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영화 차이나타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비릿한 생선내음이 코 끝을 자극해 어떻게든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불쾌한 그 냄새를 떨치려 검정 자켓을 계속해서 털어내본다.
술기운에 살짝 몽롱한 기운은 임무를 수행하기 딱 좋은 상태인줄 알았다.
숨을 쉬는 것 조차 눈에 보이는 추운 날씨에 귓가와 코 끝은 붉게 물들었으나 날카로운 그것을 움켜쥔 손은 왜인지 모르게 뜨뜻하다.
휘청거리며 도착한 허름한 아파트 앞에서 민형은 잠시 멈추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쉬며 입안에 아른거리는 알코올 향을 없애려 노력했다.
한 잔만 먹고 나오려했건만, 오랜만에 만난 재현을 쉽게 뿌리치고 나올 수가 없었던게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민형이 중요한 일을 앞두고 쉬이 시작하지 못한 이유였다.
" 아들, 얼른 끝내고 와. 고기 먹자 "
민형은 다시 한 번 걸음을 떼려다 눈을 질끈 감고 그만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곧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멤도는 것만 같아 손에 있어야할 그것을 찾으려 땅을 더듬거렸다.
" 저.. 저기, "
" .... "
"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
" 아, 네- "
교복을 입은 한 소녀는 민형이 놓친 그것을 건네주곤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그 모습이 민형의 눈에는 위태로워 보인다.
민형은 소녀가 걸어간 그 길로 천천히 들어섰다.
엘레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의 좁은 계단을 밟으며 겁에 질린 그 발걸음의 소리를 세며 도착한 3층.
우연인지 필연인지 민형이 찾는 채무자와 같은 층에 살고 있었다.
민형은 손목에 걸친 시계를 확인하곤 굼뜬 행동에 재촉을 했다. 어서 마무리 짓고 일찍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302호라 적힌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
예상대로 고요함이 민형을 반길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미리 만든 열쇠를 꺼내 문구멍에 망설임 없이 끼워넣었다.
10분도 되지 않아 일을 처리한 민형은 대충 보이는 신문지로 피가 흥건히 묻은 칼을 꽁꽁 싸매고 집 안에 있던 주인없는 옷을 걸쳐입고 원래의 옷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어 문자를 전송한 민형은 미련없이 문을 닫고 아파트 복도로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기다렸단 듯 민형을 감싸고 돈다. 빈 속에 술을 끼얹은 탓인지 아까보다 더 추위를 느끼던 민형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뒤를 돌았다.
" ....아, 여기 사셨구나.. "
" 아뇨. "
" 아, 아.. 네... "
고무장갑을 낀 손에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쥔 아까 그 교복을 입은 소녀는 민형을 보고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민형은 취기에 소녀를 상대조차 하기 귀찮았다. 1층으로 내려와 조금 걸어가자 검은색 봉고차가 민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타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던 한 여인이 입을 연다.
" 아들, 오늘은 좀 늦었네? "
" ....죄송해요. "
" 죄송할 것 까지야, 얼른 가자. 맛있는데로 예약해놨어. "
-
" 오늘은 일 처리하고 집으로 곧장 가, 재현이 왔더라 "
" 네 "
" 어제처럼 늦지말구, 알았지? "
" ...네 "
담배를 문 상태로 여인이 민형에게 사진 한 장을 건넨다.
민형은 사진속 인물을 확인하고 주머니에 넣은 후 주소지를 물었다.
" 아, 맞다.. 어제랑 똑같은 곳이야. 산들아파트 있지? 거기 사람들은 왜 돈을 안갚는지 몰라. "
" 다녀올게요. "
" 몸 조심 해~ "
민형은 차에 시동을 걸고 무표정한 얼굴로 도로를 질주했다.
신분을 들켜선 안되는 터라 면허증도 소지하지 않았지만 민형은 어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 재현을 봐야겠다는 생각외엔 아무런 감정도, 다른 잡념도 없었다.
