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들의 도시
written by. SK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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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나의 고향.
전쟁은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놨지만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새싹이 돋았다. 그 생명의 근원지가 이 곳이었다. 누구의 환대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약속한 양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이 땅을 나는 사랑했다. 누구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고개 숙이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모두가 무시하지만, 누구도 쉽게 다가올 수 없는 것도 좋았다. 쓰레기장에 피어난 한 떨기 장미,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시궁창같은 인생이래두. 그래, 아름다운 나의 고향,
구九- 룡龍- 성城- 채寨-
" 링-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네. 한 잔 할래?"
" 니 새끼 거기 발정제 타놓은 거 모를 줄 알고?"
" 링. 그렇게 틱틱 거리면 누가 널 거둬 가겠어?"
" 아가리 꾸물거리지 말고 물건이나 확인해."
맞네. 눈알 한 짝. 신장, AB형 두 팩.
확인 사인을 받고 나서야 검은 마스크를 걷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구룡성채도 어쨌거나 사람 사는 곳이었다. 나름 식료품점도 있고, 정육점도 있고, 또 그리고 음, 음. 어쨌든. 나는 정육점에서 일했다. 구룡성채 사람들은, 그리고 홍콩의 후미진 골목의 이런 무면허 돌팔이의사들은 우리를 정육점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하는 일은 당연히 정육점과는 달랐다. 우리는 장기 밀매를 했다. 홍콩 경찰은 구룡성채 사람들을 예의주시하고 경계했지만 아이들은 논외 대상이었다. 이 곳 사람들이 얼마나 악랄한지 모르는거지.
나는 열 아홉, 나머지 여섯명은 쭉 내 아래다. 모두 닥터(본인은 그렇게 부르지만 나는 그냥 백돼지라고 부르겠다)가 데려온 아이들이다. 주워왔단 표현이 더 적합할까. 다들 일곱, 여덟살 쯤 될 때까지 키우다가, 발 빠른 애들을 선별한다. 혹시 모를 검문을 위해서 빠른 발은 생존에의 필요충분조건이었다. 기껏 키웠지만 느린 아이들은, 글쎄. 행방은 백돼지만이 알고 있다. 다들 부모, 연고지 없는 천애고아다. 정육점 아이들이라고 묶이는 순간, 우리의 고향은 구룡성채 32번지로 귀결된다. 이름은 백돼지가 내키는대로 붙인다. 내 이름은 링. 날 막 주워왔을 때 쯤 읽고 있던 만화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단순한 새끼. 단순한 게 힘이 세면 어떻게 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새끼였다. 어쨌든 개 중에서도 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내 바로 밑은 열 넷이었으니까. 나와 같이 자랐던 자매들은 어디에 갔더라. 음, 음.
닥터는 혹시 모를 검문을 피하기 위해 스카쟌에 속주머니를 붙였다. 맞춤 제작한 아이스박스를 안주머니에 넣고 모양을 가다듬으면 됐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하고 손목을 잡아채는 경찰에겐 어딜 만지시는 거예요? 하고 뺨을 때리라고 배웠다. 물론 겪어본 적은 없었다. 두근두근, 하루에도 두세번씩 있는 의뢰였지만 나갈 때마다 처음 그 날처럼 심장이 뛰었다. 냉동된 장기는 차가웠고, 피가 흐르는 내 심장은 뜨거웠다. 쿵쿵. 발걸음과 심장소리는 같게.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땅거미가 진 홍콩의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발 뒷꿈치를 바짝 따라 붙었다.
*
" 다녀왔어."
듣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이곳은 나만의 아지트였다. 인삿말은 홍콩에서도, 중국에서도, 지구 돌아 먼 이국에서도 같겠지만 내겐 더 한 무게였다. 다녀왔다, 다녀올게, 이런 말은 목숨을 걸고 일하는 사람에게 귀환을, 생존을, 기어코 살아낸 하루를 확인 받는 말이니까. 다 낡아 떨어진 검은색 스니커즈를 선반에 쌓아두고 한 칸 남짓한 방에 들어갔다. 여름 이불로 사계절을 버텨야한다.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홍콩의 여름은 특히 더 무더웠다. 턱턱 막히는 숨에 난간 장식이 된 창문을 열고 나시와 반바지를 껴입었다. 이것도 백돼지가 주워온거다. 가만히 보면 칼질 다음으로는 주워오는 걸 참 잘하지.
" 링!!!"
" 닥터? 집 부서지겠, 악!"
쿵- 내 허벅지만한 팔뚝에 밀려 벽에 요란하게 부딪혔다. 그 반동에 신발선반에 위태롭게 쌓여있던 잡동사니가 와르르 무너졌다. 세게 부딪힌 척추뼈가 아렸다. 인상을 팍 쓰고 일어나려고 하니, 산발적으로 발길질이 쏟아졌다. 이, 미친, 년, 이, 어디서, 손, 을, 놀려?, 어? 백돼지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씨발, 무슨 영문인진 알고 맞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저건 발이 아니라 둔기였다. 헛발질이라도 하면 벽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 떨었다. 배달일 하면서 심장 쫄릴 일 많았고, 이 새끼가 갑자기 약쳐먹고 이런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열 다섯이 넘어간 이후 이렇게 직접적인 폭력을 겪은 건 처음이었다. 손이 벌벌 떨려 턱을 들어올리며 무어라 묻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 사람을 이렇게 패놓고 멀쩡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리도 만무했다. 물론 그 사실을 저 아이큐 삼십 짜리가 알 리 없지만.
