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k high - over inst
꿈을 꿨다. 익숙하다는 듯이 가쁜 숨을 여러번 뱉어내 이마에 맺혀있던 땀을 손으로 훔쳤다. 흑색 머리를 한 단정한 뒤통수를 끝으로 교복을 입은 앳된 남학생의 모습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옛날에도 종종 곤한 잠에 취해있던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인물이기도 했다. 자의적으로 깨어버린 정신 사이로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뒤를 돌아보는 형체가 서툴지 않게 흐릿해져갔다. 항상 변함없이 같은 패턴이었다. 손만,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지만 언제나 손가락 마디를 움직여 그의 손을 잡으려하면 그는 흔적도 없이 연기처럼 바람에 날라갔다. 얼굴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그 남자의 손을 왜 이토록 그리워 갈망하는지 나 자신조차 가늠 할 수 없지만 그저 두 눈이 잠에서 깨 천장을 쫓으면 이상하게도 더없이 공허해지는 느낌이었다. 또 이 꿈이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어제 비를 맞은 게 영 무리였는지 몸이 노곤했다. 수업만 없으면 참 좋으려만 이 힘든 인생고에 그럴 일은 아마 트럼프가 미국에서 대통령을 때려치우고 나오는 일보다 훨씬 가능성이 부족했다. 불현듯 어제의 기억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사람들은 우산 속에 가려진 우리를 유연하게 지나쳤지만 실상 그 안에 감춰져 있던 우린 그러지 못했다. 네가 뭘 알아, 진실에 서투른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울려퍼졌고 이유 모를 답답함이 나를 짓눌렀다. '싫다는 감정 아래 싫지 않다는 부정이 존재한다' 상식적으로 이해를 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주제넘었나, 불분명해지는 감정선들을 뒤로 미룬 채 샤워기를 강하게 위로 젖혔다.
X 같은 선배와의 전쟁
by. 탄덕
06
" 그래서 그 날 집에는 잘 기어들어갔냐."
" 언제? 요즘은 하도 지랄 맞아서 술 없인 살 수가 없다."
" 우리 축하파티 한 날. 정호석 선배가 너 집에 데려다 준다고 했잖아. 하긴 너 그 날 인사불성이었는데 기억 날 리가 없지."
" 아닌데, 선배 우리 집 몰라서 나 자기 집에서 재웠던데."
" 그래? 완전 아는 것처럼 끌고 가더니만 뭐야. 근데 너 선배 집에서 잤다고? "
친구의 말에 국밥을 말아먹고 있던 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자 단번에 깍두기를 집던 숟가락이 내려지더니 내 어깨를 사정없이 갈겼다. 돌았나, 친구의 행동에 흡입하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입 안에 들어있던 음식을 삼키지 못해 아프다면서 우물우물대며 맞은 부위를 손으로 비볐다. 그러고선 미쳤어 미쳤어 쉴 틈 없이 미쳤어만 얘기하는 친구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알아, 미친 거."
" 야, 정호석이 누구야. 학교 이사장 아들에 잘생겼어 과탑이지."
" 그리고 하나 더 있잖아, 존나 싸가지인 거. 제일 중요한 포인트를 빼먹으면 어떡하냐."
" 그건 뭐 그렇긴 한데 애들이 그러더라. 너 그 선배한테 잘못 찍혔다면서."
" 그거 전에 윤기 선배도 얘기해줬었는데."
" 어떻게 그런 의미로 즐거운 시간 좀 보냈냐, 단 둘이."
" 즐거운 시간 같은 소리하고 있다. 내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물건 만졌다고 성질내길래 또 싸웠어."
" 그건 네가 잘못했네. 이제 어쩌냐, 이게 프로젝트라서 1학년들보단 선배님들이 더 많잖아. 그래서 각자 한 조에 1학년은 한 명씩 들어가기로 했는데 너 윤기 선배랑 태형 선배랑 그 선배랑 같은 팀이야. 어제 단톡도 안 보고 퍼질러잤지? "
이와 동시에 앞에서 태연하게 밥을 먹으며 얘기하는 친구의 얼굴 위로 밥풀이 튀었다. 그에 어제의 선배와는 달리 혜자스님과도 맞먹는 실루엣으로 얼굴을 닦아내는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뻐근해진 뒷목을 잡고서 윤기 선배가 자기 팀으로 나 끌어당겼나며 질의를 던졌다. 그러자 꼴에 짝사랑 선배님 질문이시라고 얼굴이 붉어져선 우물쭈물대던 친구가 아닌 테이블 위의 폰이 여러 번 진동을 울리며 대꾸했다. 민윤기 이 인간도 양반은 못 될 노릇인가 보다. 환한 액정 위로 알림 창이 띄어졌고 난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거란 집 주소에 신경질적으로 잠금화면을 꺼버렸다.
