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분만 자야겠다, 하고 눈을 감았다 뜨면 세 시간이 지나있는 매직. 십 분만 핸드폰 하고 공부해야지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있는 매직. 오늘까지만 놀고 내일부턴 보람찬 하루를 보내야지 했더니 방학이 끝나있는 매직..!(울컥)
그러니까, 딱 그렇게, 시간은 빨랐다. 방학이었던 3개월동안 한 거라곤 먹고 자고 놀고. 아, 과외하고. 수능이 3달 앞으로 다가오자 민형이는 전보다 더 정신없이 공부하는 것 같았다. 진짜 밥 먹고 공부만 하는 건지 두시간 간격으로 질문이 날라왔다. 이 문제 어떻게 풀어요? 라고 질문이 오면 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후다닥 풀어버린 후 답장을 줬고, 민형이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종종 메신저 기본 이모티콘 따위를 보내왔다. 민형이가 특히 애용하는 (미소) 이모티콘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얘가 이런 걸 보낼 정도면 진짜 정신이 약간 없는 것 같아서..
“다음주 개강이야.”
“아니까 좀 닥쳐..”
정재현은 아침부터 해가 져가는 지금까지 우리 집에서 죽을 치고 있다. 요며칠 같은 패턴이었다. 내가 일어날 때 쯔음 도어락을 열고 들어와 나 대신 대충 아침상을 차리고, 티비를 켜고, 숨겨놨던 과자를 용케 찾아 뜯는 것. 나는 감자칩을 입으로 가져가는 정재현을 세모눈으로 쳐다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엄마 아빠가 정재현네 부모님과 또! 부부동반 여행을 가신 탓이었다.
“넌 약속 없냐?”
“없어.”
바삭. 감자칩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너도 가서 여자 좀 만나고 그래. 김동영도 요즘 여자 만난다잖아.”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다섯시 반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에 시선을 두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침부터 틀어놓은 티비는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였다. 나는 지루한 마음에 쇼파에 머리를 기댔다. 오물오물 입운동을 하던 정재현이 고개를 돌려 그런 나를 바라봤다.
“여자 지금 만나고 있네.”
그러곤 대뜸 하는 말이 날 코웃음 치게 만들었다. 순간 닭살도 조금 돋은 느낌에 팔을 비비며 말했다. 야ㅎㅋ..너 지금 나 여자로 봐주는 거냐? 어깨를 작게 들썩이자 정재현 역시 헛웃음을 내뱉는다. 내 쪽으로 뒀던 고개를 숙이며 제 관자놀이를 긁적이는게 보였다.
“너 심심하지.”
“어. 완전.”
“..영화 보러 갈래?”
뒤이어 녀석의 목울대가 울렁, 움직이는 것도.
“매진이요?”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정재현의 말에 혹해 무작정 나온게 화근이었다. 요즘 한창 인기 있다는 영화가 상영하는 시간을 핸드폰으로 검색한 후 대충 맞춰 준비를 하고 영화관으로 갔더니 웬걸, 표가 없단다. 그래, 예매율 1위 영화를 현장구매로 성공할 리가 있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던 정재현을 올려다봤다. 녀석이 그럼 다른 영화 볼까? 라며 시간표를 확인한다. 현재를 기준으로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영화는 정수정이 괜찮게 봤다고 했던 로맨스 영화였다. 한시간 후..(먼산)
“저거라도 볼래?”
“그러던가. 정수정이 저거 괜찮다고 했었어.”
나는 어깨에 걸치고있던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정재현이랑 이렇게 둘이서 영화를 보러 온 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항상 정수정, 김동영까지 넷이서 영화를 보는 일이 잦았는데 그 둘 다 최근 애인이 생겼지 뭔가. 괜히 마음이 울적해져 입맛을 쩝 다셨다. 누군 애인이랑 영화 보러 다니는데 나만 친구랑 영화 보러 와. 나만 애인 없어. 진짜 세상사람 다 애인 있는데 나만 없어.
“아 짜증나.”
영화 티켓을 받은 후 몇 발자국 걸어가며 정재현을 쳐다봤다(X 노려봤다O). 정재현은 뜬금없는 내 행동에 미간을 좁힌다. 뭐야, 왜. 엄청 조용히 중얼거렸는데 그걸 또 들었나보다. 나는 놈을 보던 눈을 내리며 말했다. 나 지금 좀 현타 왔으니까 너가 초코만땅 사.