" ...냐고!"
" ...어?"
습기 섞인 바람이 정적을 스쳤고 살기로 뒤바뀔때 쯤, 낮은 목소리가 우리 둘을 갈랐다.
" 거, 조용히 좀 합시다. 니 집 벽이기도 한데, 내 집 벽이기도 하거든."
" 뭐? 이 미친 새끼가!"
옆집 남잔가 싶었다. 야마가 돌아버린 백돼지는 사람 하나 죽이고도 남았다. 백돼지는 내 방 철창살을 좌우로 벌려 옆 방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너 뭐하는 새끼야? 빨리 안 쳐나와? 이 미친 새끼가 어디 뚫린 입이라고! 어? 제대로 말이나 해보자고!"
쿵쿵 거리면서 이번에는 문 밖으로 나갔다. 옆 방 문을 부서질 듯 두들겼다. 나는 살인만은 막으려 힘겹게 기어갔다.
" ... 됐어?"
" ... 사쿠라?"
백돼지는 사색이 되어 곧장 정육점으로 돌아가는 성 싶었다. 옆집 남자의 머리색은 과연 사쿠라, 였다. 헌터 사쿠라. 별칭은 옥상에 사는 꼬마들의 소행일테지만 썩 잘 어울리긴 했다. 물 빠진 핏자국 같은 선뜻한 벚꽃색. 신발장에서 채 일어나지도 못 하고 있는 나를 물끄럼 바라보다가 곧장 들어갔다. 무심하단 소문이 사실이긴 했나보다. 힘겹게 헐거운 문을 닫고 고단한 몸을 뉘였다. 헌터-사쿠라. 삼합회가 접수한 이 곳에서 살인청부 의뢰를 떳떳히 받는다는 건 거의 도전장이었다. 처음에는 말도 많고 총이니 칼이니 여럿 오갔지만 결국 결론이 났다. 사쿠라는 예외, 로. 그러니까 삼합회가 두손 두발 다 든 킬러였다. 그는.
그런 숱한 소문들과는 별개로 오늘 본 그는 상상과는 달랐다. 백돼지와 서 있는 모습은 더 대조적이었고. 그렇게 무시무시한 뒷소문을 달고, 살인청부업을 하면서도 생각보다는 마르고, 끝이 뾰족한 그 눈꼬리가, 뭉툭한 코끝이. 응. 좀 잘 생기긴 했지? 민망한 생각에 이불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어제 그 난리통을 겪고 너무 피곤해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새벽 네 시. 새우잠을 자다보면 불편해서라도 늘상 깨는 시각이었다. 백돼지 새끼. 그 커다란 대갈통에 무슨 생각을 담고 사는진 몰라도 뭔가 오해를 풀어야겠단 생각이 들어 겉옷을 걸쳤다. 내 집은 6층, 정육점은 2층. 미로같은 계단과 복도와 골목을 지나다보면 나왔다. 빨간 조명이 어른거리는 정육점. 삐걱거리는 문을 힘겹게 열자 수술 베드에 누워 자는 백돼지가 보였다. 내 싸늘한 눈빛을 보자 정신이 드는 듯 했다.
" 어제 뭐였어?"
" 링?"
" 혼자 무슨 좇같은 상상을 했길래 사람을 이 따위로 만들어 놔?"
파랗고 빨갛게 멍이 든 팔이니 다리를 보고 안그래도 허연 얼굴이 더 질렸다. 꼴에 양심은. 백돼지는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백돼지는 나름 열심히 장부를 썼다. 어제 계산이 맞지 않았고 정육점 아이들 중 금고 번호를 아는 건 나와 백돼지 뿐이었다. 그래서 물었고, 그런데 대답을 안했고, 그래서 때렸다고. 칼집에 고이 꽂혀있는 사시미가 오늘따라 땡겼다. 심장 동맥은 $1.525. 죽여버리고 싶게 단순한 사고법이었다.
" 닥터 그저께 잭한테 외상 줬다며."
" ...아."
저 새끼를 어떻게 조지지.
" 오늘은 어디야."
" 어.. 여기."
누런 종이에 빼곡하게도 적혀있다. 나이가 많고 발이 빠른 편이다보니 대개 구룡성채 내부보다 홍콩의 뒷골목이 많았다. 더 멀고 더 위험한 곳. 오늘은 두 군데. 백돼지는 기름 낀 손가락으로 밴드 박스를 건넸다. 이런 걸로 어떻게 멍을 가리라는건지 모르겠지만.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고 정육점 문을 박차고 나왔다. 하여간 짜증나는 새끼.
*
백돼지가 뜯어벌린 창살 틈새로 말을 비집어 넣었다. 못 들었나.
" 사쿠라 씨!"
" 왜."
아. 봤다. 어제와 똑같이 무심한 표정. 심장이 콩콩 거렸다. 달싹 거리길 몇 번, 겨우 말을 꺼냈다.
" 저기, 어제... 감사했어요. 이렇게 전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한데, 문 두드렸더니 대답이 없으시길래요. 그 어제 소란은 죄송했어요. 닥터가 뭔가 오해하고 있던 게 있어서... 지금은 잘 풀렸고, 이런 일은 자주 없어요, 사실. 가끔 눈 돌아가서 그러는거지, 평소엔 단순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 ... ?"
" 저, 그.. 사탕 좋아하세요?"
눈 질끈 감고 건넸다. 1층에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수중에는 돈이 별로 없어서 시례로 줄 것이 마땅치 않았다. 예쁜 벚꽃색. 사실 딸기우유 맛이었지만, 불현듯 그가 스쳤다. 충동적으로 사버린 사탕을, 충동적으로 건네고 있다. 히멀건 손이 불쑥 창살틈을 들어오더니 쏙 가져갔다.