[ 애끼는 후배, 어디냐. 문자 보면 여기로 와. ] - 17:42
꺼져주세요, 고마운 선배님.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속으로 곱씹었다. 그렇게 난 어제 비를 맞으며 걸었던 공원을 지나 아파트 앞에 발을 멈춰세웠다. 나의 마지막 말에 내 팔을 낚아채던 손이 스르륵 힘이 풀려 곤두박질 처졌고 우린 그렇게 몇 분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우산 고마워요, 숨이 막혀오는 침묵에 내가 먼저 서둘러 몸을 돌렸지만 다시 한 번 그에게 붙잡혔다. 밴드 젖었잖아, 새 거로 다시 붙이고 가. 그가 주머니에 있던 밴드를 꺼내들어 내게 쥐어주고선 다른 손에 들린 우산을 쓰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이 우리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 얼마 동안을 그 뒷모습을 마주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단지 복잡한 감정에 그랬다고 치부시키면 되는 걸까, 생각할수록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켜졌다. 바닥만 보며 걷던 걸음을 천천히 옮겨 로비로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곤 자연스럽게 층수와 닫힘 버튼을 눌렀다. 텅- 그런데 닫혀야 하던 문이 누군가의 신발에 부딪힌 반동으로 인해 스르륵 다시 열렸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반사적으로 들었다. 그러자 흰 티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살짝 굽이 들어간 워커를 신은 사내가 여유롭게 올랐다. 어디선가 본 얼굴 같은데, 누가 봐도 알 만한 명품들로 위 아래를 갖춘 그를 티나지 않게 곁눈질로 훑어보다 결국 눈이 마주쳐버렸다. 사람을 잡아먹을듯이 끌어당기던 오묘한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 여기 26층 살아요?"
" 아니요,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근데 왜 층수 안 누르세요?"
" 아 - 거기 가려고 했는데 갈 필요가 없어져서요."
" 혹시 2601호 가세요? "
" 궁금증이 많네요. 그럼 조심히 가고 또 보죠, 우리."
그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에 고개를 돌리니 벌써 엘리베이터는 26이라는 숫자를 가리켰고 그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1층을 눌렀다. 또 보자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 아파트는 이상한 인간들만 모아놓았다며 입술을 비죽이고선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바로 열렸고 그 안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어째 불안하게 어두운 거실 사이로 조금씩 빛이 비쳐오는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혼자 있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새어나와 입술을 축였다. 진짜 나만 개고생 시키는 거 맞네.
" 지금 뭐하자는 거에요? 저랑 장난치십니까."
" 아니."
" 그러면 제가 선배 장난감입니까? 오라고 하면 와야 되고 까불지 말라고 하면 까불면 안 되고 커피를 사줘도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게 장난감이지 뭐에요? 그것만 해도 열 받는데 어제는 액자 하나 만졌다고 나한테 고함을 지르지 않나. 내가 그렇게 만만해요? "
" 그것도 아니."
" 진짜 그 놈의 아니 그만 해요, 짜증나서 돌아버리겠으니까. 의논한다면서 태형 선배랑 윤기 선배는 어디 있어요? 조원들도 하나 없는데 단 둘이서 무슨 주제를 결정한다고 당장 조에서 이름 뺀다고 오시라고 해요."
" 내가 걔들 보냈어. 오늘은 하기 싫어서."
