보인다.

손목이 살짝 드러나는 정도인 소매로 여왕의 가녀린 팔이 드러난다. 단정하게 쪽을 진 머리에 금을 얇게 뽑아 만든, 가벼운 왕관을 썼다. 장식이 어찌나 섬세한지

꼭 살아움직이는 것 같다.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만나서 반갑군요, 윌리엄스 경. 그리고 옆은 경의 아들이겠군요.”

, ! 블레어 윌리엄스라고 합니다, 여왕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만나서 기쁘군요. 여기에 온 이유는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문의 영광일 따름입니다, 여왕님.”

고맙군요, 윌리엄스.”

, 그리고 여왕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죠?”

사실은..... 부탁입니다.”

부탁이라니, 갑자기 오늘 처음 뵌 여왕님께 무슨 짓이냐?”

윌리엄스 씨는 당황해서 블레어를 쳐다봤다. 하지만 블레어도 고집이 있는 편이어서, 한 번 한 걸 말릴 수는 없었다. 블레어는 갑자기 자리를 뜨더니, 누군가를 데려왔다. 바로 빨래를 하면서 구박을 받던 그 어린 하녀였다. 시드니에게 혼나던 그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깨끗이 씻고 머리를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빨간 머리카락이 불에 타는 듯 선명했다. 단지 눈동자가 잿빛이어서 자칫 흐리멍덩하게 보일 수 있는 인상이었다. 단순하고 깔끔한 하늘색 드레스가 산뜻해서 그런 인상을 가릴 수 있었다.

이 아이 이름은 제니퍼입니다. 나이는 마르티노 왕자님과 동갑이 됩니다.”

여왕은 반쯤은 당황하고, 반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보았다.

여왕님, 저는 제니퍼를 여왕님과 저 사이에 양딸로 들였으면 합니다.”

윌리엄스 씨는 입을 떡 벌린 채 막내아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여왕은 차분하게 이유를 물었다.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블레어는 침착하고 조리 있게 제니퍼를 어떻게 만났고,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설명했다. 여왕은 때에 맞춰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서, 저는 여왕님께서 제니퍼를 거둬주셨으면 합니다. 제니퍼도 이 나라에 사는 아이고, 넓게 보면 여왕님의 자식이고 딸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윌리엄스 경은 이쯤 되자, 자신의 막내아들에 속으로 감탄했다. 물론 큰 바탕과 기반은 선의다. 하지만 어차피 정략결혼이다. 말은 부탁이지만, 조건이나 다름없다.

부탁을 한 쪽은 여왕이다. 제니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왕에게 실리적으로도 불리했고, 도덕적으로도 보기 좋지 않다. 무엇보다 여왕은 이런 부탁을 거부할

사람도 아니었다.

제니퍼, 이리 오겠니?”

, 여왕님. 제니퍼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렇군요. 괜찮습니다, 데이아나 공 때문에 이런 상황도 익숙하거든요.”

저어, 글자도 모릅니다.”

으음, 그렇다면 하루 빨리 글자를 가르쳐야겠군요.”

여왕님, 그 말씀은.....?”

그래요, 나에겐 이런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군요.”

감사합니다, 여왕님!”

여왕은 싱긋 웃었다. 그리곤 제니퍼를 향해 조용히 손짓을 했다. 제니퍼는 쭈뼛거리며 여왕의 곁으로 갔다.

. 이게 필요할 것 같구나. 선물이다, 제니퍼. 내 딸.”

여왕의 손에는 긴 장갑이 들려 있었다. 여왕은 이미 제니퍼가 들어올 때부터 왼쪽 팔을 감추려 드는 걸 눈치 챘다. 제니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렇게 왕실에는 여왕의 세 번째 딸, 제니퍼 윌리엄스가 탄생하였다. 동시에 블레어는 윌리엄스 대공으로서 성에 들어갔고, 재정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다시 한 번 여왕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외딴 골짜기 아래로 피리불며 내려가다

즐겁고 유쾌한 노래 피리불며 가다

구름위에 있는 한 아이를 보았네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노래 서시

  

 

 

 

+) 안녕하세요 ㅜㅠㅠㅠㅠㅠㅠㅠㅠ 아 너무 텀이 깁니다 크흑 ㅠㅠㅠㅠㅠㅠ

블레어는 순욱이보다는 어른스러운 캐릭터입니다. 물론 윌리엄스 씨처럼 모든 걸 계산하고 행동한 건 아니죠. 그래도 장사꾼의 피가 어느 정도 흐르니까요!

그래도 이번 편으로 열 네 명 부군 이야기가 끝입니다!!! 야호!!!!!!!!!!! 이제 뒷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어요!!!! 오예!!!!!

그래서 이번 편을 분량도 많슴다. 텀이 길어서 일부러 그런 것도 있어효..... 아무튼 다음편은 더 빨리 돌아오는 걸로 할게요.....

여러분 정말 싸랑합니다!!! 댓글 마니 달아주세여!!!!  

 



 
비회원212.30
잘 봤습니다 작가님! 다음화도 기다릴게요 화이팅 ♡
7년 전
난슬
댓글 감싸해용!! 다음화도 열심히 쓰고 있어요. 좀만 기둘리세영~ 싸랑합니다!!!
7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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