“내가 왜?”
“같이 영화 보러 온 친구가 너니까!”
요즘 나의 최애 음료로 레벨업 한 초코만땅을 마시기 위해 엘레베이터 쪽으로 앞장 서 걸어갔다. 쇼핑몰 1층에 있는 카페에 가기 위해서였다. 퍽 일어버린 짜증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달콤한 걸 마셔줘야 한다. 정재현이 영화 보러 오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갑자기 짜증이 나는 일은 없었을텐데. 정재현 잘못이 분명하니 정재현이 사야한다(뻔뻔). 정재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궁시렁 거리면서도 따라오긴 잘 따라왔다. 어차피 한시간 동안 할 것도 없는데 잘됐지 뭐.
나와 정재현 둘만 탄 엘레베이터는 빠르게 1층을 향했다. 중간에 멈추지도 않고 쑥쑥 내려가더니 곧 띠딩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나는 익숙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카페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뒤에서 걷던 정재현은 어느새 내 옆으로 와 나란히 발을 맞추고 있었다. 너는 진짜 먹으러 갈 때가 제일 빠르다. 옆에서 들리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야 근데 너 어떡하냐?”
“뭐가?”
“이따가 나랑 영화 보면 완전 설렐텐데.”
..(심한 욕) 물론 저 정신 나간 소리도 무시했다. 그러는 사이 도착한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페 안은 에어컨 냉기가 더 빵빵했다. 나는 작게 몸을 떨며 정재현의 옷자락 끝을 꾹 잡았다. 곱게 카운터로 데려가려는 속셈이었다. 정재현이 그동안 우리 집에서 먹어치운 내 과자들을 생각하니 초코만땅 가지고는 안되겠더라고^^ 쇼핑몰 안 큰 카페라 그런지 사람이 북적북적 했다. 나는 그 소란 속을 걸어가던 중 문득 발을 멈췄다.
으에.. 쟤 이민형 아니야?
“왜?”
“쟤 민형인데..?”
“민형이? 그 니 과외학생?”
눈을 가늘게 뜨며 카페 저 구석 자리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무리 봐도 이민형이었다. 펜 돌리면서 고개 숙인게 딱 문제 살피는 이민형이야. 나는 생각을 마친 순간 정재현을 잡고있던 손을 놓곤 빠르게 민형이 쪽으로 걸어갔다. 민형이는 친구로 추청되는 동그란 뒷통수와 함께 앉아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그 잘생긴 얼굴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더불어 수학 문제가 가득한 문제집도 함께.
“민형아!”
아무것도 모른 채 문제만 풀던 민형이가 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민형이 앞에 앉아있던 사람도 고개를 드는게 시선 끝에 걸렸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손을 휘휘 저어보이자, 잠시간 눈이 커진 이민형은 곧 뭐에요..? 라며 제 눈썹 새를 좁혔다. 아니, 선생님..? 도 아니고 여기는 웬일이세요..? 도 아니고 뭐에요..? 뭐에요...??(울컥) 서운한 마음에 언제 올라갔냐는듯 입을 퉁 내밀며 손을 내렸다. 그러자 녀석은 당황한듯 말을 얼버무리며 제 앞에 앉은 사람을 한 번, 내게로 한 번 시선을 둔다.
“아니 그게 아니라.. 좀 놀래서..”
이제 내가 좋다면서 전보다 조금, 아주 조금 따수운 수업을 몇 번 했더니 잠시 잊었나보다. 이민형 원래가 쟈가운 놈이라는 걸. 나는 괜찮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민형이가 놀라면 그럴 수도 있지.
“마실 거 사러왔는데 너가 보여서. 공부 하러 온거야?”
“네. 얘가 하루만 같이 하자고 해서요.”
민형이가 작게 턱짓 했다. 나는 그제서야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동그란 뒷통수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민형이 또래로 보이는 남학생이었다. 내가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그런 나를 신기하단 눈으로 잠시간 바라보더니 곧 안녕하세요! 민형이 제일 친한 친구 이동혁이라고 합니다! 라며 인사한다. 눈꼬리가 아래로 향하며 히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 민형이 제일 친한 친구구나~ 저는 민형이 수학 과외 선생님이에요!”
