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에
정국의 뷔 예보 作
어느 추운 겨울 날, 봄을 마지하기 위해 추운 겨울을 버티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일기라는 것을 써보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글 쓰는 것에는 소질이 없어 늘 일기를 써오는 숙제를 하지 못해 교실 뒷자리에서 의자를 들고 벌을 섰었던 내가 문구점에 들러 벚꽃이 내리는 듯한 풍경을 품은 노트와 4b 연필 그리고 모나미 지우개를 샀다. 요즘은 샤프를 많이 쓴다는 말에도 나는 결단코 연필을 쥐었다. 아, 연필 깍이 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좁은 방 안, 이불이 깔려진 공간 옆에 작은 탁상 앞에 몸을 앉혔다. 진즉에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했을 쓰레기들이 작은 탁상 위를 어지럽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몸을 일으켜 작은 검은 봉지를 가져와 쓰레기들을 모아 봉지 안에 막무가내로 집어넣다 눈에 띈 건, 작디 작은 사진이 줄줄이 이어진 것이었다. 뭐, 이걸 스티커 사진이라고 부르던데. 그 사진 안엔 나와, 내 봄이 자리하고 있었다. 배싯, 웃음이 튀어 나왔다. 한참 꾸깃거리며 스티커를 떼어내 노트 맨 앞 쪽에 잘 보이도록 붙혀두었다.
어느 정도 탁상이 정리가 되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제 첫 페이지를 폈다. 역시 글을 써본 적이 없어서인지 첫 문장을 어떻게 작성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흘려보낸 지도 벌써 30분이 훌쩍 지났다. 그래서 선택한 거라곤 휴대폰을 들어 검색하는 것이었다. '일기 쓰는 방법' 스크롤을 내렸지만 딱히 유용한 지식 따위를 얻지 못 한 채, 반듯하게 깍인 4b 연필을 집어 들었다. 노트 끝 부분에 쓸데없이 낙서만 하다 문득 창가를 내다 보았다. 어두운 밤 하늘 위에 뜬 밝은 달이 아른거렸다. 시선은 한참 달에 머물렀고, 그 시선을 돌려 다시 공책을 내려다보며 첫 문장을 써내렸다.
봄아, 봄아.
이 봄이 영원하라고 빌지 않을 테니,
이 행복이 영원하라고 빌지 않을 테니,
부디 이 봄이.
부디 이 행복이.
빨리 져 버리지만 말아다오.
어느새 내 일기장은 '일기'라는 형태를 벗어났다. 나는 그저 나의 봄인 너에게 전할, 그리고 전하고 싶은 말과 평생 닿지 못할 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써내려 가고 있었다. 일기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것이랬다. 하지만 난 하루가 멀다하고 내 하루를 기록하고 싶었던 행복한 날들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어릴 적 꼭 써야 했던 숙제인 일기를 쓰지 않았던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행복했던 순간들이 없었기 때문에 내 하루를 쓰고 싶지도,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너를 만난 이유로는 의미도 재미도 즐겁지도 않던 하루하루가 소중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날들을 낱낱이 기록하고 싶었다. 기억에서 잊고 싶지 않았다. 죽어서도 기억하고 싶었다. 평생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일기장을 산 이유는, 오직 너뿐이었다.
"아저씨."
"… …."
"내가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 낯설고, 낯 간지러운데 하고 싶으니까 해야 겠어요."
"… …."
"나 아저씨 사랑하나 봐."
어쩐지 내 옆에 없음에도 내게 해주었던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네가 너무 그리워 내가 만들어 내는 허상들일까. 맑은 얼굴로 더 맑게 웃어보이며 세상 물정 하나 모르고 더러운 세상 속에서 떼묻지 않은 순수하고 어리기만 하던 네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연필을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 엇나간 연필에 봉지 안에 있던 모나미 지우개를 들어 벅벅 지웠다. 그 흔적이 보이지 않게, 엇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게, 열심히 지웠다. 하루에 수십 번, 하루에 수백 번은 기도했다. 내가 써내린 문장을 하루가 멀다하고 읊조리며 구름 한점없이 그 아이 만큼이나 맑은 하늘에 빌었다. 하지만 내 소원이 그리도 어려운 것이었을까.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은 빌고 빌었던 내 소원을 신은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나에게서 너를 앗아가려 들었다.