" 고마우면 이거 불 좀 땡겨줘."
텅 빈 손에 놓인 건 하얀 장초였다. 군말없이 가스레인지 불을 켜 붙였다. 라이터를 다 써서. 무안한지 답지않게 군말을 붙였다.
" 가스레인지도 없어요?"
" 밥을 안 먹으니까."
" ... 근데 어떻게 살아요?"
" 나가서 먹으니까."
..아. 얼나간 소리를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가 요리라니. 게다가 이렇게 더운 날, 게다가 혼자 밥을 먹고. 음. 역시 그런 건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 내 이름은 링이에요!"
" ..."
" 우리 이웃인데 통성명도 안 해요?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언제까지 사쿠라씨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 ..."
" ...어, 지금 눈빛으로 욕했다."
" 알면 꺼져."
" 그럼 아저씨라고 부를거예요. 이름 뭐예요?"
" 부르든가."
틈도 없네. 사람 죽일 때도 저 표정일거야. 응.
우리는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창살에 기대 섰다. 아저씨는 담배를 피고 나는 라임레몬맛 막대사탕을 먹었다. 나는 몇 번 더 아저씨의 신상을 캐기 위해 노력했지만 건진 것은 별 거 없었다. 나이는 열다섯 이후로 세지 않았다는 것, 태어난 곳은 홍콩이 아니고, 머리는 시뻘건 색으로 했다가 물이 빠진 거라는 것 정도. 대화가 뚝뚝 끊겼다. 그런데도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편안한 고요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
아저씨가 장초를 세개를 마악 필터까지 태웠을 즈음, 나는 사탕을 다 먹었다. 배가 출출했지만 더워서 다른 걸 먹고 싶단 생각은 없었다. 이제 슬슬 일을 해야했다. 간단하게 발목이니 손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작업복을 껴입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달리 특별한 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치장하면 되는거니까. 백돼지는 그런 건 너무 범죄자스럽다고 했지만 나는 뻔뻔하게 굴었다. 나는 옷빨이 살아서 홍콩 사람들이 다 패션으로 볼 걸. 십자가 목걸이를 걸었다. 야시장 근처를 지나다 노점상에서 샀다. 뭐 신앙이랄 것도 없고 믿는 신도 없지만 일종의 죄의식이랄까. 나는 죽이지도 않았고, 생살을 가르지도 않았지만, 살아있는 장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건 누가 봐도 도덕적이진 못했으니까. 하긴 이 곳에 윤리가 어딨고 도덕이 어딨겠냐마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나를 보며 편안한 목소리가 굴러들었다.
" 어디 가?"
" 일이요."
" 니가?"
" 저 정육점에서 일하거든요."
매사 무심한 그였지만 뭐하는덴진 대강 알고 있는가 싶었다. 아아, 알만하단 듯 감탄사를 내뱉곤 다시 하얀 연기를 내뱉는다. 끈 조차 너덜너덜한 스니커즈화를 신고 방을 나섰다. 이제 봤는데 아저씨네 방문 문이 푹푹 패었다. 어제 백돼지의 소행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단을 향해 내려가는데 끼익 하며 문이 열렸다. 내밀어진 건 하얀 팔과 검은색 모자. 아. 그리고 아저씨.
" 너 누가봐도 비행청소년 같은 건 알지?"
" 땡큐."
다행이다. 얼굴을 가릴만한 걸 찾았다. 긴 다갈색 머리를 반으로 갈라 앞으로 빼고 모자를 쓰자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했다. 시야는 좀 가렸지만 얼굴에 피멍 든 여자애는 장기매매가 아니라 가출청소년으로 신고받을 위험성이 더 컸다. 백돼지가 준 반창고라도 붙여야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 다녀 와."
닫혀가는 문틈 새로 무심한 다정이 삐져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왜인지 코 끝이 시큰해지는 인사였다.
*
구룡성채로 돌아오는 걸음이 빨라졌다. 조금. 들떴다. 구룡성채에서는 대개 살인청부, 마약, 도박, 매춘이 판을 쳤지만 그래도 엄연히 생산 기능도 있었다. 골목의 끝 반지하에서는 딤섬을 팔았다. 이 곳 자체가 벌레가 드글드글 하니 위생 상태는 보장할 수 없었지만, 가격도 싸고 맛도 그럭저럭 괜찮아서 홍콩 시내의 딤섬은 모두 이 곳에서 만들어진단 소문도 돌았다. 밥을 안 먹으니까, 아저씨의 목소리가 온종일 귀에서 웅웅 거렸다. 왜 신경이 쓰였지. 당사자도 모르는 약속을 계획했다. 아저씨와 딤섬을 먹어야 겠다.
정육점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한참을 걸었으니 잔뜩 땀이 배었다. 피 묻은 장갑을 낀 닥터가 나를 반겼다. 계속 고른 말인데 막상 꺼내려니 망설이게 됐다. 다리가 긴 의자에 걸터 앉으면서 타이밍만 노렸다. 집도가 끝나던 중이었는지 일회용 수술 장갑을 벗었다.
" 웬 일이야?"
" 닥터. 나 정산은 언제 해줄거야?"
백돼지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긴 이 짓을 십년 넘게 해오면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한 건 처음이었다. 금고 번호를 누르면서도 미심쩍은 눈이었다. 괜히 딴청을 부렸다. 마스크를 낀 게 다행이지.