이민형이 같이 공부하자는 걸 오케이 할 정도면 정말 친하긴 친한가봐. 그러고보니 둘 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학교가 끝난 후 바로 왔나보다.
“역시..! 저 선생님 진짜 뵙고 싶었어요. 민형이한테 선생님 얘기 진짜 많이 들었거든요.”
롸..? 나는 어색하게 웃던 걸 멈추고 이민형을 슬쩍 쳐다봤다. 친구한테도 내 얘기 한 거야? 차암나.. 민횽쓰 진짜 빼애앰..ㅎ 민형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 걸 봤지만 못 본 척 다시 동혁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정말요? 과연 무슨 얘기를 했을까 기대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다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는 애써 꾹 참았다.
“민형이가 선생님 예쁘고 착하시다고 많이 얘기 했었어요.”
“야, 예쁘다곤 안 했잖아.”
“….”
“..”
“….”
내가 기뻐 할 틈도 없이 이민형이 말했다. 덕분에 (동혁이와 나만) 화기애애 하던 분위기는 찬물이 쏟아진 듯 가라앉았다. 이민형이 저런 대답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지 동혁이가 당황한 듯 눈을 데굴 굴리는게 보였다. 나는 괜히 입술을 한 번 축이며 하하, 경직된 웃음을 내뱉었다. 예쁘다고는 안 했지만 착하다고는 했나보네..? (´▽`).. (T▽T)
“하하.., 미안해요. 공부 해야되는데 내가 너무 오래 있었죠.”
“아니 그게 아니라요 선생님..!”
나 지금 절대 속상한 거 아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뭐, 화장 더 열심히 하고 다녀야지 그런 결심만 좀 했을 뿐이다. 나름 미소를 유지 중이라고. 동혁이가 급하게 나를 불렀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진 상태였다. 나는 괜찮다며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렸다. 그런 내가 많이 애처로웠는지 동혁이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술을 다물었다.
“음.. 민형아, 뭐 모르는 문제 있어?”
“..아니요.”
나는 차마 민형이를 보지 못하고 문제집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머리 위로 녀석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해..! 친구도 열심히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을 남기곤 튕겨나가듯 걸음을 옮겼다. 어느 순간부터 까맣게 잊고있던 정재현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주문 한 건지 초코만땅을 손에 들고있는 녀석이 삐딱하게 나를 보고있다.
“어떻게 나를 그렇게 버리고 가?”
내가 제 앞까지 걸어오자 투덜거린다. 나는 정재현에게서 초코만땅을 받아들고 일단 한모금 쭉 빨았다. 시원하고 달달한 걸 넘기니까 조금 진정되는 것 같기도 하고..
“맛있냐?”
“당연하지.”
“야 근데 니 과외학생 잘생겼다.”
(울컥) 초코만땅이 가라앉혔던 마음이 순간 다시 펌핑했다. 너무 사실이라 나는 반박도 못한다. 빨대를 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 기다려봐. 나 와플 하나만 주문하고 올게.”
“학생 사주는 거?”
“어. 공부하면서 친구랑 먹으라구.”
초코만땅을 쉬지않고 들이켰다. 다시 속을 재우며 이성을 찾았다. 그래, 열심히 공부하는 애 맛있는 거 사주고 마음이라도 착한 선생님이 되자..! 나는 초코만땅을 다시 정재현에게 넘겼다. 들고 있어. 내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빨대를 입으로 가져가 한모금 마신다. 나는 얼른 카운터로 걸어가 제일 맛있어 보이는 와플을 주문했다. 주문을 도와준 아르바이트생이 영수증과 함께 진동벨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나는 진동벨을 손에 쥔 채 다시 민형이에게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문제가 아닌 걸어가는 내게 시선을 둔 민형이가 제 앞에 도착한 나를 올려다봤다. 민형아 선생님이 와플 주문했으니까 이거 울리면 받아서 먹어, 알았지? 친구도 맛있게 먹어요~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감사하다며 꾸벅 고개를 숙이는 동혁이에게 나도 작게 고개를 숙인 후 원 모양의 진동벨을 테이블에 올려뒀다. 그러곤 다시 정재현에게로 가려는데, 누군가 무방비하게 놓고있던 손목을 잡는다.
“저 질문 있어요.”