"이제, 그 아이는 너와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걸 알아줬음 해."
"… …."
"…그 아이는, 너와 어울리지 않아."
알고 있었다. 나에게 봄과 같은 그 아이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욕심이 많았던 나는, 이기심이 많았던 나는, 너를 사랑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 뿐이라, 할 수 있는 거라곤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 뿐이라, 하염없이 예쁜 너를 하염없이 사랑하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너를 욕심내려 할 수도 그럴 수도 없었다. 너는 나와 다른 사람이니까. 너는 나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니까. 연필을 쥐고 있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내 힘을 이기지 못한 연필은 뚜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부러진 연필 심은 하얀 종이를 더럽히며 데굴데굴 굴러 노트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한순간 모양이 흉해진 연필을 손에서 놓쳤다.
"아프지 마요."
"… …."
"이제 나 없을 거란 말이야. 그럼 아저씨 아프면 간호해줄 사람도 없잖아. 혼자 아픈 게 얼마나 서러운 건데."
"… …."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저씨 아프지 마요…."
내 앞에서 한 없이 웃기만 하던 그 아이가, 한 없이 예쁜 웃음만 보이며 내 심장을 미친 듯이 두들기던 그 아이가, 나 때문에 울었다. 멀건 얼굴 위로 차마 달래줄 수도 없이 서글프게 울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나는 그 눈물을 닦아주지 못 했다. 그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울지 말라고, 난 아프지 않을 테니 너도 아프지 말라고, 많이, 많이 사랑했다고. 그렇게 속삭여 주었더라면 마지막으로 내게 또 그 예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내주지 않았을까. 끝내 울음으로 가득찬 얼굴만 본 것이 내 평생의 한이 될 것만 같았다. 눈물에 덮인 얼굴도, 너무 예뻐기만 해서 보고 있던 내 가슴이 더 아렸다.
공책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글 쓰는 재주가 없어 글씨 또한 예쁘지 않았지만 나름의 정성을 들여 쓴 글이 눈물로 인해 번졌다. 이건 지우개로도 지울 수 없는 자국인데 어찌 지울꼬. 눈물을 닦으면 닦을 수록 더 서럽게 흘러내렸다. 팔에 얼굴을 묻고 혹여 내 울음 소리가 누구에게든 새어나갈까 입술을 꼭 문 채로 엉엉 울었다. 내 아픈 사랑을 누가 감히 알아라도 줄런지. 내가 사랑하는 너를, 다시는 볼 수 없음에, 여전히 보고 싶은 그 얼굴에 나는 한참을 울었다.
노트 맨 끝 줄에는 얼마나 문질렀는 지, 연필 자국이 번진 것도 모잘라 눈물로 얼룩져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무어라 쓴 건지 모를 정도로 번졌지만 내가 알았고, 그 아이가 알면 되었다. 이를 알아줄 이는, 그 아이 하나면 되니까. 그 아이가 알아보면, 되었다.
많이 사랑한다, 아가.
*
다름 본 편부터는 여주 시점으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이건 약간 뭐랄까. 정국이의 독백 비슷한? 이야기가 전개 되어야 이 편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양아치 전정국도 안 써오고 무책임한 작가가 또 이상한 걸 가져왔네! 하시는 독자분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전합니다. (ㅠㅁㅠ) 양아치 전정국은 한 편이 남은 완결을 코 앞에 둔 시점에 그녀가 사는 세상도 싸질러만 놓고 안 나오지만은 아마도 이 글이 완결이 되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제가 보는 것도, 제가 쓰는 것도 새드물을 좋아하는 새램입니다. 가슴 저릿한 글을 보면 며칠간 그 여운에 현생 불가에 이르는 걸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죠. 물론 제가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을 지가 관건이지만 열심히 써 보겠습니다. 독자님들 가슴 절절하게 만들어 보는 게 제 이번 년도 목표입니다. 8ㅅ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