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날은 솔직히 조금 긴가민가했다. 약속을 하긴 했는데, 나 혼자 한 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이 대답도 안했는데 과연 올까. 기대 반, 의심 반이었다. 그러나 그 날 저녁에도, 그 다음 날 저녁에도, 그 다음 날의 다음 날 저녁에도 그 후로도 계속 그는 나타나주었다. 그가 나타나는게 확실해진 후론 그를 기다리는 동안의 어둠이 두렵지않았다. 어차피 그가 오면 환해질테니까, 두려울 필요가 없었다. 그와 만나면 나는 종알종알 이야기를 했다. 유치원 얘기, 내가 좋아하는 만화 얘기, 엄마아빠 얘기, 오전 동안의 얘기. 그러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듣고있다는 걸 알았다. 내 일방적인 약속 때도 침묵했지만 이렇게 약속을 지키고 있으니까 내게 그의 반응이나 대답은 없어도 되었다. 나는 그와 산을 걷기도 했는데 이따금 들리는 산짐승 소리에 그의 뒤에 숨으면 그는 말없이 나를 한 팔에 안고 걸었다. 산에 있는 열매들을 가리키며 먹어도 되냐고 물으면 고개를 젓거나 그냥 두었다. 그 덕에 나는 산에 있는 열매들 중 맛있는 열매가 무엇인지 박사가 됐다. 그와 있는 시간은 그렇게 조용한 편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하거나, 함께 산을 걷거나, 이따금 내가 나무에 오르겠다고 버둥거리면 가장 낮고 튼튼한 가지에 나를 안아 잠시 앉혀주거나.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이름도 몰랐고, 정체도 몰랐고, 나이도 몰랐고, 사는 곳도 몰랐으며 목소리도 들은 적 없었다. 다만, 내게 퍽 다정하다는 것 정도.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와 있을 수 있어서 혼자인 오전도 즐거웠다.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줘야지하는 생각에 모든 것이 흥미로웠으니까. 엄마와 아빠가 날 찾으러오지않는 것도 신경쓰이지않았다. 소리치지도, 울지도, 짜증내지도 않고 사실은 말도 않는 그가 좋았으니까. 그 사람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것 처럼 어린 나의 암흑같던 순간에 나타난 빛이었고 안식처였다. 나는 그가 참 좋았다. ㅡ 그와의 시간이 쌓여가니 당연하게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날 기다린 다음 순간처럼, 정해진 결말처럼 헤어짐의 순간도 왔다. 엄마와 아빠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할머니는 기쁜 얼굴로 내게 소식을 전하셨다. 엄마와 아빠가 날 데리러온다고. 잘 해결됐다고. 할머니는 좋겠다며 나를 안아주었지만 나는 눈물이 났다. 할머니는 늦어도 저녁 전엔 엄마와 아빠가 도착할 것이라며 짐을 싸야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에 곧장 집을 나왔다. 페가 다 마른듯 거칠게 숨을 내쉬게 될 때까지 뛰었다. 낮인데, 낮이라서 그 사람이 안 올텐데, 간다고 말해줘야하는데. 나무 근처를, 함께 걸었던 산 구석구석을 다 뛰어다니며 그 사람을 찾아도 보이지않았다. 뭐라고 부르며 찾을 수도 없었다. 그 사람은 이름을 가르쳐주지않았고, 나도 그저 있잖아요-하고 이야기를 했을 뿐 그를 따로 부를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 사람의 침묵이 처음 미워진 순간이었다. 서러움에, 아쉬움에, 속상함에. 그 모든 게 한데 섞인 슬픔에 울었다. 엉엉 울면서도 계속 산을 뛰어다녔다. 이리로, 저리로 뛰어도 여전히 그 사람은 없는데 뛰었다. 한참을 뛰어다니면서 시간이 가는 걸 느끼자 조급해졌다. 나는 다시 나무로 돌아왔다. 결국은 만나도 나무일 것 같아서. 울음이 그쳐지지 않아서, 삼켜지지않아서 울면서 소리쳤다. "밤이에요, 밤이에요!" 뭐라고 부를지몰라서. 내게 그저 포근했어서. 날 행복하게해줘서. 요정인가, 천사인가 고민은 했어도 뭐라고 결론내린 적이 없어서. 그저 밤이라고, 와야한다고 소리칠 수 밖에 없었다. "밤이에요! 나 여기 있어요! 나 가야해요, 엄마랑 아빠 지금 온대요, 가야된대요." 계속 뛰어다녔던 것의 결과와 같이 나타나지않는 그 사람이, 나의 상황이 다 화가 나고 슬펐다. 가기 싫은데. 가기싫은데. 가야한다고 말하기 싫은데. 서러움이 터지며 울음이 세졌다. 밤이라고, 가기싫다고, 간다고 말하기싫다고, 보고싶다고 외치는 말이 울음을 이기지못해 그저 엉엉 울었다. 나무 곁에 주저앉아 엉엉 울면서도 눈은 계속 그 사람을 찾았다. 왜 지금은 어둡지않은지 하늘이 너무 원망스러웠고, 지금 온다는 엄마와 아빠는 너무 미웠고, 나타나지않는 그 사람은 너무. 보고싶었다. 끅끅 울면서 밤이에요를 겨우 뱉어내며 울어도 그 사람은 보이지않았다. 그 사람은 오지않고 할머니가 날 찾으러 왔을 뿐이었다. 할머니의 손에 붙들려 내려오면서도 나는 계속 뒤돌아서 소리쳤다. 다시 오겠다고, 다시 올테니까 어디가지 말라고, 금방 온다고, 다시 온다고. 너무 울어 다리가 다 풀리면서도 계속 소리쳤다. 어디있어도, 이 산에 있을 것 같은 그 사람에게 들리도록 크게. ㅡ 일방적으로 했던 내 약속은 지켜지지못했다. 엄마와 아빠가 데리러 온 것은 나뿐만이 아닌 할머니도 함께 였고, 나는 다시 할머니댁을 찾을 일이 없었다. 할머니의 짐을 마저 옮기고, 집을 정리하러 갈 때 따라나서겠다고 떼를 써도 어른들 일하는데 방해가 된다며 따라갈 수 없었다. 대답도 못들었고, 얼굴은 못봤어도 기다릴 것 같은데. 매일을 울었었다. 정말 매일. 초등학교 때까진 정말 매일 울거나, 생각나면 갑자기 울거나 그랬다. 그 이후로는 생각이 나면 그게 꿈이었는지, 진짜였는지 헷갈리는 정도가 됐다 시간이 흘렀으니까. 그래도 가끔 꿈에 나타나면 울컥해서 울기는 했지만. 그리고 십년이 넘게 흐른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