고개를 돌리자, 민형이가 제 큰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손목을 잡은 것도 녀석이었다.
“없다며..!”
“방금 생겼어요.”
그 사이에 모르는 문제가 생겼어? 나는 눈을 두어번 깜빡이곤 물었다. 뭔데? 잡힌 손목을 들어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짚었다. 몇 번 문젠지 보기 위해 고개를 문제집 가까이 가져갔는데, 이민형의 손가락은 문제집 위가 아닌 엉뚱한 곳을 가리킨다.
“누구에요?”
올곧게 뻗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엔 아까 그 자리에서 초코만땅을 들고 나를 기다리는 정재현이 서 있었다.
“아, 쟤? 친구!”
나는 생각도 할 것 없이 대답했다. 내 말에 이민형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왜?”
“아, 그냥 궁금해서요.”
“제일 오래된 친구야.”
설마 남자친구라고 생각 한 건가 싶어 친구라고 재차 강조했다. 내가 아까도 그랬잖아. 나만 애인 없다고..(먼산) 그럼 진짜 공부 열심히 하고, 와플 맛있게 먹어 민형아.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아까와 똑같은 길을 다시 걸어갔다. 정재현은 지루한 표정을 한 채로 다시 내게 초코만땅을 내밀었다. 분명 가득 차있던 초코만땅이 반은 사라져 있었다. 야 이.. 나는 말을 잇지 못한 대신 정재현의 등짝에 손을 날렸다. 짝! 소리와 함께 정재현이 인상을 쓴다.
“죽을래? 다 마셨네 다 마셨어!!”
“아니 마시다 보니까.. 이거 맛있다 야.”
하여튼 능글능글. 순식간에 표정을 풀고 히죽 웃어보이는 정재현을 노려봤다. 맞은 등이 꽤 아픈 건지 손으로 쓱 문지르더니 곧 내게 어깨동부를 해온다. 아 하지마! 내가 짜증을 내며 팔을 쳐내려하자 더 들러붙는다. 아아, 미안하다니까? 내가 팝콘도 사줄게. 됐지? 그런 말을 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정재현에게서 눈을 거뒀다. 팝콘으로 내가 넘어갈 것 같아? (넘어갔다)
“아 빨리 가기나 해.”
고개를 돌리며 툴툴거렸다. 옆에서 정재현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팝콘이 널 살렸어 인마. 팝콘 아니였으면 한 대 더 맞았을 거야. 초코만땅을 입에 물며 정재현이 이끄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가방에서 무언가가 진동하는게 느껴졌다. 안 봐도 핸드폰일게 뻔했다. 한 손으로 가방을 뒤적거려 핸드폰을 찾았다. 엘레베이터를 탐과 동시에 핸드폰이 잡혔고, 자연스럽게 풀린 정재현의 어깨동무에서 벗어나 편하게 알림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화면을 켜자 [이민형] 이 정갈하게 적혀있는 문자메세지의 도착을 알 수 있었다.
“민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면을 슬라이드 해 문자를 확인했다.
[예뻐요. 밤길 조심 찻길 조심 친구 조심.]
실실 웃으며 영화관 안으로 걸어갔다. 예뻐요. 짤막하게 적혀있는 문장만 보고 난 이미 넉다운이었다. 이민형이 요즘 조금 달라진 건 분명하단 말이지. 화면은 꺼졌지만 소중한 걸 다루듯 핸드폰을 꾹 쥐며 총총 걸음을 옮겼다. 정재현은 팝콘을 사겠다는 말이 진짜였는지 무슨 팝콘 먹을거야? 라고 내게 물었다.
“진짜 사주게?”
“엉. 오빠가 쏜다.”
아니 뭐 사주시겠다는데 제가 말릴 이유는 없죠~(*^θ^)ノ 나는 치즈를 선택한 후 뒷주머니에서 제 지갑을 꺼내는 정재현 옆에 섰다. 콤보로 주세요. 정재현은 그 말과 함께 지갑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한참 잊고있던 그 사진이 떠올라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보니 나 왜 그런 사진을 들고다니냐고 따지지도 못했잖아? 지금이라도 말을 꺼내볼까 짧게 고민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지갑 몰래 연 거 알면 팝콘 결제 취소해주세요 할까봐..(비굴)
“나 화장실 좀 갔다올게.”