" 어디 쓰게?"
" 어... 그냥."
저녁 약속이 있어서.
*
방금 사온 따끈한 딤섬을 가지고 문을 두드렸다. 잤나. 머리는 산발이 되어선 문을 열었다. 아마 이 곳에 온 타인은 내가 처음이겠지. 아저씨한테 딤섬 봉지를 흔들어보이자 시큰둥하게 찬장을 열어 술을 꺼냈다. 재떨이만이 썰렁하게 올려진 탁상에 수저니 음식같은 걸 차렸다. 집주인은 환영 인사도 없었는데 나만 조잘조잘 말을 늘어놨다.
" 모자 잘 썼어요.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 그리구 먼젓번에 도와주신 일도 있고. 나름 은혜인데 갚아야하지 않겠어요? 오늘 정산 받은 날이라 사는 거니까 열아홉 먹은 여자애한테 얻어먹는다고 너무 미안해하진 마세요. 안 갚으면 내가 더 미안해질까봐 그러는 거거든요. 아, 근데 아저씨 방은 내 방보다 좀 넓네요. 여기 이사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나는 그렇게 유명한 헌터 사쿠라가 여기 사는줄도 몰랐잖아요. 맨날 소문으로만 들었지, 진짜 내 옆방에 살고 있을 줄은. 근데 그거 알아요? 구룡성채에서는 같은 평수, 같은 구조가 하나도 없대요. 워낙 불법 신축 그런 거 많아서. 아저씨네 집은 확실히 넓네요. 내 방은 발 쭉 뻗으면 끝나거든요. 아저씨는 침대도 있구. 뭐 그래도 내 방도 있을 건 다 있어요. 세면대랑, 변기랑, 가스레인지랑, 이불이랑, 신발장이랑 그런거. 이런 탁상은 사치거든요. 저는 그냥 무릎에 올려놓고 먹어요. 솔직히 혼자 먹으려면 입맛도 없고 해서."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고 분위기를 살펴가며 말을 늘이는 스타일도 아니었는데, 아저씨의 편안한 침묵이 안 해도 될 말까지 늘어놓게 만들었다. 내가 조잘거리며 상을 마저 차릴 동안 아저씨는 마오타이를 내 몫으로 따라놨다. 아저씨는 벌써 두 잔째였다. 독하기로 유명한 술인데도 얼굴 색 하나 안 변했다.
" 아. 아저씨. 속 쓰려요. 안주도 먹어가면서 마셔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한다. 아. 정 없게.
" 근데 아저씨는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 니가 말이 너무 많은 게 아니고?"
술 냄새만으로도 취기가 돌았다. 히. 나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 아저씨 앞에만 있으면 말이 그냥 나오네요.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난 아저씨가 왜 이렇게 편하지? 오늘 처음 본 사이가 아닌 것 같아. 중얼거리며 딤섬과 함께 쓴 술을 한 잔 들이켰다. 목구멍이 따라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독한 걸 어떻게 물 넘기듯이 마셨지. 눈을 찌푸리자 낮게 웃었다. 진짜 처음 본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딤섬 두 판은 동나고 그 독한 술도 바닥이 보였다. 난 두 잔 마시고 정신이 나갔고 나머지는 아저씨 몫이었다. 아저씨는 손도 잘생겼네요. 얼굴을 양손에 괴고 낯 뜨거운 얘기만 내뱉었다. 아저씨는 그 독한 술을 마시고도 멀쩡했는데 왜인지 그 말을 할 때쯤은 열기로 물들었다. 식혀준다고 찬 손을 갖다 댔지만 아저씨의 얼굴은 더 발개지기만 했다.
그걸 바라보던 내 얼굴은 덩달아 새빨개지기 시작했는데 열기가 민망해 탁상에 깔린 유리에 얼굴을 갖다댔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간장 종지가 떨어졌다. 내 팔꿈치에 밀려 떨어진 모양이었다. 숨을 들이쉬면서 번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없게도 간장은 아저씨의 티셔츠를 적시고 난 후였다. 죄송해요. 금세 울상이 되어 휴지를 찾았다. 말리는 손길을 무시하고 축축한 기를 없애로 휴지로 꾹꾹 누르다가 안쪽도 닦으려 티셔츠를 걷어올렸다. 당황해서 일련의 동작이 뇌를 거치지 않았다.
" ...아."
잔잔하게 자리잡은 잔근육 사이로 흉터가 가득했다. 맞다. 좋은 이웃사촌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걸 단번에 무력화시켰다. 맞다. 이 사람은 사람을 죽이고 나는 장기를 내다 팔지. 누군가 내 등을 발로 차서 시궁창으로 떠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네 자리는 여기라고. 따듯한 분위기에 잠시 착각할 뻔 했다. 그냥 우리도 일반 사람들이라고. 밑바닥 인생이 아니라 힘들어도 먹고 살 만한 삶을 살고 있는 줄로. 착각, 할 뻔 했다. 내 손이 느려지자 아저씨가 내 손을 잡고 떨어뜨렸다. 나는 얼마 안 남은 술을 홀짝 거리며 마셨고 아저씨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술 보다 쓰디쓴 현실이었다. 아저씨도 갑자기 찾아온 적막에 민망해졌는지 레코드판을 연결했다. 이국의 가수가 느끼한 목소리로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다. 고개를 까딱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자 분위기는 금세 풀렸다. 현실에 발을 딛고 꿈을 꾸자. 아저씨와 함께라면 그 정도 사치는 용인될 것 같았다.
