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엔 아버지가 너무 진지했어. 옛날에 그 여자들이랑은 달랐다고. 이 여자 여기 안 데리고 오면 진짜 나랑 연 끊을 기세였다니까요. "
박민하 인생도 참, 파란만장하지. 하루 아침에 모르는 여자랑 같이 살게 되었으니. 평소엔 술을 입에 잘 안 대는 박민하가 샴페인을 쉬지 않고 쭉쭉 들이키는 것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차라리 취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두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맨 정신으로 어떻게 버티겠는가. 박민하 같은 사람이. 그보다 더 걱정되는 건 저 여자였다. 박민하가 데려온 그 여자. 표혜미 말이다.
아까 전, 박민하는 줄곧 잡고 있던 표혜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멀뚱멀뚱 자기를 바라보는 표혜미를 무시한 채 내 오른손, 그러니까 방금 표혜미와 악수한 내 오른손을 붙잡고 빈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와 버린 것이다. 표혜미를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둔 채.
' 이제 알아서 하세요. 난 아버지 말대로 당신 손잡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
그 싸늘한 한 마디에 내가 다 얼어붙을 뻔했는데, 한 눈에 봐도 마음이 여려보이는 표혜미는 어떨까 싶었다. 박민하가 내 손을 너무 세게 당기는 바람에 표혜미의 표정은 살피지도 못 했지만. 나를 끌고 온 박민하는 의자를 빼 나를 앉히곤 그 옆 자리에 털썩 앉았다. ' 이래도 돼? 저 여자 이런 자리 처음일 거 아냐. ' 괜히 불안해서 한 마디 하자 빈 잔에 샴페인을 따르던 박민하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나를 째려봤다. ' 그래,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
당신 없는 세상은 무덤 속의 좀비 얼간이 끓어오르는 오물통
당신과 함께라면 그 어떤 재난도 불행도 아름답고 황홀하겠지
나 미쳐 보여?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나 미쳐 보여?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황병승, 아름답고 멋지고 열등한 中
" 너랑 몇 살 차이난다고? "
갓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으니까, 뭐 두 살정도 차이나려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박민하는 두 손가락을 들어보이는 것이다.
" 두 살? "
" 아니. 2개월. "
" ..생각보다 어리네. "
박민하와 대화를 나누곤 있지만 내 시선은 표혜미에게 꽂혀 있었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마냥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표혜미에게. 표혜미는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결국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 앞까지 내려왔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그 흔들리는 시선으로 박민하를 힐긋거리고 있었고, 박민하가 그 애처로운 시선을 무시하고 있는 것도 눈에 보였다. 사람들은 표혜미를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그 수군거림이 어찌나 컸던지 나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 중에는 심지어 대놓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아무리 그래도, 박민하가 너무했다 싶다. 보다 못 해 샴페인을 마시느라 여념이 없는 박민하를 힐끔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 뭐라고 부르지? 아가씨? 사모님? "
이미 거하게 취한 듯한 박경리가 비틀거리며 표혜미에게 다가가더니 표혜미의 손목을 잡고 말을 건다. 뭐야, 저건 또. 결국 난 다시 조용히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게도, 박경리가 표혜미를 붙잡고 말을 걸자마자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그 시끄럽던 룸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이제 들려오는 것은 잔잔한 클래식 뿐이다. 저 또라이가 표혜미에게 어떤 짓을 할 지 예측도 가지 않아서, 나는 그들을 지켜보기 위해 등을 돌리고 앉았다.
" 저기요, 박 회장님을 어떻게 꼬신 건진 모르겠는데...인생 그렇게 살고 싶어요? "
표혜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쟨 나한테도 저러더니, 왜 또 죄없는 여자한테 가서 저래. 고개를 돌려보니 박민하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그렇게 마셔대더니 잠이 든 모양이다. 지금 박경리가 저 여자한테 진상짓 하는 이유가 다 자기 때문인데, 정작 박민하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니. 쯧, 일어나서 이거 알면 꽤나 후회하겠네.
" 왜 이러세요..놔 주세요. "
" 대학 입학하자마자 집안 망했다면서. 당신 피아노 전공했잖아. 돈 엄청 들었을 텐데, 학비는 누가 대줬어요? 그 때는 박 회장님 말고 다른 회장님이 대주셨나? "
풋. 주위에서 일제히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풀린 눈으로 표혜미를 바라보며, 박경리는 혀가 꼬인 채로 입에서 나오는 말을 아무렇게나 다 내뱉고 있었다. 직원들 중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박경리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젠 진짜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엔 정말로 일어나려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았다.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박민하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고 있던 박민하 말이다.