아직도 30분이나 남은 영화시간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재현은 앉아있을테니 다녀오라며 팝콘을 들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바닥을 보인 초코만땅을 걸어가던 중간에 놓인 쓰레기통에 버린 후 영화관 구석에 위치한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위는 어느새 조용해져 내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 걸리는 소리만 들렸다. 룰루랄라 걸어간 내가 코너를 돌았다. 아니 근데, 그 순간 누가 내 입을 틀어막는 거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낯선 팔이 단단하게 얼굴을 감싸 그러지 못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입이 막힌 채 화장실 옆에 있는 비상구로 끌려갔다. 뭐야, 뭔데. 놀란 마음에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버둥거렸지만 놓아주질 않는다. 곧 등 뒤로 비상구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와 여기서 볼 줄이야.”
남자 목소리였다. 그 말을 하며 내 입을 막고있던 손을 떼어낸다. 낄낄 웃는 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였다.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누구.., 누구세요?”
“우리 기억 안나? 하긴 몇 달 지나긴 했지.”
나는 머리를 굴렸다. 아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분명 본 적 있는 얼굴들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게 느껴졌다. 영화에서 보면 이렇게 끌려와서 나쁜 짓 당하잖아. 무서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생각해내려 애썼다. 이 사람들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누군데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어느새 등이 비상구 벽에 닿아있었다. 아, 나 이제 물러날 곳도 없어. 앞에선 남자 두 명이 나를 위협적으로 보고있었다.
“..어!”
“생각 났어?”
“그때 그 삥 뜯던..”
몇 달 전 이런 식으로 민형이한테서 돈 뺏으려 했던 그 양아치들이잖아 얘네. 시이발..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때 도망가기 위해 열심히 달리던 내가 뇌리를 스쳤다. 기억을 해내자 다리까지 떨렸다. 재수없게 또 만났어. 나는 자꾸만 가빠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당당한 척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그때 너가 끼어드는 바람에 우리가 그 고딩한테서 돈을 못 받았잖아. 그치?”
“..”
“이렇게 만났는데, 그 날 못 받은 돈 줘야지 너가.”
누나시라며. 순간 뒷목이 서늘했다. 안 주면 꼼짝없이 맞을 분위기였다. 그때 안 맞은 거 다 합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방끈만 꾹 쥐었다. 맞는 일이 있어도 너네한텐 돈 안 준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난 정말 내가 생각해도 미쳤어. 머리는 김여주 등신아; 얼른 지갑 꺼내;; 라고 명령했지만 절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돈 내놔.”
“싫어요.”
짝. 대답하기 무섭게 뺨이 돌아갔다. 살다살다 싸대기를..(울컥) 이렇게 한 대 맞은 이상 진짜 진짜 돈 안 뺏긴다는 생각으로 눈에 힘을 주며 다시 놈들을 노려봤다. 때릴테면 더 때려봐라, 뭐 그런 정신나간 눈빛이였다.
“돈 꺼내.”
“싫어.”
이번엔 반대쪽 뺨이 돌아갔다. 너무 아파서 코끝이 찡해졌지만 꾹 참았다. 그때 반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반말이네. 이쯤되니 무서움보다 분노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어떤 놈의 소중이부터 차버릴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 걸 꿈에도 모를 양아치1이 내 멱살을 잡아올린다. 놔!!! 소리를 꽥 지르며 몸을 격하게 흔들자 또 뺨을 때린다. 내가 그런다고 가만히 있을 것 같아? ヽ(0Д0)ノ 밖에서 들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더 크게 소리치자 또 입을 막아버린다.
“야, 얘 가방 뒤져.”
양아치1이 양아치2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양아치2가 내 가방으로 손을 뻗는다. 그에 나는 더 열심히 바둥거렸다. 아까 마신 초코만땅의 기운을 발끝에 모아 타이밍을 간보면서 말이다. 멱살을 잡고 있던 놈은 이런 내가 짜증이 났는지 전보다 더 세게 머리를 내려친다. 아, 근데 그 순간 진짜 울컥하는 거다. 내가 얘네한테 왜 맞고 있어야돼? 눈물 고인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랬더니 뭘 보냐며 또 때린다. 양쪽 뺨이 얼얼했다. 팝콘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을 정재현이 보고싶었다.
“야, 너 돈 이거밖에 없어?”
