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라푼젤>을 모티브로 하여 작성되었습니다.
人間化 인간화
인간적인 성격을 띠거나 띠게 함
人間 花 인간 화
인간의 모습을 위한 꽃
w.텔레투비
인간 화. 꽃을 지니고 있으면 인간의 모습이 된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모든 뱀파이어들이 혈안이 되어 꽃을 찾아 산 곳곳을 헤맸다. 낮에 햇볕을 쬐며 돌아다녀도 아무 이상이 없음에, 인간들 틈에 자연스레 섞여 반란을 도모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 그리고 뱀파이어들은 낮에는 활동하지 않는다는 그 무언의 약속을 깬 규칙의 균열. 백성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모든 인간화를 없애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다면, 뱀파이어들의 반란은 커녕 백성들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단 한 송이는 제외했다. 인간화는 인간에게도 영원한 꽃의 아름다움을 준다는 말이 있었던 탓이었다. 모두가 지녀서는 안 될 가장 위험한 것. 왕비는 마지막 남은 한 송이의 꽃을 달여 마셨다. 부디 나의 자식에게 큰 축복이 되기를. 그리고 그 축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작 17년. 공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온 왕실은 발칵 뒤집혀 공주를 찾기 시작했다. 공주를 찾아오는 이에게 어마어마한 포상금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였고,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매년 공주가 태어난 날 밤하늘을 수놓는 금빛 등불을 올렸다. 그리고 그 금액은 해를 거듭할수록 하늘 높이 치솟았다. 공주가 사라진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인간화
"인간이 또 너를 찾으러 왔나 봐."
이렇게나 이른 새벽부터? 여전히 잠에 취해 웅얼거리자 나긋나긋한 창섭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새벽 아닌데.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내 머리를 쓸어넘기는 다정한 손길도 느껴졌다. 그래도 내가 눈 뜰 생각이 없는 걸 알았는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얼굴선을 훑었다. 볼록한 이마를 지나서, 콧대를 따라 말캉한 입술에 닿기까지. 닿은 손가락 끝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날씨가 너무 추워진 것 같아. 괜히 날씨 핑계를 대며 창섭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이게 다 인간 때문이야. 언젠가 아주 어렸을 적, 창섭이에게 인간이 왜 날 찾으러 오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네가 너무 예뻐서. 창섭이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생각했다. 예쁜 건 좋지만, 너무 귀찮아. 요새는 아예 없었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인간들이 무수히 찾아와 나를 구해가겠다고 쩌렁쩌렁 소리쳐댔다. 창섭이는 그들을 혼내주겠다며 늘 순식간에 밖을 조용히 시킨 뒤에 들어오곤 했다.
"얼른 돌려보내고 올게."
"어차피 문이 없어서 못 들어오잖아.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5초만 세고 있어, 금방 와."
창섭이는 정말 5초 만에 돌아왔다. 나도 너처럼 빨리 움직이고 싶다고 했더니 나는 아직 어리고 약해서 안 된다고 했다. 늘 돌아오자마자 창섭이는 나를 안아 들고선 욕실로 향했다. 씻기 싫다고 또 투정부리면 안 돼. 단호한 어투에 알겠다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 그제야 나를 먼저 조심스럽게 욕조 안에 앉혀놓았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함께 욕조에 들어가 창섭이의 너른 가슴팍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러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창섭이는 내 목 뒤에 입술을 묻었다. 여전히 나른해. 물이 너무 따뜻해서, 하마터면 또 잠들 뻔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햇빛이 더 따가워."
"그냥 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왜?"
"맨날 널 괴롭히잖아,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아파하는 건 싫은데. 뒤에 있는 창섭이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는데,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입을 맞춰왔다. 물기에 젖어 축축한 입술이, 내 입술을 적셨다. 오늘따라 욕조에 받은 물이 뜨거운 것 같아.
"네가 있으면 난 괜찮은데 뭐가 걱정이야?"
"그런가?"
"네가 없으면 난 햇빛에 타들어 갈 거야."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따뜻해서 이불 속인 마냥 잠에 취해있기도 잠시, 감기에 걸린다며 곧바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창섭이가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말해도 될 것 같은데. 기회를 엿보며 한참을 꾹꾹 눌러 담아왔던 말을 꺼내도 되지 않을까. 창섭아.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담담한 대답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곧 무슨 날이게?"
"네 생일?"
내가 모를까 봐서? 내게 되물으며 여전히 머리를 말려주는 손길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이번엔 뭘 갖고 싶은데. 창섭이의 물음에 별안간 뒤 돌아앉아 마주했다. 들어줄거야?
"들어보고."
"하늘에 떠다니는 빛 보고 싶어. 진짜 예뻐! 가까이서 직접 보고 싶단 말이야."
"별? 옥상 올라가서 같이 볼까?"
"별 말고, 내 생일마다 하늘에 올라오는 빛."
한참을 고민하던 말을 실토하듯 뱉어냈다. 창섭이는 내가 밖에 나가는 것을 몹시나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어려서부터 창섭이는 줄곧 말해왔다. 바깥세상에는 위험한 것들 천지야. 인간은 나약하지만, 심성이 나빠서 널 산 채로 잡아먹고 말 거야. 살인범에 도둑, 강도, 전염병까지 널 죽음에 들게 할 거야. 절대로, 넌 이곳에서 벗어나면 안 돼.
"나 다 컸어! 이제 어른이고,"
"넌 아직 나보다 어리잖아."
"…그래도,"
"네가 나보다 더 크면. 그때 나갈 수 있다고 했잖아."