마시고 있던 캔이 비워졌는지 선배가 가벼워진 맥주 캔을 세게 찌그러트렸다. 그러더니 이내 취기가 오른 몸을 의자에서 일으켜 냉장고로 향해 맥주캔 두 개를 꺼내들었다. 아주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지, 손님이 왔으니 술 대접이라도 해준다 이건가. 나에게 맥주를 흔들어보이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작 힘든 건 난데, 정호석 저 사람을 만나고나서부터 풀리는 일 하나 없이 맨날 꼬여가는 사람은 나인데 왜 자기가 더 힘들어 죽을 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니, 이해조차 그에겐 사치였다. 심드렁한 내 낯빛에 선배가 들고 있던 맥주를 홈바에 올려두곤 다른 한 캔의 뚜껑을 땄다. 캔의 종류가 맥주라는 걸 알려주듯이 시원한 소리가 적막한 거실을 울려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홈바에 몸을 기댄 선배가 한동안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 싫음 말고."
" 지금 선배 웃긴 거 알죠? 자기 혼자 화내고 성질내고 이번엔 사과가 주요 장르입니까."
" 네가 더 웃겨. 따박따박 말대꾸나 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 기어오르기나 하고 말이야."
" 저 술친구 해드리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에요."
뭔 놈의 맥주를 음료수 마시듯 해치워버리는 그의 모습에 안 그래도 뻗쳤던 열이 바짝 올랐다. 눈을 돌려 식탁에 있는 쓰레기들을 조용히 훑었다. 그 전에 벌써 윤기 선배랑 한 판 했구나, 안 봐도 비디오였다. 세게 움켜쥐고 있던 끈을 풀어 소파에 가방을 두고선 부엌으로 성큼 걸어가 선배의 맥주를 뺏어들었다.
" 그만 마셔요. 이미 많이 취해 보이는데."
" 오랜만이다, 누가 나 걱정해주는 말."
" .... 걱정 아니에요."
" 근데 넌 왜 안 물어봐? 사진 속에 있던 형제가 닮지 않았다는 거. 다른 애들은 득달같이 물어보던데."
" 전 다른 사람 인생사에 그렇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서요. 각자 그 어떠한 나름의 사정들이 있을 거니까, 그 이유를 제 기준으로 단정짓는 건 감히 건방진 행동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동생분의 미모가 워낙 출중하셔서 그런 걸 느낄 새도 없었고요. 그러니까 세상을 너무 신경쓰지 마요, 그래봤자 선배만 더 피곤해 질 뿐이지 남는 건 하나 없어요."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내려놓고 옆에 있던 선배를 올려다봤다. 처음으로 선배의 올곧은 시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마주본 시선에 축축해진 눈망울이 이내 감정을 감추려는 듯 부리나케 눈동자를 위로 치켜올렸다. 진짜 너네, 선배에게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미 취해버려 맛이 간 사람의 입을 누가 단속하겠는가. 아마 단속반이 쳐들어와도 말릴 수 없을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전 이만 갈게요, 집을 나서기 위해 선배에 대한 시선을 거두고서 발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어제 공원에서 잡혀진 그대로의 촉감이 내 팔을 잡아끌더니 이내 날 끌어안았다. 미쳤나, 이 선배가. 그에게 안겨 버둥버둥대며 그의 단단한 팔뚝을 내려쳤다. 오히려 그의 품을 벗어나려는 나와는 달리 그는 날 더 세게 품으로 끌어당겼다.
" 잠시만. 잠깐만 이러고 있자, 우리."
"....................."
" 잠깐이면 돼."
그의 간절한 호소와도 같은 말에 그를 밀어내던 손이 서서히 느릿해졌다. 그러자 선배만의 향기가 코 끝을 훅 파고들었다. 언제 한 번쯤 맡아본 익숙한 향기에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 가빠오던 숨 또한 속도가 느려졌다. 어제도 그랬듯 몸만 훌쩍 커버린 앳된 소년이 겹쳐져오는 선배의 등을 조금씩 토닥였다. 그러자 선배가 기대고 있던 내 어깨가 조금씩 축축히 젖어들었고 서글픈 울음 소리가 적막함을 깨고 들려왔다. 그냥 울어요, 참지 말고. 어깨를 떨며 아이처럼 울음이 터져버린 그를 더 다독였다. 높은 파고를 지닌 파도가 모래성을 휩쓸어가듯이 그가 무너지길 바랬는데, 그러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를 토닥이던 일정한 손길이 머지않아 고장이 난 건반처럼 어긋난 간격을 이루었고 어둑한 거실 뒤로 은은한 조명을 밝히는 샹젤리제만이 우리 옆을 지켰다.
♥ 저의 원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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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저와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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