결국 지갑을 꺼내버린 양아치2가 내 지갑을 양아치1에게 넘겼다. 놈은 내 지갑 사정을 확인하더니 인상을 팍 찡그렸다.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돌려주던가; 입만 안 막혀있으면 그렇게 말했을텐데 너무 아쉬웠다. 대신 나는 남자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아쉽게도 명중은 못하고 허벅지를 찼지만.
“악!!!!!”
그래도 꽤나 아팠는지 멱살과 함께 입을 막고있던 손까지 떼고 아픔을 호소했다. 나는 그 틈을 노려 문 쪽으로 달려들었다. 도와주세요!!!! 다시한번 소리치며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욕을 중얼거리며 내 머리채를 잡아 끌더니 이번엔 주먹을 들어올리는게 보였다. 중지에는 반지가 껴있었다. 저거에 찍히면 진짜 피보겠다. 맞을 건 다 맞고 돈도 뺏기는 구나. 나는 눈을 질끔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굉장히 아파 할 각오를 하고 주먹을 받아드리려는데, 주먹보다 쾅! 하고 열리는 문 소리가 더 빨랐다.
“뭐야.”
나는 한 쪽 눈을 살며시 떴다. 어떤 천사님인가 하고 봤더니, 이게 누구야.
“….”
너무 보고싶었던 정재현이었다. 정재현은 양아치1을 한 번, 양아치2를 한 번, 마지막으로 나를 한 번 보더니 모든 말을 생략하고 주먹부터 날렸다. 나를 죽일듯이 잡고 있던 남자가 고꾸라지며 또 아악, 따위의 소리를 냈다. 정재현이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가방끈을 쥐며 정재현 뒤로 몸을 숨겼다. 정재현은 쉬지 않고 때리기만 했다. 양아치2는 얻어터지는 양아치1을 보며 작게 욕을 지껄이더니 계단을 두칸씩 내려가며 도망쳤다.
“돈, 돈 돌려드릴게요.”
아까 눈을 질끔 감았을 때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어언 말라갈 때 즈음, 정재현이 주먹질을 멈췄다. 양아치1은 터진 입술로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내 지갑을 던지듯 내려놨다. 지갑 줄테니 그만 때려라, 뭐 그런 뜻인 것 같았다. 나는 뒤에서 정재현의 옷 끝자락만 잡은 채 눈만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정재현은 크게 호흡하며 옷을 잡고있는 내 손을 제 한 손으로 감싸쥐었다.
“사과해.”
“..”
“앞니 반 날려버리기 전에 사과해.”
“그, 어, 그 죄송해요. 길에서 또 마주쳐도 다시는 아는 척 안할게요.”
사과하라는 말에 싹싹 빌며 또 냉큼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정재현이 어지간히 세게 때렸나보다. 괘씸한 마음에 아까 맞은 따귀를 다시 돌려주려 했는데, 내가 앞으로 나서기도 전에 양아치1 마저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야 너 어떻게 알고 왔..,”
그리고 정재현을 올려다보려 고개를 드는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잡고있던 내 손을 그대로 당긴 정재현이 나를 안았다. 나는 놀란 마음에 눈만 크게 떴다. 두 손은 허공에 띄운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정재현은 그런 나를 더욱 꽉 안아올 뿐이었다.
“야 정재현..나 괜찮아..”
내가 머리채 잡혀있던 모습이 많이 충격이었나..(코쓱) 물론 신명나게 맞은 뺨은 아직도 쓰라렸지만 많이 흥분한 상태인 정재현을 달래기 위해 어정쩡하게 들고있던 손을 녀석의 등으로 내려 천천히 쓸어내렸다. 나 많이 맞지도 않았고 돈도 다시 받았구.., 너 와서 괜찮아. 적막이 흐르는 비상구에 내 목소리가 울렸다. 정재현은 그제서야 슬며시 나를 제 품에서 떼어냈다. 그 행동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나는 다시 입술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
내 어깨를 잡은 채 나와 눈을 맞춘다. 정재현은 잠시간 나를 바라보더니 곧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미안.”
“..”
“많이 무서웠지.”
시야 끝에 걸린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저를 보기만 하자, 내 머리를 감싸며 다시 나를 제 품에 안는다.
근데 얘가 이렇게.. 잘생겼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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