세상은 결국 위험하고, 밖은 위험해. 넌 너무 약하고.
"널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이마에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
"크, 누구든지 찾아내면 인생 한 방일 텐데."
인생 한 방이 곧 찾아올 나처럼.
여전히 벽보에는 앳된 공주의 사진과 함께, 꽤나 많은 0이 붙어있는 액수가 쓰여있었지만, 벽보는 닳고 닳아 글씨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전에는 공주를 찾으려는 시도는 누구나 해봤다. 마을 안에는 없으니, 'B구역'에 있을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 여럿이 함께 B구역으로 향했지만,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올 수 없는 B구역에 공주가 있지 않을까. 모두가 추측으로만 남겨놓았다.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안타깝게도 공주는 그렇게 서서히 잊혀갔다.
"찾으려다가 한 방에 골로 가는 수도 있지."
벽보를 가만히 보고 서 있던 그에게, 지나가던 노파가 툭 던지듯 말을 건넸다. 한 방에 골로 간 사람 여럿인 건, 그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제 복을 발로 차는 놈이구만."
"…예?"
"쯧쯧, 그러면서 무슨 인생 한 방을 노려?"
복을 챙기면 더 챙겼지, 제 발로 차기는 무슨. 저요? 하고 되물으니 노파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어디서 관상을 잘못 배워오셨나.
죽은 거나 다름없는 공주의, 주인 없는 왕관. 왕관을 흔들어 보였다. 이래도 과연 제 복을 발로 찬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내게 인생 한 방을 선사해 준 공주는 천사가 아닐까? 공주가 없었으면 이 왕관도 아예 없었을 텐데. 공주님, 감사합니다. 이 왕관은 정말 잘 쓸게요.
"할머니, 어디 가서 아마추어 관상 보고 다니시다가 잡혀가요 진짜!"
"저기다, 잡아라!!"
저 군인들은 더럽게 끈질기네. 어차피 주인 없는 왕관인데 기를 쓰고 저를 쫓았다. 서로서로 돕고 살면 좀 좋아? 노파에게 짧은 인사를 건넨 뒤 서둘러 몸을 피했다. 남들이 글자를 배울 때 그는 도둑질과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을 배웠으며, 남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는 벽을 올라타고, 인기척을 내지 않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고작 몇 명의 군인쯤이야 떼어놓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한참을 숲속을 헤집으며 도망쳤을 때 별안간 눈앞에 B구역의 경계선이 나타났다. 재수 없게 길을 들어도 하필. 길을 우회하기 위해 돌아가려는 것도 잠시, 뒤따라오던 군인이 시야에 찼다. 잘 훈련된 군인이라 그런지, 남들보다 조금 빠르긴 했다. 그래 봤자 저보다는 느렸지만.
"네놈 뒤에 길은 막혔으니까 포기해."
"좀 살살하시지. 언제 이렇게 쫓아오셨대?"
힐끗 하늘을 올려다보자 해가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해가 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네 시간 남짓. 낮에, 그것도 이렇게나 맑은 날 뱀파이어가 밖으로 나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해가 지기 전까지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으면 됐다. 슬슬 뒷걸음질 치며 구역의 경계선으로 향하자 군인들은 거리를 좁힐 생각을 못 했다. 그저, 안절부절.
헛수고들 하셨네. 여전히 경계선을 넘어오지 못하는 군인들을 뒤로한 채 남자는 좀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
"죄송합니다, 그놈이 B구역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재밌네."
낮은 읊조림 하나에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섰다. 무장한 군인들이 따라붙었음에도 그깟 쥐새끼 하나를 못 잡았다. 이 정도 뭣도 아닌 인간이 훔쳐간 것쯤은 아랫선에서 다 처리가 돼야 했었다.
"가끔가다 이렇게 재밌는 일도 있어 줘야,"
"……."
"의욕도 샘솟고 그렇지."
덜덜 떨고 있는 지휘관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반성도 하게 되고. 나긋나긋한 대위의 목소리가 가득 울렸다. 대위라면, 저 방아쇠를 정말 당길 수 있다는 것 즈음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방해된다면 그것이 설령 동료일지라도 처치에 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폐하께 공주의 왕관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을 거고."
더불어 나에게도. 뒷말은 절로 삼켜졌다. 타이밍도 참 뭣 같지, 다른 때도 아니고 모든 준비를 다 마친 때였다. 10년 동안이나 비어있었던 공주의 자리가 채워져야 할 때. 공주가 돌아와서 사라진 왕관을 보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끔찍이나 아끼던, 소중한 왕관이었는데.
"해가 뜨자마자 구역 수색 진행해서,"
"……."
"무슨 일이 있어도 왕관 찾아와."
더는 내가 신경 쓰지 않도록.
-잘 있었어요 설이들?ㅠㅠㅠㅠㅠ제가 너무 늦었죠..마지막 글이 12월인데 어느덧 3월...이 글 엄청 묵혀뒀었어요. 올릴까 말까,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의 반복. 그래도 드디어 이렇게 올리게 되어 기쁩니다*ㅅ* 여러분이 과연 좋아해주실지..!(둑흔)
-안 그런것 같지만(?) 집착물이에요! 뱀파이어 창섭이는 기도 뮤비 속 창섭이의 이미지..! 섹시하지않나여 (발림
-사실 현식이도 넘나 섹시... (또 발림
-왕관 훔쳐간 사람은 누굴까여?!!
-다음 편부터 본 편으로 찾아올게요!