익숙한 허름한 곳 앞에서 민형은 어제와는 다르게 빠르게 아파트 안으로 걸어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여인의 말대로 이곳 사람들은 정말 가난한가보다. 거액의 돈을 빌려놓고 한 푼도 갚지 못하고 목숨을 잃다니. 민형은 이번 채무자도 3층에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잠시 멈칫했으나 305호 앞에 서 거침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1, 2, 3, 4...
" 누구세요- "
속으로 6초를 세려던 민형은 들려오는 고운 여자 목소리에 당황했다.
사진 속 인물은 남자인데 여자 목소리가 들려서? 아니었다.
그 목소리가 꽤나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 누구세요? "
왜 익숙한건지에 대해 의문을 갖을 세도 없이 열린 문 뒤에는 어제 만났던 그 소녀가 민형을 마주하고 있었다.
민형은 자신이 왜 이 집에 왔는지 둘러대지 않고 사진에 적힌 주소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산들아파트 305호, 문에 쓰여진 것도 305호.
" 앗, 어제 만났던 그 분.. 맞으시죠? "
" ..... "
" 어쩐 일이세요? "
" ..혹시 이 사람 아시나요. "
" 네. 저희 아버지에요. "
" ..... "
" 혹시 돈 받으러 오신 분인가요? "
민형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진 민형의 표정에 비해 소녀는 미소로 민형을 집으로 맞이했다.
민형은 조심스럽게 들고있던 흉기를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넣고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듯 소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쭈뼛거리는 민형에게 의자를 내어준 소녀는 이제 막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나보다. 식탁에 놓인 반찬과 밥그릇을 멍하니 보는 민형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든 공기가 놓여진다.
" 밥 드셨어도 저 혼자 먹기가 뭐 해서 드리는 거니까 한 숟갈만 뜨세요. "
" ....안 먹었어요. "
" 그러면 잘 됐다, 차린건 없지만 같이 먹어요. "
크게 한 숟갈 떠 먹는 소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민형이 어쩔 수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대충 파김치에 밥을 먹던 민형이 조용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남자는 귀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민형은 밥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 저희 아버지가 이제 막 일을 구하셔서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
" ....원래는 작년 7월달로 계약돼 있었으나 그 때도 갚지 못하여 오늘인 1월 3일로 미뤄진겁니다. "
" 만약 기간 내에 갚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될거다라는 그런 계약도 있나요? "
민형은 조금씩 삐져나오는 흉기를 다시 집어넣으며 말을 아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고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말이 없는 민형을 멀거니 바라보던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티비 옆 서랍을 뒤적거렸다. 하얀봉투를 꺼내든 소녀가 민형에게 내밀었다.
민형이 봉투를 열어보니 초록색의 지폐가 들어있었다. 대충 세어보니 40만원이었다.
" 저희 아버지가 정말 이번 달 내로 갚을거에요. 저도 지금 알바하고 있구요.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
" ...... "
" 이게 제 생활비에요. 저는 이거 없으면 이번 주 부터 굶어야해요.. 불쌍해서라도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
민형은 소녀의 말을 듣다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봉투를 내려놓았다.
소녀는 갑작스런 민형의 행동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 오늘 제가 온 건 아버지께 알리지 말아주세요. "
" ...네? "
" 돈은 나중에 한꺼번에 받겠습니다. "
그러고선 민형은 다급히 집을 나왔다. 빠르게 내려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건 민형은 한참을 핸들만 부여잡다 3층 복도에 불이 켜지는 것을 알아채고 엑셀을 밟고 그 곳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렇게 몇 분을 달리고 나서야 본인이 무슨 짓을 하고 나온건지 실감이 났다.
여인에겐 무어라 둘러대야 할까. 원칙상 채권자가 집에 없을 시에 그 집에 가족이 있다면 가족을 담보로 채권자에게 연락하여 일을 마무리 했어야 했다.
아무래도 오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고 거짓말을 해야하는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든 민형은 찜찜한 마음으로 재현이 있을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