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보다는 고통의 예감이,
패배보다는 패배의 예감이,
페스트보다는 페스트의 예감이,
사랑보다는 사랑의 예감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 호흡 , 김영하
기사님을 도와 박경리를 차에 태우고 뒤도 안 돌아보고 호텔로 들어온 뒤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 계단으로 향했다. 다시 그 곳에 들어가자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박민하의 메세지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고, 표혜미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내 성격이 문제였다.
6층까지 걸어 올라가 문을 열려다가, 담배 한 대만, 딱 한 대만 피우고 들어가자는 생각에 습관적으로 손이 바지 뒷 주머니를 향했다. 하지만 있어야 할 것이 잡히질 않는다.
" 아, 코트.. "
그제서야 아까 벗어서 의자에 걸쳐두었던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 담뱃갑이 있는 것이 기억이 났다. 평소엔 맨날 바지에 넣어두면서 왜 아까 코트로 옮겼었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결국, 어쩔 수 없구나. 또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가는 수밖에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고리를 돌리려던 순간,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버렸다.
누군가의 울음 소리. 그리고 그것을 듣자마자 그 '누군가'의 정체도 알아차려 버렸다. 그 가여운 여자가 분명했다, 아래 층에서 들려오는 울음 소리의 주인은.
오지랖이다. 괜한 오지랖이다. 아까도 괜히 나섰다가 낭패 봤잖아. 그냥 가자, 그냥 지나치자. 계속해서 되뇌었다. 하지만 우는 소리가 너무 서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 발견했다간 괜한 일이 생기진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래.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내 성격, 정말 문제다.
결국, 문고리를 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내가 내려가는 소리가 그대로 울리는데도 흐느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울고 있는 여자는 표혜미였다.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표혜미는 문 앞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 저기..괜찮아요? "
무릎을 굽히고 앉아 표혜미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그러자, 표혜미는 울음을 그치고 잠잠해지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 ...네? "
표혜미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과, 마주해버렸다. 서로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숨이 멎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갑자기 뒤에서 내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 마냥.
" ...아. 감사했어요, 아까.. "
예쁘다.
아까 처음 봤을 때 예쁘다고 생각했던 것과 지금은 달랐다. 예쁘구나. 정말로. 이 추운 날씨에, 이 추운 계단에 있는데도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빨리 뛰다 못 해 곧 있으면 터져 버릴 것 같아서, 결국 안 되겠다- 싶었던 나머지 고개를 돌리곤 일어났다.
" 괜찮으시면 저는 이만, "
" ..마요. "
그러고는 애써 무거운 발걸음을 떼려는데, 표혜미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차다. 그 차가운 손이 땀으로 범벅이 된 내 손과 닿은 것이 괜스레 부끄러워 손을 빼려는데, 표혜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고개를 돌려 다시 표혜미를 바라보자 아까처럼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 뭐라구요? " 한 발짝 다가가 묻자 표혜미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 ...가지 마요. "
그러더니 다시 그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애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표혜미의 차디 찬 손을 꽉 잡은 채로,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그 커다란 눈을 한참 동안 내려다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잘못됐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제서야 알아챈 것이다. 박경리를 끌고 나오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때부터 잘못되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 이 여자의 이름을 들었던 그 순간부터 였을까.
" 표혜미 씨. "
" ...가지 마세요. 같이 있어주시면.. "
" ... "
" 안 돼요? "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내 성격이 문제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