구룡성채 바로 옆은 공항이었다. 여기가 14층 까지만 증축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기도 했다. 운이 좋으면 가끔 낮게 나는 비행기를 마주할 때가 있다. 나는 가끔 그 비행기가 내게로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지금도 그랬다. 야간 비행하는 비행기. 괜히 들떠서 창가로 뛰어가서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는 똑바른 걸음으로 내 옆에 섰다. 관제탑은 반짝거리고 그 너머의 마천루는 화려하게 빛났다. 경치는 좋았다. 먼 이국 땅에서는 홍콩의 야경을 보려고 비행기를 타서 바다를 건너 온다는데, 그런 면에 있어서 우리는 이득이었다. 돈 안내고 환상적인 야경을 볼 수 있었으니까. 아저씨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 사람들은 다 여기가 끔찍하다고들 하던데. 나는 이 곳이 좋아요. 여기는 내 고향이에요."
" ..."
" 아저씨는 구룡성채 사람 아니죠? 어디서 살았어요? 왜 이 곳으로 온 거예요? 여긴 밑바닥 인생이 모여사는 곳인데."
" 내가 밑바닥 인생이니까."
" 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럼 어디서 왔는데요?"
" ..."
잠시 말이 없었다. 아저씨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고 늦여름의 축축한 바람이 스쳤다.
" 중국에 있었지. 태어난 곳은 한국이고. 대구.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도 안나. 어떤 곳인지, 내 부모는 누구고 나는 어쩌다 여기로 흘러들어왔으며, 왜 이런 인생을 살게 됐는지."
" 한국... 이구나. 그럼 본명은 뭔데요? 한국에서는 이름이 있었을 거 아녜요."
" 민윤기."
민 윤 기 . 속으로 여섯번 쯤 곱씹었다. 민윤기. 절대 잊지 않으려고. 민윤기. 이름 석자를 심장에 새겨넣고 몇 번이나 빨간색으로 밑줄을 쳤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무작정 신상을 털었던 것 보단 수확이 컸다. 술을 마시니 입이 트였나, 아님 좀, 우리 가까워진건가? 등 뒤에선 간드러지는 여자 목소리가 노래를 이어 불렀다.
*
푸르스름하게 동이 텄다. 머리를 팔로 받치고 그 애를 바라봤다. 산발같던 머리를 걷어내니 오밀조밀 자리 잡은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상해 길거리에서 동냥하고 살 때 나를 거둬줬던 보스는 늘상 말했다. 킬러는 삶과 죽음에 한 발씩 걸쳐놓고 사는 사람이라고. 매 순간이 삶과 죽음의 문턱이었다. 내 몸의 흉터들은 모두 내가 살아있다는 증명이었는데 그 애는 이런 것과는 낯이 설었던 모양이다. 찰나 떨렸던 손 끝을 봤다. 지난 밤을 기억했다. 내 상처위로 쏟아지듯 입맞춤이 내렸다. 삶을 축복받는 기분이었다.
온전하지 못한 삶이라면, 절름발이 생이라면, 우리 한 발씩 내어줄 순 없을까. 내 온통을 들쑤시며 뒤흔드는 아이야. 눈물나도록 눈부신 아이야. 우리, 성한 곳 하나 없는 몸뚱아리를 끌어안자.
링-
빨고 만지고 핥아도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
슬럼가와 번화가는 정말 한 끗 차이라서 골목을 잘 못 들면 곧장 마천루로 새기 쉬웠다. 네온사인이 눈 아프도록 번쩍거리고, 쿵쿵 거리는 노랫소리가 뱃속 깊은 곳 까지 울리는 곳. 의뢰를 마치고 급히 나가다가 한 블럭 먼저 나와버렸다. 수백번을 오고 간 곳인데 확실히 정신을 놓는 일이 잦아지긴 했다. 헤진 옷이나 신발은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슬쩍 고개를 들기만 하면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 걸어다녔다. 정작 그들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 나는 자꾸만 곁눈질 했다.
빨간 또각구두. 똑단발. 짧은 치마. 그런 것들.
이 곳 사람들도 물밑에서는 다 마약이니 도박이니 했지만 목적이 달랐다. 구룡성 사람들은 모든 것이 살기 위해서였다. 아편에 중독되어 미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마지막 한 탕을 위해. 이 곳 사람들은 여유였지만 우리에겐 전부였다. 삶의 모든 걸 걸고, 불꽃으로 발을 담그는 삶.
쨍한 조명에 불나방들이 달겨들다가 여명을 내며 스러졌다.
*
아저씨와는 이상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같은 날개뼈에서 돋아난 우리는 서로의 가장 약한 부분을 알고 앓고 안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갈라진 퍼즐처럼 아가리가 들어맞았다. 우리가 같이 살게 된 수순은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건지도 몰랐다. 초반엔 백돼지에게 정산을 받았지만, 내가 그러는 걸 알고는 아저씨가 카드를 쥐어줬다. 쓸 데가 없어서 그러니까 쓰는 것 좀 도우라고. 간간히 식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들었다. 아직도 가시지 않는 더위때문에 아주 가끔이긴 했다. 노을이 창살을 타고 길게 늘어지면 마주앉아 저녁을 먹었다. 같은 침대에서 눈 감고 눈을 떴다. 아저씨네 집에서 나오는 건 꽤 민망한 일이었다. 전깃줄에 앉아있는 까마귀도 지난 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둘 다 간헐적으로 식사하는 편이라 아침은 대개 걸렀다. 그래도 입이 텁텁해서 양치를 하면서 아저씨에게 말했다.