" 가지 마. "
" ..너, 자는 거 아니었.. "
" 앉아요. "
" ... "
" 얼른? "
늘 이런 식이지. 못마땅했지만 박민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는 줄만 알았더니.
박민하는 엄마보다는 이모를 더 닮았다. 그녀의 이모는 8,90년대를 주름잡은 영화배우였다. 처음엔 그 빼어난 미모만 닮은 줄 알았더니, 연기력도 물려 받은 듯 싶다. 나는 박민하의 연기에 매번 넘어가면서도, 매번 알아채지 못 했다. 예전에도, 지금도.
" 그 반반한 얼굴로 박 회장님만 꼬신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아니야? "
" 이러지 마세요, 손목, 아파요.. "
" 당신이 평생이고 회장님 사랑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내가 장담하는데 당신 3년도 못 가서 버려질.. "
" 박경리 씨! "
하지만, 이번엔 박민하에게 반항 아닌 반항을 하기로 했다. 처음이었다. 내가 박민하의 손을 뿌리친 것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이 툭 치면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쏟아낼 것 같은 표혜미를 도저히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동정이고, 연민이었다. 그냥 딱해서, 가여워서. 그뿐이었다.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박경리는 내 목소리에 놀라 몸을 틀었고 표혜미는 그 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깜빡,
깜빡,
깜빡.
" 왜요, 문 대표..아니..대표라고 부르지 말랬지...아니, 아닌가..부르라고 했나? "
" 그만해, 경리 씨. "
" 문 대표님도 쟤 좋아해요? 그런 거야? "
"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
" 문 대표님은 박 팀장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아니었구나? "
" 너희 할아버지가 너 이러고 있는 거 아시면 참 좋아하시겠다, 그치? "
말로는 통제가 안 되겠다 싶어 도저히 가만히 있지를 못 하는 박경리의 팔을 붙잡았다. 왜 이러냐며 잠깐 저항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박경리의 팔을 잡아 끄는데, 표혜미와 눈이 마주쳤다. 뭘까, 저 눈빛은. 그 짧은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나는 결국 박경리를 끌고 룸 밖으로 나올 때까지 표혜미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던 것 같다. 그 알 수 없는 눈빛에 홀려서. 룸 밖으로 나와 문을 닫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박경리를 끌고 힘겹게 엘리베이터에 탄 뒤, 겨우 함께 로비까지 내려와 전화를 걸었다. 주소록에 박경리의 운전 기사 전화번호가 있었다.
" 최 기사님. 저 문현안데, 기억하시죠? 아직도 박 의원님 댁에서 일하세요? 그럼 지금 호텔 근처에 계시겠네요. 로비로 오셔서 박경리 씨 좀 데려가실래요? 좀 많이 취해서. 최대한 빨리요."
2년 전, 박민하의 생일 파티에서 술에 취해 박민하에게 삿대질을 하며 내가 너 좋아한다고- 를 연신 외쳐대던 박경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때도 박경리를 끌고 나왔던 건 경호팀이 아닌 나였다. 전화를 걸려던 찰나 배터리 부족으로 꺼진 박경리의 휴대폰 때문에 내 휴대폰으로 박경리의 운전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더랬다. 필요없는 번호도 다 저장해 놓는 습관이 2년 뒤에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전화를 끊자마자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발신인은, 박민하다.
[ 최악이야, 문현아 ]
경리를 제외한 세 명의 등장인물의 나이는 2016년 기준입니다 (문30,표밥26)
그런데 어쩌다보니 경리가 표밥보다 네 살 어리게 됐어요ㅋㅋㅋㅋㅠㅠ이 점 기억하고 봐 주셨으면..
간단한 인물 소개를 하자면,
박경리는 여당 7선 의원의 하나뿐인 손녀. 아버지도 국회의원이고, 어머니는 아나운서 출신.
문현아의 아버지는 업계 1위 로펌의 대표.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아버지 로펌에 관심없어서 어머니가 운영하는 재단의 아트홀과 갤러리만 운영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평생 자유롭게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는데 얼마 전 사촌인 조소진한테 탈탈 털렸고.
박민하는 매년 재계 1위를 놓치지 않는 대기업 총수의 막내 딸이고 그 회사 본사 팀장. 아버지는 국무총리 인선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막대한 권력을 지니고 있고 현아 아버지가 민하 아버지의 법률 대리인이라서 현아와는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
표혜미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고 공부도 제법 잘해서 명문대 음대에 들어갔는데 대학 들어가자마자 집안이 망함. 딱하게 여긴 담당 교수가 2년 전, 한 파티에서 엄청난 페이를 받고 연주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 줌. 그런데 그게 박민하의 생일 파티였고, 그 때 회장님이랑 처음 만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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