" 홍콩의 여자들은 뾰족구두를 신고 똑단발을 하더라구요."
" ..."
" ...예쁘더라."
아저씨는 여직 침대에 누워 대꾸도 없었다. 아저씨는 온 신경이 예민해서 제대로 잠에 드는 걸 보지 못했는데, 대신 아침에 늦장을 부렸다. 얕고 길게. 그게 아저씨의 수면패턴이었다. 아저씨를 불퉁하게 돌아봤다. 무반응. 바랄 걸 바래야지. 밑창이 떨어지려고 하는 스니커즈를 질끈 묶고 틈이 맞질 않는 문을 열어재꼈다. 자긴 이상형이 예쁜 여자라면서.
" 다녀 와."
다 잠긴 목소리로 하는 인사는 역시나 다정했다.
*
오는 길은 항상 걸음이 가벼웠다. 텅 빈 방이 아니라 아저씨가 나를 반겨주니까.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평소와는 다른 컴컴한 방. 혹시나 해서 내 방에 가보았지만 역시 인적은 없었다. 십 구년을 혼자 살았고 같이 산 건 겨우 한 달 남짓인데 사무치게 외롭다. 아저씨의 침대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평소와는 달리 해도 빨리 졌다. 나는 아저씨의 방에 혼자 있어본 적이 없어서 이 상황이 너무 낯설었다. 몸을 일으켰다 누웠다 창밖을 내다봤다가 결국 손톱새로 피가 어렸다. 자꾸 물어뜯어서 손가락 끝이 따가웠다.
아저씨가 돌아온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민윤기!
" 링."
닥터는 때때로 말했다. 마악 생을 마친 사람의 살을 가를 때는 섬찟한 공포가 찾아든다고. 닥터는 그걸 영혼이라고 불렀다. 영혼이 끈적하게 팔뚝을, 등허리를 감싸고 돌아서 한기가 서린다고. 아저씨의 몸에서 그 냉기가 흘렀다. 영혼의 온도. 아저씨는 피칠갑을 한 채로 영혼을 두르고 왔다. 아, 맞다. 헌터, 사쿠라.
" 선물."
아저씨는 검붉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나는 그 혈흔의 출처가 더 궁금했지만 눈빛이 잔뜩 가라앉아서 뭘 묻지도 못하고 가만히 받아들었다. 아저씨는 고개를 까닥했다. 쇼핑백 안에는 빨간 스팽글이 박힌 하이힐과 검은색 원피스가 들어 있었다. 아저씨의 옆구리에서 피가 퐁퐁 솟아났다. 내 선물을 사다가 늦었을까, 성공률 100%를 자랑하던 헌터 사쿠라는. 한 눈 팔다가 다친거지. 이 도시에 적을 많이 둔 사람이니까.
" 이걸 신고는 못 뛰겠네요."
" 입어 봐."
부끄러움도 없이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얇은 굽과 헐거운 사이즈때문에 걸음이 퍽 위태로웠다. 검은색 원피스는 몸을 착 감쌌다. 불안한 걸음걸이로 아저씨 앞에 섰다.
" 예쁘네."
아저씨는 레코드판에 아주 오래 된 블루스를 끼웠다. 먼지가 쌓여 기괴하게 이어붙여진 블루스를 들으며 우리는 춤을 췄다. 새빨간 피를 장갑 대신 끼고 서로의 발을 밟으며 블루스를 췄다. 커다란 음악소리에 방음이 안 되는 구룡성 사람들은 쿵쿵 거리며 불만을 표출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소음은 반주가 되고, 현실은 백일몽이 되었다. 우리는 눈을 감고, 현실을 가리고, 희미한 조명 아래서 꿈을 꿨다. 우리는 조용히 입을 맞췄다. 밀어는 뱃 속에서만 머물렀다. 입 밖으로 내서 정의내리기엔 너무 버거운 감정이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엉망이고 가장 완벽한 블루스를 췄다.
그리고 울고 있는 나의 달
울고 있는 나의 달.
*
백돼지는 자꾸 내 근황을 물었다. 너 누구랑 같이 사냐? 고개를 모로 젓고 주소지를 달라고 재촉했다.
" 오늘은 없어."
" ... 왜요?"
" 다른 애들이 벌써 다 했어."
백돼지는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집도실로 향했다. 불안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이 곳에서 11년을 일했다. 그 날 중에 일이 없던 날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만 나이가 나이니만큼 그랬다. 백 육십이 조금 넘는 키는, 얼굴은 이제 누가 봐도 아이의 그것은 아니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너무 버거웠다.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 링!"
" ... 메이?"
언뜻 보고서야 못 알아 볼 뻔 했다. 나와 같이 자랐던 정육점 아이들 중 하나였다. 짙은 눈화장에 핏빛 입술. 약을 하는지 동공이 살짝 풀려 있었다. 하기야 이 곳에서 맨정신인 사람을 구하는 게 더 힘들기야 했지마는. 메이는 열 다섯 쯤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꼼짝없이 죽어서 장기로 내다 팔린 줄 알았는데. 워낙 미로같은 곳이다보니 동선이 엇갈리면 몇년 씩 못 보기도 했다. 확실히 활동 반경도, 시간도 다를테니까.
" 얘 못 본 새에 좀 예뻐졌다."
" ... 용건이 뭐야?"
" 까칠한 건 여전하네. 친구끼리 얘기도 못해?"
줄곧 개인플레이였으니 정육점 아이들이라고 모두 형제애로 뭉쳐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얼굴 본 정이 몇 년인가, 싶어서 순순히 걸음에 맞췄다. 하이힐을 신고도 편하게 움직이는 메이를 보며 새삼 시간을 체감했다. 우리는 아주 다른 길을 걸었네.
" 너 요새 누구랑 동거해?"
" 어?"
" 맞나보네? 워낙 좁아서 빨리 퍼진다, 소문. 남자야?"
" ... 누가 말했어?"
" 음, 글쎄. 까마귀?"
매섭게 쏘아보니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돌렸다. 머리 상한 것 좀 봐. 너 우리 집 와서 관리 좀 받아라. 너 오랜만이니까 내가 좀 봐줄게. 내키든 내키지 않든 이미 따라나선 길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붕 떠서 지금 가기도 약간 애매했다. 아저씨는 간만에 잠든 것 같았으니까 인기척을 내기도 뭐했고.
메이의 집은 아저씨 방과 엇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은 화려한 화장대 정도일까. 머리를 감고 나오니 한참을 매만지며 불평질이었다.
" 머리 너무 상했다. 이거 그냥 자르는게 나을 것 같은데? 요새 홍콩에선 단발이 유행인데."
예쁘네.
아저씨의 그 목소리가 멍멍했다. 눈동자를 몇번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링. 너 생각 잘 했어. 너 머리 작아서 단발로 자르면 엄청 잘 어울릴걸? 메이는 간만에 소녀다운 웃음을 지었다. 어디서 가위니 빗이니 가져오더니 망설임없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몇 년을 길러온 머리를 자르자니 약간 아쉽기도 했지만 별 미련은 없었다. 과연 완성된 머리는 내가 보기에도 좀 괜찮았다. 관리를 하도 안 해서 산발같던 머리는 어디 가고 깔끔하게 잘린 머리가 낯설고 가벼웠다. 화장도 해줄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곧장 분을 들이밀더라. 어렸을 때부터 워낙 손재주는 좋았던 애라 가만히 있었다. 심심해? 사탕 먹을래? 멍하니 있는 내게 메이가 사탕을 건넸다. 입에 넣고 대화를 이었다.
" 근데 너 그 남자 누군데?"
" ... 왜."
" 근데, 링- 사랑은 안 돼."
" ... 그런 거 아니야."
" 사랑에 빠졌다는 건 진짜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뜻이거든."
섀도우를 바르느라 눈을 감은 채라 메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분명 슬픈 웃음일거라 생각했다. 나른한 오후의 바람은 약간 서늘했다.
" 사탕 다 먹으면 립스틱 발라줄게. 지금도 예쁜데, 립만 발라도 얼굴이 확 살아."
" 근데, 메이."
줄곧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 너 요새 뭐 해?"
" ...어?"
" 뭐하는데 이 화장품에, 하이힐에,"
" 나 뭣 좀 파느라구."
" ... 뭘 파는데?"
" 음,"
봄?
매춘. 賣春. 모든 정황이 한 방향이었는데 추억에 젖었다. 알아챈 건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졸음이 몰렸다.
*
" ... 하고 좀 말랐긴 해도 얼굴이 괜찮으니까 말입니다.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겁니다."
" 흠..."
" 지금 안 데려가시면 이런 물건 어디서 못 구하신다니까요."
개소리.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탁한 붉은빛 조명에 먼지가 부유했다. 씨발, 메이. 손이 뒤로 묶였다. 사탕에 수면제가 들어있던가. 투명한 창문 밖으로 보이는 골목은 어둑했다. 이 씨발 미친. 욕이 절로 터졌다.
" 아, 깼네요. 링. 네 주인님이시다."
입을 열고 싶은데 무슨 풀이라도 발라놨는지 달싹거리기도 힘들었다. 욕심이 뒤룩뒤룩 붙은 사내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평소라면 눈깔을 뽑아버리니 안구는 $1.525니 험악한 말을 지껄였겠지만 지금은 그저 매섭게 노려보는 수 밖에 없었다.
" 눈빛이 좋네. 저걸로 하겠습니다."
이 좇같은. 악에 받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웬 장정들이 나를 들처업었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경우의 수는? 0에 육박했지만 나는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뒷좌석에 짐짝처럼 실어졌고 그 사내는 운전석에 탔다. 백미러로 힐끔 바라보며 웃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홍콩 시내는 어차피 내 손안에 있었다. 창문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들을 빠르게 외웠다. 옷은 언제 갈아입힌건지 짙은 파란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다행인건 십자가 목걸이가 그대로란 것. 운전에 한눈 판 틈을 타 목걸이를 끊고 이빨로 뚜껑을 땄다.
괜한 악세사리였으면 사치였겠지. 초소형 잭 나이프가 내장된 목걸이로 티안나게 발목의 줄을 끊었다. 맘 같아서는 저 새끼 눈알도 뽑아버리고 싶지만 일단 탈출이 우선이었다. 조심스레 칼을 고쳐잡아 손목의 끈도 풀었다. 덜컹거리는 차때문에 손목이 얕게 베었다. 아픈 티도 낼 수 없었다. 숨소리도 조심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끼익-
빨간 불. 동시에 손목의 끈도 풀렸다. 곧장 차문을 박차고 무작정 달렸다. 어디로 가야 안 잡힐까. 홍콩의 밤거리를 미친 듯이 뛰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부딪히고 발에 익지 않은 힐에 굽이 부러지고 발목이 꺾였다. 멈출 수가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 빨리 달려본 건 처음이었다. 그 새끼는 차를 타고 있었지만 달음박질 하나는 자신있었다. 내 달리기 실력은 구룡성 내에서도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괜히 정육점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고. 10분여를 달리자 멀리 구룡성채가 보였다. 벌써부터 눈물이 터졌다. 아저씨, 아저씨.
요란하게 엔진소리가 들렸다. 씨발. 하는 짓은 쓰레기 같아도 머리는 쓰는 놈이었던 모양이었다. 내 뒤를 쫓아오는 모습에 기겁했다. 이대로라면 잡힐 수도 있었다. 더 힘껏 내달렸다. 피맛이 입가를 메웠다. 숨 쉬는 건 어느 순간부터 잊었다. 내가 구룡성에 들어가자마자 그 새끼도 따라 내렸다. 구룡성은 워낙 미로같았고, 이 곳을 꿰뚫는 건 평생을 여기 살아도 힘들었다. 나야 어렸을때부터 여길 들쑤셨다지만. 3층, 11층, 2층, 5층, 미친 듯이 골목을 헤집었지만 내 뒤를 바투 쫓는 덕분에 따돌려지지가 않았다.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마지막 방도였다. 6층. 603호. 아저씨의 방문을 미친듯이 두드렸다. 기다렸단 듯 문이 열렸다. 내 머리채를 잡는 손길은 그와 동시였다.
" 이 미친 년이!"
" ..."
아저씨는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보였다. 굽이 부러지고 눈물로 범벅이 된 내 모습과, 내 머리채를 잡은 낯선 남자. 입이 아직도 꽁꽁 묶여 상황 설명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눈물만 뚝뚝 흘리는데,
" 죄송합니다. 오늘 제가 산 창년데, 도망을 가서요."
멍청한 놈. 지 입으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해줬다. 허참. 아저씨가 어이없단 듯 그 새끼를 쳐다봤다. 1초, 2초, 3초.
" 죽기 싫으면 손 떼."
" ... 뭐?"
아저씨는 그대로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못 할 것 같아? 당황해서 벌어진 남자의 입에 총구를 쑤셔박았다. 남자는 이제 상황파악이 된 모양인지 내 머리채를 잡은 손을 풀고 항복의 제스처를 했다. 아저씨는 망설임도 없었다. 팡. 남자의 대가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총성이야 이 곳에서는 기상벨만큼 익숙한 소음이었다. 아저씨는 다 죽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빈 내 방에 쳐넣었다. 복도를 깨끗이 걸레질 했다. 사람이 죽는 걸 바로 옆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아저씨의 침대에 앉자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팔다리에 그 새끼 피가 잔뜩이었다. 숨소리가 불규칙했다. 방에 들어온 아저씨가 화장실에 들어가려다 그런 나를 봤다.
이제 어떡해요- 우리- ?
눈빛으로 대신 한 물음에 아저씨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 혀도 잘리지 않고 발가락도 그대로이니 충분해. 이십 번 절망해도 한 번 사랑할 수 있으니."
수도 없는 생을 앗아갔지만 사욕으로 사람을 죽인 건 처음이었다. 나름의 철칙을 가지고 움직였다. 감정에 쏠려 사람을 죽인다면 언젠가 그대로 돌아올거라고. 뼈에 새긴 다짐이었다. 그걸 무참히 짓밟은 게 이 애다. 내 모든 신념을 무력화시키고, 모든 경계를 해제시켰다. 그렇게 눈이 뒤집혀 총을 쏜 건 처음이었다. 대담하게 굴었지만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매음굴에서 여자를 살 정도라면 돈도, 사회적 명망도 있는 사람일테지. 언젠간 잡힐 꼬리였다.
어쩌지. 너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 감정은 사치다. 연민이고 두려움이고 망설임이고 동정이고 집어치워. 나는 그렇게 잃은 아이들이 수두룩하지, 네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면 다음 순간에 심장이 꿰뚫리는 건 너다.]
눈을 팔로 가렸다. 보스의 목소리는 끊기지 않고 괴롭혔다.
[ 제일 위험한 건 뭔지 아니? 그게 바로 사랑. 그건 아주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눈 멀고 귀 먹게 만들지. 감각이 무뎌지는 건 킬러에겐 최악이야. 명심해라. 사랑을, 하지 마라.]
미안. 근데 그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겨버렸다. 링을 만나고 두가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죽은 듯이 살지, 산 듯이 죽을지. 딱 한 치 앞만 생각하기로 했다. 너와 함께 얼마나 살아갈지 모르겠지만, 우리 딱. 한 치 앞만을 보면서 살자.
*
AM 3:30
아저씨가 몸을 흔들어 깨웠다. 링- 우리 도망갈래? 하며 쓰게 웃었다. 아저씨도 현실이 두렵죠. 악몽에서 깨어났는데 더한 현실을 마주했다.
백돼지의 금고를 뒤졌다. 돈은 딱 반만 챙겼다. 나 이제 은퇴니까 위로금 받아야되잖아. 나머지는 이걸루. 아저씨의 손을 이끌고 미로같은 구룡성을 뒤졌다. 그리고 발견했다. 검은 지프트럭. 백돼지가 큰 맘 먹고 산 것이지만 오늘 떠나는 사람들한테 그런 자잘한 사정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아저씨는 시동을 걸었다. 일단 홍콩은 경찰이 깔렸을걸요. 우리 바다로 가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싱긋 웃자 아저씨도 따라 웃었다.
지프는 부드럽게 구룡성을 뒤로 했다. 머리를 빼꼼 내밀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젠 안녕, 아름다운 나의 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